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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1 - 자유로부터의 도피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실존성을 함의한다. 그런 생각의 기반은 에리피 프롬의 '자유'에서 근거를 찾았다.


원인 및 배경

근대 서구 유럽 사회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주체권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정치적으로는 귀족에서 남성, 노동자, 여성 그리고 이외 소외된 계층 순으로 하나씩 참정권이 회복되었고 종교적으로도 천주교의 권위와 형식에서 종교개혁을 통해 보다 종교인으로서 자유권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므로써 이제 개인은 주체적인 결정의 단위, 모든 권위와 권력으로 부터 자연인의 권리를 하나씩 획득하게 됐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내성과 관성을 더 함에 따라 권력으로 부터 독립된 상황에 놓이게 됐죠...
하지만, 자연인 회복의 결과는 오히려 이들을 불안하게 됐습니다. 많은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다 보니 그 책임은 가중되고 어려운 의사결정들을 스스로 담당했어야 했습니다. 즉, 주체적인 자연인으로서의 개인이 보장됐지만 이와 비례해서 불안과 근심, 책임이 쌓이게 됐죠..
이런 전차로 다시 강력한 권력의 요구가 내제적으로 등장하면서 잠재적으로 그 권력에게로 다시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반납하게 됐습니다.
이들이 갖게된 '불안'을 에리히 프롬은 사회적, 심리적 차원에서 '고독과 무력함'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이 그렇게 투쟁했던 자유의 결과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기에) 고독과 무력함으로 되돌아왔던거죠..

고독과 무력함 도피법

고독과 무력함은 다시 안정감을 요구하게 됐으며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일반적인 무력함 찾기 방법을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 째, 소유로의 도피
최초, 인간은 생존권을 보장 받기 위해 소유하죠. 다음으로는 소유를 위해 소유하게 됩니다.
인간은 소유하므로써 삶의 존재를 느끼게 되고 -현재 천민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우리 한국사람들은 아주 잘 공감하는 부분일 겁니다.- '먹이(자본) 축적=생존'이라는 원시적인 유전자가 있는 인간들은 '소유'를 통해 안정감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이 소유라는 것이 바닷물과 같아서, 상대성을 띄게 되고 이 '소유양식'속에서의 소유는 끝없는 퇴화적인 무한퇴행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소개할 때 더 정리하기로 하겠습니다.

둘 째, 권력, 명예로의 도피
어느정도 '소유'가 확보된 사람들은 권력이나 명예를 탐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오목을 수료한 사람이 바둑을 배우는 것과도 같은데요.. 즉, '소유'가 같고 있는 구조적인 오류를 그대로 갖게 되는거죠..
단지 소유로의 도피 방법은 자본적인 안정감을 찾는데 반해 권력, 명예로의 도피는 사회적인 안정감을 찾게 됩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은 자유를 찾기 위해 몇 백년에 걸쳐 투쟁했다가 다시 자유를 양도하려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나찌 시대를 살았고 유태계였기 때문에 나찌를 피해 망명해야했던 에리히 프롬에겐 파시즘이라는게 하나의 화두가 됐다고 합니다.
사실 유럽인들이 도피하려 했던 대피소가 이 파시즘이었거든요...

에리히 프롬은 '자유'를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소극적 자유 : Free from , ~로 부터의 자유

당시 독일이나 이탈리아인들은 '고독과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 '고독과 무력함'을 회피시켜줄 대상을 찾습니다. 파시즘이죠..
예기엔 묵시적 계약관계가 성립합니다. 카리스마 있고 강한 힘을 갖은 대상은 어느정도 틀을 제공함으로써 '고독과 무력함'에 대한 마취제를 주게 되고 약하고 소심한 개인들은 강력한 권력에 복종하므로써 그 틀에 들어갈 수 있는 시민권을 얻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 관계를 마조키즘과 사디즘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에게 초인적인 근면과 성실, 강한 군인을 강요하고 유태인을 박해했죠. 독일인들은 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태인을 괴롭히면서 배설합니다. (이 피학과 가학 성향의 연결적 상관관계..)
여기서 독일인들은 1등 민족인 자존심을 갖게 되고 이런 강력한 나라에 살기 위해서 초인적인 국민으로의 요구에 충실해집니다. 또한 이런 울타리 속에서 1등 국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다른 사례로 마조키즘과 사디즘의 관계로 눈에 띄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노예라거나 신앙만 강조하는 종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위해 자신의 신체 일부를 태운다거나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고난 받으면 천국간다'란 논리들.. 기실 그 이데올로기의 깊은 의미라던가 속내도 모른 채 '계급을 없애고 모든 토지를 공유한다'는 말만 믿고 죽창을 들었던 (또는 그 반대편에 서서 똑같은 형태의 이유로 이들과 대결했던) 우리 아버님 할아버님들...
이들에겐 종교나 이데올로기에 충실할 수록 자신의 안정감을 보장받고 싶었던 심리가 있습니다. - 교활한 선동가들은 이 최면술의 대가..

도피의 성격

이런 '~로 부터의 자유'는 결국 도피적 자유이기 때문에 태생적인 자유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첫 째, 권위주의적 성격, 상술한 마조키즘과 사디즘의 관계를 말합니다. 좀 물리적이죠..
둘 째, 기계적 성격
마치 사회라는 시스템에 잘 적응한 부속품이 누리는 자유입니다. '나'라는 부품이 잘 돌아가기 때문에 존재감을 느끼게 되고 이 존재감 때문에 (용도 폐기 당하지 않기 위해) 더 사회성을 갈구하죠..
이들은 유행이나 시대적 트렌드 이를테면 TV 연속극, 메이저 음악 장르, 패션 ... 같은 것들을 잘 수용하며 살고 있습니다.
extreme sports나 싸이월드, 블로그 같은 것들이 대중화 된 원인이 그런류를 즐기거나 어떤 개인적 목적도 있겠지만 심리적으로 다들 하기 때문에 안 하면 왠지 소외감을 갖게 되어 하는 경우가 많죠..

사실 개인적으로 사회적이지 못 한 탓에 이런 사회성, 기계성이 폭력처럼 느껴진적이 많았습니다.
술자리에서 동료나 학교 친구들과 화제를 공유하기 위해서 (정말 억지로) TV 프로그램의 정보나 제일 선호하는 연예인들의 정보를 수집한 적도 있었죠.. 이런 한심한 자신을 발견했을 때 너무도 환멸스러워서 왕따를 작정했지만요... ㅠ.ㅠ

더욱이 현재 서울의 중심가를 거닐다 보면 이런 '~부터의 자유'들을 봅니다. 다들 개성을 갖고 자신의 개성, 자유를 어필하고 있지만 그들의 문화, 패션들은 몇가지 운신의 폭을 갖을 뿐 천편일률적이기 이를데 없게 보이거든요..


