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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24
    노조 창립과 단협1
    무화과
  2. 2013/05/17
    노동조합을 만들다1-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계기(4)
    무화과

노조 창립과 단협1

 

2010년 7월 27일 언론노동조합 보리출판사 분회 창립총회를 했다. 보통 창립총회를 하고 나서 외부 손님들을 초대해서 축하받는 자리를 따로 만드는 거 같은데, 우리는 한꺼번에 진행했다. 언론노조, 창비, 작은책, 출판노협 들에서 축하를 하러 와 주었다. 덕분에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손님들한테 많이 보여줬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들이 터져나왔을 때, 그걸 판단하기 위한 준거가 회칙이 될텐데, 아직 의결하지 않은 회칙이 유효한지 같은, 그야말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문제들이 터져나온 거다. 우왕좌왕하긴 했어도,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논의를 해서 잘 처리해 넘겼다. 대부분이 노동조합 결성을 반기는 분위기였기때문에 잘 풀어갈 수 있었지, 만약 나쁜 마음을 가지고 노동조합을 방해하려는 사람이 한 명만 있었어도 총회가 파행으로 치달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창립총회는 회칙 인준, 집행부 선거, 공연(초대 가수와 조합원들 공연), 축하인사 들로 이루어졌다. 당시는 아직 단협을 맺기 전이라 오픈샵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수습사원과 계약직 직원을 제외한 모든 평직원이 가입했다. 간부급(부장 이상) 이상에서는 경영지원실장만 가입서를 냈고, 노동조합을 만드는 동안 계속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부장과 실장들은 가입하지 않았다. 간부급들은 나중에 단협에서 유니온샵 규정이 통과되면서 자동으로 가입이 되었고, 계약직 직원은 역시 단협에서 노조와 회사가 조합원 범위를 합의하면서 가입하게 되었다.

 

총회를 준비하면서 작가들에게 노동조합 창립축하 메세지를 받았다. 보리와 작업을 하는 작가들 뿐만 아니라, 보리와 책을 낸 적은 없어도 조합원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작가들에게도 연대 메세지를 받았다. 박노자, 이계삼, 서정오, 하민석, 김수박, 김성희, 박건웅, 서선미 같은 작가들이 창립축하 메세지를 보내주었다. 이거는 참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의 방패막이가 되어달라는 요청이나 마찬가지였다. 막 출범하는 노동조합이 무슨 힘이 있겠나. 작가들이 공개적으로 지지해주면 회사 밖으로도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혹시나 불안해하는 조합원이 있다면 그 마음을 다잡아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밝힌 작가들도 있었다. 작가들 역시 생활인이기 때문에 그 판단을 존중해주자고 노조 준비위에서 이야기가 되었다. 

 

보리출판사 분회를 만든 뒤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단협 준비였다. 단협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조언을 들었다. 그 가운데 오마이뉴스 노조 지부장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보리와 비슷한 규모(10명은 넘고 100명은 안 되는)에다가 회사가 나름의 진보성을 표방하는 곳이어서 들을만한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다. 당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고, 단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지금은 딱 한마디 밖에 기억이 안난다. 막상 단협이 시작되면 회사의 바닥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말... 그 말은 150% 진짜였다. 

 

본격으로 단협 준비를 시작한 것은 10월로 기억한다. 우리는 신생노조여서 단협을 하기 위해 단체협약 초안부터 만들어야 했다. 조합원들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보리 노조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단협을 맺는데 무엇을 중점적으로 맺는 게 좋을지 등을 물었다. 많은 의견이 모였다. 외박을 해야 하는 회사 의무 교육에 대한 문제제기,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인사 발령, 그리고 수습사원에 대한 처우 같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조합원들 의견을 바탕으로 단체협약 초안을 만들어야 했다. 음으로 양으로 다른 출판사 노동조합들의 단체협약을 다 모으고, 언론노조에서 단체협약사례집도 받았다. MBC나 한겨레처럼 언론노조 안에서 노동조합이 활발한 곳들 단체협약과, 언론노조에서 만든 모범 단체협약, 다른 출판사의 단체협약들을 살피면서 가장 좋은 것들을 추리되, 보리의 실정에 맞게 수정하기로 했다. 어차피 단협 자리에서 합의를 하면서 양보를 해야할 것이기에 일단은 최선의 안을 만들자고 했다. 

