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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극우폭력의 현상과 그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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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극우폭력의 현상과 그 뿌리
장광열 jjagal@yahoo.co.kr
독일 검찰은 9일 외국인을 집단구타해 숨지게 한 프랑크 미트바우어(16) 등 신나치주의 청소년 3명을 살인죄로 기소했다. 이들은 지난 6월11일 옛동독지역 데사우에서 모잠비크 출신 아드리아노(39)를 무차별 구타해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극우파의 폭력이 종잡을 수 없이 번지는 악성 종양처럼 독일 전역을 위협하고 있다.

◇ 확산되는 극우폭력bm=지난 8주 동안 극우폭력으로 4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중경상자가 생겼으며, 망명인 기숙사 방화, 유대인 공동묘지 파괴시도 등이 행해졌다. 지난달 29일 아이젠나흐에서는 20명의 극우파 청년들이 두명의 아프리카인을 몰이사냥하며 괴롭혔다.

1990년 독일 통일 직후 옛동독지역 소도시 에버발트에서 앙골라 출신 노동자가 극우파의 몰매로 살해당한 사건과 그 이후 이어진 망명인 기숙사 방화사건으로 극우파문제는 동독의 현상인 것으로 간주돼왔다. 통일에 따른 사회 격변과 높은 실업률로 비전을 잃은 동독 청년들이 불만을 외국인 증오로 해소한다는 것이 당시 전문가들의 해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극우폭력은 동독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난달 27일 옛서독지역 뒤셀도르프 전철역에 설치된 폭발물로 대부분 러시아계 유대인인 9명의 외국인노동자가 중경상을 입자 독일 전역은 화들짝 놀랐다.

◇ 대응=극우폭력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자 정계에 비상경보가 걸렸다. 여야가 이구동성으로 극우파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오토 실리 연방 내무장관은 폭력에 짓밟히는 외국인을 외면하지 말자며 시민들에게 용기를 호소하고 나섰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및 주요 정치인들은 극우폭력 단속강화책으로 연방국경수비군 동원을 검토 중이며, 바이에른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는 구체적인 극우정당인 독일민족민주당(NPD)의 불법화를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정치권에서는 신나치주의자를 모든 공직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범죄행위를 저지른 극우파에 대한 처벌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민주당 불법화 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도 만만치 않다. 극우정당을 불법화할 경우 이들이 지하로 숨어들어 통제가 어려워지고 더욱 극렬한 폭력을 행사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경악과 공포'라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로 극우테러를 다룬 시사주간지 <디차이트>는 민족민주당 금지로 극우폭력이 근절되기에는 이들의 최근 조직형태가 너무 유동적이고 복합적이라고 지적했다. 극우폭력은 중앙조직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충동적이고 돌발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 극우파의 뿌리와 실태=극우파는 90년대 중반에 인가된 각종 극우단체가 불법화된 뒤, 폭력을 일삼는 스킨헤드와 결합해 이른바 동우회를 곳곳에 결성했다. 동우회는 공식적으로 인가받을 필요가 없으므로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극우파의 동우회에 가입하려면 보증인은 물론 특별한 의식과 힘겨루기를 통과해야 한다.

전국에 산재한 약 150개의 동우회(총 회원 약 2200명)가 극우폭력의 주역이다. 이들은 민족민주당과는 공생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민족민주당이 공식적인 시위를 추진하고 홍보물을 제공하면, 극우 동우회원들은 거리에서 `실질적인 활동'을 벌인다. 대부분의 스킨헤드들은 민족민주당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지만 당원은 아니다.

극우파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인터넷과 스킨헤드음악(나치록)이다. 스킨 시디를 통신판매하는 회사가 50개, 신나치 밴드는 약 100개에 이른다. 세계적인 활동망을 확보하고 있는 `피와 명예'라는 신나치 동우회는 스킨헤드 콘서트 조직에 핵심을 두고 있다. `사이클론B' `게슈타포' `터키인 사냥꾼' 등 섬짓한 이름을 단 스킨밴드의 콘서트는 갈색(극우를 상징하는 색) 물이 아직 들지 않는 청소년들을 낚는 터전이기도 하다.

극우파들의 이데올로기는 나치시대의 민족혁명주의와 동일하여 `순수하고 건전한 독일 민족국가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유색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편협한 세계관에 비춰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공격 대상이 된다. 좌파, 동성애자, 장애인, 진보파, 노숙자, 비독일적인 문화, 심지어 오스트하르츠에서는 미혼모에게까지 폭력을 가했다.

이들의 유혹에 휘말리는 동독인들 가운데는 하층 소시민이나 실업자 등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 많다. 이들은 뚜렷한 이념보다는 극우조직의 끈끈한 연대감에 취한다. 그러나 철부지들의 소행이라고 간주하기에는 극우폭력은 너무 극렬하며 정치적으로도 위협적이다.
<한겨레 프랑크푸르트/양한주 통신원 hanju.yang@t-onlin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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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호/동향]독일, 민주사회주의당 새 지도부 '중도좌파'의 길 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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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호/동향]독일, 민주사회주의당 새 지도부 '중도좌파'의 길 천명
picis picis@jinbo.net
독일, 민주사회주의당 새 지도부 '중도좌파'의 길 천명
[주간녹색좌파] 11/1 에케하르트 예니케


하노버 - 독일의 민주사회주의당(이하 민사당)은 구 동독지역인 코트부스에서 10월 14일과 15일에 7차 당대회를 가졌다. 당은 지난 10년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그리고 새 대표와 전국집행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다음 연방선거가 있을 2002년 가을까지의 기간 동안 당이 할 일들을 결정했다.

민사당 대표 로타르 비스키와 의원단 대표 그레고르 기지가 지난 4월 직위에서 물러나면서 이번 대회에서 지도부의 변화가 불가피했다. 전국집행부의 제안에 대해 압도적인 다수의 대의원(93.3%)이 가비 침머를 당대표로 선출하였다. 이것은 역대 득표율 중 가장 높은 것이다.
1997년부터 민사당 부대표직을 맡아온 침머는 "준비된 대표였다". 그녀는 전국 대회에 앞서 진행된 10개 지역 예비대회에서 자신의 온건좌파적 노선을 성공적으로 피력한 바 있었다.
번역가였던 침머는 1989년 이전까지 구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의 당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정치에 입문한 계기는 민사당의 창당이었다. 약 10년간 그녀는 튀링엔 주에서 민사당 조직과 의원단을 이끌어왔다. 그녀의 지휘 아래 이 지역에서 당 지지율은 1990년 9.7%에서 1999년 21.4%로 상승했다. 이로써 민사당은 지지율 18.5%의 사민당을 3위로 밀어내고 보수적인 집권 기민당 다음으로 인기있는 정당이 되었다.
여성할당제가 당 규약으로 채택됨에 따라 이번 당대회에서 한 명의 여성과 두명의 남성이 부대표로 선출되었다. 연방의회 의원단 부대표였던 페트라 파우, 사회민주당 좌파였던 디테르 뎀 박사, 작센주 민사당 조직과 의원단 대표였던 페터 포르쉬 교수가 그들이다. 포르쉬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연방의회 의원인 "극단적 실용주의자" 디트마르 바취와 우베 호블러는 당 사무총장과 회계부장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민사당 전국집행부는 앞서 언급한 6명을 포함하여 18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50%가 새로선출된 사람이다. 여성할당제 규약에 따라 최소한 50%는 여성이다. 전국집행부의 다수는 급진적 야당으로보다는 사민당과 녹색당과의 연합을 통해 개혁세력으로 자리매김되길 바라고 있다.
사임하는 당대표 비스키는 연설을 통해 자신과 그레고르 기지는 민사당에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나갈 것이라고 말해서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그는 민사당이 평화, 사회정의, 반파시즘을 지향하는 정당으로서 계속 자리매김되고, 구동독 민중의 이해를 수호하는 믿음직한 세력이 될 것을 당부했다. 그는 또한 민사당이 독일사회 전역에서 사회적, 생태적, 민주적 변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스키는 민사당과 모든 반파시즘을 지향하는 민주적 세력들은, 공산주의자와 사민주의자들이 서로를 가장 큰 적으로 간주함으로써 결국 나치에게 유리한 위치를 내주었던 1920년대와 30년대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극우세력의 증가 현상은 모든 민주주의 세력간의 긴밀한 협력이 시급하게 필요함을 말해준다.
비스키는 사회주의 독일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민사당이 대중들의 기대에 답할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비전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민사당이 국제주의 정당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전세계의 좌파들이 단결하여 자본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것은 필요하다. 비스키는 어려운 시기에 민사당에게 지지와 연대를 보냈던 정당과 운동들에 감사의 뜻을 표했으며, 또한 그와 같은 연대를 계속 다른 정당과 단체들에 보낼 것을 약속했다.
새로운 당대표 침머는 민사당을 "폭넓은 관용, 실천적인 연대, 다원주의, 격조있는 논
쟁"의 정당으로 묘사했다. 독일을 사회정의, 연대, 교육, 문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고 독일이 유럽의 다른 모든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러한 정당이 필요하다.
침머는 민사당이 모든 사회 계급과 집단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사회주의 정당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구 동독지역 선거에서 40%에 달하는 지지를 얻은 사실은 "국민정당"으로서의 성격 때문이다.
침머는 민사당에서 사민주의의 위험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민사당이 공산주의도 아니고 사민주의도 아닌 민주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사당은 고용창출, 연금보장, 모두를 위한 의료, 교육문제에 있어 진정한 진보를 가져올 기회가 있을 때는 언제든지 사민당과 연대할 것이다. 그러나 연대의 결과가 사회보장의 축소, 민중의 주변화, 시민권과 자유에 대한 제한, 국가의 사회적 책임 약화를 가져오거나, 부자와 대기업들 그리고 독일의 "거대한 세계권력에 대한 야망"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함께 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독일에는 더 많은 사회주의 정책이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압도적 다수의 대의원이 채택한 핵심 결의안은 도시, 주, 전국적 수준에서 정당의 목표를 설명한다. 그것은 민사당이 가까운 미래의 독일 정치에서 "중도좌파적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극우주의자 폭력 증가에 대한 경종으로 당대회에서는 반파시스트 운동에 대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결의안은 가능한 가장 폭넓은 연대망을 구축할 것을 천명했으며, 그 안에서의 다양성과 내부모순을 "적절히"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한 전략은 독일과 전 유럽에서 모든 종류의 민족주의, 외국인 혐오증, 인종주의, 폭력을 추방하는 사회적 풍토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되 민사당 7차 당대회는 당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0년간 민사당은 단순히 당의 생존과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해 왔다. 이번 당대회를 계기로 이러한 시기가 끝난 것이다. 이제 민사당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적 관점을 관철시킬 수 있는 독일 사회의 일부로 보고 있다.
민사당은 아직 사민/녹색 연정에 경도되어 있는 더 많은 이들을 민사당 지지자로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한 새로운 당 노선을 개량주의에 불과하거나 사민/녹색 연정의 신자유주의적 목표에 대한 급진적인 저항을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좌파 유권자와 지지자들을 잃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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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골수에 미친 기업별 의식과 산별노조의 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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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골수에 미친 기업별 의식과 산별노조의 허울
현장신문 work@nodong.net
골수에 미친 기업별 의식과 산별노조의 허울

