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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해"
하늘의 해는
늘 남을 위해 자신을 비춰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곳에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세상을 밝게 한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그것을 꼭 해야 한다.
그것이 해의 임무이다.
그것이 해의 존재이다.
해가 가려진 밤사이 달이 뜬다.
해가 쉬고 있는 순간이다.
아니,
해는 그대로 있지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도 숨고 싶을때가 있는거다
자기 혼자만 있고 싶을때가 있다.
쉬고 싶을 때가.
그래도
해는 바다저편에서 세상을 향해 올라올때
밝게 웃어야 한다.
밝게 비춰야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서
세상을 향해 온몸을 발사해야 한다.
어느 한구석이라도
햇살이 닿지 않으면 않되기에
달이 뜰때는 해가 가려질 때고,
해가 뜰때는 달이 가려질 때고,.
얼마전 아는 선배의 어무이가 사주를 봐주셨다.
사주를 봐준다고 할때 난 나를 갈무리 할 누군가를 기다렸다.
진심으로..
그런데,
내 사주가 "하늘의 해"란다.
허걱!!!
그런 거창한거 싫은데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강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강하다는 말에 스트레스 만빵으로 받고 있다.
강하다는 거,
강해야만 한다는 거,
강할 수 밖에 없다는 거,
그런거 말고,
그냥 좀 평범하고,
그냥 좀 기대어도 되고,
그냥 좀 풀어내고 싶고.
해는 얼마나 외로울까?
미디어충청 www.cmedia.or.kr / 2008년06월23일 18시35분
* 기관지 글
열사투쟁을 외면한, ‘대책없는’ 대책회의!!
‘열사’를 ‘님’이라 부르는 대책회의!
40일이 넘게 진행된 촛불, 광우병쇠고기 협상무효 투쟁의 과정에서 두분의 동지가 분신을 했고, 그중의 한분은 생을 마감했다. 한 국가의 내각을 바꾸고, 대통령이 스스로 ‘명박산성’을 쌓아 숨어버리게 만든 촛불은 그 위대한 힘에도 불구하고, ‘열사’를 ‘님’이라 부르며 무기력하게 떠나보냈다.
이병렬 열사는 5월 25일 전북 코아백화점앞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보수친미정권 명박을 규탄하기 위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우리는 단호히 맞서야 한다”는 자필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남겼다. 그리고, 6월 9일 전신 80%의 3도화상을 입고 화마와 싸우다 운명했다.
열사가 운명하자마자 광우병 대책위는 상황실 회이에서 ‘이병렬 조합원에 대해 민주시민장으로 5일장’을 결정했다. 장례를 바로 치르지 말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날 저녁 대표자회의에서 최종 ‘6일장’을 결정했다.
스스로 분명한 요구를 던지며 분신했고, 화마와 싸우다 돌아가신 그 분의 요구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있던 9일, 87년을 재현하자며 사력을 다해 조직하던 그날, 전국적으로 70만명이 모여 ‘이명박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전국을 돌아다니기 바로 전날 광우병 대책위는 그런 어이없는 결정을 했다.
투쟁을 핑계삼아, ‘열사’를 버리다?
6월 10일 백만대회는 실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였다. 시청 앞 그 넓은 대로에 끝이 보이지 않게 늘어선 촛불을 가로질러, 21년전 돌아가신 이한열 열사의 상여가 들어왔다. 사회자는 시민들에게 이한열 ‘열사’에 대한 뜻을 기리자고 했다. 바로 전날 돌아가신 이병렬 ‘님’과 이한열 ‘열사’는 뭐가 그리 달랐을까?
