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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에게 소중한 것, 해방의 조건과 열쇠

  판타지 소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마법사를 대포의 판타지적 표현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에서 근원이야 다양하지만 여튼 괴상한 힘으로 빛과 바람과 불꽃을 만들고 하늘을 움직이고 땅을 진동시킨다. 결국 이 힘은 대부분 전쟁 등의 살상에 집중되어 사용된다. 그 압도적이고 비생산적인 파괴력! 심지어는 악마의 소환이나 세계의 멸망 등 도대체가 무의미한 짓거리-핵무기 개발과 비슷할 정도로-에 일생을 바치는 마법사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들이 화염구를 만들어 선량한 이웃을 구워버리는 대신 이웃에게 줄 빵을 구워낸다면, 이들이 악마를 소환하는 시간에 잔치에 쓰일 돼지 고기를 소환한다면, 이들이 마법검을 만들어낼 땀으로 마법 농기구를 만들어낸다면, 반란 농민을 학살하느라 심신이 피곤한 기사를 치료하는 대신 반란 농민을 부활시키는데 그들의 영혼마저 바친다면 그 세상은 좀 더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것은 진실로 판타지에 불과하다. 오늘도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의 머리 위에 떨어질 집속탄을 위해서 엄청난 양의 돈이 허공에 증발하고 있지 않는가? 그 돈이면 굶주리는 이들에게 유용한 양식을 줄 수 있건만.


아무리 주인공이더라도 버스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서는 곤란합니다

 

  간만에 생산적인 분야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마법사를 다룬 만화책을 발견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만화에서는 마법사가 사람의 염원을 들어주는 마법을 사용한다. 짧은 이야기-얇은 책으로 두권 정도-의 주된 내용은 국가 공무원인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 수습 기간을 밟고 있는 유메라는 소녀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사람의 염원을 들어준다는 것, 그것에 관한 몇 가지 물음을 작품은 던진다. (나름대로 생각해보자. 판타지의 탈을 쓴 무협지보다 더 상상력에 근거한 설정과 질문에.)

 

  약간 벗어난 이야기를 해보자. 과연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마법사가 있다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과연 작품과 같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그것이 사용될까? 마법사들이 이라크에 파병되어 무협적 판타지처럼 하늘을 가르며 땅을 뒤엎지는 않을까? 효율적인 노동력 공급을 위해 사람들을 세뇌하고 좀비로 만드는 일에 종사하지는 않을까? 혹은 정보 경찰의 앞잡이가 되어 사람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고 일상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다니지는 않을까? 마법에 의해 생산량이 극도로 늘어난다고한들 그것이 모두의 행복으로 이어질까? 지금도 인류 전체가 배터지게 먹고 남을 식량(1인당 3500kcal의)이 해마다 생산되고 있음에도 수백만의 어린이가 굶어죽고 수 억의 인류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데?

 

  전구의 발명은 인류를 어둠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와 동시에 인류를 추가 근무와 주야 맞교대 근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원자력은 방사능 치료를 통해 사람을 살리는 동시에 그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공포 혹은 그 자체로 내몰고 있다. 휴대폰은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을 연결하는 동시에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괴물로 작동하고 있고, 눈부신 생산력의 발전은 거대한 낭비와 파괴로 사라지고 있다.

 

  과학을 비롯한 기술의 발전은 그 자체로 해방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해방의 조건을 만들어 줄 따름이다. 해방의 열쇠는 그 발달한 생산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그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달려있다. 마법이건 과학이건 그 무엇이건 그 모든 해방의 조건을 진정한 해방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경쟁하는 한 줌의 무리들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세계적인 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조직된 직접 생산자들인가?



쓸데없이 삽입 기능을 사용했다. 어떻게 하면 취소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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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란 무엇인가?

* 이 글은 이러나님의 [정말 싫은 말] 을 보고 삘 받아서 주위 사람들도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을까 해서 쓰게 된 트랙백(이게 뭔말이야?)입니다.