적극적 자유 : Free to , ~에의 자유

'~로 부터의 자유'는 이렇게 물리적, 형태적 자유를 띄는 반면 '~에의 자유'는 본질적, 실존적 의미를 갖습니다.
자신이 실존적 존재로서 의미를 찾기 때문에 '고독과 무력함'이나 소외가 무섭지 않죠...
제가 갖고 싶고 습관적으로 확인하는 자유의 의미에 실존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학습을 통해 편하게 자신의 운신의 폭을 제안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이고 실존적으로 나의 취사선택을 내가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유럽인들이 도피했다시피 인간은 적당히 약하기 때문에 이 본질적 자유를 극복하기 위해 상당히 용감해야 하며, 적당히 슬기로와야 하며, 어느정도 착하기도 해야합니다. 어렵죠...

아직도 봉건적 권위와 질서에서 독자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다시 전체주의적 예속의 개인이 아직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전 Free to 하겠습니다. 못 하더라도 의지를 갖고 노력할겁니다..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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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변해야 사회도 바뀐다"-리영희 교수

절반은 남북 문제에 대한 얘기고... 1/3은 기독교에 대한 얘기인데..
"남한이 북한보다 더 나은 정치와 경제제도 하에서 더 큰 자유와 풍요로움을 누릴 의지가 있는가"
이부분이 눈에 띕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의 의지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억압적인, 세뇌적인 자유입니다. 자유로의 의지는 있지요.. 바로 이런 자유로의 의지지요..
하지만 이런 수식어, 이런 제약들을 제거한 자유로의 의지가 있는가? ( 이 부분은 에리히 프롬을 소개하면서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문제...
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예수를 모르니까, 우리가 너희보다 훨씬 우월하다' ... 자꾸 이래서 유대인들은 자신의 고향, 주변국가들에게 왕따 당했죠..

제가 제시하고 싶은 질문은 이겁니다. 유일신인거 알겠는데.. 그것은 스스로의 믿음이고 다른 종교를 배타적으로 보는.. 폄훼하는 객관적인 증거를 대라는거죠.. 입증하시라는거죠..
이런 선행과정 없이 무조건 우리가 옳다는 비장함은 연극(허구)에 지나지 않을까요?

"교회가 행위적 차원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자기 입증을 할 수 있을 때 민족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내면적인 신인관계, 좋습니다. 형제, 자매간의 화목한 교우관계, 좋습니다. 그런 좋은 것들... 빛과 소금 되려면 세상과도 조화해야하지 않나요??
오히려 거룩(구별됨)을 앞세워 세상과 배타적인 성향을 보이자나요?
세상 사람들도 우리가 점점 타락하고 있는거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1/3은 기독교인입니다.

근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거... 우기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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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변해야 사회도 바뀐다" - 리영희 교수 강연

http://holybbs.net/forum/Forum1/HTML/003515.html

리영희 교수, 배타적 우월적 태도 버리고 높은 종교적 가치 제시해야

우리사회의 대표적 진보지식인 리영희 명예교수(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74)는 "한국사회가 바뀌려면 한국기독교가 바뀌어야 한다"며 평소 그가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풀어 놓았다. 리영희 교수는 장공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제6회 장공기념강연회에서 '한국기독교가 민족사회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11월 25일 경동교회(박종화 목사)에서 강연했다.

리영희 교수는 강연을 통해 남북관계, 기독교의 역할, 기독교인의 실천 등 세 가지 주제를 놓고 변증법적 틀에 따라 설명했다. 즉 통일을 이루기 위해 북한 뿐 아니라 남한도 변화돼야 하는데, 특히 사회 변화를 위한 기독교의 역할이 중요하며, 기독교의 역할은 개인 기독교인들의 실천을 통해 올바로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다.

남한도 바뀌어야 한다

리 교수는 가장 먼저 남과 북의 관계와 통일의 방향에 대해 다뤘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남한은 변화될 게 없고 북한만 변화돼야 한다는 사고논리가 굳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북한이 변화될 것을 기대하기에 앞서 남한의 변화를 외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남한과 북한을 이분법에 따라 차별하는 태도는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남한은 무조건 선하고, 우월하고, 완벽한데 반해 북한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식의 사고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리 교수는 남북통일이 독일의 통일철학인 '접근에 의한 변화'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동·서독이 내전을 겪지 않고 순조롭게 통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서독과 동독은 변화와 통합의 노력에 앞서, 서로를 민족과 국가가 다른 두 개의 국제단위라고 받아들였다. 각자의 개별적인 정체성을 인식하고 서로에게 접근하는 가운데 질적인 변화의 힘이 작용해 결국 통합을 이루게 된 것이다."

독일통일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 리 교수는 우리 남과 북이 독일의 통일 노력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직 우리나라는 남과 북이 '민족은 하나인데 국가만 두 개'라는 사고틀 속에 있다는 것이다. 계속 북한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한 민족, 한 국가, 한 사회라고 고집하며 희망만 갖고 있으면 통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기독교는 한국사회 변화시키는 원동력

그렇다면 리영희 교수가 얘기하는 '남한사회에서 바뀌어야 할 부분'이란 어떤 것일까. 리 교수는 "남한이 북한보다 더 나은 정치와 경제제도 하에서 더 큰 자유와 풍요로움을 누릴 의지가 있는가" 하고 반문했다. 그는 남한사람들에게 나눔과 인정이 없으며, 폐쇄적으로 오로지 자기만의 영역을 고수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 리영희 교수는 한국인 76%가 '삶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제시하며,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장 큰 사회문제를 '인간 소외'라고 보았다. 한국인들이 납치, 살인, 강간 등 온갖 범죄와 타락과 이기주의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인간적 고귀함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리 교수는 "남한사람들이 정치적 자유를 얻었지만, 총체적으로 소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하고 모든 인간이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종교가 올바른 가치를 전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 교수는 남한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밝히면서도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종교 이상으로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는 단위는 없다. 교회가 행위적 차원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자기 입증을 할 수 있을 때 민족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종교 외에도 정치, 경제 등 여러 단위가 있는데 리 교수가 특히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리 교수는 경제 발전을 통한 변화는 근원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그는 "국민소득 1만 불 시대에서 2만 불 시대가 된다고 해서 개인이 실존적으로 느끼는 행복이 두 배가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 후 "결코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다. 진정한 변화의 가치는 물질주의적 측면보다 정신사상의 본질적 변화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실천 뒤따라야

그러나 리 교수는 한국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오만함에 대해 지적했다. 그는 북한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너희는 예수를 모르니까, 우리가 너희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말하는 남한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을 꼬집었다. 그리고 리 교수는 부시와 같이 다른 종교에 대해 파괴적인 태도로 치닫는 근본주의 신앙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의 가치를 존중하며, 다른 종교와 공존하는 것에 너그러워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리 교수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파병문제, 한미관계 등의 사안에 대해 수구적인 종교세력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았다. 리 교수는 요새 기독교 십계명에 하나가 더 추가된 '십일계명'이란 게 있다고 말했다. 즉 '미국의 모든 명령을 순종하라'는 것이다.