지난 17일 위원장을 비롯해 일부 간부들이 독일로 산별 연수를 떠났다고 한다. 물론 이번 산별 연수는 금속산업연맹이나 민주노총의 연수프로그램이 아니다. 노동조합의 독자적인 사업이다. 산별노조로 노동자들의 통큰단결을 위해 선진국을 돌아본다는거야 누가 뭐라고 할까마는 산별연수에 앞서 개최된 정기대의원대회에서 회사 이름이 바뀌었다고 만도기계노동조합에서 만도노동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할 것을 안건으로 제출하는 명백한 기업별 의식 수준을 가진 집행부(그것도 2개 법인이 하나의 노조로 있는 노동조합에서)가 산별(?)연수라니 멍해지는 느낌이다. 독일에서 회사 이름 따라 바뀌는 노동조합 이름을 찾을 수나 있을는지.... 12년 역사와 투쟁의 이름인 만도기계노동조합을 만도노동조합으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가 회사 간판이 바뀐 것이라니...
집행부가 골수에 미친 기업별 의식을 털어버리려는 산별연수에 나서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사측은 ERP와 관리직 구조조정이라는 도발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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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MLPD에서 온 대우차투쟁 연대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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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MLPD에서 온 대우차투쟁 연대의 글
이택승 yanga@www.jinbo.net
다음은 국제연대 호소문에 답한
독일 MLPD에서 온 연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동지들에게,

독일 마르크스-레닌주의당(MLPD)의 중앙위원회는 동지들의 강경한 투쟁에 대해서 연대를 선언합니다. 우리는 경찰병력의 개입을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권력테러를 직면하는 대우차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방어권리를 지지합니다.

독일에도 독자적 파업이 비합법적입니다. 노동조합 권리가 아주 제한 되 있으며 단체협상에 관한 파업만 벌일 수 있습니다. 이 이유로서 독일에는 독자적 파업들이 정치적 요구들과 점점 결합하고 있습니다. 초점은 바로 파업의 전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지난 1월 25일에 Opel(General Motors)사 노동자들이 국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상징했습니다. GM에 최초인 유럽 전체적 수준으로써 협조한 연대파업이었습니다. 오 개 국(벨기에, 영국, 독일, 에스파냐, 포르투갈)에 9 공장에 4만 명 노동자들이 영국 루톤(Luton)시의 GM 공장의 폐쇄와 다른 공장의 정리해고에 맞선 파업투쟁을 벌였습니다. GM사가 한국에 현재 정리해고 경우에도 어느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에 배경은 세계 독점 자동차사의 재편의 새로운 라운드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자동차사 5-6개만 생존할 수 있는 멸망의 전쟁이 사나와지고 있습니다. 자동차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협조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구는 노동시간 일6시간입니다 -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는 자신의 모순에 대해서 더 이상 대처할 수 없습니다. 이 거대한 국제 생산력이 민중 대중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해법이 필요합니다, 즉 진정한 사회주의.
동지들의 용감하고 강경한 투쟁은 반초국자본 투쟁의 힘있는 주도적 역할을 하며 국제 산업노동자들이 그 것을 받아들어야 할 시그널입니다.

MLPD의 자동차 산업 공장단위들이 동지들의 투쟁에 대해서 선전하고 연대 활동을 조직하겠습니다. 동지들의 투쟁에 대한 구체적 사항, 요구들과 투쟁 조직과 형태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것을 MLPD 기관지 <붉은 깃발>에 올리겠습니다.

국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추진하라!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 단결하라!

연대 하에,
스테판 엥겔, MLPD 의장

원문
Dear colleagues,
>
>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Marxist-Leninist Party of Germany (MLPD)
> declares its solidarity with your resolute struggle to defend your jobs
> at Daewoo. We vehemently condemn the brutal intervention of the special
> police units. The warrants against 30 trade unionists must be revoked
> immediately! We support the Daewoo workers and their families who take
> the right of defending themselves against the state terror and carry out
> active resistance against the special police units deployed to fight
> rebellion.
> In Germany, too, independent strikes are considered illegal; the trade
> unions only have a very restricted right to strike on matters of
> collective bargaining. For this reason, independent strikes in Germany
> increasingly combine with political demands. The struggle for the full
> legal right to strike in all matters is in the focus.
> On January 25, 2001, the Opel (General Motors) workforce set a signal of
> international working-class unity. It was the first solidarity strike at
> GM which was coordinated on a European level. 40,000 workers in 9 plants
> in 5 countries (Belgium, England, Germany, Spain and Portugal) went on
> strike against the closure of the GM works in Luton, England, and
> against the destruction of jobs in other works. According to our
> information, GM is also playing a certain role in the case of the
> redundancies in your country. Since the talks on the takeover of Daewoo
> by GM in September, 5,540 jobs have been destroyed. Now further 1,751
> jobs are at stake. The background is a new round of the new organization
> of the international production of the automobile monopolies. A
> worldwide battle of annihilation is raging, which only five to six
> automobile corporations will survive. The car workers must coordinate
> their struggle, the most important economic demand being the six-hour
> workday with ful!
> l wage compensation worldwide!
> Capitalism is incapable of coping with the mode of production which
> today is organized on an international level. To make the enormous
> productive forces of this international production serve the needs of
> the masses instead of the needs of a handful of monopolies greedy for
> profit, a social solution is needed, that is, genuine socialism.
>
> Your brave and resolute struggle is a signal for the international
> industrial proletariat to accept its strength and leading role in the
> struggle against the international corporations.
>
> The MLPD party factory groups in the automobile industry will inform on
> your struggle
> and will organize international solidarity. Please send us concrete
> information about your struggle, your demands and your forms of struggle
> and organization. In its weekly paper, Rote Fahne (Red Flag), the MLPD
> will report about it.
>
> Forward with international working-class unity!
> Workers of all countries, unite!
>
>
> With cordial greetings,
> in solidarity,
>
>
> Stefan Engel
> Party Chai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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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호/동향]독일:반핵운동을 배반한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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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호/동향]독일:반핵운동을 배반한 녹색당
picis picis@jinbo.net
반핵운동을 배반한 녹색당
[주간녹색좌파] 4/11 짐 그린

3월 26-29일 동안 있은 프랑스에서 독일 도시 고어레벤으로의 고준위 방사능 폐기물
수송을 지지함으로써 독일 녹색당은 자신의 원래 강령의 네 원칙-환경 지속가능성, 탈무
장, 사회정의, 민주주의-을 저버렸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왼쪽도, 오른쪽도 아니지만
전선에 서 있다"는 그들의 주문(呪文)에 내재하는 보수주의와 기회주의 뿐이다.

프랑스 라아그에 있는 원자력기업 코제마(Cogema)사의 재처리 공장에서 기차와 트럭
에 실린 여섯 개의 '캐스터(Castor, 방사능 물질 저장·수송용 용기-옮긴이)' 컨테이너-
각 캐스터에는 원자로에서 사용후 연료의 재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결정(結晶)화된 폐기
물 10톤씩이 들어 있다-는 소금 광산이 '임시' 저장소(재활용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이
곳에 반영구적으로 보관된다-옮긴이)로 사용되고 있는 고어레벤으로 운송되었다.
핵폐기물의 수송 몇주 전 동안 수만 명의 시위대가 독일 전역에서 일련의 시위에 착
수하였다. 폐기물 수송 열차의 진행로를 따라 수천 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철로에서 연
좌농성을 벌이고 시멘트를 붓고 철로에 쇠사슬로 몸을 묶는 등 열차 운송을 지연시켰
다. 진압 작전에는 2만여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으며 수천 명의 시위대가 단넨베르크 역
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물대포가 사용되기도 했다.
독일에서 나온 사용후 연료와 재처리 폐기물 수천 톤이 여전이 라아그에 남아있으며 독
일과 프랑스 정부는 매년 두 차례의 수송을 계획하고 있다.
여섯 개의 캐스터 폐기물 컨테이너가 종착지에 도착하긴 했지만 독일 정부가 부담한
정치적, 재정적 비용-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 3월 28일자에 따르면 경찰 작전 비용
이 천만 마르크(930만 달러) 이상 소요되었다고 한다-으로 인해 앞으로의 수송이 위태
롭게 되었다.
고어레벤으로 재처리 폐기물을 이송한 것은 독일 원자력 기업들이 직면한 문제, 즉
한계에 다다른 사용후 연료 저장 능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방편이었다.
코제마사 또한 독일 원자력 기업들의 동기와 유사하다. 앞으로 운영을 계속하기 위해
서는 재처리 폐기물을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고어레벤으로 폐기물을 수송한 결과 독일 원자력 기업들은 얼마 안가 코제마로 사용
후 연료를 다시 수송하게 될 것이다.
폐기물 수송에 대한 대중적 반대는 환경 및 공중보건 상의 위험에 기인하는 것이다.
1998년, 캐스터 컨테이너가 10여년 동안 유럽 전역을 왔다갔다 하면서 허용치보다 많은
방사능을 방출해왔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많은 경우에 국제원자력에너지기구(IAEA)
가 권고하는 방사능 허용치를 초과했으며 때로는 100배를 넘어서기도 했다.
오염 스캔들과 이에 대한 대중적 반응의 결과로 당시 기민연(CDU) 정부는 폐기물
수송을 계속할 수 없었으며 캐스터의 철도 운송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3월 26-29일
의 캐스터 수송은 98년 이래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세계에너지정보서비스(WISE)의 2월 16일자 뉴스 성명에서 요헨 슈타이는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지금 수송 금지가 종언을 고하고 있지만, 현 환경장관이 녹색당 당원
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캐스터가 이제 보다 안전해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터무니없는 합의'