  87년 투쟁의 성과일까? 민주주의라는 것이 사회에 그 약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구타와 기합으로 유지되던 공장 규율은 세련된 규칙과 평가제로 개편되었고, 야만적인 폭력으로 유지되던 초중고 역시 '사랑의 매'-그 표현방식이 극도로 새디스틱하다는 것이 문제지만-가 내신 반영으로 대체되고 있다. (초중고 순으로) 무조건 쥐어패고 보던 사회는 대화의 외피를 거치게 되었고 노사정 위원회나 교장선생님과의 대화의 시간 ... 등의 극도로 무의미하고 기만적인 자리도 심심찮게 만들어지(려)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의 시체는 살아서 걸어다니고 있다. 87년의 타협은 파시스트들의 정권을 연장시켜주었고 국가 기관에서 언론에서 경찰 정보과에서 그들의 하수인들을 아직까지 남아있게 하였다. 아직도 상명하복의 병영의 규율은 학교와 공장에서 관철되고 있고 국가보안법이나 족벌 기업 등은 싱싱하게 그 모습을 뽐내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뒷걸음질 위에서 파시스트들의 세상은 임종의 순간을 계속 미루고 있다.

 

  그렇기에 파시즘이 끝장났다고 학교에서 배운,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것을 늘 암기해온 사람들, 특히 사회초입자들에게는 세상 엄밀히 말하자면 파시즘의 잔재는 도대체가 불합리한 것일 수밖에 없다. (파시즘 덕에 더 근본적인 불합리는 쉽게 그 모습을 숨긴다.)

 

  군대는 파시즘과의 대화이다. 파시즘이 불합리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군대는 2년 넘는 시간 동안 악랄하고 끈질기게 설득한다. 군대는 부당한 권위에 굴종하는 법, 불합리한 명령에 의문을 품지 않는 법, 강자에게 약하게 굴고 약자에게 잔인해 지는 법 등 파시즘을 이해하고 그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게 해 준다. 군대는 우리에게 파시스트와 자신을 동일시 하거나 적어도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부당한 권위에 쉽게 굴복하고 뒷걸음질치는 자유주의자들을 용서하게 해 준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파시스트들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군대를 갔다와야 정신을 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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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cm 라이프, 수요와 필요

  얼짱, 몸짱, 별별 짱들이 난무하는 시대이다. 필자가 소싯적에는 키짱이라는 말이 없어서인지 별로 우유라던가 유제품을 그다지 열심히 먹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키는 2년전 기준으로 남한 평균신장(성별기준)에 도달하였고 그리 키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물론 노인네들이 죽고 애덜이 자라는 통에 슬슬 평균신장이 필자의 키와 거리를 벌이고 있다만)

 

  키가 사회생활에서의 영향력이 상당한 것은 분명한 일이다. 하지만 일정 이하(혹은 이상)의 키는 외모로서의 영향력을 넘어 그 이상의 생활을 제약하는 핸디캡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래 150cm 라이프(번역되었다.)의 주인공인 150cm의 키로 살고 있는 일본의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이 책의 저자이기도한 타카기 나오코 씨가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작아도 까마귀보다는 크고 아무리 커도 전봇대보다는 작다

 

