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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에서 소멸까지 ⑪ - MP3]70대 할아버지에게도 사랑받아요

그렇다. 내게 필요한 것은 20기가가 아니라 30기가짜리였다.

 

 

내 안에 노래 있다, 500곡 넘게
[탄생에서 소멸까지 ⑪ - MP3]70대 할아버지에게도 사랑받아요
텍스트만보기   홍성식(poet6) 기자   
일상에서 쉽게 만나고 소비하는 것들일수록 그것의 원재료가 무언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완제품이 되는지에 관해서는 무심히 넘어가는 경우가 흔하다. 반면 공정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는 친숙한 제품의 탄생에서 소멸까지를 직접 제품의 입장이 되어 1인칭 화법으로 서술해보았다. 기획 열 한 번째 기사는 MP3다. <편집자 주>
▲ MP3플레이어는 워크맨의 손자이고, PMP의 아버지다.
ⓒ 코원시스템 제공
하늘엔 매연이, 땅엔 쓰레기가, 강물엔 갖가지 오염물질이 떠다니는 서울.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27층 스카이라운지에서 내려다보는 이 도시의 야경은 아름답다. 서른다섯살 노총각 회사원 민호 앞에 앉은 스물세살의 여대생 애인 혜인은 오늘 행복하다. 오빠가 기특하게도 자신이 원했던 것을 꼭 집어 선물했기 때문이다.

'SS501'과 '더 빨강'의 최신 유행곡을 듣는 것은 물론, 녹음기능에 동영상까지 재생이 가능한 나. 평소 아무리 서로 좋아해도 '열네 살의 나이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까'라며 고민하던 혜인의 걱정을 한번에 해결해준 근사한 선물이었다.

민호 역시 고민이 없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퀸'과 '제네시스'의 사랑노래를 녹음해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지도록 함께 들었던 첫사랑 미정과의 추억.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가 사람들의 손에서 사라졌던 것처럼, 애틋한 첫 여자와의 기억은 사라지고 뜻하지 않게 찾아온 꼬마 숙녀와의 만남.

하지만, 민호는 현실에 충실하기로 했다. 언제까지나 멀어진 젊은 날의 기억에만 기대 살 수는 없는 법. 지금의 어린(?) 애인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생일선물이 근사한 이탈리아풍 저녁식사와 나였던 것. 나는 세대차이라는 둘 사이의 간극을 좁혀줄 긴요한 매개물이 된 셈이다.

MP3 최초 개발국은 한국... 세계시장 40% 장악

떡볶이집 가래떡 만한 크기의 몸에 자그마치 500곡 이상의 음악을 담을 수 있는 나. 그래 맞다. 난 MP3플레이어다. 날 만지작거리며 민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혜인처럼 나 또한 내 주인마님을 올려다보며 8년 남짓 시간동안 지내온 나와 내 친구들의 삶과 그 삶 속 얽힌 갖가지 사연들을 떠올려 본다.

앞서 언급한대로 나와 친구들의 역사는 일천하다. 애초 1980년대 후반 독일의 음향 분야 과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으나, 정작 우리들의 시조가 되는 큰형을 제품으로 완성시킨 건 한국 회사다. 1997년 세상에 얼굴을 내민 큰형의 이름은 엠피맨(MPman).

'MP3플레이어' 1호라 불러도 무방한 그 형은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의 대명사로 이야기되는 '워크맨' 만한 크기였다. 지금 만들어지는 내 친구들보다 엄청나게 큰 몸피다. 그 커다란 덩치 탓에 별명도 '탱크'였다. 그 형의 뒤를 잇는 둘째 형의 이름은 '리오 300'. 이 형 역시 우람하고 컸다.

테이프가 늘어나고 몸집이 크다는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의 단점을 극복하고 CD에 가까운 깨끗한 음질을 재생하는 나 MP3플레이어.

'고음질 오디오 압축기술'이라 불리는 MP3는 음악 속에서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가청영역만을 압축해 재생한다. 초기 단계 내 형들은 건전지로 작동되는 것이라 재생시간이 짧았지만, 요사이 시장에 선보이는 친구들은 30분 충전으로 20시간 이상 음악재생이 가능하다.

▲ 초기의 MP3플레이어.
ⓒ 코원시스템 제공
뿐이랴, 초기에는 200~300MB에 불과하던 내 메모리용량도 최근에는 괄목상대할 만큼 늘어나 30GB(1GB=1024MB)를 자랑한다. 노래 한 곡의 평균 5MB이니 최대 600곡의 노래를 내 안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와 내 친구들은 크게 플래시메모리형과 하드디스크형(HDD)으로 구분된다.

플래시메모리형은 날씬하고 작음 몸에 디자인이 세련된 것이 많아 한국 사람들이 선호한다. 하지만 용량이 적다. 하드디스크형은 다소 큰 몸집이 단점으로 지적되기 하지만, 상대적으로 용량이 커 외국인들이 좋아한다. 둘 다 일장일단이 있는 셈이다.

나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음질이 최고"라고 평가받는 코원시스템은 내수용 플래시메모리형과 수출용 하드디스크형을 각각 40%와 60% 비율로 생산해 연 1천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외에도 레이콤과 삼성전자 등 20여 개 회사가 나와 내 친구들을 생산한다.