 

대의원들이 수차례 회의와 토론을 하면서 단협 초안을 만들었다. 이때는 참 즐거웠던 거 같다. 우리가 노력하기에 따라 이 회사가 더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말에 따로 시간을 내 대의원들이 모였는데도, 모두들 싫은 기색이 없었다. 단체협약 초안을 만들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노동조합이 회사의 경영권과 인사권을 견제하는 부분이었다. 복지와 관련된 것들은 지금도 과히 나쁜 수준이 아니기때문에 회사에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구병 대표이사가 거의 회사 결정의 전권을 휘두르고, 주주들이나 이사들이 윤구병 대표이사를 견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대표이사의 막강한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인사권 같은 경우는 조합원들이 바로 직접적인 피해를 볼 수 있는 사안이라서 더더욱 신경을 쓰고 우리 힘을 이곳에 집중시키자고 했다. 실제로 우리가 들어오기 직전에 보리 직원들이 회사를 단체로 나갈 때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도 대표이사의 인사발령이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인사권 견제는 이상적인 선언이라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자는 현실적인 측면이 더 컸다. 

 

단협 초안을 완성하고회사에 단협을 시작하자고 공문을 보냈다. 2010년 12(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남)에 보리출판사 노사가 첫 모임을 가졌다단협은 예상 외로 길어졌다우리는 사실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윤구병 대표이사가 진보인사로 이름난 자기 명예 때문에라도 밖에다 자랑할 수 있는 단협을 맺어줄 거라고그리고 노조가 생기고 처음 하는 임금협상인데다 작년에 한 푼도 임금이 오르지 않았으니 이번 임금협상은 크게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우리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단협에 들어가면 회사의 바닥을 볼 수 있을 거라던 오마이뉴스 지부장의 이야기가 딱 맞았다.

 

2011년 1월 12일에 첫 단협을 해서, 5월 13일까지 10차에 걸쳐 단협을 했지만끝내 결렬되어 지방노동위원회 중재까지 가게 되었다그 과정을 간단하게 복기해보고자 한다.

 

사실 단협 처음부터 갈등이 심했던 것은 아니다노사가 의견이 다른 부분도 있었고목소리를 높여 싸우기도 했지만,서로 양보하면서 절충안을 찾아가고 있었다복지나혹은 세세한 부분들은 거의 이견이 없거나한두 번 토론으로 합의점을 찾았다주로 의견이 충돌했던 부분은 역시나 우리가 가장 중점적으로 준비한 부분바로 인사권과 경영권에 대한 조항들이었다그동안 합리적이지 않은 인사발령이 많았기 때문에노동조합에서는 노동조합이 최소한 징계성 인사발령이라도 막을 수 있게 단협에 넣으려고 했다문구 하나하나를 가지고 여러 차례 토론을 했다. ‘모든 인사발령으로 할지 징계성 인사발령으로 할지노동조합과 합의해야한다로 할지, ‘협의해야한다로 할지징계와 해고에 대해서도 날선 토론이 이어졌다회사는 조금이라도 해고의 여지를 두려고 하고노동조합은 해고의 여지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했다징계에 있어서도 징계를 내릴 수 있는 사안을 엄격하게 제안하고징계의 절차도 까다롭게 하려는 노동조합과 사유나 절차 모두 좀 열어두려는 사측이 끊임없이 대립했다인사권만큼은 아니지만경영권에 대한 부분도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졌다우리는 회사의 정보를 노동조합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려고 했고회사는 기밀이라면서 그것을 차단하려고 했다결국 관련 법령을 보여주고 나서야 우리 뜻대로 조항을 삽입할 수 있었다또 회의 구조가 투명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투명하게 하려고 한 부분에서도 노사가 대립했다.

 

아무튼 단체협약을 만드는 일은 10차에 걸친 단협 가운데 5차 만에 모두 끝났다차수로는 5차지만 4차 단협이 사측의 불참으로 결렬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네 차례에 걸쳐서 단협을 맺은 것이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노동조합 입장에서는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 

 