리 교수는 밤만 되면 한국 땅의 절반이 십자가로 뒤덮일 정도로 교회가 많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깊은 유감을 드러냈다. 그는 세계 50대 교회 중 23개, 세계 5개 교회 중 3개가 남한에 있다는 통계자료를 들며, 자랑스럽지만 한편으로 섭섭하고 슬픈 현실이라고 말했다.

리영희 교수는 기독교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기독교가 근본진리를 올바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의 저서 「스핑크스의 코」에서도 나오듯이, 리 교수는 자신은 기독교와 불교가 아닌, 예수교와 부처교를 따른다고 밝혔다. 예수와 부처의 삶과 가르침은 존경하지만 제도화한 종교와 종교형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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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이 안 낳으려는 최악의 사회"

갈 수록 나라에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IMF 때 우리도 아르헨티나 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조금씩 징후가 보이고 있습니다.

더 두려운 건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답게 살기'란 단순히 웰빙이라던가 높은 문화환경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마약, 타인의 선호도를 나무랄 자격이 없지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확실히 '사람답게 살기'와 상호 배타적인 듯 합니다. 문장해석적으로는 전혀 그렇지도 않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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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이 안 낳으려는 최악의 사회"  
  출산률 세계최저, 부부가 1.19명밖에 안낳아 한국미래 암울

  2004-08-25 오후 2:16:46    

출처 : 관점이 있는 신문 프레시안 (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40825132620&s_menu=경제 )
  
  우리나라의 신생아 출산숫자가 지난해 사상최저 수치를 기록하는 등 신생아 출산률이 선진국 가운데 최저로 급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아이를 낳기를 포기하는 여성도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아이를 낳아 제대로 키우기가 너무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전세계에서 가장 아이 낳기를 두려워하는 나라, 한국
  
  25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3년 출생.사망통계 결과'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태어난 총 출생아 수는 49만3천5백명으로 전년보다 1천1백명이 줄어 지난 1970년 통계 집계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1일 평균 출생아 수도 가임여성이 감소하면서 1천3백52명으로 전년의 1천3백55명보다 3명 줄었다.
  
  여성 1명이 가임기간동안 낳는 평균 출생아 수(출산률)는 1.19명으로 전년보다 0.02명 증가해 증가세로 돌아섰으나, 이는 지난해 가임여성 감소폭이 출생아 수 감소폭보다 컸던 데 따른 '일시적 착시' 현상으로 해석된다. 요컨대 아예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결심한 여성들이 급증한 데 따른 착시현상이지, 출산률이 증가세로 반전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의 출산 감소현상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출산률이 1.19명인 데 반해, 한때 우리나라보다 출산감소 현상이 심각해 '국가문제화'됐던 일본의 지난해 출산률은 1.29명으로 우리나라보다 높았다. 서구의 경우도 한결같이 우리나라보다 출산률이 높았다. 미국이 2.01명(2002년)으로 가장 높았고 프랑스 1.88명(2002년), 영국 1.73명, 스웨덴 1.65명, 독일 1.40명, 이탈리아 1.26명, 스페인 1.25명, 그리스 1.25명 등이었다. 호주와 뉴질랜드도 각각 1.75명과 1.95명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93년 1.67명이던 출산률이 그후 급격히 낮아져, 지난 2002년에는 1.17명까지 급락했다.
  
  이처럼 출산률이 급감함에 따라 총출생자에서 총사망자를 뺀 자연인구증가 숫자도 24만7천명으로, 사상최저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고, 여기에다가 최근 급증세를 보이고 있는 해외이민 등까지 고려하면 우리나라의 절대인구가 줄어드는 날도 멀지 않은 분위기다.
  
  후대에게 짐만 지우는 사회
  
  이같은 출산률 급감은 여성들이 나날이 악화되는 교육환경, 취업환경, 경제환경 등을 고려해 출산을 기피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아울러 맞벌이를 해야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환경이 크게 변화하고 있는 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번 조사결과, 출산모의 평균 연령은 초혼 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29.8세로 10년 전보다 2.2세 높아졌다.
  
  또한 결혼후 2년이 되기 전에 첫 아이를 낳는 비율은 72.6%로 10년 전의 82.8%에 비해 10.2%나 낮아져 결혼후 첫째 아기 출산에 걸리는 기간이 점차 길어지고 있다.
  
  이는 아이를 낳기 전에 최소한 안전한 경제환경을 꾸리기 위해 출산을 늦추고 한푼이라도 저축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같은 상황은 최근 3년여동안 아파트값이 폭등, 신혼부부의 집장만이 한층 어려워지면서 한층 심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이같은 출산률 격감은 절대인구 감소라는 위기뿐 아니라, 이들 아이가 자라나 성인이 됐을 때 이들이 떠맡아야 할 고령층 부양 등을 위한 경제적 부담의 급증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앞으로 한국경제에 치명적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우려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고령층 증가율이 세계최고여서, 이들 후대에게 전가될 부담이 대단히 높을 전망이다.
  
  아이 낳기를 두렵게 만드는 사회경제환경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얼마 뒤 한국은 회생불능의 침몰을 목격해야 할 판이다. 아파트값 거품을 빼고 세계최고의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한국지도층이 매진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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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로르의 노래] 소개

"독자는 앞으로 읽게 될 내용처럼 대담하고 또 일시적으로 사나워져서, 음산하고 독으로 가득 찬 이 작품의 황폐한 늪 가운데서, 방향을 잃지 말고 가파르고 황량한 자신의 길을 찾아내기 바란다." 로 친절하게 시의 목적을 설명해주면서 이 시는 시작합니다.
류시화와 이외수를 만난 뒤로 제법 시와 친해졌다고 생각했고, 시를 많이 읽었다고 할 순 없지만 시를 통해 시인과의 공감대를 즐겼던 20살때 내겐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 참고로 그때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쑥스러움~~)

도무지 시의 첫 귀절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시작... [말도로르의 노래]는 서사시적인 성격을 띄고 있어 시 하나가 시집 한권입니다. 운과 율이 있지도 않으므로 산문으로도 볼 수 있는 시이지만, 시의 최고의 특징인 '모든 형식의 초월'을 무기로 시로 분류되고 있는 듯 합니다.
불어를 알지 못 해서 여음 형식을 띄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그리고 곧바로 뒤통수를 쳐버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뒤따라올 다음 페이지들을 읽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몇몇 사람만이 이 씁쓸한 열매를 위험없이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소심한 자여, 너는 이런 미답의 황야에 더 멀리 들어가기 전에 너의 발길을 앞으로가 아니고 뒤로 돌려라.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잘 들어라. 너의 발길을 앞으로가 아니고 뒤로 돌려라."
아무나 읽는 시가 아니라는 의밉니다. 분명 로뜨 레아몽은 호기심을 자극하려는게 아니고 진심으로 위험한 장난에 동참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부터 말하고 싶은 부분이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은데 얼마전 부터 타인들의 세계에 편입할 요량으로 타인들의 습성과 습속을 따라하려 노력하다 도무지 맞지 않아 포기하던 시기에 이 시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구절입니다.