이병렬 열사는 공공서비스노조 조합원이고, 공공운수연맹 조합원이고, 민주노총 조합원이다. 민주노총이든, 공공운수연맹든, 공공서비스노조든 이 국면에서 돌아가신 이병렬동지를 왜 열사로 규정하지 못했는가? 열사가 돌아가신 다음날인 10일 공공서비스노조는 이병렬 ‘님’에서 이병렬 ‘노동열사’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광우병 대책위는 여전히 열사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열어준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직접행동, 거리의 정치를 탄생시켰다. 그동안 노동조합이 투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달라야 하는가? 시민들이기에 ‘열사’라는 호칭을 쓸수 없는가? 그런데 왜 6월 10일 이한열 열사에 대해서는 ‘열사’라고 부르며 21년 전을 기념했는가? 유관순열사도 있고, 윤봉길열사도 있다. 1900년도 일제에 폭거에 항거했던 분들을 우리는 열사라고 불렀다. 촛불이 열어준 국면에서 오히려 전 국민적인 열사로 정확히 규명해야 했다. 그것은 개념의 확장이 아니고, 매우 객관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열사투쟁은 ‘열사의 뜻을 이어받는’ 투쟁이다. 노동운동의 역사상 분신하고 나서 열사대책위로 전환하지 않은 경우는 처음이다. 가족들의 완강한 요구로 인해 열사대책위를 구성하자마자 장례를 치른 경우는 있지만, 열사투쟁 자체를 거부한 분신대책위가 존재했는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는 선배열사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투쟁해 왔고, 열사를 열사로 규정하지 않았던 수많은 어용노조와의 투쟁을 통해 건설되어왔다.
분신하고 이틀이 지난 5월 27일 광우병국민대책회의는 기자회견을 열고 "이명박 대통령은 사죄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광우병 대책회의는 열사가 돌아가시자 마자 열사투쟁을 저버렸다. 그들이 촉구했던 그 내용이 하나도 수용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촛불투쟁이 잘 되고 있기 때문에 열사투쟁을 하지 말고, 장례를 치르는게 맞았다는 주장이 있다. 열사투쟁은 투쟁이 어려울 때 기폭제를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인위적이고 기획적인 투쟁이 아니라, 열사투쟁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열사투쟁으로 인해 이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열사투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투쟁을 회피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민주노총의 최근 열사투쟁이 너무 무기력하여 동력이 안되는 노조를 믿을 수 없었다는 것 또한 핑계이다. 살인당한 동지앞에 산자는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것이 바로 ‘열사투쟁’이다.
광화문에 빈소를 차리고, 촛불대오의 조문을 받고, ‘이병렬을 살려내라’는 구호라도 원없이 외쳤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무기력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이 억울함은 없었을 것이다.
살인자, 이명박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자!
6월 20일까지 선전포고를 한 광우병 대책회의는 이제와서 돌연 ‘정권퇴진투쟁’을 결정한바가 없다고 한다. 온갖 신문에 20일까지 재협상을 하지 않으면 정권퇴진 투쟁으로 나갈 것이라는 내용이 보도되었고, 심지어 조선일보에서는 ‘정권퇴진을 명령한다!’는 선정적 카피를 뽑았다. 그런데 이제와서 정권퇴진투쟁을 결의한 적이 없고, ‘정권퇴진에 불사하는 투쟁’이라는 말장난을 늘어놓고 있다.
광우병대책회의의 줄타기는 당장 멈춰야 한다. 20일까지 재협상을 하지 않으면 애초 발표했던 대로 이명박정권퇴진투쟁으로 가면 된다. 뭐가 그리 두려운가? 열사투쟁으로 전화하지 못한 이유도 이러한 기조의 혼란함의 연장성에 놓여있다.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이병렬열사를 죽이고, 김경철씨를 분신하게 한 것은 바로 ‘이명박정권’인 것을. 이제, 살인자 이명박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해야 한다. 열사를 욕보이게 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화물연대 조합원이 오늘 할복자살을 시도하셨다.
화물연대 전체 파업보다 4일 먼저인 충남 서부지부는 파업 9일차를 맞는 날이었다
현대제철 운송차량인 글로비스는 단한번도 교섭자리에 나오지 않았고
물량을 빼가려는 회사의 개들은 경찰의 비호를 받고 돌진하는 상황에서
낙담한 한 조합원이 할복을 시도한 것이다.