독일 녹색당은 1998년 후반 사회민주당의 하위 파트너로 연정에 참여하였다. 녹색당
과 사민당 모두 원자력의 단계적 축소를 주창했으며 정부 구성 100일 안에 이를 입법
화하겠다고 약속했었다.
600여일이 지난 작년 6월 14일 사민당-녹색당 정부는 입법화는커녕 원자력기업들과 '합
의'에 도달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녹색당의 상원의원 봅 브라운은 이 합의가 '커다란 승리'라고 환호했
지만 대부분의 논평가들은 이를 원자력기업들의 커다란 승리로 간주하면서 '터무니없는
합의'라고 조롱하였다. 이 합의에 힘입어 독일 원자력기업들의 주가는 4-5% 상승하였
다.
과거에 독일 녹색당은 "원자력 종식을 위한 분명한 일정표"를 요구했었다. 그러나 6
월 14일의 합의는 '단계적 축소'를 위한 시간표를 명기하기는커녕 19기의 원자로 모두
에 대해, 32년인 원자로의 평균수명에 상응하는 생산치를 설정하였다.
녹색당은 협상 과정에서 2002년 총선 전까지 가장 노후한 2기의 원자로를 폐쇄하라
는 요구를 빼버렸다. 녹색당과 사민당 지도자들은 또한 핵연료에 대한 투입세 신설이라
는 녹색당의 제안을 기각시켰다.
1999년 1월 사민당-녹색당 정부는 2000년 1월 1일부터 독일의 사용후 연료 재처리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녹색당은 이 결정이 "핵에너지의 180도 선회"라며 환호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국 또다른 거짓 약속임이 드러났다. 이번 합의로 2005년 7월 1일까지 재
처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민당-녹색당 정부는 입법을 통해서든, 프랑스와 영국의 재처리 공장들로 사용후 연
료를 수송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으로써든 원자력의 신속한 종식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
러나 정부는 오히려 합의를 선택했으며 그 결과 프랑스와 영국으로 사용후 연료를 수
송하고 재처리 폐기물을 독일로 되가져오는 과정을 재개하고 있다.
3월 10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당대회 표결에서 녹색당의 압도적 다수는 3월 26-29
일의 폐기물 수송 저지에 반대하였다. 당대회에서 통과된 결의안으로 인해 녹색당은
"원자력 합의에 반하는 행동이나 시위, 봉쇄"를 구축하거나 지지할 수 없었다.
반핵운동에 대한 녹색당의 배반은 환경 지속가능성, 탈무장, 사회정의, 민주주의라는
자신들이 선언한 원칙을 배신한 것 가운데 최근의 일에 불과하다.
녹색당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녹색으로 치장하는 놀랄만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1999년 2월, 독일 제2의 은행의 수석 경제학자인 마르틴 후프너는 녹색당이 "수많은 영
역에서 경제적 합리성의 목소리로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후프너는 녹색당이 경제 정책 및 사회 정책에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고 있
다고 말했다. 그는 "세대간 평등"-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허황된 말들 가운
데 하나이다-과 관련하여 정당화된, 녹색당의 연금 증대에 대한 반대를 예로 들었다. 녹
색당은 연금을 확대함으로써 미래 세대에 경제적 부담을 더 지우는 건 현명치 못한 처
사라고 주장했다.
1999년에 도입된 연료세 및 전기세 증가는 "환경세"라고 선전되었지만, 기업들은 크
게 감면시켜주면서 저소득층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녹색당은 국가 지출의 대량 삭
감-연금생활자와 실업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을 지지해왔으며 절약, 변통성,
자율 등과 같은 녹색 캐치프레이즈로 이를 정당화하고 있다.