  그녀가 유쾌하게 털어놓는 일상의 제약은 웃어넘기기에는 뒷맛이 쓰다. 표준신장(많은 경우 남성의)에 맞추어져 있는 세계 속에서 그녀에게 지하철은 생존해내야만 하는 공간이고 높은 선반의 물건에 손이 닿지 않는 그녀에게 아르바이트는 도전이요 혼자 살기는 모험이다. 그녀가 자조적으로 이야기하는 20살까지는 중학생 요금을 냈다는 둥, 어릴 때 입던 옷을 입을 수 있다는 둥의 작은 키로 살아가는 장점이란 키가 작다는 것이 정상적 성인으로 인식되지 않는 현실과 가장 작은 사이즈의 성인 기성복의 사이즈가 잘 맞지 않는다는 비참한 현실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제약은 키 작은 사람에게 집중되지는 않는다. 해외 토픽 등을 보면서 평생 택시를 못타봤다는 2m30cm의 아저씨의 이야기이나 뚱뚱한 사람에게 2개 좌석 분의 요금을 물리겠다는 미국 항공사에 맞서 싸우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키 작은 사람은 작은 사람 나름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뚱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 권리와 획일적인 높이에 분포한 지하철 손잡이는, 획일적인 크기로 재단된 비행기 좌석은 충돌하고 있다. 하지만 생산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생산이 다양한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수요, 즉 지불능력을 가지지 못한 집단을 소외시키면서까지 최대 이윤을 거둘 수 있는 방향으로 조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돈자루 씨는 필요가 있음에도 수요가 없는 자들에게 역으로 소리친다. 몸을 세계에 맞추라고. 장애인 탑승자가 적기 때문에 KTX에 단 3%의-국가기관에서 이야기하는 장애인 조우율-장애인 좌석을 배정하기 거부하는 철도청은 장애인들에게 이동할 수 없는 세상에 몸을 맞추라고 소리친다. 키 작은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한 손잡이가 아닌 칼슘 우유와 호르몬 주사를 이야기하고 뚱뚱한 사람에게 그들에게 맞는 좌석이 아닌 탑승 거부와 다이어트를 이야기한다. 오늘도 수많은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어린이들이 가족과 국가 기관(학교)의 폭력 속에서 오른손으로 연필을 옮기고 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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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I can / The Pillows / 주인공의 숙명

 

I think, I can

The Pillows

 

 

似ても似つかない 雙子のキミ
닛테모 니츠카나이 후타코노 키미
닮은 듯 닮지 않은 쌍둥이인 너.

どうしたんだい 靴紐さえ
도오시탄다이 쿠츠히 모사에
왜 그러는 거야? 신발끈조차도


ほどけっぱなしのままうわの空 
호도켓바 나시노 마마 우와노 소라
풀지 않은 채. 건성 건성.


待ち構えて

마치카 마에테

준비하고 기다린.

 

ハイエナのキス 間一髮
하이에나노 키스 칸잇바츠
하이에나의 키스. 아슬 아슬. 

 

誰の目にも およそ不可能なBET

다레노 메니모 오요소 후카노나 BET
누가 보기에도. 불가능해 보이기만 하는 베팅.


樂しみたいな
타노시미 타이나
즐거워 보이는 걸?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晝も夜もない 黑い森で
히루모 요루모 나이 쿠로이 모리데
낮도 밤도 없는, 어두컴컴한 숲에서.

勇敢なカメレオンが 捨てた羅針盤を
유우칸나 카메레온가 스테타 라신반오
용감한 카멜레온이 던져버린 나침반을, 

にらんでた
니란데타
노려봤었지.

 

 

何も言わない 出ていったキミ
나니모 이와나이 데테잇타키미
아무런 말도 없이, 뒤쳐나가버린 너. 

簡單な起きて紙は
칸탄나 오키테가미와
간단한 메모는

ドアに刻まれてた
도아니 키자마레테타
문에 새겨놓고 갔구나.

 


I-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かけがえのない
카케가 에노나이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夢をしっちゃって
유메오 싯챳테
꿈을 알게 되었으니.

もう絶對ごまかせないんだ
모오 젯타이 고마카세 나인다
이젠 절대로 얼버무리지 않겠어.

寢ても覺めても繰り返す
네테모 사메테모 쿠리카에스
자나깨나 반복해 말하는 건. 


I/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I Think, I C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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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이야기한 바 있는 애니메이션 프리크리의 클라이막스 부분에 삽입되어 있는 BGM이다.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애니메이션에서 BGM과 영상, 내용의 결합도가 높아 느낌이 좋았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저 반복되며 강요되는 듯한 가사가 좋아서이다.

