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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16
    글쓰기를 시작하며(12)
    무화과

글쓰기를 시작하며

진보넷 블로그를 다시 쓰게 될 줄 몰랐다. 이 글을 어디에 올릴까 고민하다 결국 새로 블로그를 만들기보다 예전에 쓰던 블로그에 올리자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들어와보니, 예전에 남겨두었던 기록들이 보인다. 당연히 보리출판사를 다니며 느꼈던 생생한 감정들이 적혀있다. 여기다 내가 보리를 다니며 겪은 일들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글은 이미 몇 달 전에 썼던 글이다. 여러 고려 사항으로 그동안 비공개로 해 둔 것이다. 앞으로 블로그에 올릴 글 몇 개는 몇 달 전에 썼던 글이고, 몇 개는 이번에 새로 쓸 글이라는 걸 밝혀둔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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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를 그만두면서 3년 동안 보리출판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활동하며 겪은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게으름으로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꼭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려웠고 걱정이 됐다. 다니던 회사와 회사 사장을 비판하는 글을 남기는 것이 내 취업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쓰는 글이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보리노동조합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쓰기가 결국 내 화풀이 분풀이가 될까봐, 내가 조금이라도 힘이 있으면 열심히 싸우는 강정이나 밀양 주민분들에 힘 보태야 하는데 윤구병 뒷담화나 하고 있어도 되나, 이런 생각이 나를 붙잡았다. 

 

윤구병 대표이사가 언론과 한 인터뷰를 간간히 보면서 그리고 회사에 남아있는 동료들에게 회사 소식을 들으면서 여전히 분노했지만, 그래도 위선자들 얼굴을 맞대지 않기 때문에 참을만 했다. 그러던 와중에 서점에서 손석춘이 윤구병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엮은 책 <노동시간을 줄이고 농촌을 살려라>를 보게 됐다. 윤구병이 하는 이야기는 하도 많이 들어서 궁금하지도 않았고, 6시간제를 어떻게 포장해 놨나 어디 한 번 보자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그런데 거기 예상 외의 내용이 있었다. 바로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였다. 

 

노동조합도 있다. 2010년 7월 27일 1년여 준비한 끝에 창립했다. 당시 윤구병 대표이사도 흔쾌히 동의했다. 윤 대표는 이왕 하려면 유니언, 즉 조합이 옳다고 했고 실제로 유니언 노조로 출발해서 활동해왔다.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노조에서 교육하고 조합원이 된다. 해마다 단체협상을 하고 있고 상급단체는 민주노총 전국언론노동조합 보리출판 분회다. 앞서 언급한 운영위원회에 들어가는 부서장 4인 가운데 3인이 노동조합 조합원이다. 경영지원부 부장만 성격상 조합원이 맞지 않다고 해서 노조와 협의해 조합에서 빠졌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제도는 더 있다. 조합원은 정년이 없다. 대표이사라도 그 직을 내려놓으면 다시 노동조합에 가입해 일반 노동자로 일할 수 있다. 현재 대표이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출하는데 임기가 3년이다. 윤구병 대표는 연임했다. 2009년 선출될 때는 전 직원과 주주들이 다 모여 선출했고 연임할 때는 주주들이 재추대했다. 
처음에는 전 직원들이 주식을 나눠갖고 있었는데(상한선 2퍼센트) 그후 전 직원이 합의해서 직원들 주식을 양도했다. 현재 사실상 직원을 대표하는 윤구병 대표이사 지분이 2퍼센트이고 나머지는 공익단체들이 나눠갖고 있다.

 

이게 전문이다. 요약하려다 귀찮아서 그냥 다 갖다 붙였다. 말할 것도 없이 거짓과 왜곡과 교묘한 포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글을 읽으면 마치 윤구병은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의 대표로 인정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수차례나 했던 윤구병이 말이다. 나는 이 글을 보고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우리는 윤구병이 회사를 자기 맘대로 좌지우지하고 우리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것에 맞서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활동했는데, 노동조합 활동마저도 자기 명예를 드높이는 도구로 활용할 줄이야. 내 스스로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맞서 싸운 것조차 윤구병의 명예를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거 같은 기분이었다. 투쟁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존엄성마저 유린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스스로 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말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 이야기를 대신 해 주지 않는다. 윤구병이 거짓말을 하는 걸 내가 막을 방법은 없지만, 윤구병의 말이 거짓임을 알릴 수는 있다. 신중한 사람들조차도 일단 의심은 하게 할 수 있을 거다. 그래 쓰자. 보리에서 겪은 일을, 다 쓰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더라도 아직도 걱정이 앞 선다. 내가 쓰는 글이 결국엔 윤구병을 공격하기 위한 글이 되지는 않을까, 내 마음 가득한 미움이 글쓰기를 치유가 아닌 감정 배설로 이끌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내가 이 글을 쓰는 까닭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 스스로에게 다짐도 하려고 한다. 

 

나는 윤구병을 공개 망신 시키거나 공개 비판 하기 위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그러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깝다. 내 관심사는 윤구병보다는 내 자신이다. 

 

병역거부자가 어찌하여 노동조합 열성활동가가 되었는지, 평화와 노동의 연결고리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예전부터 있었다.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옆에서 살짝 겪었으니 노동조합에 대해 불편한 시선은 없었다. 하지만 전쟁없는세상 활동 시절엔 노동운동은 너무 경직되어 있고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운동의 당위만을 가지고 노동조합을 만들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걸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이 글은 평화와 노동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이 될 거다. 

 

노동자가 직장에서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말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굳이 경영진을 나쁘게 악마처럼 묘사할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진실은 큰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보리에서 겪은 일은 나의 일이기도 하지만, 보리 노동자들이 겪는 일이고, 이 시대 출판 노동자들이 겪는 일이다. 내가 대표성을 가지지는 않지만, 사장님들 말로 넘쳐나는 곳에 노동자의 말을 던지고 싶다. 노동자들의 말이 힘을 가지고 노동자들이 연대할 때 출판계가 바뀔 거라 믿는다. 사실 윤구병은 내가 겪은 최악의 사장이지, 출판계에는 그와 비슷한 그보다 더하거나 덜한 사장들이 굉장히 많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보고 들은 것만 해도 경악할 수준이다. 폭로? 그건 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노동자의 입으로 노동자의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거다. 그러다보면 사장들의 거짓과 위선은 자연스럽게 폭로가 되겠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다. 

 

나는 보리출판사 분회에서 1년 반 동안 분회장을 했고 그 다음 1년 동안 대의원을 했다. 당시 우리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활동은커녕 회사 생활도 처음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갈팡질팡했고 우왕좌왕했으며 좌충우돌했다. 아쉬운 순간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잘한 것보다는 못한 것들이 마음에 많이 남는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잘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가고자 한다. 내 실수와 오판과 잘못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다른 분들에게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되찾고 싶다. 치유가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굉장히 밝고 긍적적이고 성격도 둥그스럼하고 때로는 무딘 사람이었는데, 지금 내 모습은 짜증이 사방으로 돋혀있고, 아주 날카롭고, 누구든 건들면 폭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 같다. 이런 내가 낯설고 무섭고 싫다. 회사를 그만둔 지 반 년이 다 되었는데 아직도 전 회사 사장 욕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안쓰럽다. 이제 보리라는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글은 나를 다시 되찾는 일이 될 거다. 내겐 글쓰기가 치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나 내가 글을 쓰는 도중에 내 글쓰기의 목적을 잊고 미움와 증오로 가득차 화풀이만 일삼는다면, 그래서 치유는커녕 화만 더 키워간다면 따끔하게 한 마디씩 해 주기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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