탈무장과 비(非)-비폭력
탈무장과 비폭력이라는 녹색당의 원칙 또한 탈선을 거듭하고 있다. 1998년 선거 직전
에 발표한 녹색당의 선거강령은 "정치의 탈군사화-군대의 폐지와 나토 해체-"를 목표로
선언했었다.
선거 몇달 후 녹색당은 세르비아와 코소보에 대한 나토의 군사공세를 지지하였다. 아
이러니하게도 1999년, 몇몇 녹색당 인사들은 사민당으로부터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겠
다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치뤄야 할 필수적인 대가라고 당의 군사주의를 옹호했었
다.
일부 녹색당 인사들은 또한 1998년 이후 이라크에 대한 군사공격을 지지하였다. 한
예로 지난 2월 외무장관이자 녹색당 지도자인 요시카 피셔는 미국과 영국의 폭격을 비
난하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정부는 그들을 "이해"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녹색당은 또한 현재 군사계획참모부와 정치안보위원회를 신설하고 6만여 명으로 구
성된 강력한 '신속대응군' 창설을 준비 중인 유럽연합의 군국주의화를 지지하고 있다.
코소보와 세르비아에 대한 나토의 폭격이 끝나고 석 달이 지난 후 녹색당 의원단 방
위 대변인인 앙겔리카 베어는 문서 하나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녀는 독일 군대가 "기
동성과 기술, 작전상의 우월성, 갱신된 지도력을 통한 규율, 다국적, 국제적 작전들에서
의 유연한 배치 능력 등"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출(庶出)로 간주되는 녹색당의 개념들은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라는 제목
의 베어의 문서 전체에 걸쳐 맹렬하게 비난받고 있다. 그녀의 문서는 녹색당의 절약과
변통성을 독일과 유럽연합, 나토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좇을 수 있는 "높은 작전수행 능력과 보다 비용효율적인 군대"에 대한 지지로 변환시키고 있다.
베어에게 "해방"이란 독일 군대를 잠에서 깨우는 것을 뜻한다. "구조적 개혁의 불충
분함으로 말미암아 군대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이로부
터 해방되어야만 한다."
1999년 5월 13일 열린 당대회에서 피셔는 녹색당의 마지막 원칙인 민주주의에 관해
이렇게 언급했다. "여러분이 시한 없이 [세르비아와 코소보에 대한
나토의] 폭격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라고 호소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경우 저는 이에 따
르지 않을 것입니다."독일 연방선거는 내년에 치러진다. 1998년 연방 선거 이래 많은
주 및 지방선거에서 녹색당의 득표율이 하락했으며, 원내 진출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5%를 얻을지조차도 불확실하다.
녹색당이 원내 진출에 실패하는 게 독일인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퇴보를 의미
할런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녹색당은 -풍력 에너지의 상당한 성장 등- 몇몇 성과를
획득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전쟁 개입과 원자력 정책의 대실패 등과 같은- 일련의 중
요한 이슈들에서 녹색당은 진보운동을 적극적으로 가로막아왔다.
녹색당의 대차대조표는 부정적인 면이 압도적이며 지배계급의 품에 안겨버린 당의
정치적 궤적 또한 분명하다. 독일사회생태연구소(GISE)의 페터 슈타우덴마이어의 말을
빌자면, "과거에 활동가들이 이끌던 '당에 반대하는 당'이 풀뿌리운동과의 연계를 상실
한 채 경력을 좇는 직업 정치인들의 사교집단으로 움츠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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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호/동향] 유럽의 우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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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호/동향] 유럽의 우향우
picis picis@jinbo.net
유럽의 우향우
「인디즈타임즈」 2002/02/19, 더그 아일랜드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극우라는 유령이. 조지 W. 부시의 장기적 전쟁은
외국인혐오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반이민 집단 히스테리 등 나치적 감정을 전 대륙
에 걸쳐 증폭시켰다. 부패로 손상되고 정책적으로 파산 상태인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는 도망치고 있으며, 아직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곳에서는 정치 지도부가 경제 위기
를 심화시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서유럽 거의 대부분에서 좌파 중 사민주의적 정
부 혹은 좌파-중도파 동맹이 정권을 장악했던 90년대의 "장미 유럽"(장미가 유럽 사
회당·사회민주당의 로고였다-옮긴이)은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
독일의 게라드 쉬뢰더와 영국의 토니 블레어에게 소중한 "제3의 길"은 전통적인
사민주의적 정치의 "클린턴화"를 의미하며, 프랑스 수상 리오넬 죠스팽의 타협 정치
는 사실 싱겁기 그지없다. 그러나 정치적 색깔이 무뎌진 유럽 좌파 기회주의자들을
대체하기 위해 경쟁하는 세력들은 훨씬, 훨씬 더 나쁘다. 프랑스-독일 간 협상이 전
통적으로 유럽 공동체의 정치, 경제를 지배하면서 점점 유럽의 연방화 경향에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라인 강 양쪽 모두에서 진행될 선거에 힘의 균형을 급격히 우측으
로 돌려버릴 위험이 있다.
프랑스의 우경화는 다른 어떤 유럽 국가보다 북아프리카계 인구가 많다는 사실에
서 연유한다. 프랑스는 50년대와 60년대 전후(戰後) 성장 시기에 과거 식민국가들로
부터 수십만의 육체노동자들을 수입했다. 전통적으로 대규모인 이민자 가족들의 제
2, 3세대 젊은이들은 정체성의 위기에 빠져있다. 불어로 말하고 그들 부모 조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프랑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황량하고, 답답하며, 저소득과 높은 물가상승의 고립
된 교외 도시에 갇혀, 할 일 없는 많은 빈민가 젊은이들은 자신의 유일하게 진정한
정체성을 경범죄를 일삼는 집단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들은 범죄 증가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 모든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조짐을 보여줬던 작년 지방자치선거에서 왜 프
랑스 좌파가 40개 도시에서 권력을 잃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사회당의 죠스팽은 4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여론조사에서 현직 대통령인 보수적 쟈크 시라크에 점점 뒤지
고 있거나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죠스팽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은 아마 이민에
대한 강경주의자인 그의 내무부장관d;었던 장 피에르 셰브느망으로부터 나올 것이
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이며 유럽통합회의주의자인 셰브느망은 1991년에 프랑스의 걸
프 전쟁 지지에 저항하는 뜻에서 이전 사회당 정부의 국방장관을 사직했다. 그는 당
시 시민운동(불어 약자로 MDC)이라는 당을 창립했는데, 이 당은 최근 그가 사직할
때까지 죠스팽의 집권 동맹에 참여해왔다. 질서의 보증인인체하고, 프랑스 언론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체"라는 별명을 붙여준 그는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전직 공산주의자 장관, 급진좌파당 (급진적이지도 좌파이지도 않은 소규모 중산층
정당) 지도자들과 초극우 카톨릭 정치인인 비스꽁 필리쁘 드빌리에 등을 포함한 지
지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알록달록한 퀼트 동맹을 꿰매고 있다.
셰브느망의 반미주의와 안보 히스테리에의 영합으로 그는 여론조사에서 죠스팽보
다는 시라크의 지지자들을 더 많이 끌어들여, 2단계로 치뤄지는 대선 과정의 첫 번
째 라운드에서 그는 '제3의 인물'이 되었다. 그가 워낙 잘 되어가고 있어 많은 선경
지명이 있는 프랑스 정치 분석가들은 결승에서 죠스팽-시라크보다 죠스팽-체 사이의
결투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시라크 자신은 녹색당을 제외하고 프랑스의 모든 중요한 정당들에게 연속적으로
제공한 조직적 뇌물 스캔들로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 또한 부패 스캔
들로 타격을 입었고 좌파, 우파 정당을 막론하고 여러 장관들이 다양한 부패 죄로
수감되었다. 죠스팽 개인의 재정적 고결함이 지금까지 문제시된 적은 없지만, 그의
신뢰도는 람베르티스뜨(편집증적이고 은둔적인 지도자 삐에르 람베르트의 이름을 붙
인)로 알려진 매우 비밀스러운 트로츠키 분파의 스파이로서 사회당에 처음 입당했다
는 사실이 밝혀지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수년동안 죠스팽은 그가 과거 트로츠키
파였다는 소문을 부인하면서 그의 형과 혼동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소와
미테랑 대통령 시절 사회당 서기로 재직할 때까지 분파주의 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그의 과거 트로츠키파 동지들로부터 나온 공개적인 증언들이 쌓여가자
그는 할 수 없이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것은 우파에게 공격 거리를 제공해주
었고, 죠스팽의 지하 암호명인 "미셀 동지"에 대한 악의적 언급이 죠스팽 비판자들
의 담론을 장식했다.
한편 인종문제를 미끼로 삼는 신파시스트 장 마리 르펜 -악명높은 반유대주의자
이며, 그의 국민전선은 부패와 부실운영 때문에 집권했던 중요한 시장직 세 개를 작
년 지방선거에서 잃었을 때 무력화되었다- 은 다시 한번 여러 대선 여론조사에서
13%나 얻고 있다. (전 부인에 의하면 집에서 히플러를 항상 "아돌프 삼촌"라고 부
른다는 르펜은 나치 수용소의 오븐을 "역사의 세밀함"이라 부른 것으로 유명하다.)
이와 동시에 죠스팽의 "복수 좌파" 동맹의 다른 두 구성원은 공산당(한때 프랑스의
가장 큰 전후 정치정당이었던)과 녹색당인데, 이들 모두 여론조사에서 약 5%대로
하락했다. 만약 죠스팽이 대선에서 진다면 -르펜과 셰브느망이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는 결승에서- 좌파 동맹은 6월 총선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에 처
하게 될 것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역시 다가오는 9월 선거에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있다. 부시
가 의회에서 "악"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몇 주 후, 그의 독일 사민당 -유럽 사회주
의의 모태 정당으로서 역사적인 뿌리가 있는- 은 지난 50년 동안이나 장악하고 있던
함부르크에서 새롭게 창당한 반이민자적 '법과 질서 당'이 기가 막히게 총 투표의 4
분의 1을 얻는 바람에(많은 부분 사민당의 전통적 노동계급 유권자들의 표를 가로챈
것이다.) 권력을 상실했다.
독일 경제는 현재 거의 자유 낙하 상태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슈뢰더의 권력
장악을 도왔던 쟁점인 실업은 거의 10%가 되었으며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지방 조
세 수입을 깡그리 흡수해버렸던 조세법이 기업친화적으로 바뀌어(슈뢰더가 주도했
다), 독일 도시들은 서비스를 대폭 삭감하고 파산 직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고용 수
치를 위조하고 과장한 슈뢰더의 노동부 장관을 둘러싸고 엄청난 스캔들이 터져 버
렸다.
신나치 독일국민정당(NPD)를 금지시키려던 시도는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또 다른
스캔들이다. 전체주의적 과거를 가지고 있는 독일에서 어떠한 정당이라도 불법화시
키려는 것은 예민한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며, NPD를 불법화시키는 것은 경제 침체
에 빠져있는 구(舊)동독에서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신나치를 순교자로 만들어버리는
행위이다. 더구나, 지나친 반이민 태도가 금지 사유로 언급되었던 최소한 5명의
NPD 지도자들은 독일정보기관원으로 밝혀졌다.
이 모든 상황은 보수적인 기독민주연합(CDU) 후보인 에드문트 슈토이버에게 대
단히 유리한 환경을 만들고 있다. 그는 바이에른 정치계의 권위있는 거물이며 과거
나치의 악명높은 아부꾼이었던 프란츠 조세프 슈트라우스의 후계자이다. 불타오르는
민족주의자이며 유럽통합회의론자인 슈토이버의 법과 질서, 이민자 강경 담론은 특
히 실업률이 17%나 되는 동독에서 인기있다. 슈토이버 집권의 바이에른은 슈토이버
가 기업들에게 제공한 뜻밖의 보조금 덕분에 유럽의 하이테크 수도가 되었고, 바이
에른의 실업율은 국가 전체의 대략 반정도인 5%를 약간 넘는다.
"바이에른의 기적"을 만든 사람인 체 하는 이 사람이 상대로 자리잡고 있는 한
슈뢰더가 수상직을 지속하게 될 가능성은 올해 가을 독일 의회의 의석수가 거의
10%나 줄어들 것(이전의 보수적 정부가 1996년에 통과시킨 법이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이라는 사실에 더욱 희박해지고 있다. 유력한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
네 차이퉁에 따르면, "만약 올해 선거 결과가 1998년과 똑같이 나온다면, 사민당과
녹색당의 21석 우위는 아마 개혁조치 때문에 8석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평화주의자인 녹색당의 지지율은 당수인 요시카 피셔 독일 외
무장관의 전쟁찬성 견해에도 불구하고, 9.11 이후 여론조사에서 폭락을 거듭해왔다.
슈뢰더의 유일한 생존 희망은 동독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놀라울 정도로 강한
그레고르 기지 주도의 전 공산주의자들인 좌익민주당(PDS)과의 동맹이다. 사민당은
이미 몇 개 지역에서 민사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인 사민
당 지도자 클라우스 보베라이트를 시장선거에서 함께 지지했던 베를린도 포함된다.)
슈뢰더는 민사당과의 동맹을 부정했지만, 2월 여론조사에 의하면 독일 국민 38%만
이 그를 믿는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악의적인 반이민 및 인종주의 캠페인으로
당선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수상이 포스트-파시스트 정당인 국민동맹과 외국인혐오
주의자인 움베르토 보시의 북부동맹 지원 하에 집권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의 '포
르자 이탈리아(전진 이탈리아!)'는 서유럽의 그 어떠한 정당과도 다르다. 이탈리아의
가장 부유한 사람인 그는 가장 많은 당원을 모집하거나 가장 많은 표를 조직화한
자에게 현금과 상을 주던 암웨이와 마찬가지로, 당을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만들었고
그는 이런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갑부로서 이탈리아 텔레비젼의 45%를 소유
하고 있고, 정부의 수반으로서 그는 현재 세 개의 국영 TV네트워크를 통해 추가
45%를 장악하고 있다.
이탈리아 부수상인 지안프랑코 피니 국민동맹 총재는 국민동맹의 전신(前身)인
MSI(1946년 과거 파시스트들이 창당한 '이탈리아 사회운동')에 17살 때 입당했다. 왜
냐하면 좌파 시위자들이 그가 존 웨인의 [초록색 베레모]를 보러 극장에 가는 길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바로 몇 년 전인 1994년에 그는 라 스탐파
에게 무쏠리니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베를루스코니
는 피니를 유럽연합 헌법제정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지명함으로써 유럽연합을 조
롱했다. 나아가, 베를루스코니는 국영 텔레비젼을 통제하기 위해 전(前) 파시스트 청
년 지도자를 선택했고, 이민장관은 무솔리니의 마지막 보루였던 살로 공화국의 일원
이었다. 그리고 TV 홈쇼핑 프로그램의 전 호스트였던 문화장관은 최근 현대 미술을
"배설물"이라 비난했다.
그러나 야당인 중도좌파 올리브동맹은 내부 권력투쟁에 빠져들면서 완전히 혼란
상태에 있다. 지도자인 전 로마 시장 프랑세스코 로텔리는 최근 [가디언]이 지적했
듯이, "허약하고 열정이 없다". 전 공산주의자들인 좌익민주당의 호리호리한 지도자
피에로 파씨노 또한 보다 카리스마적인 대안을 제공할 것 같지 않다. 노벨상 수상자
인 다리오 포의 절규는 베를루스코니가 차례로 사법부 등의 국가 기관을 그의 손아
귀 아래 두면서 민주주의에 가할 수 있는 죽음의 위협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 외에, 갈색과 검은 피부의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가 역사적으로 포용력
있고 사회민주주의적이던 스칸디나비아에까지 전염되었다. 작년 10월, 노르웨이 노
동당은 90년 역사에서 최악의 총선 결과에 고통받고 있으며, 루터교 목사인 후엘 마
그네 분데빅이 이끈 보수 연합에 의해 쫓겨났다. 그 다음 달 덴마크 사회민주주의자
들은 50년이래 최악의 결과를 얻어 반이민, '법과 질서' 강령을 들고 출마한 안더스
포그 라스무센이라는 카리스마적 젊은 보수주의자에게 권력을 잃었다. 한편, 극우
정당인 덴마크국민당은 나제3의 정당이 될 정도로 표를 긁어모았다. (스칸디나비아
대륙 어느 곳에서도 이민자는 인구의 5%를 넘지 않는데도 말이다.)
스페인에서는 보수적인 수상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의 인기는 부패로 점철된 펠리
페 곤살레스 사회당 정부를 패배시킨 이래 6년 동안 가장 높다. 그리고 벨기에에서
는 신파시스트 플랑드리 민족주의자들인 '블람스 볼록'은 2년 전 총선에서 총 투표
의 10%를 득표했는데, 이 때 부패병에 걸린 사회당 연합 정부를 희생으로 이 정당
과 기타 극우 정당들이 선전하도록 나섰다. 전쟁으로 확대된 외국인혐오주의적 안보
히스테리는 나치를 사랑하는 오스트리아 선동주의자인 요르크 하이더의 행운을 적
지 않게 도왔으며, 그의 신파시스트 정당인 극우 자유당(FPO)은 1월 말 여론조사에
서 집권 연립정부의 지지율과 똑같은 25%를 기록했다.
에드문트 슈토이버가 내년 가을에 새로운 독일 수상이 된다면, 보수주의, 민족주
의, 반이민이라는 새로운 로마-베를린-비엔나 축은 유럽 연방 건설을 중단시킬 수
있으며, 인권에 대한 유럽연합의 완강한 약속을 없애버릴 것이다. 대륙 위에는 인종
주의라는 어두운 구름에 덮여있는 상황에서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미래는 점점 더
어두워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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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만의 파업 4% 벽 넘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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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만의 파업 4% 벽 넘겨
독일 금속노조 파업
클리핑기사 chamnews@jinbo.net
정원호/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과정
조합원 2백80만명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독일 금속노조의 2002년 임금교섭이 7년만의 파업을 거쳐 마무리국면에 접어들었다.

