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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을 만들다1-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계기

 

나는 2009년 7월 하순에 보리출판사에 입사했다. 근로계약서에는 입사일이 8월 1일로 되어 있는데, 그건 행정편의상 그렇게 작성한 거고 실제로는 7월부터 일을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출판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고, 편집자가 무슨 일 하는 사람인지는 더더욱 몰랐다. 전과자를 받아주는 업계가 출판계라는 이야기를 듣고 원서를 냈는데 아주 운좋게 한 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노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나 노동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월급이나 꼬박꼬박 받으며 다니자는 생각이었다. 보리에 노동조합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출판사들에 노동조합이 이렇게 드물다는 것도 몰랐다. 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이나 편견도 그런 생각에 한몫을 했다. 노동조합 운동은 재미없어 보였고, 무겁게 느껴졌으며, 너무 위계적이고 조직적이라 답답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병역거부 운동 초창기에 대체복무제도 서명을 받으러 노동자 집회 다니면 "남자라면 군대에 가야지!" 같은 말을 하며 서명을 안 해주는 노동자 아저씨들이 많았는데 그 경험 탓도 있으리라. 아무튼 그때만 해도 내가 노동조합 활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사건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당시 보리 직원들은 절반이 넘게 그 해 봄부터 들어온 신입사원들이었다. 윤구병 대표이사가 취임한 뒤로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나갔고 그 자리에 사람을 계속 뽑았던 것이다. 다들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서로 서먹서먹하기도 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바닷가로 2박3일 엠티를 간다고 했다. 엠티 준비팀이 꾸려지고 그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엠티 준비를 했다. 나는 그때 입사한 지 한 달 밖에 안 된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회사 다닐 때였다. 

 

엠티 가기 하루 전날, 회사 안이 웅성웅성거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서 선배한테 물어보니, 나보다 두 달 먼저 들어온, 8월 말에 수습평가 예정이던 직원이 짤렸다는 것이다. 낯선 회사에서 친구 하나 없는데, 나한테 탁구 치자고 먼저 말해줘서 참 고마웠던 동갑내기 직원이었다. 그날 퇴근한 뒤 서울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몇몇 선배들과 모였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이리저리 전화를 해 봐도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뒤숭숭한 기분으로 엠티를 갔다. 

 

엠티에 가서 첫날인지 둘째날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윤구병 대표이사와 회사 직원 전체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당연히 바로 전날 짤린 직원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윤구병 대표이사는, 그 직원이 수습사원이기 때문에 계약해지이지 해고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 직원은 보리출판사가 새롭게 기획중인 사업을 위해 뽑은 직원이었다. 중간에 그 사업이 중단되고, 그 사업을 맡고 있던 사람이 나가게 되었는데 그 직원은 이 사람이 데려왔던 직원이라면서 보리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말했다. 내 귀에는 그게 그 직원이 남아있음 회사 기밀을 유출할 수 있으니 잘라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사실 보리는 정보가 잘 공유되지 않는다. 많은 결정이 이사회에서 내려지지만 단 한 번도 이사회 회의 결과가 제대로 공지된 적이 없다.(심지어 나중에 단협으로 이사회가 열리면 결과를 공지하기로 했는데도 말이다) 때문에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노동자들이 알지 못한다. 이사회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회사가 어디에 돈을 쓰는지, 어떤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스파이 노릇을 하고 싶어도 아무 정보가 없다. 게다가 그런식으로 직원을 의심한다면 우리 모두 의심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쫓겨난 그 수습사원은, 자기가 맡은 일이 없어지면 다른 부서로 옮겨서 일해도 좋다고 이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바로 반박했다. 계약해지나 해고나 노동자 처지에서는 똑같은 거다. 인트라넷에 기밀이 될만한 정보는 없고 앞으로도 그런 것들은 비밀글로 올리면 되지 않냐. 대표이사 말대로라면 그 수습사원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스파이 노릇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 수습사원이 엠티 준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엠티 하루 전날 자르는 것은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여기에 대해서는 엠티를 다녀와서 사람들과 정이 들면 계약해지 당했을 때 상처가 더 클 수 있다며, 정말이지 눈물겨운 배려심 돋는 대답을 했다) 많은 직원들이 그 자리에서 윤구병 대표이사에게 따졌지만, 윤구병 대표이사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다 제 책임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물론 그 뒤로도 내가 보리를 나오기 전까지 수습사원이 정직원이 되지 못한 사례는 두 차례나  더 있었다. 그리고 윤구병 대표이사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회사가 사업을 하다가 중간에 여러 이유로 그 사업이 중단될 수는 있다. 실패할 수도 있다. 그 책임은 당연히 그 사업을 주도했던 경영진이 가장 크게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 보리에서는 수습사원이 잘리고 그 수습사원을 데리고 있던 부장이 감봉 되는 것 말고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 사업을 시작했던 대표이사는 입으로만 책임을 졌고, 맡아서 진행하던 상무이사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이것이 내 생애 최초의 회사에서, 들어간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겪은 최초의 해고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부당해고가 명백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실제로 그런 걱정도 들었다. 저리 쉽게 수습사원을 자르는데, 누구든 저렇게 잘려 나갈 수 있지 않은가. 물론 내가 잘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별로 두려운 건 없었다. 윤구병이 나를 자른다고 해도 윤구병과 맞서 싸우는 게 두렵지 않았다. 

 

나한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진보 인사로 이름난 윤구병이지만, 나 또한 내 병역거부자 친구들과 인권활동가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를 도와줄 거라는 생각에 무섭지 않았던 거다. 회사 밖에 든든한 내 편이 있다는 생각은 이후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비폭력 트레이닝 덕분에 나는 권력자들에게 겁을 잘 먹지 않게 되었다. 엄청나게 대단해 보이는 권력(자)들이 사실은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약자가 싸워서 권력을 이기기는 쉽지 않겠지만,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다면 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나는, 대표이사가 단협하면서 내 앞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협박을 해도 쫄지 않았다. 

 

이 일 하나 때문에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보리에 노동조합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처음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들어오기 직전 회사를 나갈 수밖에 없었던 선배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스스로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어쩌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활동을 하게 됐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병역거부자인 내가 노동조합 활동가가 된 데 어떤 연결 지점이 있지 않을까? 고민을 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에 희미하게나마 평화와 노동을 이어주는 고리를 떠올렸다. 열쇳말은 바로 '폭력'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평화운동이란 모든 폭력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경영진이 노동자에게 행사하는 여러 종류의 폭력을 직간접으로 겪었다. 물리적인 폭력은 없었지만, 물리력보다 약한 폭력을 쓴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적나라하고 때로는 교묘했다. 때로는 괴롭힘이었고, 때로는 협박이었고, 때로는 쫓아내는 거였다. 그 수습사원의 해고는 이곳의 권력도 폭력을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평화주의라면, 모든 폭력에 저항하려면, 회사가 노동자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맞다. 물론 그 방법이 꼭 노동조합 활동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 당시 나는 노동조합을 떠올렸던 것이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내가 그동안 노동조합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많이 달라졌다. 어떤 것은 내 생각이 맞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내가 오해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노동조합의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번에 글을 써 가면서 이런 생각들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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