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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31
    '진보'를 다시 생각하다(12)
    무화과

'진보'를 다시 생각하다

'윤구병 효과'라는 게 있다. 뭐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말은 아니고, 요새 나와 몇몇이 즐겨 쓰는 말이다. 운동권이던 사람을 사장말 잘 듣고 복종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운동권이 전혀 아니던 사람을 사장 말에 복종하지 않는 저항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게 바로 윤구병 효과다. 

 

이런 말이 나온 까닭은, 보리 출판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활동했던 경험 때문이다. 우리가 노동조합을 만들 때, 가장 열심히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거의 평직원이었다. 이들은 노동조합 경험은커녕, 노동자 집회도 안 나가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진보정당 당원도 아니고, 촛불집회도 안 가봤고, 보수적인 신학교 출신의 목사 지망생이었던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사회과학 서적 한 번 안 읽어본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하다못해 과대표 같은 것을 해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보리에서 진보 물 먹어봤다 하는 사람들은 주로 간부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나이로는 386 세대였는데, 대학 다닐 때 어느 정도 운동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자처했다. 이분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진보정당 열성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노동자 투쟁에 연대를 열심히 하는 분도 있었다. 강정 마을에, 홍대 청소 노동자들 투쟁에, 희망버스에 확실히 일반 직원들보다 열심히 싸우러 다녔다. 이 사람들은 평직원들을 정치 의식 없고 노동자 의식 모자란 사람들로 보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르치고 했다. 작은책 강좌를 듣게 하고, 변산 공동체에 가서 일을 하면서 보리가 가진 철학(진보)을 배우라 했다. 노동조합을 만들 때는 노동자의식도 없는 애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 댄 것이 내 귀에 흘러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 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대표이사 눈밖에 나서 해고 당할 위기에 조합원이 처해도 간부들은 대부분 침묵했다. 아니 오히려 징계위원회 사측위원으로 들어와 중징계를 주장하기도 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인사발령이 내려져도 늘 침묵했다. 그러다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가는 회사 결정이 날 때면 굉장히 열성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회사 안에서 대표이사의 폭력과 권력에 맞선 것은 늘 평직원들이었다. 운동권 출신 간부들에게 정치의식 없고 노동자 의식 없다고 무시받는 평직원들은 거창한 이데올로기 같은 것 없이, 뛰어난 사회과학 이론 없이, 그저 자기가 가진 상식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 결과는 저항이었다. 물론 사회 운동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서툴고 실수투성이였지만 말이다. 

 

나는 진보가 무엇인지, 진보를 삶의 가치로 품고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리 간부들을 이미 철지난 기억을 추억삼아 살아가는 그런 386 세대로 치부해버리면 모든 문제가 단순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간부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도 활발히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또 그런 분석은 저 사람들을 비판하기에는 좋아도 나에게는 아무런 시사점도 주지 못하니까. 

 

양심적 병역거부에 찬성하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면 진보인가? 희망버스를 탔으면, 밀양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면 진보인가? 맑스주의자거나 코뮨주의자면 진보인가? 진보신당 당원이거나 녹색당 당원이면 진보일까? 그렇다면 윤구병을 비롯한 보리 경영진과 간부들은 죄다 진보다. 윤구병에 맞서는 노동조합보다 훨씬 진보다. 하지만, 비정규직 직원을 마음대로 해고하려고 하고, 수습 사원을 맘대로 해고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진보가 어디있다는 말인가. 우습게도 윤구병 사장이 우리를 공격하거나 우리의 공격에 반격하는데 써 먹는 것도 진보적인 가치였다. 

