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041031 -- 부여답사

백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15년, 춘정월(春正月)에 궁실을 새로 지었는데
儉而不陋 華而不侈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유홍준 창작과비평사 1997)
백제의 문화를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한다고 합니다.
 
2004. 10. 31. 부여 답사.
 
BC 18. 시조 온조왕 위례성(한성)에서 즉위
백제는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했기에 백제의 시작을 이 시기로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강학(講學)상 이 시기를 시작으로 본다.
AD 32. 남한지역에서 처음으로 벼농사
132. 북한산성 축조
232. 고이왕 즉위
346. 근초고왕즉위(~375)
371. 고구려 평양공격
475. 고구려 침입, 웅진(공주)천도
538. 성왕 사비(부여)천도.
641. 무왕죽고 의자왕즉위
660. 계백전사, 백제멸망.
 
한성시대(bc 18 - ad 475)
지금의 서울이다. 고교 국사시간에 배웠듯이 삼국은 한강유역을 차지하려고 서로 동맹을 맺기도
하고 적대시 하기도 했다.
근데 지금의 서울이 백제의 수도로 500년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 첨 들은것처럼 생소하다.
내가 무식한 것도 무식한 거지만 우리 역사가 백제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조선왕조 500년이란 말은 많이 쓰지만 그보다 더 긴 백제왕조 678년은 안 쓰니까.
아마 패배자의 역사이기에 그러하리라.
한성시대의 유물은 풍납토성과 , 몽촌토성이다.
난 이게 백제 유물인지도 몰랐다. 쪽팔려라~~
판축(版築-흙을 얇은 층 모양으로 다져서 쌓아올리고 다시 사람이 밟아서 여러 층으로 이루어짐)
방식으로 쌓은 토성은 요즘 군인이 쌓는 진지보다 더 튼튼하다고 한다.
그 길이는 수Km이며 폭은 넓은 곳이 45m도 있다고 한다.
꼭 한번 가봐야겠다.
 
웅진시대(475-538)
웅진은 공주다. 공주는 분지로 되어 있어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그러다 보니 배산임수니 뭐니하는 것도 없이 급조한 것이다.
처음 이곳을 수도로 천도한 왕은 성왕인데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려 대충 정한 것이 웅진이였다.
자료를 보면 이곳에서는 고분이 한 특징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곳은 차안에서 지나가면서 봤을 뿐이다.
 
사비시대(538-660)
이번 답사의 장소이고 백제의 문화가 중흥기와 멸망기가 동시에 일어난 시기이다.


손병주선생님


 

능산리 고분군
이런데 오면 저 무덤안에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데..전혀 그렇게 할 수 없다.
난 거기 죽은 사람이 누워있는 관에도 한번 누워 보고 싶은데...

그래~ 이렇게 상품화하면 어떨까? 한번 누워보는데 만원...

 

 










정림사지 5층석탑
사비천도 이후 건립, 높이는 8.33m, 총 149개의 화강암 돌맹이를 이용해 잘 짜 맞추어 올린 탑.
멀리서, 중간에서, 가까이서 볼때마다 탑의 느낌이 다르다 하는데..정말 다르다.
그렇게 볼 수 있는건 환상적인 황금비율을 적용했기에 가능하단다.
자료에 보면 백제인의 돌을 다루는 기술이 상당하다고 한다.
요즘에야 좋은 도구로 충분히 좋게 돌을 다듬지만 그때는 무엇으로 어떻게 깍고 황금비율을 적용했을까? 대단합니다....







모서리를 둥굴게 말아올려 경쾌한 상승미를 보여준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1층 탑신에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새겨놓은 글을

길잡이 손병주선생님이 알려준다.
한 때 이 글 때문에 평제탑(平濟塔-백제를 평정한 탑)이라 불리며 설움을 당한적도 있었다.




부여시내를 유유히 걷는 말탄 사람.
우리는 신기하게 보는데 그곳 사람들은 뭐가 신기하냐는 듯 시큰둥하다.







계백과 그 외 충신을 모신 사당.
동입서출 -선생님이 알려준 사당 출입법. 들어갈때는 동쪽으로 나올때는 서쪽으로.
나침판 가지고 다녀야겠다.....




그 몽촌토성처럼 쌓은 토성이다.
흙을 쌓고 다지고 다시 돌을 넣고 다지고 해서 아주 딴딴한 토성이다.













낙화암...
설움이 깃든 곳이다.
길잡이 선생님은 3천궁녀니 뭐니하는건 승자의 역사적 관점이고 패자를 폄하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하시며 아예 3천은 메모리에서 델리트시키라 하신다.
어느 기록에도 3천은 없다 하신다.

참고로 지금은 3만여호가 사는 부여이지만 기록에는 그 당시 13만호가 살았다고 한다.
13만호...지금보다 4배더 많다....상상해 보라...




궁남지
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
차라리 마지막 코스로 저녁 무렵에 가기를 잘했다.
경주의 안압지를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보니 더 실망스럽다.
가운데 정자는 공사중이라 추운 듯 공사장 옷을 두르고 있고 주위는 듬성듬성한 버드나무만 늘어서 있다.
이곳이 예전에는 왕의 유흥장소이면서 도성을 방비하는 목적도 있었다한다.
그 당시보다 1/3크기라 왠지 안쓰럽다.

 

 

빡빡한 일정에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다음코스로 이동한 경우도 있다.
그래도 이 정도라도 느끼게 된걸 감사한다.
한가지 아쉬움이라면 우리의 역사유물이 지배자의 유물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보니 그 당시 민초들의 삶을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때 민초들은 감히 접근도 못할 왕의 유흥장소나 쌀 한되라도 시주해야 볼 수 있는 탑에서 민초의 삶을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겠다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