 

  하고 싶어서 한다기 보다는 해야 해서 일을 하다보면 어느샌가 저걸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질문조차 던지지 않고 관성적으로 일을 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내 손에 닿는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모든 것이 당연한 세계에서 당연한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손을 뻗어 닿을 수 있을 법한 무언가에 눈을 돌리면 그 질문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할 수 있을까?"

 

 

덧. 물론 가능할 수밖에 없다. 은하계의 주인공의 숙명이랄까? 냐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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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誌) - 후한말의 계급투쟁 (1)

1. 시작하며

 

  봉건 무협지 삼국지 연의에 대한 재평가가 근래에 들어 꽤나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근래에 들어서야 이 반동적 문학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우리 사회가 이 악랄한 반동에 타협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든다.

 

  물론 성군 유비와 폭군 조조를 이야기하는 봉건적 관점보다 CEO 조조와 유비를 이야기하는 자유주의자들의 판타지가 썩은 내는 덜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승상과 황제의 패거리가 되지 못한 대다수 농민의 후손들이 즐겨 먹을 수 있는 신선한 음식물인지는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그렇다고 필자가 삼국지를 재구성하겠다거나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농사를 지어 세금을 내고 나면 짚신이라도 엮지 않으면 다음 가을을 맞을 수 없는 자들의 입장에서 삼국지의 시작을 장식했던 황건 민중봉기라는 계급투쟁과 이 계급투쟁에 의해 전개된 이후 계급 간의 역관계에 대한 사소한 생각을 풀고자 한다.

 

2. 후한 말의 사회

 

  태양 아래 천자가 있고 그 주위에는 승상 이하 문무 백관이 그를 보필하며 천하를 13주로 나누어 천자가 보낸 자사가 다스리며 고을 고을 마다 현령이 내려와 백성들을 보살피니 ... 운운하는 이야기는 적당히 하도록 하자. 이런 이야기의 흐름대로라면 천자가 백성들을 먹이고 살리는 셈이지만 실상은 보통 반대라서 하늘 같은 천자가 쓰고 다니는 양산과 승상부 창고에 쌓여있는 금은 보화부터 이들의 실질적 힘인 창칼에 이르기까지 직접생산자의 땀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당시 열악한 생산력은 이 직접 생산자의 절대 다수를 식량 생산을 위한 농업에 종사하게 하였고 이 사회의 분석을 위해서는 이 농민들을 중심으로 이 사회의 생산이 어떤식으로 조직되고 잉여가 어떤 식으로 흘러다니는 지를 명확히 분석할 필요가 있겠다.

 