노조의 6.5% 인상요구와 사용자의 3.3% 인상안의 대립으로 노조는 6일 독일 남서부의 바덴-뷔르템부르크주(州)에서부터 파업을 시작하여 13일부터는 베를린/브란덴부르크주로 확대했는데(독일에서 임금교섭과 파업은 교섭지구별로 이루어짐), 15일 바덴-뷔르템부르크주의 노사가 2002년 6월부터 4.0%, 2003년 6월부터 12월까지 3.1%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동독지역이었던 베를린/브란덴부르크주의 파업은 72년만에 최초라는 점에서 독일 노조의 새 역사를 장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독일에서 흔치않은 파업이 발생한 것은 “높은 임금인상이 경기회복을 방해하고 고용사정을 악화시킨다"는 사용자들의 상투적인 주장에 대한 노조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실제 노조는 그러한 주장을 존중하여 지난 수년간 낮은 임금인상을 감수했지만, 결과는 엄청난 생산성증가와 이윤증가에도 불구하고 소득분배는 악화됐으며 고용 또한 오히려 감소됐을 뿐이다.

이에 대해 노조는 높은 임금인상이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증대시킴으로써 소비를 늘리고 경기회복을 가져와 일자리도 늘릴 것이라고 주장하며, 요구의 관철에 강력한 의지를 보였는데, 이는 두 지역의 파업찬성률이 90%에 달했다는 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번 합의에 대해 노조는 당초 요구는 관철하지 못했지만 ‘마의 4%'를 돌파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바덴-뷔르템부르크의 시범적인 결과는 관례에 따라 전국에 확대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부 사용자들은 이에 불만을 표시하며 일자리를 감축할 수밖에 없다고 위협하고 있어, 향후에도 고용을 둘러싼 대립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 88호] 5.20 ~ 5.26

민주노동당기관지 <진보정치> http://www.kdlp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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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실종된 인물 선거 사민ㆍ녹색당 신승 &quot;고맙다 홍수야, 미국아&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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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실종된 인물 선거 사민ㆍ녹색당 신승 "고맙다 홍수야, 미국아"
해설│독일총선 결과
클리핑기사 chamnews@jinbo.net
▲ 독일 총선의 진정한 승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왼쪽)와 요슈카 피셔 외무장관이 지난 24일 총선 후 첫 회의를 갖고 기자회견에 임하고 있다.

강정수/베를린 통신원  jskang@web.de
23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밤새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전날 출구조사와 선거개표 방송은 자정 무렵까지 우파 기민/기사연합이 독일 총선에서 원내 제1당이 됐음을 말하고 있었다. 비록 근소한 차이였지만 좀처럼 역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기민/기사연합의 슈토이버 총리후보는 투표 마감시간이 정확히 1시간이 지난 22일 저녁 7시, 환호하는 당원들 앞에서 “선거에서 승리했다”며 기염을 토했다.

얼마 후 조금은 위축된 표정으로 사민당 지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슈뢰더 총리는 “밤은 길다”며 끝까지 개표를 지켜볼 것을 당부했다. 비록 원내 제1당 자리를 기민/기사연합에게 빼앗긴다 해도, 사민당과 녹색당의 전체 지지도가 과반수를 0.1~2% 앞서나가고 있어 ‘적녹연정’의 운명도 긍정적으로 점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에 대한 탁월한 육감을 소지한 것으로 평가받는 슈뢰더 총리가 이번에도 무언가를 감지했었던 걸까?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마감된 개표방송은, 8천8백54표 차이로 사민당이 원내 1당을 사수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은 38.5%라는 공히 동일한 지지율을 얻었지만, 사민당은 의석수에 있어서 3석을 더 확보함으로써 기민/기사연합을 따돌릴 수 있게 됐다.

사민당과 녹색당이 내놓은 선거전술은, 당내 인기스타 슈뢰더 총리와 피셔 외무장관을 전면에 내세우는 ‘인물 중심’ 전략이었다. 이는 ‘정당명부제’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정당 및 정책 대결 선거를 ‘인물 대결’로 바꿔 보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정당 지지율에 따라 사실상 의석이 배분되고, 다수당 대표후보가 총리가 되는 독일 선거제도에서 시도된 최초의 ‘인물선거 전략’은 두 가지 계산 속에서 탄생했다.

먼저 우파 기민/기사연합에서도 가장 우파에 속하는 슈토이버 총리 후보에 대한 광범위한 ‘반슈토이버 정서’가 그 하나다. 또한 초라한 정당 지지도에 비해, 월등히 높은 피셔 장관과 슈뢰더 총리의 대중적 인기가 ‘인물 선거 전략’의 나머지 한 축을 구성했다.

정치인 선호도 조사에서 이 두 명은 지난 4년 줄곧 1, 2위를 유지해 왔고, 슈토이버 후보의 경우 선거 끝나는 날까지 단 한번도 5위권 안으로 진입해 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여기에 독일 기상계측 역사 이래 가장 큰 강수량을 기록했던 지난 8월의 ‘대홍수’는 선거전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번 홍수는 자연 재앙이 아니라 ‘환경 재앙’으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다.

특히 구 동독지역을 강타했던 ‘대홍수’는 ‘환경 문제’가 ‘경제 불안 심리’를 비집고 주요 사회 관심사로 등장하는 호기를 만들어줬다. 무려 3주간 지속된 홍수 기간 동안, 사민 녹색 양당의 지지율은 마침내 바닥을 치고 상승곡선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녹색당 정치인들과 정책들은 갑작스레 방송과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됐다.

8월말에는 선거 양상을 뒤바꿀 수 있는 계기가 ‘외부’로부터 찾아 왔다. 딕 체니 미 부통령이 이라크에 대한 ‘선제 공격’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이에 슈뢰더 총리는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2차 대전의 경험자들이 생존하는 독일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 심리는 빠르게 확산됐고, 냉랭하게 등을 돌렸던 평화주의자들이 사민당과 녹색당 곁으로 돌아왔다.

또한 보수 우익 ‘슈토이버 반대’ 구호가 마침내 그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사민당에 대한 지지도가 급상승했다. 투표 1주일 전 마지막으로 조사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사민당이 기민/기사연합을 근소하게 따돌리는 믿기 어려운 역전이 일어났다. 사민당에 대한 지지 호소가 아닌 ‘슈뢰더를 총리로’라는 구호 외에는 특별하게 새로운 선거공약조차 내걸지 않았던 사민당으로 볼 때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무려 8.6%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마의 8%선을 가뿐히 넘긴 녹색당은 창당이래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당을 위협해온 정체성 위기 또한 모면한 것이다. 그러나 ‘피셔를 찍자’를 선거구호로 내세웠던 녹색당의 앞길이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다.

녹색당 주요 정책들은 이미 지난 4년 집권 기간동안 ‘다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뿐더러, 차기 집권기간을 주도해 갈만한 새로운 선거공약도 제시되지 못했다. 사민당과 녹색당의 의석수가 원내 과반수보다 정확히 4석 앞서는 사실도 커다란 질곡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의원 개인행동보다는 ‘규율’이 강조될 것이고, ‘표 단속’은 당내 권위주의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선거 승리를 일궈낸 피셔 장관과 슈뢰더 총리는 자신들에게 보다 집중된 당 권력을 십분 즐기며 제2기 ‘적녹연정’을 맞이하고 있다.
[ 105호] 9.30 ~ 10.6
민주노동당기관지 l진보정치l http://www.kdlp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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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케테콜비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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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케테콜비츠2
케테콜비츠: 독일 판화를 많이 남긴 여류화가(1867--1945년)
참세상뉴스 chamnews@jinbo.net
[낫을 갈면서/동판/1905]

농민전쟁

1840년 초 침머만의 <대농민전쟁사개설>을 바탕으로 엥겔스가 농민전쟁을 분석한 글을 마르크스가 간행한 잡지에 기고하였는데 1870년 다시 단행본으로 이 글이 나왔다. 이 글을 보고 형상화한 작품이 [농민전쟁]이다. 1902년 당시 독일은 사회주의가 위세를 떨치며 계급투쟁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농민전쟁]의 역사적배경은 15세기 말 16세기 초 지배계급을 이루는 봉건영주, 성직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농민들이 그 부담을 다 떠맡았다. 농민은 소나 말, 그 이하의 취급을 받고 살았다. 농민들은 영주의 토지에서 일을 하였고 자신의 농지에서 올린 소득은 십일조나, 지대, 전쟁세, 제국세 등으로 다 빼앗겼다. 당시에는 영주에게 돈을 바치지 않고는 결혼을 할 수도 없었다. 뿐만아니라 그의 아내와 딸 또한 영주의 소유였던 것이다.