"좁은 어깨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수 많은 어리석은 짓을 행하고, 그들의 동류를 바보로 만들고, 모든 수단을 써서 영혼을 타락시키는 것을 나는 일생 동안 보았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동기를 영예라고 부른다. 그런 광경을 보고 나는 타인들처럼 웃고자 했다. 그러나 괴상한 모방인 그 짓은 불가능 했다. 나는 예리한 칼날이 달린 주머니칼을 들어 두 입술이 합해지는 지점의 살을 쨌다. 한순간 나는 나의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믿었다. 나는 거울 속에서 나 자신의 의지로 상처입은 그 입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오산이었다! 두 상처에서 철철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진정으로 그것이 타인들의 웃음과 같은 것인지를 구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동안 비교해 본 다음, 나의 웃음은 사람들의 웃음과 닮지 않다는 것, 즉 나는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웃음을 모방하고 싶어서 자신의 양 입 끝을 찢었지만(마치 [베트맨]에서의 조커처럼..) 그래도 타인의 그것들과 다른 자신의 얼굴.. 그때 제 심정이 바로 이래서였습니다.
남들 다 좋아한다는 효리, 전지현, 파리의 연인.. 대중음악... TV프로그램.. 화제 ... 등을 좋아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남들과 다른, 악수하지 못 하는 나를 체념해해 할때였었습니다.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 하는 나, 부평초 처럼 남들과 화제를 공유하지 못 하고 이상을 공유하지 못 하고 삶의 태도를 공유하지 못 하고...

여하튼 [말도로르의 노래]는 꽤 과격하고 잔인하고 난폭합니다. 제가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게 된 계기도 보들레르와 함께 악마주의, 난폭한 시인이라는 문구를 봤기 때문입니다.

시의 내용 중 몇 가지 사례를 표현하려고 했지만 곧 지워버렸습니다. 너무 난폭해서..
공포영화광이라면 devil doll의 음악을 틀어놓고 습한 지하방에서 읽으시면 이 시의 효과는 극대화 됩니다.. ^^;;

또 하나의 연상작용은 요즘 말이 많던 증오범죄(hate crime)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듯 합니다.
참고로 전 [seven]이란 영화를 보고 악역을 맡은 연쇄 살인자의 논리에 '약간'은 동의했었습니다. 신곡의 일곱가지 범죄를 행하는 사람들을 처형한다면 사회정의는 실현될 수 있겠다던... (물론 동참하고 싶진 않습니다.. ^^;; )

여하튼.. 지금 다시 [말도로르의 노래]를 보고 있습니다. 가끔 로뜨 레아몽의 고독을 느끼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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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대신 ‘시민결합’으로 대체하자

“결혼대신 ‘시민결합’으로 대체하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08/005000000200408191819167.html)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 ‘현행 일부일처제’ 비판

“세속 민법에서 ‘결혼’이란 단어를 없애고 ‘시민결합(union civil)’이란 말로 대체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74)는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 19일치에 실린 인터뷰에서 현행 일부일처제 결혼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좀더 유연한 시민결합을 대안으로 주장했다.

 

그는 “출산과 영원한 절개에 대한 맹세를 동반하는 결혼의 종교적, 이성애적 가치는 세속국가가 기독교 교회에 양보한 것”이라며 “결혼이라는 단어와 개념, 모호함이나 종교적 위선을 제거하고 섹스 파트너들 또는 강제되지 않은 여럿 사이에 보편화되고 정제된 유연한 계약인 ‘시민결합’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존의 결혼제도로 결합하길 원하는 사람은 종교적 권위 앞에서 그렇게 하고 동성간 결혼을 종교적으로 인정하는 나라에서도 그리하면 될 것”이라며 “세속법이나 종교법중 한가지 방식 또는 두가지 방식 모두를 통해, 아니면 어느 것도 아닌 방식으로 서로 결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만년의 사유 세계와 관련해 “나는 자신과 ‘싸움중’이고 이런 실제적인 긴장은 나를 만들어 내고 살아가게 하며 죽게 할 것”이라며 “이는 무섭고 고된 싸움이지만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걸 안다. 나는 영원한 휴식 속에서만 평화를 찾게 될 것”이라며 죽음에 대한 담담함을 피력했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데리다는 구조주의 방법론을 철학에 도입하고 서구 해체 철학의 근간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동성애자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등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르몽드〉는 ‘대담(entretien)면’의 두쪽 전체에 걸쳐 게재한 이 인터뷰 기사에서 데리다를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이 해석되는 생존 프랑스 철학자”라고 소개했다.

파리/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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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에게 남아있는 레드 컴플렉스는 꺼지지 않았다. 빨갱이란 단어는 냉전을 벗어난 전후후세대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의 리트머스로 남아있다.
단순히 냉전적 사고를 떠나서도 이 '빨갱이'란 단어는 여지없이 적용된다.
'빨갱이'란 하나의 바로미터가 아니다. 빨갱이는 파쇼다..


아직도 여전한 리트머스
데리다를 놓고 말했지만, '그렇다/아니다'의 입장강요는 상당히 파쇼적이다. 바로 전에 있었던 친노/반노의 논쟁이 그렇다.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이 친노라고???
내가 인공언어로 증명해줄께 -(탄핵 옹호자) = 친노 , -친노 =  반노 = 탄행 찬성자, 그러므로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탄핵을 찬성한다' ............ 맞냐???
난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았는데 열라 탄핵 반대 했는데???

이번엔 자연언어로 증명해줄께..
자민련 유운영 아저씨의 논리다. ('SBS 대토론 이것이 여론이다' 참조) '반미를 외치니까 사회주의다.' 반미를 외치는 유럽권은 사회주의인가??

리트머스는 아주 유용한 화학 기제일 수 있지만 빨강/파랑 밖에 표현하지 못 한다. 화학에선 산성과 알카리성을 대분류할 수 있지만 사회는 오로지 두 가지 색깔만 있는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는 (전여옥 대변인이 발하는 것 처럼) '네/아니요' 로 답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가령 이런 질문 "대한민국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나요? 네/아뇨로 답해주셈~"

이런 흑백의 리트머스를 들이데는 논리는 냉전적 사고방식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 논리는 첨예한 기득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단정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빨갱이의 정체가 뭘까?

마녀사냥, 혹은 메카시즘

가끔 기독교인과 어떤 논쟁을 벌일때 접하는 경우다. "왜 욥의 시험과 상관없는 욥의 자녀는 아버지(욥)의 시험 때문에 죽어야 하나요?" 또는 "한국 기독교가 일제시대때 친일한거 아시나요??" 난 이거 무지 궁금하거든... 근데 이들은 곧바로 공격한다... 사실 공격도 못 하고 화를 낸다... 대부분 이런 논조다. 기독교를 시험하지 말라고... 아니 왜? 난 궁금했는데? 왜 나의 시험이 당신의 시험이 되는가? 그걸 떠나서 대답해달란 말이에요...!!