단협 과정에서 자잘한 기싸움도 많았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통크게 양보해줘도 될 거를 기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뭐 결과로 보자면단협을 잘 맺었으니 좋은 전략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필요 이상의 기싸움은 노사 모두에 안 좋은 거 같다지금 드는 생각은 싸움은 최소로제대로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다자잘한 거 싸워서 이겨봤자내 기분 좋은 거 말고는 남는 게 없는 것 같다모든 싸움이 그렇듯 잘 지는 게 단협에서도 정말 중요하다.모든 걸 노조의 뜻대로 할 수는 없다회사와 싸워 이겨 무언가를 따 내는 것만큼이나회사에 양보하고 져 줄 것을 잘 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게 말로는 쉽지만 지금 다시 단협을 한다고 해도 자신이 없다. 막상 단협에 들어가면, 피부로 느끼는 공기나 회사의 태도 이런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거 같다. 그리고 이것은 노조 혼자서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회사와 노조 양쪽 모두 감정 싸움을 자제하려고 노력해야 그나마 겨우겨우 피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간혹 노동조합이 서툴다며 질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로는 맞는 이야기지만 현실에서도 그게 맞는 거 같지는 않다. 노동조합이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회사와 동등한 입장이라면 노조가 서툴게 임하는 것이 단협에 큰 영향을 끼치겠지만, 현실에서는 회사가 훨씬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결국 회사의 의지가 단협의 성패에 영향이 큰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태도만을 문제 삼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힘을 아끼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나는 그래도 에너지가 넘치는 편이라 회사와 싸운다고 지치지 않았는데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다른 사람들은 단협에 임하는 책임감부터 분회장과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장 후회되는 것은물론 그리해서 좋은 단협을 맺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내가 너무 많은 발언을 독점했다는 것이다언론노조에서 교육 받을 때도 한 사람만 너무 말을 많이 하지 말고돌아가면서 역할을 맡아서 말을 해야한다고 들었다그런데 실제 단협에서는 순발력 있게 치고나가거나 법 같은 정보를 들먹어야 하는 상황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말을 다 하게 되었다단기적으로보면 그게 그 싸움에서는 좋을 수 있지만노조를 장기적으로 볼 때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조직은 건강할 수가 없으니까.

 

다음 글에서는 임금 협상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그런대로 수월하게 진행되었던 단협이 임금협상을 하면서 급속도로 파탄났다. 아마 지금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가도 결과는 똑같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당시 왜 단협이 파탄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은 어땠는지 살펴보고 싶다. 지금 노동조합을 열심히 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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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을 만들다1-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계기

 

나는 2009년 7월 하순에 보리출판사에 입사했다. 근로계약서에는 입사일이 8월 1일로 되어 있는데, 그건 행정편의상 그렇게 작성한 거고 실제로는 7월부터 일을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출판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고, 편집자가 무슨 일 하는 사람인지는 더더욱 몰랐다. 전과자를 받아주는 업계가 출판계라는 이야기를 듣고 원서를 냈는데 아주 운좋게 한 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노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나 노동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월급이나 꼬박꼬박 받으며 다니자는 생각이었다. 보리에 노동조합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출판사들에 노동조합이 이렇게 드물다는 것도 몰랐다. 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이나 편견도 그런 생각에 한몫을 했다. 노동조합 운동은 재미없어 보였고, 무겁게 느껴졌으며, 너무 위계적이고 조직적이라 답답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병역거부 운동 초창기에 대체복무제도 서명을 받으러 노동자 집회 다니면 "남자라면 군대에 가야지!" 같은 말을 하며 서명을 안 해주는 노동자 아저씨들이 많았는데 그 경험 탓도 있으리라. 아무튼 그때만 해도 내가 노동조합 활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사건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당시 보리 직원들은 절반이 넘게 그 해 봄부터 들어온 신입사원들이었다. 윤구병 대표이사가 취임한 뒤로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나갔고 그 자리에 사람을 계속 뽑았던 것이다. 다들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서로 서먹서먹하기도 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바닷가로 2박3일 엠티를 간다고 했다. 엠티 준비팀이 꾸려지고 그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엠티 준비를 했다. 나는 그때 입사한 지 한 달 밖에 안 된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회사 다닐 때였다. 

 

엠티 가기 하루 전날, 회사 안이 웅성웅성거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서 선배한테 물어보니, 나보다 두 달 먼저 들어온, 8월 말에 수습평가 예정이던 직원이 짤렸다는 것이다. 낯선 회사에서 친구 하나 없는데, 나한테 탁구 치자고 먼저 말해줘서 참 고마웠던 동갑내기 직원이었다. 그날 퇴근한 뒤 서울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몇몇 선배들과 모였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이리저리 전화를 해 봐도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뒤숭숭한 기분으로 엠티를 갔다. 