이 때 루터의 종교개혁이 농민의 반란을 일깨운다. 토마스 뮌쩌는 ‘천국이 아닌 지상의 왕국 건설'을 주장하며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설파하는 자들이 농민들을 약탈하고 파멸시키고 있고, 수탈당하는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작은 죄를 범하면 사형에 처해진다고 교회의 성직자들과 지배계급을 강하게 비판한다. 15세기 말 부터 유럽 곳곳에서의 간헐적인 농민반란이 1525년 그의 지도아래 독일의 70%에 달하는 농민의 참여로 농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억압되었던 분노는 봉기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무자비한 진압 또한 가속화 되었다.

농민전쟁은‘산더미처럼 쌓인 파괴의 잔해와 나무마다 매달린 농민의 시체'로 참혹산 양상을 띄었고, 마을을 통째로 불태워 약탈과 대량학살까지 저질러 졌다. 이 속에서 토마스 뮌쩌는 고문으로 참수당했고, 농민반란이 들불처럼 퍼지자 루터는 지배계급인 영주와 귀족편에서서 평화를 부르짖으며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농민의 반격이 심해지자 루터는 ‘미친개를 죽이듯이 두들겨 패고, 목졸라 죽이고, 찔러 죽여아 한다'고 외친다. 농민에 관해서는 어떠한 잘못된 자비도 실천되어서는 안된다고 떠들어댄다.

독일의 농민전쟁은 한 계급이 전체적으로 계급운동에 참여한 독일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당시가 서양미술사의 꽃이라고 불리는 르네상스시대이다. 이렇듯 유럽 각지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을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미켈란절로, 뒤러 등의 거장들이 불후의 명작들을 쏟아낸다. 독일의 조각가이자 목판화가인 리멘슈나이더가 농민전쟁에서 농민들 편에 서서 교황에게 맞섰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심한 고문으로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은둔생활을 하다 죽어갔다.

이러한 처참한 역사적 사건인 농민전쟁을 현재적으로 부활시키고자 [농민전쟁] 작업을 한다. <밭가는 사람들>, <능욕>,< 낫을 갈면서>, <무기를 들고>, <폭발>, <전쟁터에서>, <잡힌 사람들>의 7부작으로 완성된다.

콜비츠의 작업순서는 [직조공의 봉기]가 먼저 제작되지만 [농민전쟁]이 [직조공의 봉기]보다 훨씬 앞선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담고 있다. 그리고 [농민전쟁]연작은 [직조공의 봉기]와 같은 구성으로 진행과정과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해낸 것으로 7개의 대형판화로 주제에 대한 정확한 상황설정, 감정처리, 탁월한 구성과 묘사로 완결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 연작에서도 억압하는 지배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밭가는 농부의 노고에서, 여인의 능욕 등의 표정과 몸짓, 분노에서 이들을 짓밟는 자들을 간접적으로 더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다.

[농민전쟁]에서도 역시 케테콜비츠는 피지배계급의 피끓는 분노를 너무도 적확하게 포착하여 리얼리즘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작품하나 하나가 고도의 예술성을 담보한 탁월한 작품이다. 작품을 만나면 그녀의 가슴을 대하는 느낌이다. 아주 오랫동안 작품을 보고 또 보고 느끼길 바란다.

*[밭가는 사람들/동판/1906]-연작1


*[능욕/동판/1907]-연작2

첫번째 <밭가는 사람들>을 완성하기 위해 9개의 상황을 설정하고, 6개의 상황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구도는 레핀의 부두노동자(1870-1873)와 비슷하다. 밭가는 농부들의 노고가 보는 이에게 그대로 이전되면서‘영차'하며 당기거나 밀어주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한다.

<능욕>에서는 케테콜비츠의 작품에는 나타나지 않는 식물의 세부적인 묘사로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처참한 상황에서의 흐드러진 꽃의 세부묘사는 찢겨진 여인과 화사한 꽃을 대조시킴으로서 당시의 몸서리치는 모욕, 허탈, 슬픔과 노여움이 그대로 전이되며 영주와 귀족에 대한 분노를 한층 고조시킨다.
*[낫을 갈면서/동판/1905]-연작3

*[무기를 들고/동판/1906]-연작4

*[폭발/혼합기법/1903]-연작5

이 연작의 반전이 이루어지는 <낫을 갈면서>는 앞의 두 작품보다 먼저 제작된 작품이다. 습작과 변형말고도 12가지의 상황설정이 있었던 작품이다. 농민들의 힘든 노동과 여인의 능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와 폭풍전야의 긴장을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 한 인물의 심리를 포착하고 있다. <무기를 들고>는 날카로운 창과 낫을 들고 나선형 계단을 물밀듯이 밀려드는 사람들. 참아왔던 분노를 무장을 하고 봉건영주와 귀족을 처단하러 간다. 계속 이어지는 사람들을 밝은 빛으로 처리하여 분노와 힘의 크기를 표현하였고, 대각선 구도의 치솟아 올라가는 구도로 역동성과 열기를 표현하고 있다.

[농민전쟁] 연작에서 <폭발>은 [직조공 봉기]의 <폭동> , 1899년의 <봉기>를 이어가는 것으로 한 주제에 대한 깊은 탐구을 느낄 수 있고 (이것은 케테콜비츠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특성을 보인다). 또한 혁명적인 예술가로서 대중봉기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봉기의 들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농부를 독려하며 ‘하늘을 나는 여인’을 침머만의 <대농민전쟁사개설>에서의‘검은 안나’로 등치시킨다. <폭발>에서 ‘검은 안나’(등진 여인)는 군중과 함께하는투쟁하는 여성으로 발전한다.

*[전쟁터에서/동판/1907]-연작6

*[죄수들/동판/1908]-연작7

흑백의 대조로서 표현한 <전쟁터에서>는 개선된 부식법을 사용하여 밤의 어둠을 나타냈다. “고통은 아주 어두운 빛깔이다”고 말한다. 봉기이후의 처참한 상황을 자식을 찾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어머니의 손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손과 죽은 자의 얼굴과 램프의 빛만 밝게 표현하고 나머지는 어둠과 별 묘사 없이 표현하였다. 가슴 뭉클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죄수들>이 마지막 작품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결박당한다. 비록 승리하지 못한 투쟁으로 잡힌 몸들이 되어 고개숙이고, 슬픈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고, 지쳐 쓰러져가지만 영주와 귀족에 대한 분노와 울분은 그대로 남아있다. 농민의 단단한 어깨와 팔, 다리, 담담한 표정에서 새로운 투쟁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농민전쟁] 연작은 5년간의 작업으로 1908년 완성되고 ‘역사미술학회’에 의해 출판되었다. 농민전쟁 연작을 마치며 그는 독일 판화가의 제1열에 우뚝 서게 된다. 연작은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고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한 속에서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 독일에서도 계급투쟁이 격렬하여 사회주의자들은 사상 유례없는 선전선동을 하게 되는데 케테콜비츠는 사회주의자 예술가로서 투쟁의 열기를 북돋웠다. 또한 자신이 가진 능력의 최상의 것을 투여했다고 자부하였던 작품이다.

짐플리시시무스
1909년 케테콜비츠는 하이네, 알베르트 랑겐 등이 활동하고 있었던 풍자 시사주간지인 [짐플리시시무스]에 사회비판적인 그림을 싣기 시작한다.

<가내노동>에서는 대도시 생활의 힘든 삶, <임시숙박소>의 프롤레타리아의 즐거운 일상, 혼자된 여자의 고단한 삶, 실직, 배고픔과 절망, 원하지 않는 임신 등 노동자 가족의 전형적인 불행들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4년여의 이 작업을 통해 중요한 양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자신의 회화적인 착상을 직접 모델을 이용, 꼼꼼하게 발전시켜서 동작 몸짓을 하나하나 힘들여 완성했으나 이제 밑그림을 재빨리 그려내고 본질적인 요소를 집중하기 위해 세부묘사를 생략한다.
*[가내노동, 짐플리시시무스, 1909, 11, 11]

*[임시숙박소, 짐플리시시무스, 1911, 1, 16]

“신속하게 완성해야 한다는 것, 대중적으로 표현해야만 할 필요성, 그러면서도 <짐플리시시무스>를 위해서도 예술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늘 나를 새롭게 사로잡아 오래도록 충분히 다 말하지 못해온 것을 대중 앞에서 더 자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유달리 이 작업에 애착을 느끼도록 하였다. 단 하나 나쁜 점이 있다면 내가 이 잡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부터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이 잡지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도 더 이상 이 잡지가 저속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눈에 안 띄도록 감출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은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하는 케테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예술이 계급투쟁과 노동자계급 의식 형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예술의 당파성을 견지하고 있다.

“ 이제 어디에서나 모두가 궁핍과 싸워나가는 과정에 내가 참여해 줄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요구이며 정상적인 일이다. 나는 정말로 기꺼이 나의 작품으로 이 일을 도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기분내키는 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곧바로 큰소리를 듣게 된다. 빨리해! 노인복지를 위해! 아동복지를 위해!”

게르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콜비츠연구서>에서 “독일 조형예술가들 중에서 노동자 계급내의 민중성을 케테가 포괄한 세계에 필적할 만큼 획득하거나 최소한 그러한 경지에 버금가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된 작품들은 노동자의 일상적인 슬픔과 기쁨을 민중적으로 표현하였다.

