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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10/02

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2/27
    소금 양치(1)
    맑은공기
  2. 2010/02/12
    다른 언어를 대하듯 조심스럽게....(2)
    맑은공기
  3. 2010/02/11
    4대 성인(1)
    맑은공기
  4. 2010/02/10
    칼의 노래
    맑은공기
  5. 2010/02/09
    자립 하기 위하여...(2)
    맑은공기
  6. 2010/02/07
    사랑하는 조문익과 그의 사람들(5)
    맑은공기
  7. 2010/02/07
    김진숙님 고맙습니다.(1)
    맑은공기

소금 양치

몇 달전 집에 치약이 떨어진 후

소금으로 양치를 시작했다.

처음 할 때는 개운한 것 같지도 않고

하더니 금새 익숙해 졌다.

오히려 치약으로 양치를 할때보다

개운한것 같다.

 

오랜만에 수련회에 가서

치약으로 양치를 하니

치약맛이 너무 독하고

개운치도 않았다.

확실히 소금이 더 좋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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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언어를 대하듯 조심스럽게....

언어는 인간의 수 만큼 존재한다.

 

가게에서 회의를 한다.

매출 장부와 현금사이에 1,000원이 모자란다.

이것을 두고 세 명이 각자 설명을 하는데

서로 알아듣지 못한다.

알아듣지 못함으로 짜증이 나고

목소리가 커진다.

 

같은 단어를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언어가 같은건 아닌것 같다.

저마다 서로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것 같다.

아니 이것이 사실일지 모른다.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는 착각속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타인과 이야기할때는

저 사람이 나의 언어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내가 다른 사람이야기들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언어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 속에서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저사람의 언어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자!

 

언어는 인간의 수 만큼 존재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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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성인

 

4대 성인(聖人)


소크라테스, 예수, 공자, 석가를 4대 성인이라 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글을 남기지 않았다.

후대 사람들이 성인들의 말을 정리하여 하나의 사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묻는 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들은 먼저 들었다.

듣는 것이 먼저다.

참으로 듣고 그다음에 말한다.

그래서 "聖 성인 성"의 부수는 "耳 귀이"다.

듣고 말하기의 왕을 성인이라 하나보다.


오늘도 나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다른 사람이 말할때 조차

내가 할 말을 생각했다.

성인이 되려는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말을 줄이고 듣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자꾸 나에게 말을 건다.

아~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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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느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개별성의 울음과 개별성의 몸이 어째서 나의 칼로 베어 없애야 할 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칼의 노래를 읽었다.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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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 하기 위하여...

자립하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적 욕망을

꿰뚫어볼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줍는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사구시의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자립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립의 조건을 만들며 살아야하지 않을까?

 

나는 아직 함께 사는 법을 몰라

혼자서 잘사는 자립을 꿈꾸는지도 몰라~

 

나는 아직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몰라

다른 이들의 욕망을 따라살고 있는지 몰라~

 

나는 아직 관념속에서 허욱적데며

당당하지 못하고 쭈삣거리는지 몰라~

 

자립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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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조문익과 그의 사람들

사랑하는 조문익과 그의 사람들

 

 

핸드폰에 지우지 못한 번호가 하나 있다. 끝 번호 3362, 이미 다른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문익이 형 전화번호다. 어제는 4주기 추모제가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문익이 형이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평소 사람을 형식적으로 만나지 않았던 문익이 형이기에 나중 사람들도 형을 형식적으로 보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사람들 마음이 모였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있다. 그것은 모인 사람들의 관계는 해가 갈수록 멀어진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활동가들에게 안부를 물어보기가 민망하다. 어떤 분은 내가 “잘~ 지내시죠?”하면 놀리는 줄 아는 모양이다. 오히려 역성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해법은 무엇일까? 조직과 조직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도 마찬가지다. 많은 조직들이 겪는 갈등과 내횽! 그러나 이러한 내횽도 진보의 성장통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4주기 추모식 식순 전단지에 쓰여 있는 글귀가 마음에 남는다.

 

충만한 실천과 열정적인 토론이 물흐르듯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고요하게 내부를 응시하는 영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 고 조문익의 글 중”

3주기 추모제가 끝나고 여러 사람이 뒷풀이를 하면서 내년부터는 좀 밝게하자고 했다. 그리고 4주기 추모제가 끝나고 술을 마시면서 또 한번 의견을 모았다. 내년에는 재미지게 풍물도 치고 그러자고 말이다. 그런데 문익이형 추모제가 무거운 것은 문익이 형이 죽은 날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 무겁기 때문은 아닐까?

 

만남의 광장이 되어버린 문익이 형의 추모식~ 그 추모식이 이제 사람들의 삶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는 그런 추모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당에 사물악기들을 풀어놓고 신나게 굿 한번 같이 치고 놀았으면 좋겠다. 정년퇴직을 하고도 전북을 제2의 고향으로 20년 동안 한국을 48번 방문하신 나카무라 선생님께 슬픈 추모제가 아니라 행복한 추모제를 보여드리고 싶다. 같이 온 지역 동지들과 어깨를 걸고 춤을 춰보고 싶다.

 

행복한 추모제를 위해 1년 동안 나는 뭘 하며 지낼까?

벌써부터 다시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두근 두근~!^^”

행복한 운동, 행복한 추모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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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님 고맙습니다.

김진숙님 고맙습니다.

 

악수한번 얼굴한번 보지 못했지만 

단식을 풀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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