빨갱이를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빨갱이와 '파랭이??'를 구분할 줄 모른다. 더구나 그 구분이란 것 마저도 작위적이다. 내가 기독교의 예를 든 이유가 있다. 자신의 믿음, 신념이 바로 그 빨갱이의 기준이다. 지극히 작위적이다. 혹은 자기 해석적이다.

사실 '빨갱이'의 목적은 피아식별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응징..., 영화 [넘버 쓰리]에서 송강호의 논조와 똑 같다.
"니....니들..내말..자..자..잘들어...내..내가 하늘색깔이...빨간색..하면 그때부턴 무조건 빨간색이야....이..이..이건 노..노..노리끼리한 색이지만...내가..빨간색!! 하면 이것두 빨간색이야...응?..이 십새끼야...응?..내가 현정화라그러면..무조건. 현정화야...내말에....토.토.토.토토토토다는 새끼는 전부 배반형이야 배반형... 배신!!배반형...무슨말인지 알겟어?...앞으론 직사시켜버리겟어..직사!!.....

빨간색은 그들이 무조건 빨갱이라면 빨갱인거다... 그래서 '직사' 시키는 거다..

중세 때 마녀사냥이 그랬다. 어떤 질서가 흐트러지면 그 질서를 바로잡기위한 희생양 '마녀'가 필요했다. 그때 신부들이 진짜 그 마녀가 악마를 부르고, 부정한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려서 죽였던가? (대부분의 '마녀'는 종교의식과 아무 상관이 없는 과부들이었다.)
그냥 신부가 빨갱이라니까 빨갱이인거다. 그들은 빨간색, 파란색에 대한 분류 근거, 확인을 대지 못 한다.

미국의 메카시즘이 아주 대표적인 역사적 예이다...

그러니까.. 빨갱이는 단지 니네들이 빨갱이라면 빨갱이인거다....!!

왜 빨갱이인가???

아까 주제와 관련있지만 빨갱이의 목적은 자신의 철학적, 체제적, 논리적, 정치적... 이런 위기를 당했을 때 도망가기 가장 좋은 장치가 '빨갱이'이다.

즉, '빨갱이' 운운하는 사람은 자신의 논리가 허술하던가, 자신이 위기에 있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혹은 모 정당 처럼 '흠집내기' 위한 방법...

이 '빨갱이' 수법은 너무나 쉽게 잘 먹혀들어간다. 내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고 물고문하고, 발톱뽑고 .. 하면 될 뿐이다. 그러면 알아서 빨갱이가 된다.


빨갱이 취급 많이 당한 자로서 바람..

제발 좀 이성과 논리 갖고 싸우자. 아니면 싸움의 법칙을 확실히 하자. (머리끄댕질 할지 논쟁을 할지..) 그리고 몰릴 때 어줍잖게 빨갱이 운운하지 말자...

난 빨갱이도 아니고 적그리스도도 아닌데.. 자꾸 '사상검증' 시키니까 짜증나자나.. 그럼.. 니네들도 사상검증해봐.. 이 빨갱이들아..!!


ps> 또 들린다. 나보고......... '역시 쟤 빨갱이었어..' 하는 소리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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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쿠바 사회주의는 러시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

출처 : 진보누리 http://news.jinbonuri.com/sub_read.html?uid=1148§ion=section1&nil_profile=g&nil_News=15

 

"쿠바 사회주의는 러시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 거대한 논쟁이 다시 시작된다
조회수 3145

(편집자 주) 1989년 구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우후죽순 무너질 무렵 미국의 일본계 학자인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이야기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 승리함으로써 역사가 일단락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회주의는 역사의 사생아, 혹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가장 먼 길’로 전락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줄줄이 과거의 이념을 버리고 자유주의나 심지어 파시즘으로 전향해버렸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제임스 페트라스는 자본주의-사회주의 논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신생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동유럽의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고 또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를 견지해온 쿠바를 비교한다. 그리고 시민들의 삶의 질 측면에서 ‘신생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그나마 옛 사회주의와 쿠바가 훨씬 우월하다고 판단한다.

저자 : 제임스 페트라스 미국 빙햄턴 대학 사회학과
출처 : Rebelion 2004년 6월호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이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념 전쟁’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유엔, 국제노동기구, 식량농업기구(FAO), 세계보건기구 등과 엔지오, 유네스코, 각종 전문가들의 보고서를 보면 이 논쟁은 오히려 지금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내려면 우선 ‘자본주의 도입’ 이후 러시아, 동유럽의 모습을 그 이전과 비교해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현재와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를 비교해보면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시작한지 15년이 흘렀다. 평가엔 충분한 시간이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 : 산업은 절망, 실업률은 급등, 조직범죄 극성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 체제였을 당시, 경제 자원들은 국가 소유이거나 공공 소유였다. 또한 이를 운용하는 결정도 국가적이거나 공공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이행한 15년 동안 일어난 일은 이런 경제 자원들, 즉 모든 기초산업, 에너지, 광업, 사회하부구조, 유통 등이 미국과 유럽 혹은 억만장자 마피아들에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혹은 문을 닫았다. 이는 대량실업과 불안정 고용의 증가, 경기침체, 이민, 돈 세탁과 국민경제에서 자본이 탈출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폴란드에서는 연대노조의 기반이었던 그다노스크 조선소가 폐업하고 박물관이 되었다. 이 나라의 노동인구 중 20%는 공식적으로 실업상태이다.(『파이낸셜 타임스』 2004년 2월21일) 나머지 30%는 성매매, 밀수, 노천시장, 행상, 각종 지하경제 등 주변부의 저임금 부문에서 일하고 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라트비아, 동독도 비슷하거나 더 나쁜 상황이다. 이러한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지난 15년 동안의 1인당 평균 실질소득 증가는 그 이전의 15년(공산주의 치하) 보다 훨씬 낮았다. 이와 함께 소득격차는 엄청나게 심각해져서 최상위 소득계층 1%가 사적 자산의 80%와 소득의 50%를 지배하게 되었다. 빈곤층은 50%를 상회하고 있다. 옛 소련, 특히 아르메니아, 조지아, 우즈베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생활 표준이 80%나 떨어졌다. 인구의 25%가 이민을 가거나 극빈 상태에 놓였으며, 산업과 공공자금, 에너지는 강탈당했다. 과학, 보건, 교육 시스템은 거의 붕괴되었다.

옛 소련에서는 하이테크의 중심지였던 아르메니아의 경우 지난 1990년엔 2만 명에 달했던 과학기술 연구자의 수가 1995년엔 5천명으로 폭락했으며 지금도 줄어드는 추세이다.(『내셔널 지오그래픽』 2004년 3월호) 아르메니아는 결국 대다수 인민들이 중앙난방장치와 전기 없이 사는 국가로, 국가의 경제적 자원들을 마피아들에게 강탈당한 국가로 전락했다.