2002년인가 칸쿤에서 WTO반대투쟁을 하다가 이경해열사가 그렇게 돌아가셨다.
그때 농민분들의 그 원한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고, 6년이 지난 2008년 FTA비준을
앞두고 있는 바로 지금,
또 한명의 소중한 동지가 자신의 배에 칼을 밀어넣었다.
한나라당조차 생계형파업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상황은
자본주의체제의 한계를 여실이 드러내고 있다.
화물연대의 투쟁으로 화물 다단계 알선업자들의 문제들이 폭로되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규제를 아무리 한다고 해도,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다른 세상이 아니고선,
근본적인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것이 아닌가?
건물이 높으면 높을 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고 하는데...
75평짜리 작은 아파트에 산다는 '고-소-영'이 있는 반면,
죽지못해 살아가고 있는 이땅의 노동자, 농민, 서민들은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하고,
배에 칼을 꽂는다.
죽어라고 일을 해도 밑지는 상황을 이기다 못해,
파업을 하고싶어서가 아니라 이미 자발전 폐업인 상황에서,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 회사를 비호하면서 파업파괴를 조장하고,
그 전선에서 삶과 죽음의 전쟁을 벌이는..
여수에서는 비조합원이 모는 운송차량을 막다가,
전경과 실랑이를 벌이다. 밀려나면서...
차에 한쪽 다리가 깔려버렸다고 한다.
이병렬열사가 장례식을 치룬지 3일만에
한 동지는 할복을 하셨다.
우리 노동자들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냔 말이다.
뭘 잘못했길래..
이 빌어먹을 세상!!!
점심밥 묵다가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장례가 이제 끝났으니, 어떻게 하자는 건지 야그좀 해보자는 거다!!
허걱!!
장례를 하면 않된다고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하자는지 이야기를 해보자고???
너무 열이 받았다.
말도 제대로 않나오고,
언성만 높아졌다. 가만들어보니, 왜 자기가 그런생각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동지는 10일 밤 , 서울대 장례식장 잔디밭에서 분명히
'원칙적으로는 맞는데, 장례를 미루자는 말을 못하겠다' 고 했었다.
근데 이제와서 '장례하는게 맞다는 판단을 했다'는 거다
첫째 이유는 전북동지들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
둘재는 민주시민장에 대해 구지 노동장으로 할 필요가 없다고 봤다는것
셋째는 민주노총을 믿을 수 없다는 것. 최근 민주노총이 한 열사투쟁이 모두 그모양이었다는것.
넷째, 우리 사업장이 파업을 할 조건이 않된다는것.
그동지는 시민들의 투쟁이 훨씬더 급진적이고, 잘 되고 있기 때문에, 투쟁의 정점에서 장례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정세에 대한 판단은 다르지 않았다. 시민들이 이미 조합원들보다, 운동가들보다
훨씬더 능동적이고, 계급적인 요구를 걸고 있다는 것과
이에 따라가지 못하는 노동조합의 조직된 노동자들의 상태..
민주노총의 상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우린 그런 점에 모두 일치했다.
그런데 왜 장례를 했냐는 거다.
난 열사가 외친 요구가 쇠고기수입반대, 이명박퇴진, 한미FTA무효였는데,
우린 아직 그 투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 투쟁에 열사투쟁이 어떤 폭발점을 가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렇게 만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민주시민장에 대해서는 꼭 노동장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50만명이 모인 자리에서 국민열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투쟁을 다 떠나서 기본적으로 열사가 돌아가시고 나서 열사의 요구를 기리는 열사투쟁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도대체 이런법은 없었노라고 말이다.
근데 너무 정세판단이 달랐다. 나중에 제대로된 토론을 해보자고 했을 뿐..
감정은 격양되었지만, 전화로 다 이야기 할 것이 아니니까..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도저히..
열사 장례식에 않갔다. 울산 출장을 잡고는 거길 갔다.
한 동지가 전화가 왔었다. 장례투쟁에 얼마나 모였냐고..
장례투쟁에 가서 뭐하냐고 이야기 했다.
