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끄적거림과 잡문

1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2/12
    다른 언어를 대하듯 조심스럽게....(2)
    맑은공기
  2. 2010/02/11
    4대 성인(1)
    맑은공기
  3. 2010/02/09
    자립 하기 위하여...(2)
    맑은공기
  4. 2010/02/07
    사랑하는 조문익과 그의 사람들(5)
    맑은공기
  5. 2010/01/13
    용산아리랑(1)
    맑은공기
  6. 2009/04/19
    이미 2000년 전에...아니 그 이전부터...(1)
    맑은공기
  7. 2009/02/27
    20세기 대통령을 대하는 21세기 시민의 자세
    맑은공기
  8. 2009/01/11
    인간(3)
    맑은공기
  9. 2009/01/01
    2009년 “行福”(행복)합시다. (4)
    맑은공기
  10. 2008/12/20
    문화바우처 관람 후기
    맑은공기

다른 언어를 대하듯 조심스럽게....

언어는 인간의 수 만큼 존재한다.

 

가게에서 회의를 한다.

매출 장부와 현금사이에 1,000원이 모자란다.

이것을 두고 세 명이 각자 설명을 하는데

서로 알아듣지 못한다.

알아듣지 못함으로 짜증이 나고

목소리가 커진다.

 

같은 단어를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언어가 같은건 아닌것 같다.

저마다 서로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것 같다.

아니 이것이 사실일지 모른다.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는 착각속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타인과 이야기할때는

저 사람이 나의 언어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내가 다른 사람이야기들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언어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 속에서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저사람의 언어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자!

 

언어는 인간의 수 만큼 존재하는 것이기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4대 성인

 

4대 성인(聖人)


소크라테스, 예수, 공자, 석가를 4대 성인이라 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글을 남기지 않았다.

후대 사람들이 성인들의 말을 정리하여 하나의 사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묻는 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들은 먼저 들었다.

듣는 것이 먼저다.

참으로 듣고 그다음에 말한다.

그래서 "聖 성인 성"의 부수는 "耳 귀이"다.

듣고 말하기의 왕을 성인이라 하나보다.


오늘도 나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다른 사람이 말할때 조차

내가 할 말을 생각했다.

성인이 되려는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말을 줄이고 듣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자꾸 나에게 말을 건다.

아~ 어쩌란 말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립 하기 위하여...

자립하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적 욕망을

꿰뚫어볼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줍는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사구시의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자립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립의 조건을 만들며 살아야하지 않을까?

 

나는 아직 함께 사는 법을 몰라

혼자서 잘사는 자립을 꿈꾸는지도 몰라~

 

나는 아직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몰라

다른 이들의 욕망을 따라살고 있는지 몰라~

 

나는 아직 관념속에서 허욱적데며

당당하지 못하고 쭈삣거리는지 몰라~

 

자립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랑하는 조문익과 그의 사람들

사랑하는 조문익과 그의 사람들

 

 

핸드폰에 지우지 못한 번호가 하나 있다. 끝 번호 3362, 이미 다른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문익이 형 전화번호다. 어제는 4주기 추모제가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문익이 형이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평소 사람을 형식적으로 만나지 않았던 문익이 형이기에 나중 사람들도 형을 형식적으로 보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사람들 마음이 모였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있다. 그것은 모인 사람들의 관계는 해가 갈수록 멀어진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활동가들에게 안부를 물어보기가 민망하다. 어떤 분은 내가 “잘~ 지내시죠?”하면 놀리는 줄 아는 모양이다. 오히려 역성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해법은 무엇일까? 조직과 조직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도 마찬가지다. 많은 조직들이 겪는 갈등과 내횽! 그러나 이러한 내횽도 진보의 성장통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4주기 추모식 식순 전단지에 쓰여 있는 글귀가 마음에 남는다.

 

충만한 실천과 열정적인 토론이 물흐르듯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고요하게 내부를 응시하는 영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 고 조문익의 글 중”

3주기 추모제가 끝나고 여러 사람이 뒷풀이를 하면서 내년부터는 좀 밝게하자고 했다. 그리고 4주기 추모제가 끝나고 술을 마시면서 또 한번 의견을 모았다. 내년에는 재미지게 풍물도 치고 그러자고 말이다. 그런데 문익이형 추모제가 무거운 것은 문익이 형이 죽은 날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 무겁기 때문은 아닐까?