러시아의 경제적 쇠퇴는 더욱 심각하다. 1990년대 중반 현재, 러시아 인구 중 50% 이상이 빈곤층이며 이러한 현상은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 외부에서 더욱 심각하다. 노숙자는 증가 추세이고 국가적 차원의 보건․교육 시스템은 붕괴했다. 비(非)전시 상황에서 한 나라의 경제가 이토록 빠르고 철저하게 무너진 경우는 현대사에서 ‘러시아 자본주의’밖에 없다. 러시아 경제는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민영화되면서 마피아들에게 접수되었다. 러시아 마피아를 이끄는 것은 8개의 억만장자 과두체제이다. 이들은 뉴욕, 텔아비브, 런던, 스위스 등의 은행으로 2천억 달러 이상을 반출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의 전 경제 부문에서 살인과 테러는 ‘경쟁력’이 되었고, 과학은 말살되었다.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러시아 과학자들이 현재는 저소득과 설비부족 때문에 굶주리고 있다.

러시아 자본주의 : 한 나라 경제가 이토록 빠르고 철저히 망가진 적은 없다

‘러시아 자본주의화’의 수혜자는 옛 소련의 관료, 마피아 보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은행, 유럽의 땅 투기꾼, 미국의 제국주의자, 군부, 초국적 기업들이다. 이렇게 약탈과 대량실업, 빈곤, 절망이 만연하면서 자살과 알콜, 약물 중독이 폭증하고 있다. 소련 체제하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질병도 나타나고 있다. 옛 소련이 붕괴되던 당시 남성의 예상 수명은 65세였으나 2003년엔 58세로 줄어들었다.(『월스트리트 저널』 2004년 2월4일자) 이는 방글라데시 보다 낮은 수준이다. 또 쿠바 남성의 예상 수명인 74세 보다 16년이나 적다. 인구학 전문가들은 러시아 인구가 다음 10년 동안 30%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월스트리트 저널』 2004년 2월4일자)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입한 자본주의는 대중적인 보건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붕괴시켜 과거엔 통제 가능했던 전염병을 다시 대대적으로 부활시켰다. ‘유엔 합동 프로그램’ 보고서에 따르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에이즈 전염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2004년 현재 1백50만 명이 에이즈 보균자인데 1995년엔 3만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을 초래하는 데 큰 몫을 한 집단이 바로 러시아, 동유럽, 발칸, 발틱 국가의 범죄조직들이다. 이들은 헤로인 무역을 주도하면서 매년 20만 명의 성노예를 세계 각국으로 팔아 넘기고 있다. ‘해방’된 코소보를 근거지로 설치고 있는 알바니아 마피아들은 헤로인 무역의 요충지를 통제하면서 성노예들을 서유럽과 북미에 ‘수출’하고 있다. ‘해방’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국과 동맹을 맺었던 군부가 헤로인을 생산, 옛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서유럽으로 반입시키고 있다. ‘해방’된 러시아의 마피아 과두체제는 주로 마약 및 불법무기 거래, 성매매 여성 양산, 미국-유럽-캐나다를 경유한 돈세탁 등에 종사하고 있다. 마피아 억만장자들은 정치인과 정당들(‘동방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선거에서 선출된)을 사실상 사고 팔면서, 미국, 유럽 등의 정보기관과 공식/비공식적인 동맹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자본주의’의 경제, 사회적 상황들은 본질적으로 이전의 사회주의체제 당시 실존하던 완전 고용, 안정적 성장, 복지 보다 못하다. 개인적인 삶에서 봐도 고용, 노후생활, 저축, 생활의 공적, 사적 안전성 측면에서 옛 사회주의 체제는 ‘범죄집단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훨씬 안전한 시스템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옛 공산주의 국가들은 노동자들의 사회적 수요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했고, 소득 불평등을 억제했으며, 대외정책에서도 자국의 이해를 지킬줄 알았다. 또한 경제의 주요 부문을 산업화했고 소유했다. 그러나 새로 도입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정치가들은 자국의 모든 주요 산업을 해외나 특정인에게 팔아 넘겼고 기괴할 정도로 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보건과 고용은 무시된다.

쿠바 사회주의는 건재하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자본주의 15년’과 ‘이전의 15년’을 비교해보면, 오히려 사회주의 당시에 시민들은 질적으로 훨씬 우월한 삶을 누렸다. 이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제 ‘신생 자본주의 사회’인 러시아, 동유럽, 중앙아시아를 쿠바 사회주의와 비교해보자.
 
쿠바 사회주의는 소련과 동유럽의 자본주의화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산업 생산과 무역은 60% 하락했으며, 쿠바인의 1인당 칼로리 섭취량도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유아사망률은 1989년의 1천명 당 11명에서 2003년엔 6명으로 하락했다. 한편 러시아가 국민소득의 3.8%를 공공 보건에, 1.5%를 사보험에 쓰는데 비해, 쿠바는 16.7%를 사용한다. 남성의 예상 수명도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에서는 58년이지만, 사회주의 쿠바에서는 74년이다.

자본주의 국가 폴란드에서는 실업률이 21%로 뛰어 올랐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3%로 떨어졌다.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마약과 조직범죄자들이 날뛰고 있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청년실업자들을 위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젊은이들은 기술을 배울 때마다 봉급을 받고 일자리를 제공받을 수도 있다. 쿠바에서는 과학기술(특히 생명공학과 약학)이 계속 발전해왔으며 이젠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상태이다. 이에 반해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과학 인프라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 국가들의 과학자들은 이민을 가거나 국내에 머물러도 먹고 살 수가 없다.

쿠바는 정치, 경제적으로 자주성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에 군사적으로 예속되어, 발칸반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용병을 보내 미 제국주의에 봉사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재 쿠바의 의료인 1만4천 명은 남미와 아프리카의 최빈곤 지역에서 그곳 정부와 협력해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쿠바는 하이티에도 의료인 5백 명을 파견했다.

산업 측면에서 보면 쿠바에서는 대다수 산업이 국민적이거나 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시장 부문도 존재하며, 외국자본과 합작한 벤처회사도 영업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우 거의 모든 기간 산업과 언론매체, 문화산업 등의 소유권을 해외로 넘겨 버렸다. 쿠바는 기초 식량, 주택, 보건, 교육, 스포츠 등에서 사회적 안전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실업자와 저소득자들이 재화와 서비스로의 접근에서 배제되고 있다.