  농민은 농사를 짓는다. 2세기 중반 이들은 이른바 자경농민이다. 자경농민이라고 해서 오늘날 남한의 중농이나 16-17세기 영국의 농민 등을 생각한다면 곤란한 노릇이다. 5인 가족 기준으로 농민 1호가 100무(전근대적인 면적 단위는 생산량이 기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역시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를 경작하면 매년 150석을 수확한다. 기본적인 토지세로 100석이 우리의 현령 나으리를 통해 수탈되고, 그것은 자사의 손을 거쳐 천자의 지갑에까지 올라간다. 아, 50석이나 남았군! 이라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기엔 아직 이르다. 성인의 경우 120전, 아동의 경우 20전의 인두세를 더 납부해야 하고 성인 남성에게 부과되는 노역을 구실로 300전의 세금이 추가로 부담된다. 곡식을 팔아 그것들을 내고 나면 거의 손에 남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 종자, 가축, 농구, 의복, 잡비 등을 생각하고 다음 가을까지 먹고 살 궁리를 하면 역시 부업을 좀 더 뛰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이 괴로운 농민들은 흉년이라도 들면 더욱 더 삶이 빡빡해진다. 그러다 농가부채도 쌓이게 되고 빚에 떠밀려 혹은 총칼..아니 창칼에 떠밀려 토지를 인근의 대지주에게 넘기고 전객(佃客) 즉 소작농이 된다. 이들 소작농은 국가에서 조사하는 인구조사에서 제외되는 모양이니 각종 세금은 납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인구조사 따위 할 이유가 뭐겠는가?) 그 대신 비슷한 비율의 곡식을 지주에게 소작료로 납부한다. 뭐 그다지 인생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들 농민은 노예가 아니다. 이들은 제한된 형태나마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을 가졌다. 특히 자신의 생산 도구를 소유하고 있었고, 특히 토지에 대한 소극적인 권리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산을 자신이 통제하였다. 생산에 대한 통제권이 생산자에 있었기에 약탈자들은 생산(경제)외부에서 강제적인 수단으로 이들의 생산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세금이나 소작료의 형태이며 이는 소작 계약, 신분제, 그리고 창칼에 의해 관철된다. 바로 그것이 경제외적강제의 본질이며 이러한 경제 관계, 직접 생산자에 의한 경제 외적 강제를 통해 잉여가 추출되는 사회를 바로 바로 봉건제라고 이르는 것이다. 후한말 농민은 자경 농민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본질은 국가가 지주로 존재하는 국가봉건제 하의 소작농과 비정부지주(NGL?)에 소속된 소작농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면 타당하며 이들은 중세 유럽의 농노, 조선시대의 전호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빼앗기는 자의 반대 축에 서 있는 빼앗는 자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기본적으로 이들 중 눈여겨 볼만한 두 세력은 천자와 그를 보필하는 관료 집단을 위시한 중앙의 국가 봉건 지주 세력과 호족이나 군벌 등으로 알려진 지방의 대지주 세력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경제적으로 동일한 계급적 이해 위에 서 있고 의식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비교적 동질적인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나눠놓은 것은 후한말 중앙집권체제가 붕괴하고 지방 군벌이 발호하면서 삼국 시대가 개막되었다는 점에서이다. 이들의 차이는 크지 않았고 실제로 대표적인 군벌 조조의 경우 중원을 장악하자마자 구품중정법 등을 통해 대족지주를 견제하고 국가봉건제를 재건하기 위해 매진하게 된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한의 붕괴와 위의 건국을 혁명적인 변화, 조조와 그의 패거리를 혁명적인 세력 등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는 황당한 이야기이다. 그가 행한 것은 국가 봉건제 재건을 위한 가장 단호하고 개혁적인 조치였을 뿐, 그것을 뛰어넘는 어떠한 대안도 실천도 창출할 의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대안조차 제시할 수 없었던 황실의 꼴통들에게는 조조가 볼셰비키보다도 더 무섭게 보였겠지만. 한나라 당이 노무현을 두려워하듯이 말이다.

 

  진과 전한 시대의 상업 억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상인 세력은 꾸준히 성장하였다. 소금과 철 등을 매매하여 거부가 된 자의 이야기가 사서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러한 거부들은 오늘날 이건희와 정주영의 무리와 같은 산업 자본가들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들은 수공업 등을 조직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미약한 수준이었고 이들의 부의 원천은 지주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서민들에게 소금 등 생필품을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생기는 기생적이고 약탈적인 것이었고 취약한 기반 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상업으로 재산을 모으는 대상인은 비록 자산이 수천만에서 억에 이르나 여전히 농업을 통해 그것을 지켰다'라고 이르기도 했다. 상인자본의 기반은 항상 취약하였고 그것은 봉건 지주의 기반을 가졌을 때에만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상인은 아직 유의미한 독자적 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봉건 세력은 일견 자신들의 필요 충족을 위해 상업을 이용하면서도 봉건적 경제 질서를 흔들 우려가 있는 상업 발달과 그를 통한 자본주의적 맹아의 성장을 항상 견제하였다. 한무제는 소금과 철의 전매제를 실시하고 평준제와 균수제를 실시하는 등 대상인을 견제하는 정책을 폈고, 조조-전한시대 사람입니다-는 문제에게 억상(抑商)법령의 형식화를 탄식하며 "지금의 법률은 상인을 천하게 여기나 상인은 이미 부귀하다"며 상주하였다. 이러한 억압 속에서 상업 발달은 정체되었고 이들은 대안 세력으로 나설 역량이 부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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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대강적인 시대에 대한 묘사가 끝난 듯하다.

