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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9/05
    앤지 젤터와 이석기(3)
    무화과

앤지 젤터와 이석기

(페북에 쓴 글 옮겨 놓기)

 

나는 10년 전쯤 국회 국방위원장실에 들어간 적이 있다. 당시 학생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고, 내가 속한 그룹은 병역거부운동을 열심히 할 때였다. 함께 학생운동을 하는 몇몇과 국방위원장실을 점거(라고 하기엔 너무 짧지만)하고 유인물을 뿌리고 플랭카드를 걸다가 잡혀나왔다.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끌려나가는데, 당시 국방위원장인 장영달의원이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대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하다 나왔다. 나는 창피하게도 장영달이 국방위원장인지도 몰랐고, 사실 어떤 사람인지 몰랐고, 그냥 민주당 의원인 것만 알았다. 그 장영달이 대체복무 법안을 발의한 의원이라는 것도 몰랐다. 장영달 의원이 하는 모든 말에 대해 '정치인들은 늘 그렇게 말하고 지키지 않는다'며 적대만 드러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창피하고 쪽팔리다. 장영달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국방위원장실까지 처들어 와서 병역거부권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구만!'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가까운 영등포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우리는 입을 맞춰놨었다. 어떤 모르는 사람이 와서 이런 걸 해 보자고 해서 온 거라고. 우리는 사회 운동에 관심도 없는 평범한 학생이라고 진술했다. 그냥 병역거부자들이 감옥 가는 게 안돼 보여서 측은한 마음에 한 행동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앞뒤도 안 맞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경찰들은 뻔히 보이는 우리의 거짓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비웃었을까. 당시 나는 단과대 학생회장이었는데, 조사받는 중 경찰이 그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그냥 학교에서 체육대회하고 교수님과 식사하고 그런 일을 주로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이 기억이 아직까지도 부끄럽다. 내가 내 생각을 가지고, 신념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한 행동을 부정하는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다. 스스로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행동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얼마 전 짧은 영상기록을 한 편 봤다. 어느 혁명가와 그 동료들이 벌인 직접행동에 대한 영상이었다. 그 혁명가는 우리도 알고 있는, 강정마을에서 연행되어 경찰 조사를 받으며 "내 이름은 구럼비. 나는 세계시민"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던 그 앤지 젤터다. 앤지 젤터가 동료들과 함께 인도네시아로 수출할 계획이던 호크기를 망치로 때려 부순다. 영상은 그 과정을 기록하고 있었다. 엔지와 동료들이 직접행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트레이닝을 하는 것도 인상 깊었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호크기를 부수고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있었다는 것이다. 연행되어서 재판을 받는 와중에도 자기들이 무슨 행동을 왜, 어떻게 했는지를 떳떳하게 밝혔다. 결국 앤지와 동료들은 무죄선고를 받았다. 더 큰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재판부가 판단한 것이다. 물론 재판부가 대한민국 재판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직접행동 과정이 철저하게 비폭력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방식의 운동은 좋은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거나, 내가 한 행동을 부인해야 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거다. 이건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행동을 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내 행동은 때로는 합법일 수 있고 때로는 불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행동은 늘 스스로에게 떳떳해야 하며,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직접행동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건 지배세력들로부터 국가권력을 빼앗아 오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석기 의원을 보면서 앤지 젤터 생각을 했다. 국정원이 공개한 녹취록에 대한 이석기 의원의 기자회견에 대해서 크게 실망했다. 만약 국정원이 공개한 녹취록이 왜곡이 심하다면 이석기 의원은 조목조목 반박해주면 좋겠다. 만약 녹취록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면 떳떳해지면 좋겠다. 확신이 있는 행동이라면 떳떳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망치로 전투기를 때려 부수도고 떳떳했던 앤지 젤터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옳은 거 같은데, 사람들이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거 같고 사람들을 설득할 자신도 없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혁명가라면, 사회운동가라면 말이다. 떳떳하게 사람들을 설득하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방식도 아니라면 그런 방식으로는 정권이 바뀌고 국가가 바뀔 수는 있을지 몰라도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어쩌면 이석기 의원 개인이나 그가 속한 그룹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니라 한국 진보 운동이 고민해야할 문제다. 물론 진보 운동 안에서 이석기처럼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방식으로 운동을 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있는 게 아닐까? 당장 집회 때 연행 되어서도 자기가 왜 이 집회에 나왔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떳떳하게 이야기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벌금을 덜 받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벌금을 덜 받는 거는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지만 그건 법정투쟁을 통해서 떳떳하고 당당한 과정으로 해야 할 일이지 거짓말을 해서 피해갈 일이 아니다. 국가 권력이 너무 비정상적이어서 활동가들을 보호해야 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의견은 우리가 사회 운동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헷갈리는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게 그저 권력자의 교체라면 지금 권력자에게 타격을 주는 방식들 모두가 효과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게 민주주의 그 자체라면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지하로 숨고 정체를 가리면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식과 내 생각을 적극 드러내고 행동하면서 내 생각에 동의하는 시민들이 스스로 나를 지켜주도록 하는 방식 가운데 어느 것이 사회 전체 민주주의의 성장에 도움이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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