 

엠티에 가서 첫날인지 둘째날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윤구병 대표이사와 회사 직원 전체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당연히 바로 전날 짤린 직원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윤구병 대표이사는, 그 직원이 수습사원이기 때문에 계약해지이지 해고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 직원은 보리출판사가 새롭게 기획중인 사업을 위해 뽑은 직원이었다. 중간에 그 사업이 중단되고, 그 사업을 맡고 있던 사람이 나가게 되었는데 그 직원은 이 사람이 데려왔던 직원이라면서 보리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말했다. 내 귀에는 그게 그 직원이 남아있음 회사 기밀을 유출할 수 있으니 잘라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사실 보리는 정보가 잘 공유되지 않는다. 많은 결정이 이사회에서 내려지지만 단 한 번도 이사회 회의 결과가 제대로 공지된 적이 없다.(심지어 나중에 단협으로 이사회가 열리면 결과를 공지하기로 했는데도 말이다) 때문에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노동자들이 알지 못한다. 이사회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회사가 어디에 돈을 쓰는지, 어떤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스파이 노릇을 하고 싶어도 아무 정보가 없다. 게다가 그런식으로 직원을 의심한다면 우리 모두 의심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쫓겨난 그 수습사원은, 자기가 맡은 일이 없어지면 다른 부서로 옮겨서 일해도 좋다고 이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바로 반박했다. 계약해지나 해고나 노동자 처지에서는 똑같은 거다. 인트라넷에 기밀이 될만한 정보는 없고 앞으로도 그런 것들은 비밀글로 올리면 되지 않냐. 대표이사 말대로라면 그 수습사원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스파이 노릇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 수습사원이 엠티 준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엠티 하루 전날 자르는 것은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여기에 대해서는 엠티를 다녀와서 사람들과 정이 들면 계약해지 당했을 때 상처가 더 클 수 있다며, 정말이지 눈물겨운 배려심 돋는 대답을 했다) 많은 직원들이 그 자리에서 윤구병 대표이사에게 따졌지만, 윤구병 대표이사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다 제 책임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물론 그 뒤로도 내가 보리를 나오기 전까지 수습사원이 정직원이 되지 못한 사례는 두 차례나  더 있었다. 그리고 윤구병 대표이사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회사가 사업을 하다가 중간에 여러 이유로 그 사업이 중단될 수는 있다. 실패할 수도 있다. 그 책임은 당연히 그 사업을 주도했던 경영진이 가장 크게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 보리에서는 수습사원이 잘리고 그 수습사원을 데리고 있던 부장이 감봉 되는 것 말고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 사업을 시작했던 대표이사는 입으로만 책임을 졌고, 맡아서 진행하던 상무이사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이것이 내 생애 최초의 회사에서, 들어간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겪은 최초의 해고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부당해고가 명백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실제로 그런 걱정도 들었다. 저리 쉽게 수습사원을 자르는데, 누구든 저렇게 잘려 나갈 수 있지 않은가. 물론 내가 잘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별로 두려운 건 없었다. 윤구병이 나를 자른다고 해도 윤구병과 맞서 싸우는 게 두렵지 않았다. 

 

나한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진보 인사로 이름난 윤구병이지만, 나 또한 내 병역거부자 친구들과 인권활동가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를 도와줄 거라는 생각에 무섭지 않았던 거다. 회사 밖에 든든한 내 편이 있다는 생각은 이후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비폭력 트레이닝 덕분에 나는 권력자들에게 겁을 잘 먹지 않게 되었다. 엄청나게 대단해 보이는 권력(자)들이 사실은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약자가 싸워서 권력을 이기기는 쉽지 않겠지만,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다면 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나는, 대표이사가 단협하면서 내 앞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협박을 해도 쫄지 않았다. 

 

이 일 하나 때문에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보리에 노동조합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처음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들어오기 직전 회사를 나갈 수밖에 없었던 선배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스스로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어쩌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활동을 하게 됐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병역거부자인 내가 노동조합 활동가가 된 데 어떤 연결 지점이 있지 않을까? 고민을 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에 희미하게나마 평화와 노동을 이어주는 고리를 떠올렸다. 열쇳말은 바로 '폭력'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평화운동이란 모든 폭력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경영진이 노동자에게 행사하는 여러 종류의 폭력을 직간접으로 겪었다. 물리적인 폭력은 없었지만, 물리력보다 약한 폭력을 쓴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적나라하고 때로는 교묘했다. 때로는 괴롭힘이었고, 때로는 협박이었고, 때로는 쫓아내는 거였다. 그 수습사원의 해고는 이곳의 권력도 폭력을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평화주의라면, 모든 폭력에 저항하려면, 회사가 노동자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맞다. 물론 그 방법이 꼭 노동조합 활동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 당시 나는 노동조합을 떠올렸던 것이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내가 그동안 노동조합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많이 달라졌다. 어떤 것은 내 생각이 맞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내가 오해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노동조합의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번에 글을 써 가면서 이런 생각들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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