다음 편들에서는 봉건제의 파국적 위기의 도래와 그 분석, 황건 농민군의 등장과 본질, 계급 투쟁의 양상, 계급 투쟁의 결과 1) 후한제국 붕괴 2) 국가 봉건제 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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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크리(flcl), 상상력.

* 구구절절 쏟아지는 스토리 요약과 인물 해설을 위해 아까운 시간과 지면을 낭비하는 것은 과학 만능 시대에 올바른 삶의 양식은 아닐 것 같다. 검색 엔진과 블로그, 그보다는 만화를 직접 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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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림

 

  애니메이션은 상대적으로 애들이 많이 본다. 반면 영화의 경우 상대적으로 어른들이 많이 보는 편이다. 특별히 애니메이션이 유치하고 영화가 고상하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일본 애니메이션보다 헐리우드 영화가 더 고상하다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차피 진지한 사회인이 가질법한 문제의식을 다룬 작품-쓸데없이 난해하다는 뜻은 아니다-이란 애니건 영화건 극히 드물다. 당연하게도 문제의식을 가져봤자 그것을 사회에 반영할 통로를 가지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상품화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애니메이션은 왜 아이들에게 타겟이 맞춰져 있을까? 나름대로의 가설을 내놓자면 나이가들수록 상상력이 감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감소라는 표현은 적당치 않다. 여자친구가 알고보니 입양된 할아버지의 숨겨둔 딸이었다는 상상력과 여자친구가 알고보니 가변형 전략병기였다는 상상력에 우열을 두기는 힘든 노릇 아닌가? 그래도 아이들이 선호하는 상상력과 어른들이 선호하는 상상력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여튼 아이들의 상상력을 찍어내기엔 애니메이션이 탁월하게 저렴하다. 그런저런 이유로 만화의 주된 고객은 아이들이 된다. 이야기가 길었는데 그 결과 애니메이션, 특히 필자가 주로 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주된 시청자는 유소년층과 청소년층에 많은 편이다. 청소년이 주된 타겟이다보니 일본 애니의 경우 인기있는 소재가 바로 성장물이다.

 

  야구를 하고, 축구를 하다가, 연애를 하거나, 싸움질을 하면서, 때로는 거대 로봇을 조종하고, 전쟁에 휩쓸리면서, 고갯길에서 드리프트를 하기도 하며, 대마왕을 잡으러 떠나거나, 거대 마피아와 맞서면서, 발레를 하면서, 심지어 폭주족에 가담하면서, '무엇을 하건' 주인공은 성공하며 혹은 실패하며, 그것을 극복하며 혹은 끝내 극복하지 못하며, 성장하게되며 어른으로 나아가게 된다.

 

  성장이라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건' 상관없다는 태도의 극단에 바로 개인적으로 가이낙스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꼽는 프리크리가 서 있다. (가이낙스, 이들의 만행은 원작자도 이해못하는 기묘한 설정으로 점철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도 유명하다) '무엇을 하냐'고? 어디선가 이태리제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외계인이 배트를 휘둘러 소년의 머리에서 N.O.(좌뇌와 우뇌의 사고통로를 이용, 장거리의 물질 전송을 일으키는 현상-뭐야 이게?)를 일으켜 뇌와 해적왕의 해방을 위한 파츠를 꺼내고, 소년과 외계인은 해적왕의 해방을 막기 위해 거대 무인 공장에서 파견하며 소년(혹은 소녀)의 머리에서 튀어나오는 거대 로봇에 맞서 학교와 마을을 구하다가 어쩌다가 한다는 이야기이다. ... 이해가 안된다고? 필자도 그다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할 필요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프리크리의 설정은 골치아프며 정돈되어 있지 않고 스토리 진행과 주제의 이해에 많은 경우 불필요하다. 다만 놀라울 정도의 상상력으로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적실하게 상징하고 비유한다. 세상 알만큼 알았다는 둥 세상 별 거 있냐는 둥 어릴 때 가질 법한(어른이 되어서도 가질 법한) 유치한 생각들과 그것을 깨버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묘한 사건과 상황들. 실연과 질투, 동경과 좌절, 부모에 대한 불만과 실망,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재, 무력감과 자만 등의 정신적인 고통을 상징하는 두통과 머리에서 튀어나오는 거대 로봇.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면서 자신의 배트와 그것을 휘두를 용기를 가지게 된 소년. 다분히 내면적인 문제와 갈등을 창의적인 설정으로 유쾌하게 시각화해 낸다.