투쟁도 못한 것들이 장례투쟁은 왜가냐고 했다.
말은 그리했지만, 사실 면목이 없었다.
난 그동지가 류기혁 열사투쟁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했는지,
그때문에 그 모든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제기했었는지 기억한다.
나도 류기혁 열사투쟁때의 논쟁에 대해 기억한다. 그리고 그 때의 과오에 대해 그 동지들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평가서를 통해 반성을 했고, 조합원들에게 신문으로 배포했다. 그리고도 이후에 계속적으로 문제제기를 받았다.
그 당시 조건과 조합원의 상태 등등의 이야기들은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다.
열사는 열사인거고, 열사투쟁을 못한 것은 문제제기를 받아야 한다.
당시 류기혁 열사는 가족들의 완강한 의지로 3일만에 가족장을 치뤘다.
비정규지회에서는 첫날 류기혁 조합원이라고 했고, 둘째날부터 열사라고 했고,
열사로 규정할지 말지에 대한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가족들은 가족장으로 장례를 서둘렀다.
그래서 평가만 남았다.
그리고 한달뒤에 비정규지회는 대의원대회를 통해 공식 열사로 규정했다.
난 분명히 그때도 지금도 열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열사투쟁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걸 못한 동지들은 활동가로서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 당사자던, 나같은 먼곳에 있는 활동가던 말이다.
노동조합의 체계에서의 질서와 조건 등등이 있을 수 있지만,
최소한 활동가로서 어찌할 것인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랬었다.
그리고 이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되는 것에 대해 난 한번도 그 당시의 구체적 정황과 조건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래 반성하고 있어요,,그들도, 나도,.,.그렇게만 이야기 했었다.
당시 울산의 동지들과 이야기 할때도 열사다라고 이야기 했다. 몇동지들은 전화를 피했고, 장문을 편지를 써서 보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그동지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세게 주장하진 않았다. 우리가 언제 열사가 아니다라고 했냐고 오히려 항변했었다. 열사인지 아닌지 해당 노조에서 판단하면 그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었다. 최소한 나한테 솔직하게 말했을 수 있는데도,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렇게 이야기 했었다.
오늘 전화온 동지가 2년전쯤 류기혁열사문제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랬었다. 문제가 있죠..그래서 조직 총회에서 반성적 평가서를 채택했어요..라고 나는 이야기 했었다.
근데 지금은 너무도 당당하게 장례를 하는게 맞았다고 이야기 한다.
열사투쟁은 의미가 없다는 거다. 왜냐? 이미 정세가 고양되어있기때문이라고..
어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야기하는 혁신은 바로 이런것에 대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게 이런 것밖에 없는 현실이 괴롭지만 평가는 제대로 해야 한다.
그날 서울대 병원에서 그 회의에 참관을 했으면서, 그자리에 드러눕지 못했던 나에대해 너무도 자괴감이 든다.
나는 그 순간 왜 그렇게 못했을까? 그렇게 하는게 맞는가, 안맞는가를 계속 망설였다.
여기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대책위 참가단체도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나왔다.
오늘 그이가 이야기 했듯이. 서울에서 대책위에도 결합하지 않았다는게 이해가 않된다고 한 것에 대해.. 그것을 우리가 받아야 하는 질책이고 평가라면 받아야 한다.
정말, 나도 잘한게 없는데, 이렇게 승질만 내고, 열만받아하는 것 또한
입만가지고 운동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가 몬지 도통 모르겠다.
그때 그때 다른거냐!!!
14일에 한단다.
이병렬 열사에 대해 열사로 공식적인 규정도 못한채
이렇게 열사를 보낸단다
세상천지 어느 분신대책위가 돌아가시자 마자 장례일정을 잡는단 말인가?
열사를 열사로 부르지 못하는 노조는 어용노조다
자기 조합원이 분신을 했는데, 화마와 싸우다가 돌아가셨는데
공공서비스 노조는 열사로 규정하지 않다가 문제가 생기자
그제서야 열사로 규정했다.