사회주의 운동의 새로운 전망

이렇게 경제․사회 지표들을 비교해 보면 쿠바의 ‘개혁 사회주의’는 동유럽과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 보다 훨씬 낫다. 윤리, 문화적 측면에서 봐도 쿠바의 경우 비록 1990년 이후 관광 부문의 성장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만, 마피아가 주도하는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마약, 성매매, 미제국으로 종속 때문에 부패한)보다 우월하다.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수백만 명을 감염시킨 에이즈에 대해서도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예방중심적이며 인간적인 의료 시스템으로 대처하고 있다. 에이즈에 대한 무료 의료, 무료 약품, 광범위한 공공 보건 프로그램 및 교육은 쿠바의 에이즈 발병률이 개발도상국 중 가장 낮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분명히 관광산업과 저소득으로 인한 성매매가 존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한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와 동유럽에 도입된 자본주의가 그 이전의 체제 보다 모든 경제, 사회적 부문에서 훨씬 열악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한 논쟁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쿠바의 성과가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을 뛰어 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된 사회운동들이 자치(사파티스타), 토지소유 민주화(브라질의 MST 운동), 자원에 대한 민주적 통제(볼리비아)에서 실질적인 변혁을 이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 제국주의가 제공하는 것, 그리고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이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것 보다 훨씬 우월하다.

이렇게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사회주의는 과거의 복지국가에 쿠바식 인간적 사회 프로그램과 사회 안전망, 사파티스타와 MST의 자치 실험을 결합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기사는 디지털 말에서 제공한 것이며 이종태기자는 월간 말 편집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기사입력시간 : 2004년 07월28일 [04:00] ⓒ 진보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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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권력] 발기문(draft ver) (부제 : 조심해!)

마징가Z와 메칸더V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아무리 마징가Z가 '기운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 인조인간 로보트고 무쇠팔 무쇠다리 로케트 주먹'이라도 메칸더V는 '원자력 에너지에 힘이 솟'고 '용감히 싸운'다. ^^
원자력 에너지는 무쇠도 파괴한다. 그리고 마징가Z, 메칸더V ..... 알파벳에서 'Z'보다 'V'가 먼저다..
결론, 메칸더V가 더 싸움 잘 한다.

종교적으로 누가 옳고 그르다.. 라는 싸움.. .대부분 신앙의 대결은 믿음과 신념, 자신의 가치를 재료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서 처럼 논리나 이성적 관점에서 보면 옳고 그름이 명백치 않다.
불신자의 관점에서 보면 보수기독교단과 여호와증인과 똑같다.
즉,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믿음'의 체계이기 때문에 이성의 칼로 난도질 하기에 너무 형체가 투명치 않다.
아퀴나스가 그랬던가? 종교는 이성(과학)과 신앙(믿음)이 양쪽 날개를 펴고 나는 새와 같다고...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이 '이성'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시론을 작정하고, 의지를 갖고 시작하려는 이유는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는 종교인(기독교인)이고 우리의 접근법, 논의, 교의를 똑같이 아끼기 때문이다.
퇴화되지 않으려면, 아니 더욱 정당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그것들에 대해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는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정의도 필요하고 질서도 필요하지만 "정의보다 우선되는 것은 질서"라고 밝히고 있다.
종교의 영역에선 질서보다 정의(진리)가 우선이다. 왜? 이것은 내세와 모든 질서의 근거가 되니까...
그리고 진리(정의)가 없는 신앙이 존재할까?
가령 내가 믿는 교의과 진리가 확실치 않은데 종교를 위해 목숨도 버릴 각오(순교) 가 가능한가?


난 우리가 믿는 신(하나님)이 기운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구태한 당위적 접근법에 반대한다. 그리고 근거를 알 수 없는 권위적 '율법'도 부정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종교(기독교)란 수동적, 정적 메커니즘에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생명력이 적나라하게 들어나 있는, 살아 팔딱 뛰는 유기체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역사적으로 본받을 만한 선진들이 바로 이렇게 살았으니까...
그래서 야심차게 해보고 싶은 것, 개혁, 수정, 보다 옳은 진리를 찾는 것...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져 과거의 메커니즘과 가치들만 붙든 채 점점 벌어지는 시대와의 간극을 아예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이 타락했네.. 한탄하며 세상과 절연하고 살겠다는 비장하기까지 한 태도.. 그리고 초기 기독교 부흥기 때 있었던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단어들과 거리가 먼 보수의 자리를 꽤차고 있는 우리의 현주소.
우리는 과거의 도그마를 인정하지 않는다. 과거의 악용/오인된 습속도 버리지 않는다.
이때 [넘버3] 보스가 하신 말 "세상은 눈깔 튀어나오게 팍팍 돌아가는데 넌 언제까지 재떨이 타령만 하고 있을꺼야....!! "


세상에 불화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남들처럼' 살길 바란다던 어머니 말씀이 또 생각난다.  하지만 비장하게, 대차게 가야지.. (기질이 이런 걸..)


ps. 제목에도 썼지만 이 문서는 초안이고 언젠가 체계를 갖고 진지하게 수정하겠다..

 + 정말 쪽 팔린 일련의 사건들..
화이트 앤젤, 기독교 극우 근본주의자들의 초등학교 단군상 참수 사건, 김선일씨 죽음을 둘러싼 온누리 교회의 태도... 그리고 이명박 시장의 서울 헌납... 그 외에도 조직적이고 개인적인 기독교인들의 스스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들...

정말 같은 기독교인인게 쪽 팔리다..
다른 사람이 종교가 뭐냐고 물어보면 러시아 정교나 루터교라고 말하고 다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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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9/11

나도 봤다.
추악한 부시의 이라크를 대상으로한 전 세계 유린/기만전을 낱낱히 폭로하고 있다.

종로나 신촌에 출몰하는 서양인들 팔짱끼고 다니는 '일부' 아가씨들(사실 난 이들을 속으로 양갈보, 양공주라고 비하한다.. 물론 '일부'다.. ^^;) 그 Mr.들하고 필히 관람 부탁 바람...!!

무고하게 미국 무기에 코가 깨지고 머리가 찢어지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조직적 테러를 목격하고 다시 한번 반전주의를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이렇게 상처받고, 친구와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불구가 된 아이들은 미국인들의 차세대 주적이 될 차세대 알카에다 전사들이 된다. 이 끊을 수 없는 피비린내 나는 상속관계 !!

전쟁은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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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딴지일보 (http://www.ddanzi.com/new_ddanzi/movie/4074/mo4074_best_051.asp)

최근의 전 세계적인 반전, 반부시 정서가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란 궁극의 갑빠와 결합, 마침내 초절정 정치적 올바름 영화의 화신처럼 되어버린 <화씨 9/11>이 드뎌 울나라에 상륙했다.

제목과 달리 당 영화, 9.11테러 자체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음이다. 2000년 미대선과 9.11테러, 아프가니스탄 공습과 이라크 침략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부시와 그 똘마니들이 대중을 기만하기 위해 행한 광범위한 가라와 사실 은폐가 어떻게 진실을 왜곡했는가, 고걸 알기 쉽게 갈켜주는 게 당 영화의 목적되겠다.

그리고 느무느무 당연하게도 당 영화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정치적 효과는 마이클 무어 스스로도 주장하듯, 부시 쉐이를 백악관에서 끌어내리고, 혼자서 카우보이 놀이하며 자빠질 수 있게 텍사스로 돌려보내는 데 있다.

이 같은 주장을 위해 당 영화 대략 세 가지의 방식을 이용한다.