전세계를 통틀어 나의 시장규모는 3700만대. 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49억 달러다. 한화 5조원 규모의 엄청난 시장이다. 한국에서는 코원과 레인콤, 삼성전자 등 3사가 전체 매출의 50% 가량을 차지하는 메이저 제조업체로 거론된다.

몸집큰 '탱크형' 워크맨부터 영화도 보여주는 PMP까지

이동하면서 음악감상이 가능하다는 차원에서 보자면 소니가 개발해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워크맨은 내 조상 격이다. 자고로 음악이란 근사한 오디오 기기를 갖추고 집에서만 듣는 것이라는 인식에 일대전환을 가져온 제품.

워크맨은 그 탄생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1978년 소니는 녹음기기 생산부서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한다. 더 이상 이익 창출이 어렵다는 경영진의 판단 앞에 이들은 악전고투의 노력을 경주했고 그 결과물로 손바닥 크기의 녹음재생기를 내놓았다.

소니의 회장 모리타는 이 제품의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진행해 마침내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의 대박 신화를 이뤄낸다. 이 제품이 바로 워크맨. 워크맨은 일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대화보다는 혼자만의 고독에 익숙한 뉴욕의 여피족과 입시와 주입식 교육에 찌들어 있던 한국의 중고교생들에게도 엄청난 사랑을 받는다. 지금으로 20여년 전인 1980년대 이야기다.

한국에서 나와 내 친구들이 사랑받는 건 민족적인 기질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노래 듣고 노래 부르는 것을 다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즐기고(당신 주위의 노래방들을 보라), 주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만 가지지 못하면 견디기 힘들어하는 한국인의 성정. 그런 배경이 '엠피맨'이라는 내 큰형을 만들었고, 거리를 각종 MP3플레이어의 거대한 전시장으로 만든 게 아닐지.

워크맨이 내 조상이라면 나의 가장 진화된 형태는 PMP(Portable Multimedia Player)다. 음악재생 기능과 보이스레코더 기능은 물론,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감상할 수 있고, 이미지를 볼 수 있으며, 텍스트를 읽는 것까지 가능한 이 기기는 나의 진화가 과연 어디까지 가닿을 것인지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요사이는 PMP도 상용화단계에 이르러 지하철을 타면 나를 가진 대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코원 홍보실 측에 따르면 지난해 9월 출시한 'A2'라는 PMP는 40여만원이라는 고가임에도 한 달에 1만여대씩이나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개가 물어뜯어도 멀쩡한 한국 MP3의 맷집

한국에서 생산되는 전자제품의 기술력과 품질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만만찮은 수준이란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나 역시 그렇다. 게다가 내 친구 하나는 튼튼함까지 갖춰 세계의 네티즌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지난 연말. 미국의 한 네티즌이 개가 물어뜯어 완전히 파손되기 직전의 상태까지 간 내 친구 하나의 사진을 전자기기 전문사이트 게시판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사연이 놀라웠는데 완파 직전까지 간 내 친구가 멀쩡히 작동했다는 것. 이 제품은 한국의 MP3플레이어 제조사가 만든 것이었다.

이 게시글과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내 친구의 튼튼함과 품질에 찬사를 보냈고, 이 사연은 태평양을 건너와 한국의 신문에까지 보도됐다.

▲ 최신형의 MP3플레이어.
ⓒ 코원시스템 제공
마지막으로 세상이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 하나를 풀어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사람들은 보통 나를 사용하는 이들이 10~20대 학생들뿐일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주고객층은 그들이 맞다. 하지만, 전혀 의외의 사용자도 없지 않다. 코원 고객센터를 자주 방문한다는 70대 할아버지 이야기는 진정한 음악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내 친구들을 4대나 소유하고 있는 이 할아버지는 딱 한번 짧게 소리를 들어보는 것만으로 기기의 종류를 알아 맞추는 마니아. 제품 하나 하나의 특징을 너무나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고객센터 직원들도 이 할아버지에게 배우는 것이 적지 않다고 한다.

가끔씩은 고객대기실에 앉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루종일 음악에 빠져있다는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소설가 장정일이 <아담이 눈뜰 때>에서 서술한 바 있는 '뮤직 러버(Music Lover)'를 떠올리게 한다.

음악에 대한 사랑과 그 음악을 재생해주는 기계에 대한 지식을 두루 갖춘 백발의 노신사. 예술을 그 자체로 아끼는 할아버지의 낭만적인 삶을 닮고싶은 직원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 사람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내 친구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데 이것 봐라. 혜인이 민호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낀 채 같은 노래를 듣고 있다. 리처스 샌더슨(Richard Sanderson)의 '리얼리티(Reality)'다. 어젯밤 민호가 다운받아 내 몸에 저장한 곡.

민호가 영화 <라붐>의 삽입곡인 이 노래에 빠져있던 중학생 시절. 혜인은 기저귀를 차고 다니던 아기였다. 그 막막한 시간의 간극을 내 몸 속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이 메워주고 있는 것이다. 나이 차이 많은 연인들을 이어주는 사랑의 타임머신 역할을 하게 된 오늘. 'MP3플레이어'로 태어난 내 운명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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