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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어떻게 진화되어야 할까

- '미디어 충청'에 기고한 글.

-촛불집회는 딱 두 번 나가 봤다.

-그중 행진을 한 건 딱 한 번, 대전역에서.

-그 때 느꼈던 것들을 적어 보았다.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글을 쓴다는 것이 웃긴 것 같아

쓰지 않으려고도 했지만

-그래도 편집위원이 글을 좀 써야 하지 않겠냐는 대표의 명을

받들어 두서 없는 글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고민 끝에 쓰기는 했다.

 

촛불의 진화를 바란다.


   촛불의 열기가 한 낮의 태양의 열기보다 뜨겁게 밤이 내려앉은 아스팔트를 달군지 벌써 두 달이 넘어 간다. 그 동안 쇠고기 관련 추가협상을 진행케 하고 공공부문 사유화와 한반도 대운하와 같은 이명박 정부의 핵심 사업을 유보시키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촛불을 든 데모꾼들은 대단한 인내심을 유지하며 경찰의 곤봉과 물대포에 맞서 그리고 이른바 ‘명박산성’ 앞에서도 재치를 발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른바 ‘웹 2.0’ 시대에 인터넷 공간에서 시작되어 거리로까지 나선 촛불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들고 있음은 분명하다. 수백만이 참여하고 있는 촛불집회는 역사적 사건임에 분명하고 혹자는 프랑스의 68혁명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68혁명과 같은 효과를 낳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여전히 정권은 흔들리지 않고 있으며 여당인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는 선두를 달리고 있다.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 소비의향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소비의향이 있다는 응답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을 한 발 뒤로 물러나 바라보며 들었던 생각들을 풀어 본다.

 

   먼저 참여자들과 이들의 인식에 대한 생각에서 시작을 해 보자. 이들이 내건 주장은 하나이고 이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대오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 편으로는 아직은 어색한 동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7월 2일, 대전역 집회에 처음으로 나갔다. 금속노조를 비롯한 민주노총 대전본부의 투쟁결의대회가 있었고 이어서 촛불집회가 진행되었다. 그 날 사회자와 일부 연사들의 발언에서 왠지 노동자와 ‘일반’ 시민을 구분하려는 듯한 표현들을 듣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나는 노동자는 아니지만 ……’, ‘비록 다른 활동을 하고 있지만 ……’ 이런 식의 표현이 발언 중간 중간 섞여 있었다. 그리고 행진을 하던 도중 사회자는 ‘시민 여러분이 허락하신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겠습니다.’라고 함께 노래 부르기를 제안하기도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집회 도중에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부를 수 있는 노래였던가. 사회자와 연사들의 이러한 표현들이 의식적인 행위였는지 무의식중에 나온 것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지켜보는 내내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다.

   촛불 집회가 진행되는 기간에 화물운동노동자들의 파업도 있었고 그 와중에 한 분의 열사가 발생하는 고통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열사는 타오르고 있는 수많은 촛불들 중 어느 촛불에서 타고 있는지 그 존재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정권퇴진’을 외쳤다는 것 또한 흥미로웠다. 정권이 국민들의 요구를 대변하지 못할 때 국민들은 그들이 위임했던 권력을 소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따라서 이들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공간에서도 ‘정권퇴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 주장은 함께 촛불을 들었던 그 밖의 군중들에 의해 거부당하기도 했다. 그 때 대통령 노무현과 지금의 대통령 이명박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기에 그 때는 안 되던 것이 지금은 용인이 되는지 궁금했다.

 

   이런 상황에서 촛불을 계속 밝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언론매체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논의할 때가 아니라 촛불 이후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초기에 ‘생활정치’의식이 자발적 참여를 이끌었고 그 동력이 어느 조직된 저항보다 완고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생활정치라 함에 있어 ‘생활’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건강권에 대한 염려는 생활정치의 소재가 되고 노동권은 생활의 영역을 벗어난 것인가. 서구와 같이 후기산업사회에 접어들어서 노동, 생산, 발전과 같은 경제의 문제보다 비경제 부문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이 발전하기라도 한 것인가.

   노동권의 문제는 여전히 이 사회의 중요한 문제이고 자본계급과 노동계급의 팽팽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권리쟁탈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 아닌가.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좌파진영은 촛불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서울만이 아니라 지역에서도 지역 수준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독자적인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정답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생활’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고, 모인 사람들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수 있는 그런 상황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겠다. 그 때, 촛불은 비로소 진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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