 

  프리크리는 상상력이 메말라버린 두뇌와 반드시 정돈되고 꽉 짜여진 구성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 꽤나 괜찮은 충격을 줄 것이다. (반대의 극단도 존재한다. 질식할 정도의 자기 완결도를 지닌 세계관에 비해 너무도 약한 메시지의 작품) 물론 이 작품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별 거 없다. 성장이란 진부한 소재의 진부한 해석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실험적이고 파격적이다. 고골의 단편이 떠올랐을 정도로. 그렇기에 프리크리는 만화를 통해서만이 표현할 수 있는 상상력이 (적어도 영화화하기에 돈이 많이 들법한 상상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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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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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계(軍鷄) (1), 21세기 격투기의 위상은?

* 구구절절 쏟아지는 스토리 요약과 인물 해설을 위해 아까운 시간과 지면을 낭비하는 것은 과학 만능 시대에 올바른 삶의 양식은 아닐 것 같다. 검색 엔진과 블로그, 그보다는 만화를 직접 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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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이 주인공이다.

 

  인류는 왜 격투기라는 것을 발명해내게 되었을까? 무슨 연고로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 것을 기예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대를 파괴하기 위해서. 적어도 상대와 정정당당한 승부를 겨루기 위해, 인체의 기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등의 교과서적인 올림픽 정신 등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 것이다.

 

  격투기가 상대를 제압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 가령 무기술이나 전술 등과 분리될 이유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격투기에 실전성이 요구되는 기간동안 그것은 언제나 그러했다. 우리가 킥복싱 쯤으로 알고 있는 무에타이는 148가지 무기를 다루는 크와비크와봉과 격투술인 람무에를 포함하는 개념이고, 중세 일본의 병법가란 궁술, 기마술, 창출, 검술, 유술, 전술 등을 두루 갖춘 자를 말하는 것이며 하나의 유파는 당연하게도 도장에서 검술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것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개인화기의 발달, 법체계와 공권력 체계의 발달은 격투기의 개념을 바꿔놓게 된다. 근대 사회가 발전하면서 대부분의 유의미한 실전의 승패는 제3세대 탱크와 전폭기 그리고 대륙간 탄도 미사일에 의해 결정되고 있고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실전의 승패는 개인화기(대부분 칼리시니코프)와 박격포, 대인지뢰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폭력은 거의 배제되어 있고 조폭들 싸움조차도 적당한 맷집과 연장, 허술한 법, 인간관계(혹은 빽)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즉 실전에 격투가 필요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물론 일부 영역에서 제한적인 실전에서 격투기가 유의미성을 지니는 경우가 있긴 하다. (경찰, 양아치, 중고딩 등의)

 

실전 격투가 유의미한 몇 안되는 예랄까.