전쟁

일곱개의 목판화로 [전쟁] 연작은 1922-1925년에 걸쳐 완성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젊은이들이 지원병으로 전쟁터에 나가고 콜비츠의 둘째아들 페터도 지원하였다. 1914년 10월 10일 임관한 18살의 페터는 20일 후 전사통지서로 돌아온다. 콜비츠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힘든 삶을 보내며 자신의 슬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희생/ 목판/ 1922-1923]-연작1

*[지원병들/ 목판/ 1922-1925]-연작2

<희생>은 제단에 희생물을 바치듯 두 손으로 어머니가 아이를 무엇인가에게 바치고 있는 그림이다. <북두>라는 잡지에 실려서 1931년 최초로 콜비츠를 중국에 소개한 이 작품은 노신과 그 동료들의 공감을 샀고, 중국의 미술학도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중국 목판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해골모습의 병사, 우는 병사 등으로 무의미하고 절망스러운 전쟁을 <지원병들>이 표현하고 있다.

전쟁연작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표현하는 것으로 전쟁으로 인한 한 사람의 죽음과 연관된 부모와 부인, 자식, 어머니들을 표현해 냄으로써 전쟁의 참혹함을 전하고 있다.
*[부모/ 목판/ 1923]-연작3

*[과부1/ 목판/ 1922-1923]-연작4

*[과부2/ 목판/ 1922-1923]-연작5

*[어머니들/ 목판/ 1922]-연작6

“전쟁반대 포스터를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 일을 생각하면 나는 즐거워진다. 어떤 목적을 지닌 작품은 순수한 예술일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작업할 수 있는 한 나의 예술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지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1922년 여류화가 에르나 크뤼거에게 보낸 콜비츠의 편지 중에서)

“ 나는 전쟁을 형상화해내기 위해 무던히 애섰지만 그것을 포착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말하고 싶어한 것을 어느 정도 말해줄 목판화 시리즈를 완성했습니다. 그 제목은 <희생>, <지원병들>, <부모>, <어머니들>, <과부들>, <민중>입니다. 이 그림들은 마땅히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 모두가 겪은 이 참담한 과거를.”(1922년 작가 로망롤랑에게 보낸 콜비츠의 편지 중에서)

예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뚜렷이 인식하며 [전쟁]이란 주제를 다루면서도 노동자계급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전쟁>연작 이외에 반전의 메시지가 담긴 1914년 작인 <근심>, <어머니들>, <작전 중 사망>과 <전쟁은 이제그만!>(1924)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 >(1942) 등이 있다.
*[전쟁은 이제 그만/ 석판/ 1924]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 마지막 석판/ 1942]

프롤레타리아

<실업>, <기아>, <자식의 죽음>으로 목판으로 구성된 이 연작은 [직조공의 봉기]나 [농민전쟁]에서의 작품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한 삶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과는 달리 더 가까이에서 관찰한 노동자계급의 극단적인 빈곤의 삶을 간결하게 추상적으로 묘사했다.

석판이 부드러우면서 구상적, 구체적인 반면 목판은 거칠고 추상적으로 표현을 하는데 적합하다. 1926년 10월 16일 알프레드 두루스는 [적기]에서 [프롤레타리아 ]연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그녀는 클링거의 영향을 받고서 졸라,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아르노 홀츠, 율리우스 하르트 등의 문학에서 접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참한 삶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에서 벗어나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빈곤한 삶을 더 가까이에서 더 강하게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기에 이르렀다. 이것과 나란히 기법도 무른 동판화에서 시작하여 석판화를 거쳐 가장 거친 목판화에 이르렀다. ”

콜비츠는 이 작품에 대해 “이 판화들은 나쁘지는 않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작품들만큼 내게 절실한 작품은 아니었다. 다만 작업하는 시간이 즐거웠기 때문에 손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고 말하고 있다.

이 [프롤레타리아] 연작은 1945년 이후의 동독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먼저, <실업>을 살펴보면 원근효과로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두번째 작품 <기아>는 열다섯 번이나 구도를 바꾸면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 작품으로 안타깝게 그림을 구할 수 없다. <빈의 굶주리는 어린이들을 위하여>라는 작품에서도 다룬 주제로 보다 간결하고 추상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하였는데 채찍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탁월하게 형상화 한 작품이다. <자식의 죽음>에서는 자전적인 작품이지만 자신의 특수한 사항을 전혀 그리지 않은 채 본질적인 내용만을 표현하였다.
*[실업/ 목판/ 1926]

*[자식의 죽음/ 목판/ 1925]

이상으로 [농민전쟁], [짐플리시시무스], [전쟁], [프롤레타리아] 연작을 살펴보았다. 콜비츠의 작품의 힘은 주제를 포착하여 한 화면으로 구성해내는 구성력이 대단하다. 더 이상 그 주제로서는 다른 구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히 포착해 낸다. 또한 감정전달이 그대로 옮겨오는 놀라운 힘을 작품에 새겨 넣는다. 아이의 눈을 통해 엄마의 몸짓을 통해, 농민의 육중한 다리와 어깨에서 그대로 전해진다. 역시 탁월한 예술작품이며, 노동자계급의 예술에서 가장 빛나는 전형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케테 콜비츠 작품을 능가하는 노동자계급의 예술을 본 적이 없다. 또한 지배계급예술과 견주어서도 절대적으로 월등한 예술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을 감상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케테콜비츠 마지막 글로 [죽음]연작과 플랑카드, 포스터 등 사회ㆍ정치적인 그림들과 일상적인 그림들, 그리고 자화상과 그의 예술세계와 영향에 대하여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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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케테 콜비츠 1

 
    칼럼 > 칼럼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예술가 케테 콜비츠 1
케테 콜비츠: 독일 여류화가(1867-1945년)
참세상뉴스 chamnews@jinbo.net
*<봉기/동판/1899>

지난 글에서는 예술이 노동의 산물임과 함께 예술의 계급성을 다루면서 노동자계급의 예술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노동자계급의식과 노동자계급예술이 최초로 발생한 독일의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계급성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는지, 작가의 사상은 어떻게 작품 속에 표현되는지, 시대와 정치적 상황들이 어떻게 작가와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볼 것이다.

케테 콜비츠라는 위대한 예술가의 삶과 사상, 작품을 풍부하게 이해하고, 그의 공헌과 한계를 정확히 평가하는 것은 노동자문화운동에 큰 자산으로 남지 않을까 한다.

*왼쪽. <1930년대 초의 케테 콜비츠> / *오른쪽. <팔을 고인 자화상/1920>

이 글이 그것을 위한 단초라도 되었으면 한다. 또한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이 내용과 형식 두 측면 모두에서 노동자계급의 예술을 완벽하게 현실화한 케테 콜비츠의 위대한 예술세계를 만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에게 글을 짧고 쉽게 쓰라고 권유받았다. 그러나, 워낙 위대한 예술가를 알려내는 작업이기에 단지 개인의 소감을 간단히 밝히고 말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케테 콜비츠 작가의 시대적, 역사적, 정치적 배경뿐만이 아니라 작품 하나하나의 시대적, 역사적, 정치적 배경들을 알릴 필요가 있기에 부득이하게 이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할 생각이다. 글이 조금 길더라도 이해를 바라며, 진지한 검토를 부탁한다.

첫 번째 글에서는 서문 <낯선, 그러나 너무 친근한 케테 콜비츠>와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미술사적 배경을 다루는 <사회주의 운동의 기운을 받으며 성장한 사회주의자 케테 콜비츠>, 콜비츠의 청년시절에서 노년 시절에 이르는 사상적인 흐름을 살피는 <자신에게 엄격했고 당당했던 케테 콜비츠>, 그리고 본격적인 작품해설을 시작하여 판화 연작 <직조공들의 봉기>를 다룰 것이다.

두 번째 글에서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의 악랄한 지주계급에 맞선 농민들의 반란을 다룬 <농민전쟁> 연작, 시사 주간잡지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한 작품,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슬픔의 반전 메시지를 담은 <전쟁> 연작과 <프롤레타리아> 연작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 글에서는 노년의 <죽음> 연작과 플랭카드, 포스터 등 사회정치적인 그림들과 조가작품,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남긴 자화상과 그의 예술적 영향력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다룰 것이다.

낯선, 그러나 너무 친근한 케테 콜비츠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1 <궁핍/석판/1897>

케테 콜비츠란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특별히 진보적인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전혀 알 수 없는 예술가다. 자본가계급에게는 해로운 사람으로 당연히 제도 교육에서는, 제도권 예술계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케테 콜비츠는 그만큼 우리에게 낯설다. 하지만 그를 알게 되면 그가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케테 콜비츠의 그림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계급의식을 일깨워주고 예술적 체험을 주는 감동적인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이미 나는 그를 만났다. 과거 운동이 활발하던 때에는 미술운동도 역시 민중운동의 한 세력으로 명실공히 자리하고 있었다. 민예총(민족민주예술인총연합), 민미협(미술), 민음협(음악) 등등 문화운동이 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벽화, 걸개, 판화 등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온 거리와 학교, 공장, 농촌에 그려지고 집회의 필수품이었던 때였다. 지금은 무용담이 되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지금의 문화운동에 복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때를 꿈꾸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제 문화운동이라고는 노래와 비디오 운동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때, 케테콜비츠를 대하는 나는 상당히 진지하였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를 만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하기도 하고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격동하는 시대에 진지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그는 나를 너무 부끄럽게도 했고,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10여년 전의 그에 대한 미천한 이해를 조금은 더 깊이 있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10년, 20년, 30년이 지난 후에야 그를 보다 올곧게, 보다 충분히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2 <죽음/석판/1897>


케테 콜비츠의 삶과 예술을 접하면서 역시 예술은 계급성을 표현하며, 인간의 삶과 사상을 표현하며, 모든 것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명제를 다시 느낄 수가 있었다. 또한 예술이란 인간 개인이 새로운 인식을 통해 의식을 발전시킨 결과물이기 때문에 산고의 작업임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과 노동자계급에게 겸허하고 한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케테 콜비츠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케테 콜비츠는 젊은시절과 중년까지 사회주의자로 <게르미날>(1893), <직조공들의 봉기>(1893-1898) 연작, <농민전쟁>(1903-1908) 연작, 시사주간지 '짐플리시시무스'(1907-1909)에 사회비판적인 판화를 기고 하는 등의 왕성한 판화작품 활동을 한다.