 

만남의 광장이 되어버린 문익이 형의 추모식~ 그 추모식이 이제 사람들의 삶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는 그런 추모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당에 사물악기들을 풀어놓고 신나게 굿 한번 같이 치고 놀았으면 좋겠다. 정년퇴직을 하고도 전북을 제2의 고향으로 20년 동안 한국을 48번 방문하신 나카무라 선생님께 슬픈 추모제가 아니라 행복한 추모제를 보여드리고 싶다. 같이 온 지역 동지들과 어깨를 걸고 춤을 춰보고 싶다.

 

행복한 추모제를 위해 1년 동안 나는 뭘 하며 지낼까?

벌써부터 다시 만날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두근 두근~!^^”

행복한 운동, 행복한 추모제를 위하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용산아리랑

 용산아리랑


아리고 쓰리다고 아리랑이라고 했던가?

아리고 쓰리지 않고서는 넘을 수 없는 고개

용산아리랑이 한고개를 넘었다.


아리고 쓰리지만 넘어야 하는 고개

운명처럼 받아들려야 하는

아리랑 고개를 눈물로 넘었다.


애비를 죽인 살인자로,

옥상에서 떨어진 후유증을 진통제로 버티던

이상림 열사의 막내아들은 아리랑 고개를 넘어

까막소로 들어갔고


혼신의 힘으로 철거민과 함께하던

수배자들은 끝내 그 한고개도 함께 넘지못하고

명동성당에서 눈물을 흘렸다.


아리고 쓰리다고 아리랑이라고,

몇 고개를 더 넘어야 할지 모를 절망의 시간에

"아리랑 응 응 응 아라리가 났네"며

어깨를 들썩이는 아린 긍정의 시간을 향해 고개를 넘는다.

다섯 열사가 355일 먼길을 돌아 넘는 그 고개를

눈물로, 사랑으로 사람들이 함께 넘는다.


"아리랑 아리랑

용산 아리랑

남일당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고 발병난다."


아리고 쓰리다고 아리랑이라고 했던가?

기어이 넘어야 하는 고개를 이제 한 고개 넘었다.

 

*1월 10일 눈내리던 일요일 새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미 2000년 전에...아니 그 이전부터...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자는 이미 2000년 전에

"사적소유"와 "종교"가

폭력과 불안 그리고 공포의 세상을 만들것을 이야기 했다.

이미 2000년 전에....

 

지금도 계속되는 국제적 분쟁 대부분이

사적소유 확장과 종교 분쟁임을 본다면

역사는 폭력과 불안...공포의 확장임에 틀림없다.

 

맑스가 지금까지의 철학자는 세상을 해석해 왔는데

중요한 건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라고 말을 했다는데

아마 그것은 정원에 소요하는 에피쿠로스를 향한

외침이었는지 모른다.

 

맑스는 에피쿠로스의 말을 보편적 진리로 만들기 위해

정세를 분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맑스의 분석은 역사적 분석이기에

2000년을 관통하는 분석이어야 하지 않은가?

 

이미 2000년전에 사적소유와 종교로 타락한 세상에 환멸을 느낀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정원에서 감각의 기쁨을 즐기며 소요하며 살았다.

 

이런 젠장~~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세기 대통령을 대하는 21세기 시민의 자세

20세기 대통령을 대하는 21세기 시민의 자세

 

 

인터넷의 쌍방향 소통에 익숙한 21세기 시민은 20세기식 일방향 소통에 익숙한 대통령에게 화가 났습니다. 대통령이 20세기에나 있을 법한 담화문 정도로 국민들에게 일방적인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려 하니 21세기 시민들은 당황스럽고 황당할 뿐입니다.

 

지금도 상업적이고 친국가적인 방송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기업과 국가권력 아래로 미디어를 통제하겠다는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발상은 개그콘서트이 복학생을 생각나게 합니다.

 

21세기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은 다원성, 창발성, 자율성이 중요한 덕목인데 이를 역행하는 일제고사는 20세기식 교련의 부활일뿐입니다.

 

법과 질서가 필요한 건 금융사기와 부동산 투기 그리고 요즘은 환율로 차익을 챙기는 돈이 남아돌아 어디에 써야 할이지 모르는 소수의 부유층이지 가계부채로 쫄딱 망하게 생긴 서민들이 아닙니다. 빚내서 가게 열었는데 재개발로 쫓겨 나야하는 철거민이 아닙니다.

