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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혹은, 짐승같은 사회

오늘 마음에 딱 드는 한겨레 칼럼!



오정희 소설에 만추의 초저녁 스산함에 대한 절절한 묘사가 있다. 11월의 저녁 7시와 한여름의 저녁 7시는 다르다. 11월 그 시간의 어둠과 푸른 추위는, 누구나 외로움에 굴복하게 만들고 희미하더라도 따뜻한 빛과 체온을 찾게 한다. 이 계절, 그 시간에 외딴 비닐하우스에 혼자 살던 9살 소년이 기르던 굶주린 개에 물려 사망했다. 나는 그 소년이 겪었을 숨의 끊김과 이어짐의 공포를 경험하는 것이 무서워서, 그의 추모 사이트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 글을 쓴다. 뉴스를 접한 날 영화 <오로라 공주>를 보았다. 6살 소녀가 성폭행 당하고 살해된 이야기.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남자 어린이는 짐승에 죽고 여자 어린이는 짐승 같은 놈에게 죽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든 예술에 재현된 현실에서든, 인간의 불행은 근원적으로 ‘가족(제도) 때문’이다. 부/모가 ‘없는’ 이들을 포함해, 부모로부터 계급이 결정되고 삶의 상처를 다루는 자아의 원형이 형성된다. 대부분의 인간 고통이, 양육을 가족만의 책임으로 보는 사회의 시선 때문에 발생한다는 얘기다. 어떤 면에서 인류의 ‘주요 모순’은 계급도 성차별 제도도 아니고, 나를 포함하여, 아무나 아이를 낳는 것이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부모의 역할과 책임을 공식적으로 반복해서 가르쳐야 하고, ‘부모 자격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에게만 아이를 기르게 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비극은 개별 가정이나 부모 탓이 아니다. 출산과 양육은 누구나 저절로 수행할 수 있는 생물학적 당연이 아니라 심각한 사회적 행위이고 선택이다. 국가와 지역 사회가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 생명의 영속을 위해서다. 생존 때문에 어린이를 돌볼 수 없는 저소득층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국민 국가 지속을 위해, 고령화 사회 대책으로…, ‘저출산을 막자’는 목소리가 솔직히 가증스럽다. 저출산은 문제의 결과일 뿐이다. 지금 사람(여성)들은 가난, 경쟁사회, 위험, 보살핌 노동에 대한 비하 등 수많은 이유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 노동시장에서 통용되는 가장 모욕적인 말 중 하나는, “집에 가서 애나 봐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3살 이상 아동을 위한 보육기관에 대한 지원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1%(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의 4분의 1). 한국은 돌봄 노동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리는 ‘사회’다. 아니, ‘정글’이다. 2005년 통계청 자료는 여성의 ‘공식’ 취업률만 해도 49.8%인데, 맞벌이 가구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하루 평균 32분(맞벌이 주부는 3시간 28분)으로, 맞벌이가 아닌 가구 남성의 31분보다 “1분 많다”고 보고한다. <여성신문>이 20~40대 남녀를 대상으로 한 출산 기피 이유 조사에서, 32%는 ‘육아를 전적으로 여성의 책임으로 떠넘기기 때문’이라서, 27%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서’라고 답했다.

많은 여성들이 어린이, 환자, 노인, 장애인을 돌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회는 여성을 ‘의존적인 존재’라고 한다. 여성은 보살핌을 받아서 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보살핌 노동을 하기 때문에 ‘의존적’이다. 여성의 보살핌 노동 대가가 경제적 의존과 빈곤인 셈이다. 누가 누구에게 의존하고 있단 말인가? 한국사회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돌봄’에 의탁하여 살아가고 있다. 발상 자체를 전환하지 않으면, 개에 끌려 다니다 죽은 아이의 고통은 되풀이 될 것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사족>>그래서 나는 아이를 키우는게 무섭고, 너무 힘에 부친다..ㅡㅡ;;

아무래도 '부모자격 시험'을 보지 않고 그렇게 해서 인가보다..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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