하지만 노년에는 자신의 나약한 사상적 한계에 고뇌하며 여전히 심정적으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자신이 평화주의자인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케테 콜비츠는 50대, 60대이던 1920, 30년대에도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1919), <러시아를 도우라!>(1921), <선동가>(1926), <프롤레타리아> 연작(1925)처럼 간단히 평화주의라고 치부할 수 없는 귀중한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케테 콜비츠는 그림으로써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을 불어넣어 준, 위대한 노동자계급의 예술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설사 케테 콜비츠 자신이 사상적 동요를 부끄러워하며 노동자계급 예술가라는 영예를 거부한다 해도 역사는 기꺼이 그에게 그런 영예를 부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3 <음모/석판/1898>


사회주의 운동의 기운을 받으며 성장한 케테 콜비츠

케테 콜비츠는 1867년 7월 8일 독일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 운동이 비스마르크와 어린 황제에 맞서 가열차게 투쟁을 하고 있던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는 복음주의와 종교의 권위를 거부하고 합리주의와 윤리를 강조하는 자유 신앙운동을 하였고, 아버지 칼 슈미트 또한 자유주의적 사상을 지닌 사람으로 세속적인 성공이 보장되는 법관생활을 그만두고 미장이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라는 예술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사회주의 사상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콜비츠는 아우구스트 베벨, 마르크스주의자인 오빠 콘라트 슈미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영향을 받는다.

케테 콜비츠가 살았던 19세기 후반부와 20세기 전반부는 정치, 사회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일대 변혁의 시대였다. 18세기 말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은 혁명과 반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1905년 러시아혁명, 1914-1919년 1차 세계대전, 1917년 2월과 10월의 러시아 혁명, 1918-1923년의 독일혁명, 1933년의 히틀러 집권과 1939-1945년 2차 세계대전 등 굵직한 사건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독일은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과 세계에서 중요한 나라였다. 독일에서 파시즘이 집권하여 야만으로 가느냐 변혁으로 가느냐는 그 시대의 관건이었다.

미술사조에서는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에 이어 혁명과정에서 생겨난 19세기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인상주의, 모더니즘이 등장하였고, 세잔느를 이어 브라크와 피카소가 큐비즘을 구축하였다. 또한 표현주의, 야수파,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미래파 등 20세기 전반기에 다양한 미술사조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 당시 고흐, 고갱, 뭉크, 클레, 마네, 모네, 샤갈, 꾸르베, 마티스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과 그에 영향받은 유럽과 세계 노동자투쟁의 분출은 미술에서도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요구했고, 리얼리즘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이런 속에서 케테 콜비츠는 1885-86년에 베를린의 여자예술학교에서 슈타우퍼 베른의 가르침을 받고, 맑스 클링거의 판화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권유받는다. 1888-89년에는 뮌헨의 여자 예술학교에서 루드비히 헤르테리히에게 회화를 배우게 된다.

1891년에는 칼 콜비츠와 결혼한 다음 북부 베를린으로 옮겨와서 의사인 칼 콜비츠가 일하는 의료보험조합의 무료진료소에서 하층민의 고통과 불행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케테 콜비츠는 노동자계급의 세계가 아름답다고 느끼던 낭만적이고 연민에 어린 시선에서 "노동자들의 결혼생활은 남편과 아내가 모두 건강할 때라야 유지될 수 있다. 그녀가 일을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노동자들의 세계는 부르주아의 그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세계이다. 그곳은 전혀 다른 가치척도가 지배한다"고 여기게 된다.
남편 칼은 케테 콜비츠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칼과 케테는 사상과 현실의 동반자로서 서로간에 사랑과 존경, 신뢰로 살아간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4 <직조공들의 행진/ 동판/1897>

자신에게 엄격했으며 당당했던 케테 콜비츠

콜비츠는 당파를 취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한때는 혁명론자였다. 어린 시절과 소녀 시절에는 혁명과 바리케이드를 꿈꾸었다. 지금 내가 젊다면 틀림없이 공산주의자였을 텐데. 아직도 그 꿈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지만 내 나이가 벌써 50대다. 그리고 전쟁을 겪었고 페터와 마찬가지로 수천의 젊은이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면서 자신은 사회주의는 원하지만 "나는 평화주의자임을 한 번도 고백하지 못한 채 그 주변에서 동요하고 있다"고 1920년 10월의 일기에서 솔직하게 밝힌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예술가로 간주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페테르스부르크 거리에 전시된 내 작품을 보고서 나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내가 확고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 같은 여류 예술가가 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 똑바로 제 갈 길을 찾아가길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들을 감각하고, 감동을 느끼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리프크네히트의 정치노선을 추종하지는 않지만, 리프크네히트를 애도하는 노동자들을 묘사하고 또 그 그림을 노동자들에게 증정할 권리가 있다." 케테 콜비츠는 자신에게 엄격하였고 진지하였으며, 당당하였다.

케테 콜비츠의 사상적 흐름을 변증법적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항상 노동자계급의 편에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며 진정으로 그들과 함께 편하게 살기를 갈구하였지만 현실의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등 감당하기 힘든 현실들이 케테 콜비츠를 체념하게 했다. 특히 아들의 죽음은 오랫동안 깊은 영향을 미쳤다. 콜비츠는 자신이 살아온 사회적조건과 인생역경 속에서 많이 힘들었고 너무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 조건을 뛰어넘어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처럼 혁명 예술가로 굳세게 진군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과학적인 이론을 체득하여 노동자계급의 힘과 노동해방을 이해하지 못한 케테 콜비츠의 한계라고 본다. 투쟁을 하면 희생이 따르고, 그 희생은 인간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희생에 따른 고통을 이겨내고 계속 투쟁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할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 그리고 투쟁을 해도 패배만 하고 승리가 멀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럴 때에도 과학적인 이론으로 노동자계급의 힘을 믿고 노동해방을 추구하며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케테 콜비츠에겐 희생과 패배에 따른 고통을 능히 이겨낼 만한 이론과 전망, 당파가 없었다. 또한 당시 케테 콜비츠의 한계는 영웅적으로 싸웠지만 번번이 패배했던 독일 노동계급 운동의 한계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에게 영감과 힘을 주는 위대한 예술을 창조해낸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시대는 달라도 여전히 케테콜비츠의 고뇌를 함께하는 노동자, 예술가들이 많이 있음을 전하면서 위로를 대신한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5 <폭동/동판/1897>

직조공들의 봉기

케테 콜비츠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직조공들의 봉기]가 있다.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은 독일 실레지엔 지방의 직조공들의 봉기다. 1840년대에 산업혁명이 유럽을 휩쓸었다. 산업혁명으로 생겨난 직조 기계들은 집에서 손으로 직물을 짜던 직조공들의 생활조건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직조 기계는 손으로 작업하던 직조공들보다 훨씬 싼 값에 제품을 내놓았고, 이윤을 많이 챙기려던 중개인들은 손으로 만든 제품을 보다 싼 값에 사들여 직조공들의 수입을 최저 생계비 이하로 떨어뜨렸다. 1844년에 최초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슐레지엔 직조공의 봉기였다. 이 내용을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이 희곡으로 만들었다. 1893년 2월 28일 이 [직조공들]이라는 희곡을 보고 난 후 그 감동으로 제작한 것이 케테 콜비츠의 [직조공 봉기]이다. 그리고 이 봉기를 다룬 노래로 '실레지엔의 직조공'이 있으며, 이 노래는 '최초의 노동자계급의 예술'이란 평가도 받는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서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이하 생략)

1844년 하우프트만의 [직조공들]은 단지 무대 위의 희극이 아니라 그 당시의 혁명적 투쟁을 예고하는 살아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져 황제 빌헬름 2세는 극장의 궁정특별석을 해약하고, 드디어는 1890년 "사회민주주의자들이란 하나같이 제국과 조국에 해를 끼치는 인사들이다"고 담화문까지 내렸다. 케테 콜비츠가 [직조공 봉기] 연작을 끝낼 무렵인 1897년에는 파업주동자들에 대한 징역형 선고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1896년 하우프트만에게 쉴러상이 추천되었을 때 빌헬름 2세는 승인도 거부하였다.

콜비츠의 이 판화가 1898년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을 때는 상당한 충격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심사위원회는 콜비츠에게 금상을 추천했으나 빌헬름 2세는 그것도 거부했다. 이 때 빌헬름 2세는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예술을 모두 "시궁창 예술"이라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콜비츠의 판화는 1899년 드레스덴에서 전시되었을 때 금상을 수상했으며, 1900년 런던에서도 상을 받았다. 이 [직조공들의 봉기]로 케테 콜비츠는 판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6 <결말/동판/1897>


[직조공들의 봉기]는 <궁핍>, <죽음>, <음모>, <직조공의 행진>, <폭동>, <결말>의 6부작으로 석판과 동판으로 만들었다. 그는 먼저 시작한 [게르미날] 연작을 버려두고 [직조공들의 봉기]에 몰두했다.

이 연작은 1893년부터 1898년에 걸쳐 완성됐다. 하우프트만의 희곡과 달리 콜비츠의 [직조공들의 봉기]에서는 작품 속 그 어디에도 억압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직조공들의 실존과 삶, 투쟁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계급투쟁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고, 당시의 자본가의 악랄함과 직조공들의 분노를 처절히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여성에 대한 당시의 저급한 봉건적 사고와 편견에 맞서 여성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다 하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콜비츠의 사회주의적 여성관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케테 콜비츠가 상당히 아끼던 작품이었던 것 같다. 1921년의 한 일기에서 이 작품에 대해 "나의 [직조공들]"이란 표현을 한다. 또한 이 작품은 가장 민중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 평가된다.

<게르미날>의 한 장면/동판/1893>

다음은 이 글을 이어 케테콜비츠의 작품해설로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의 악랄한 지주계급에 맞선 농민들의 반란을 다룬 <농민전쟁> 연작, 시사 주간잡지 {짐플리시시무스}에 기고한 작품,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슬픔의 반전 메시지를 담은 <전쟁> 연작과 <프롤레타리아> 연작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 글에서는 노년의 <죽음> 연작과 플랭카드, 포스터 등 사회정치적인 그림들과 일상의 그림들, 그리고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남긴 자화상과 그의 예술세계와 예술적 영향력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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