 

21세기 시민은 대통령이 동시대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이 잃어버린 10년을 운운하며 스스로 20세기로 회귀해버리고 말았으니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그러나 21세기 시민은 이미 20세기의 역사를 간직한 사람이기에 20세기 대통령을 21세기로 인도합니다. 21세기 시민들은 20세기 인류 역사의 아픔을 알기에 21세기 시민답게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21세기 시민들은 다음과 같이 행동합니다.

 

○아이들의 창발성, 자율성, 다원성을 훼손하는 일제고사 대신 현장학습을 통한 전인교육을 지지하며 적극 동참합니다.

 

○20세기 신문으로 21세기 시민들을 우롱하는 조선,동아,중앙일보와 같은 구(久)문은 보지 않으며 편파, 왜곡이 없는 21세기 신문을 구독합니다.

 

○전쟁의 세기 20세기로 회귀하며 한반도에 분쟁을 조장하는 모든 군사적 행동에 반대하며 평화를 위한 적극적 평화 행동을 지지하며 이와 함께 합니다.

 

○이윤에 눈이 멀어 광우병 위험 미국산 소고기를 판매하는 대형 할인 매장를 가지 않으며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윤리적 소비를 지향합니다.

 

○모두가 함께 사는 대한민국을 기원하며 사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21세기 시민행동을 지지하며 적극적으로 함께 합니다.

 

○21세기 시민들은 자율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서로 협력합니다. 21세기 시민들은 적극적인 의사표현과 쌍방향 소통을 통해 다중의 지성으로 세계금융위기가 서민의 고통이 되지 않도록 하며 평화와 행복의 21세기를 살아갑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인간

 人間


사람‘인’과 사이‘간’이 모여 인간이 되었다.

인간 즉, 사람 사이

사람은 사이의 존재다.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이 그 자체다.


사이는 매개고 긴장이고 경계다.

현재가 과거와 미래의 매개고 긴장이고 경계이듯

인간의 삶은 어떤 것의 매개고 긴장이고 경계다.


그러므로 극단은 인간의 어떤 특수한 형태이다.

중심을 위해 극단은 꼭 필요한가?

이것은 나에게 아직 버거운 질문이다.


나는 어떤 것들의 사이에 있는가?

그것이 내가 물어야 질문이다.


국가주의와 무정부주의,

본질과 비본질,

목적론과 비목적론,

객관주의와 상대주의 등등...

 

*철학은 변화속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의 경계선 긋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년 “行福”(행복)합시다.

2009년 “行福”(행복)합시다.


行福(행복)없는 幸福(행복)없습니다.

모두 行福(행복)합시다~


흔히 행복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뽑습니다. 돈, 명예, 권력 등 모든 수단도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지 행복 그 자체는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幸福(행복)은 복된 좋은 운수 혹은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런 행복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요?


문득 행복의 幸(행)자가 행할 行(행)자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어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行福(행복)이라는 것이 있더군요. 삼복의 하나로 스스로 불도를 닦으면서 다른 사람을 이끌어 불도를 믿게 하여 얻은 복이랍니다. 복을 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고 행하면서 만든다는 것이지요!


거꾸로 이야기 하자면 불행은 복을 행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복을 행하지 않음으로 불행하다는 것이지요! 어떤 조건에서든 복을 짓고 행하는 것이 바로 행복의 원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복을 핑계로 어거지로 폭력으로 무언가를 강요하게 되는 것은 일을 행할 때 언제나 살펴야할 가장 경계해야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다 같이 복을 짓고 나누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생각하며 모두의 行福을 기원해 봅니다.


모두 행복합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문화바우처 관람 후기

문화바우처! 

아이들에게 감동과 자신감을 선물하다.


*이 글은 문화바우처 후기 공모에 출품한 글입니다. 마감날 함께 일하시는 선생님께서 강권하기도 하고 이런 공모전에 글을 써본적이 없어 재미삼아 한번 써봤습니다. 상은 아차상을 받았습니다. 상금 십만원~ 적은 돈이 아닙니다. 


“오늘은 뮤지컬-점프를 보러 갈 거야!”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뮤지컬이 뭐 예요?”, “점프가 뭐 예요?” 질문을 쏟아냅니다. 어떤 아이들은 지금까지 극장 한번 가보지 못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는 말이 있듯 문화도 해본 사람이 즐길 줄 압니다.


