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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늉한 여성주의자 과외제자와 못난 과외선생

도곡동에 사는 중 2 학생 과외를 한다.

아침 10시-1시반 영어학원 , 2-4시 나와의 과외, 5-8시 수학학원, 새벽 3시까지 숙제.

 

이런 평일의 사이클과 논술학원과 해금수업 등으로 주말을 보내는 아이이다.

 

이 아이의 생활패턴을 보면 숨이 막힌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학원에 치여사는 게 안쓰러워서

가끔 따로 불러내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이런 저런  수업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도 해주고 그러게 된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여성주의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 아이는 너무나도 훌륭한 반응들을 쏟아낸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분노하면서,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성경을 제대로 해석한 목사들이라면 동성애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예수님이 지금 살아계신다면 아마 동성애자를 인정하셨을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쏟아내더니 약간 머뭇거리며 고민하다가

"그런데요 , 선생님.  저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아직까진 남자밖에 좋아한 적이 없어서 굳이 따지자면 이성애자인것같은데요... 제가 동성애자를 '인정'한다고 말하는 게 조금 웃긴 것 같아요..."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속으로 감탄하면서, "왜 그게 왜 웃긴 것 같아요?"라고 묻자 ,

"음...그러니깐 ... 잘은 모르겠는데 .... 제가 그 사람들을 인정한다고 말하는 게, 왠지 그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고.. 암튼 좀 웃겨요. 제가 뭔데 그 사람들을 인정해요. "

라고 떠듬떠듬 말하는 것이었다.

매끄러운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 이 아이는 '동성애자를 인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 권력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한 것이리라. '타자화'라는 어려운 말따위 들어본 적도 없지만, 정말 이 아이의 내부에서 그런 것에 대한 경계심이 있었던 것일테지. (라고 나는 해석했음)

 

*그리고  아무래도 강남에서 태어나서 자라다보니 주위에 이명박 지지자밖에 없어서인지 내가 대선에 대해서 물었을 때 명박씨를 지지한다고 말해서 날 놀라게 만들더니,

이명박의 공약이 왜 문제적인지를 조곤조곤 논의한 후엔, 한숨을 푹푹 쉬며 "저는 정말 투표권이 생겨도 찍을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한탄하며 이명박을 욕하기 시작하더니.

다음주에 태안에 내려가서 봉사를 한다면서 "이명박이 진짜로 계속 저러면,  내년엔 운하에 가서 돌파야 되는 거 아닌 지 모르겠어요 -_- 아 정말 이 나라에 못살겠어요"라고 너무나도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바람에 날 대폭소하게 만들었다. 물론 씁쓸했지만.

 

 

그러던 오늘!

 

다음 주 스케줄을 정하고나서, 수첩을 꺼내서 일정을 적는 날 보더니 "샘~ 그 수첩 뭐예요?"라고 하길래,

속으로 흠칫 놀랐다.

작년에 있었던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치유 워크북 이었는데, 하필 내가 펼치고 있는 장이 '섹스 속으로' 여서 -0-;;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아무리 똑똑한 아이라고 해도 엄마한테 나에 대해서 이상하게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식은땀이 났다.

애써 진정하고,  한국성폭력상담소라는 여성단체가 있는데~ 어쩌구 저쩌구 하며 서론을 시작하는데 갑자기 이 학생이 "샘 잠시만요! 저도 그런 수첩 있어요!" 라고 하더니 책상 서랍에서 뭘 끄내왔다.

 

십대,길을 떠나다 라는 수첩이었고,  늘푸른 여성지원센터에서 만든 10대 쏘녀들을 위한 것이었다.

슬쩍 살펴보니  '으랏차차 쏘녀 가이드'를 비롯해서 내가 작년에 함께 했던 10대 쏘녀들과 함께 했던 프로젝트에 관련된 내용들도 많이 나와있고,

한국 성폭력상담소와 아하!청소녀센터 등 나와 관련있는 단체들과 심지어 아는 활동가의 이름까지!

게다가 내가 요즘 조금씩 빠져들어가고 있는 스윙시스터즈까지!

- _-; 내가 관계되어 있는 여성주의와 관련된 많은 정보들이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왠지 신기하고 괜시리 민망한 기분이랄까.

 

이 수첩을 어디서 났냐고 묻자, 작년까지 학교에 있었던 양호 선생님이 주신 건데 자기는 여기에 있는 말들이 너무 좋아서 항상 혼자서 꺼내본다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 꼬마 여성주의자 아가씨가 혼자서 이런 글귀들을 보면서 자가 치유를 하고 있을 동안,

나는 사실 과외 짤릴까봐 적극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못해주고, 쉬는 시간 짬을 내서 잠깐 잠깐 하는 이야기들의 수위를 조절하며 (예를 들면 총여학생회 활동한다는 이야기는 쏙 빼고, 그냥 학교 여성학 수업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말이야~ 라며 이야기를 해준다던지) 살아왔는데..

이 아이는 더 많은 정보와 소통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라, 오늘 수업은 땡치자. 나중에 보충해줄게 - 라는 심산으로.

오늘은 내가 어떻게 여성주의자가 되었는지, 지금 어떤 활동을 하고 있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작년에 했던 10대 쏘녀들과의 '다른몸되기 프로젝트' 이야기도 제대로 해주었다. 그 전에도 사실 몇 번 했었는데 정확하게 이야기는 안 해주고,  '내가 어쩌다가 알게 된 10대 여학생이 학교 체육시간에 여학생체육권을 주장하다가 교장실까지 갔다더라 신기하지' 뭐 이런 식으로 사례들만 잠깐 잠깐 이야기해줬었는데 오늘은 맘껏 이야기 한 것. ㅎㅎ

 

그리고 사실 이 과외를 소개시켜준 언니도 여성주의를 통해서 만나게 된 언니인데 , 어떻게 그 언니를 알게 되었냐는 질문에 초반에 괜히 여성주의자라고 말했다가 엄마 귀에 들어가서 짤릴까봐(-_-;) 그냥 친구의 친구의 언니라고 말했었던 기억도 떠올라 왠지 민망해졌다는; ㅅ;

 

암튼 내가 한 가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엄청난 반응을 보이며 꺄악거리는 이 학생을 보며 왠지 뭉클해졌다는.. 빨리 그 끔찍한 생활에서 벗어나서 함께하자꾸나- 뭐 이런 마음.

 

오늘 수업 끝내고 나가면서 문을 닫는데 갑자기  이 아이가 부끄러워하면서 '선생님,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생뚱맞았지만, 이 아이가 무슨 마음이었는 지 알 것같아서 왠지 마음이 왈랑절랑했다.

 

그런데 사실 내가 더 감사한 걸...

오늘 들었던 말 중에 가장 감동이었던 것은, 학교 수행평가가 '도덕책 새로 만들기'였는데 , 내가 저번에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말했던 것이 생각나서 동성애에 관한 내용을 넣었단다. 정말로 세상이 평화롭고 도덕적이고 싶다면 이런 차별들부터 없애야한다고 썼다나.

아아,

내가 과외 짤릴까봐 전전긍긍대며 여성주의자인 거 숨기면서 '여성학 교양시간에 들었는데 말이야-'라고 했던 말들 다 기억하고 그리고 받아들이고 또 실천까지 해줘서 정말이지 고마워.

 

아아.

고마워. 힝. 눈물 핑글. 이런 소심쟁이에다가 못난 페미과외샘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ㅠㅠ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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