폭력이 배제된 일상은 누군가의 폭력을 통해서만이 유지될 수 있다


 

  전근대적인 격투가들은 자신들의 격투기가 사멸하거나 일부 제한된 영역에서의 기예로 전락하기 원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살인 기예를 스포츠화시킴으로서 혹은 정신적 수양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서 변화를 추구하게 된다. 고류검술은 현대검도와 강도관의 유도, 대동류의 합기유술 등으로 스포츠화되었고, 쇠징박은 장갑을 끼고 상대를 살점을 날려버리던 고대 복싱은 글러브와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점수를 따는 근대 복싱으로, 목을 조르고 관절을 꺾어버리던 고대 레슬링은 매트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근대 레슬링으로 변화하게 된다. 실전과 살인을 유일한 목적으로하던 선대의 가르침은 무도(道)와 스포츠맨쉽으로 대체되었고 이상적인 격투가는 실전 무적의 병법가에서 올림픽 메달리스트나 링 위의 챔피언으로 바뀌게 된다.

 

  최상단 그림에 있는 우리의 주인공 나루시마 료(이제야 나왔다)의 격투기는 전근대적이다.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 (...법적으론 근거없다) 부모를 살해하여 소년원에 들어가게된 료는 살아남기 위한 유의미한 저항의 수단으로서 공수도를 연마한다. 그리고 소년원에서 나오게 되면서도 그의 전근대적인 공수도가 통용될 수 있는 좁은 공간-뒷골목 등의-에서 바둥거리며 그는 생존한다. 머리로 받고 급소를 차고 눈을 찌르고 물고 목을 조르는 가장 야만적인 쌈박질, 그러나 그가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생존의 조건에 불과하였고 그나마의 생존의 조건조차도 양지의 힘 앞에서 언제든지 짓밟힐 수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전진하기 위해 혹은 후퇴하지 않기 위해 스가와라 나오토를 정점으로 하는 양지의 공수도와의 싸움에 나서게 된다. 스포츠맨쉽도 무도도 아닌 가장 야만적으로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바득바득 근대 격투기의 정점으로 그는 전진한다. 그렇다면 그가 맞서고자 하는 스가와라 나오토의 공수도는 무엇인가?

     이 자가 스가와라 나오토이다. 좌측이 3권 우측이 7권.

 

  흥미있는 것은 스가와라 나오토의 캐릭터가 연재를 거듭하면서 대단히 크게 변경되었다는 점이다. (뭣보다도 수염이 없어졌다.) 금욕적인 격투가에서 벗어난 현대적인 스포츠맨 정도였던 설정이 정신적인 수행과 육체적 단련에서 나오는 무도가의 완성형 정도로랄까. 여튼 근대 이후 세련된 형태로 정립된 무도로서의 격투기가 나루시마가 맞서려는 격투기인 것이다.

 

  근대 무도가와 전근대 짐승 간의 싸움은 화려한 스폿라이트의 도쿄돔에서 어두운 절간으로, 6온스 글러브에서 장봉과 톤파 등의 무기로, 5라운드KO제의 경기에서 목숨을 건 결투로 이어져 간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승패와 함께 이야기는 한 매듭을 짓고 다른 이야기로 이야기는 나아가고 있다.

  격투기의 존재 조건의 변화에 따라 격투기계는 신체의 단련과 작전으로 (그리고 프로스포츠의 경우 적절한 쇼맨쉽을 포함해) 성공이 결정되는 스포츠적 경향과 정신적 수양을 중시하는 무도적 경향이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 이상 실전성은 격투기의 존재 조건이 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격투기에 대한 환상을 가진 시대착오적 인간들의 존재는 군계와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재생산하고 있다. 격투기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전근대) 격투가들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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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의의 말을 적어둔다면 이 작품은 지극히 반여성적-반여성적 의식이 지배적인 이 사회에서도 두드러지게-이며 반인권적이다. 혹시 접하고자 하는 사람은 유념하면서 읽도록 하자.

 

* 이 작품에서 특히 주인공에서 나타나는 악(惡)이 단순히 스타일을 위한 것이나 악마나 마왕처럼 정체성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작품 전체의 주제이기도 한듯한 이 문제는 군계에 대한 다른 글을 통해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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