아이들은 정신을 쏙 빼놓는 재미난 공연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집중을 잘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지루할라 치면 공연장을 뛰어다니는가 하면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공연 시작 전 어두워지는 조명이 무서워 선생님을 애타게 부르기도 합니다. 생소한 문화예술 공연에 적응을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보면 참 관람 예의가 없다며 혀를 차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처음 경험하는 문화적 충격에 대한 아이들 나름대로의 저항인 것입니다.


문화 바우처를 이용하여 영화 “도라이 몽”을 보러가게 되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진영이는 초등학교 2학년입니다. 그날은 진영이 어머니도 저희와 함께 극장엘 갔습니다. 진영이는 물론 진영이 어머니도 극장이 처음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여기 저기 자리를 옮겨 다니며 속닥속닥 거리며 영화를 봅니다. 몇 번을 “조용히 해라!”, “가만히 좀 있어라!” 주의를 줘봐야 잠깐입니다. 신이 나서 돌아다니는 아이들에게 “너희 영화가 재미없나 보구나! 다음엔 안 올까?”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안돼요! 선생님 또 와요!” 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들은 너무나 신이 나는 모양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사람들 사는 모습이 모두 그만 그만해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하루 종일 산으로 강으로 놀러 다니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반에서 겨우 한 둘이 영화를 보고 오거나 대도시에서 새로운 걸 경험하고 오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고 그 아이는 몇 날이고 그 이야기를 해주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이 같은 공동체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들에게는 문화적 소외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다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극장조차 가보지 못한 아이들은 보편적인 모습이 아니라 이제는 특수한 상황입니다. 컴퓨터가 없어 정보와 게임에 소외되고 문화예술에 소외되어 알게 모르게 벽이 생깁니다. 유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미난 뮤지컬이나 만화 영화 같은 경우 소문이 나면 금방 퍼집니다. 본 아이들과 보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가본 아이들과 가보지 못한 아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깁니다.


차상위 계층으로 자활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저는 사회적 일자리형인 방과 후 공부방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55명의 아이들이 다니는 방과 후 공부방은 주로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등 빈곤 계층 아이들이 많습니다. 문화바우처를 이용한 문화공연예술 체험은 문화예술에 소외된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되고 감동이 되고 자신감이 됩니다. 저도 뮤지컬은 문화바우처를 이용하여 처음 경험해 보았습니다.


어린이 난타와 점프 등을 보면서 어른인 저도 공연에서 보여주는 창의적 상상력에 놀랄 정도니 아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저를 포함한 선생님들과 공부방 아이들은 문화바우처를 통해 문화예술과 공연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아이들은 빈곤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문화예술 공연 체험을 통해 자기의 꿈과 희망을 키워가기도 합니다.


12월 문화바우처 영화 관람이라고 쓰여 있는 칠판에 아이들이 무슨 영화를 보냐며 묻지만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기다려지나 봅니다.


아이들이 극장에서 조금 떠들고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무서우면 눈을 가리고 재밌으면 신나게 웃고 신기하면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니 조금씩 낯설었던 문화예술 공연에 익숙해져 가는가 봅니다. 이제는 나름대로 보는 눈이 생겨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뮤지컬도 난타도 영화 관람과 연극 공연도 아이들에게는 생소하지만 몇 번 공연 예술을 경험한 것에 힘을 얻어 올해는 공부방 아이들과 작은 연극을 준비하여 공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학교 학예발표회에서 리허설을 하던 날 까불까불하던 1학년 여자아이가 같은 반 아이들 앞에서 연극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사를 잃어버렸습니다. 리허설 전에는 공연을 장난처럼 여기던 아이들이 리어설이 조금 잘못 되고나니 눈이 빛납니다. 서로 충고 하며 도와가며 집중도 잘합니다. 공연을 보고 배우는 것을 넘어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공연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간접적인 무대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아이들을 지도하는 나에게도 문화바우처의 여러 문화예술 공연은 이렇듯 새로운 자극이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1학년 아이들은 본 공연 때 연극을 잘하여 지역 사회복지 단체가 주관하는 가족 송년회에서도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화공연을 받기만 하다가 직접 공연을 통해 주는 역할로 뿌듯해 하는 아이들을 보니 저절로 힘이 납니다.

이제 문화바우처는 우리의 친근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여건 상 문화공연예술을 쉽게 접근하지 못 하는데 문화바우처가 있어 아이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문화바우처를 기획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다양하고 재미난 공연 기회를 부탁드립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