그리고, 열사투쟁을 하지 않기로 하고, 바로 장례일정을 잡는 것에 동의했다.
파업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미쳤다..모두 미쳤다..
9일 저녁 진행된 대책위 회의에서 공공을 대표해서 이근원대협실장이 들어와있었고, 장례일정을 잡는 것을 주장했다. 광우병 대책위 박석운 집행위원장도 장례라도 잘 해야 하는것 아니냐고 이야기 했다.
그런 것들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
공공연맹 위원장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근원대협실장은 자기 입장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윽박을 질렀다.
이게 도통 무슨일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아무런 답변이 없냔 말이다.
왜??
그 책임에 있던 사람들이 왜 한마디도 하지 않냔 말이다
몇년전만해도 미친듯이 날뛰던 그자들이
왜 자기 문제가 되니, 아무것도 못한다고 이야기 하냐는거다
남의 노조 조합원이 아니고,
바로 자기 노조 조합원인데도 말이다.
난 듣고싶다.
최소한 어떤 변명이라도,
어떤 사과라도
어떤 반성이라도 말이다.
얼마전 핵심감정 테스트라는걸 했다
핵심감정이라는 것은 나의 행동과 사고와 감정을 지배하는 중심 감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놈의 핵심감정은 나의 일거수 일투족에 다 베어있으며, 대물림된다고 한다.
여러가지 질문 문항들에 체크를 하고 나중에 종합을 하는것인데..
나의 핵심감정의 3순위
1위 그리움
2위 억울함
3위 공포, 화, 경쟁심 -> 세개의 감정이 동점이었다
다 연결되어 있다...
어제가 KTX 투쟁의 800일이었다.
청계천엔 최소 1만명이 모였다는데,
서울역 앞엔 많은 사람들은 없었다.
그치만, 코비도 있고, 뉴코아도있고,
KTX동지들도 있었다.
우리를 잊은건 아니죠?라는 글자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40여명 남았다는데
여전히 씩씩했다.
서지본 정규직 동지가 무대로 나가자
우리 승무원 동지들이 환호의 소리를 질렀다.
그 환호의 소리는 그동안같이 해왔던 것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KTX투쟁을 첨시작할때부터 아버지(?)역할을 했던
선배는 무대옆에서 담배를 피워대며 바라보고 있었다.
첨 투쟁을 시작할때
'병아리들같다고 이야기 했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자기들이 결정한것은
절대로 안바꿔~~정말 대단해!!'
헌신적으로 결합해서 이 투쟁을 함께 했던 그 선배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씁쓸하기도, 회한도, 아쉬움도, 안타까움.. 뭐 그런것들이느껴지는..
끝나고 뒤에서 아시바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와줘서 고마워!'
라고 한마디 하신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노인네가 아시바 철거까지 손수하냐고 했더니
'이제 권력을 잃어서 이것밖에 할 게 없어..' 라며..
뉴코아 100일 문화제를 서울역 앞에서 했었는데..
그때 약 1000명의 동지들이 모였었는데..
이제 뉴코아도 300일이 넘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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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 나 연용국은 2009년 6월 22일과 그 전에도 6월2일 부터 세종로 촛불집회를 매일 갔습니다. 사람들이 양초를 길바닥에 녹여서 직경 1 미터 정도로 모닷불처럼 불을 놓아서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경찰버스밑으로 들어가서 연료탱크에 드레인코크를 풀러서 경유를 빼내어서 촛불에 불이붙게 할려고 판단을 했어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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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도로를 막고 있는 경찰버스 불을 놓은 당사자 나 연용국은 2009년 6월 22일과 6월2일 부터 세종로 촛불집회를 매일 갔습니다. 2009년 6월 22일에는 순수하게 경찰버스에 불을 놓아서 사람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시킬 할려고했지 경찰 프락지라는 것은 "ㅍ" 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2009년 12월 25일15시 34분 작성자: 연 용 국[global575@hanmail.net]daum.net검색창에서 "연용국" 을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