계약직 직원을 해고하면서 한다는 이야기가 "계약직은 차별적인 나쁜 제도라서 보리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에 보리는 계약직 형태로 계약을 연장할 수 없다." 고 말한 것이나 홍대 청소노동자들에 가해지는 사회적 차별을 이야기 하면서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를 마치 이기적인것처럼 말한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사회적인 기준들은 보리에선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내 동료들은 진보에 질려하기 시작했다. 회사 밖에서 하는 말과 회사 안에서 하는 행동이 너무 다른 것이 마치 진보의 표상인 것처럼 되었다. 우스겠소리처럼 말하지만, 보리에서 한 때 가장 인기없는 정당이 진보신당인 적도 있을 정도니까. 나는 아니라고, 훌륭한 진보주의자들도 많다고 항변해봤지만, 나 스스로도 대체 진보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진보의 가치를 품고 사는 게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냉소에 빠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진보라는 이름 따위는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곳에서 가장 집중해야할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보리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각각의 사람들이 거기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 사람의 사회적인 배경이나, 과거에 어디서 무얼 했는지 따위는 다 지워버렸다. 결국에는 대표이사에 복종하는 사람들과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복종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나는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는 아주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 생계형으로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윤구병을 정말로 존경해서 그러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냥 귀찮아서 지금 보리에서 주는 혜택을 받으면서 조용히 편하게 회사 다니고 싶어서 침묵으로 복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 유심히 생각했다. 맑스를 읽은 적도 없고, 추방과 탈주와 혁명을 이야기 하는 그린비 책을 읽은 적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 하는 불복종과 저항. 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내가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아주 거창한 이론도 아니고, 위대한 사상도 아니었다. 상식과 양심,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지는 마음. 이게 전부였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동료가 부당한 처우를 받을 때 함께 분노하고 함께 이야기하고. 거기에 변증법 같은 철학도 거창한 계급 의식도 필요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나는 양심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해봤다. 분명 윤구병에 저항하기를 포기한 사람들 가운데도 이성의 판단으로는 윤구병 대표의 회사 경영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가 내리는 인사발령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권력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양심아닐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상식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인간의 마음정도면 된다. 푸코나 맑스를 몰라도,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뭐가 문제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아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 그건 양심의 힘이다. 모두가 알아도 모두가 그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라들이, 양심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지금 생각하는 진보의 가장 큰 조건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가 남았다. 실제로 윤구병을 존경하는 사람도 있기때문이다. 이들은 자기의 행동과 말이 자기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사람들도 보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대게 인정했다. 그런데 그게 윤구병 대표 때문이 아니라, 그 밑에서 일하는 몇몇 경영진들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이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건 뭘까? 왜 이사람들은, 자기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영진을 임명한 것도 윤구병이고, 문제의 그 경영진이 문제가 되는 행동을 해도 눈 감아줘서 그 행동에 정당성을 주는 것도 윤구병이라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소 성급하게 지금 시점에서 결론을 내리자면, '권력'을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윤구병 대표가 책과 언론 인터뷰에서 떠들어 대는 좋은 말과 좋은 철학만 보고, 현실에서 대표이사로서 휘두르는 권력은 보지 못하거나, 애써 피하거나 일부러 보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해 '권력'을 직시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성찰하지 않은 거라 생각한다.

 

확실히 현실을 직시하는 것, 특히 현실의 권력을 직시하는 것은 상당히 고단한 일이다. 그걸 좋아하는 권력자가 없기때문에 권력자의 눈밖에 나고, 사는 게 퍽퍽해지겠지. 그러고보면 윤구병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철학자 윤구병' '농사꾼 윤구병' 이런 이름을 보지 않고, 자기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사장 윤구병'이 우리가 얼굴 마주하고 있는 윤구병이라는 개인의 실제 모습이라는 걸 알고, 윤구병을 (윤구병이 가장 싫어하는 이름인) 사장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는 것'과 더불어 '현실을 직시하고, 특히 권력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진보라고 생각한다. 

 

진보주의자는 진보적인 철학, 진보적인 정치 성향, 혹은 진보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권력을 직시하며,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양심에 어긋나는 일에는 복종하지 않는 것, 그게 진보의 참내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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