첫 번째, 다큐의 본래적 성격이라 할 수 있는 현실고발기능을 십분 발휘,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무척 궁금한 다양한 자료화면들을 통하여 빈 라덴 가문, 사우디 왕가, 탈레반 지도자들과 부시 가문간의 석유와 돈을 매개로 한 유착관계를 뽀록 낸다.

두 번째, 부시와 그 똘마니들의 무능과 가라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적재적소에서 편집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9.11 테러의 순간, 그 소식을 듣고도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부시의 모습을 시간 경과별로 자막까지 넣어가며 친절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라던가, 부시일파가 9.11의 책임을 이라크로 돌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라크와 후세인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편집한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 백악관과 의회를 지배하고 있는 전쟁광 쉐이들과 이들에 의한 피해자들간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고도의 정밀폭격으로 민간인 피해는 없을 거라는 럼스펠드의 인터뷰 뒤에 미군의 폭격으로 아수장이 된 이라크 민간인 지역의 처참한 광경과 가족을 잃은 이라크 여인의 절규가 이어지는 장면. 500여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고작 1명의 자식만이 참전한 미국의 의회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입대하는 것 외에 별 희망이 없는 미국 빈민가 모습간의 대비가 그것이다.

당 영화, 단순히 내용만 보면 졸라 진지하고 무겁고 지루할 것 같지만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이거 만든 마이클 무어란 넘 다큐멘터리 재밌게 만들기로 유명한 넘이다. 우덜이 좃선 데리고 놀 듯, 이 넘 주특기가 권력 가진 꼴통들 염장 달구기다. 당 영화에도 꼴통들 뻘짓하는 화면에 조롱 섞인 나레이션을 깐다거나, 법도 안 읽고 어처구니 없는 법을 통과시킨 의원넘들에게 직접 법을 읽어주는 이벤트를 감행하는 등, 이 넘 영화의 전매특허가 고스란히 살아있음이다.

무엇보다 이라크 파병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작금의 울나라 상황에서, 울나라 정부가 가담하려는 일이 뭔 짓인지 똑똑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 영화, 남다른 의미가 있다 하겠다.

이런 전차로 당 영화를 온 국민 관람가 등급인 베스트에 봉하는 바이다. 이상.


베스트/워스트 선정 특별위원회
(
movie@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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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노회찬 난중 일기에서 '영화 <화씨 9/11>을 관람하였다' ( http://www.nanjoong.net/board/view.php3?club=&mode=view&id=866&page=1&num=85&nowpos=71&type=&sermun=&qu=§ion=election&tb_name=notice )

7월 19일 (월) 맑음


공식일정이 없어 종일 의원실에 있는데도 시간이 모자란다.

찾아오는 기자들이나 손님들을 반갑게 맞지만 마음은 부담스럽다.


용산미군기지 이전비용에 대한 감사청구 기자회견을 22일 갖기로 최종결정했다.

언론들은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감사원 감사를 최초로 청구하는 데 모아져 있다.

일부 언론은 이전비용의 적실성과 한미간 부담 비율 등으로 관심을 넓히고 있다.

그러나 이 사안은 거기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부일 뿐이다.


법사위 활동에 대한 분석에 착수했다.

역대 활동 자료에 대한 분석을 마치면 관련단체, 전문가 면담과 현장탐방을 추진키로 했다.

이 모든 것을 8월 초까지 마쳐야 한다.


영화 <화씨 9/11>을 관람하였다.

개봉 전 시사회의 성격을 갖기는 했으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줄 예상하지 못했다.

연예부 기자들은 민주노동당이 <문화>를 통해 정치를 말하는 게 신기한 듯 묻는다.


사실 문화는 배부른 사람들의 관심사라는 생각이 아직 진보진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진보정당에 있어서 문화와 문화적 접근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계급사회에선 <지배계급의 문화가 지배적인 문화이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문화>를 자포자기하는 근거로 오용되어선 안된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 것은 <진실의 힘>이자 <예술의 힘>이다.

지하철에서 이 영화홍보전단을 나눠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민주노동당 동료들은 밀려든 관객의 열기에 고무되었다.

좌석이 모자라 통로에 앉고 일부는 서서 보는 상황이 되자 단병호의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벽 쪽 통로에 기대서서 관람하였다.


그의 결벽증에는 인간의 체온이 담겨 있다.


서서 보느라 혼났다는 아내와 함께 모처럼 일찍 귀가하였다.

올해도 여름휴가를 갖지 않을게 뻔해보였던지

아내는 처제들과 며칠 쉴 계획을 추진 중이다.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다.


성각스님께서 글씨를 보내 주셨다.

마음은 이미 남해 망운암 중턱에 올라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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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씨네 21 리뷰 ( http://www.cine21.co.kr/kisa/sec-003100100/2004/07/040720121421014.html )
Key ‘스토킹 무비’의 대가 마이클 무어의 안티-부시 프로파간다 영화.

올해 칸영화제가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에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궁지에 몰린 영화미학에 돌파구를 마련해줄 대안적인 영화형식으로서의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에? 심사위원장이었던 타란티노의 궁색한 변명이야 어찌됐건 <화씨 9/11>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누가 뭐래도 확실히 정치적인 제스처였다고밖에는 달리 판단할 길이 없다. 무어는 화씨 911도가 “자유가 불타는 온도”라고 말했다지만, 생각건대 그것은 영화가 타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온도이기도 한 것 같다. 그는 기꺼이 미학을 찢어발기고 논리를 포기하면서 프로파간다의 길을 선택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화씨 9/11>은 걸작의 반열에 오르기엔 한참 못 미치는 영화이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부시 대통령의 온갖 행태들에 반감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원할 법한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또 들려주는 영화다. 부시 가문과 빈 라덴 가문의 긴밀한 유착관계, 자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 하기 위해 공화당 정부가 취한 온갖 비열한 술수들, 명분없는 전쟁에 투입됐다 죽거나 다친 젊은이들, 졸지에 집과 가족을 잃고 분노에 차 있는 이라크 민간인들 등등 <화씨 9/11>이 다루고 있는 이러한 것들은 조금도 새로운 것은 없지만 여하간 우리가 공적인 미디어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것보다는 훨씬 강도 높게, 또 선동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로저와 나>(1989)에서부터 이미 분명해졌듯이 그의 장기는 브리콜라주(bricolage)와 캐리커처(caricature), 그리고 무엇보다 스토킹(stalking)에 있다. 즉 뉴스화면, 극영화, 그리고 직접 촬영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조합하고, 특정 사안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 하나를 골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퍼부어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황색 저널리즘의 좌파적 전유라 할 만한 것이다. 또한 무어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그 특유의 과장과 조롱, 풍자에 의해 변형되어 지극히 희극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물론 <화씨 9/11>은 (9·11 테러 자체를 직접 보여주는 대신 장시간의 암전 뒤에 뉴욕시민들의 놀란 표정을 하나씩 보여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무어의 전작에 비하면 약간은 조심스러워졌고 또 신중해진 게 사실이다.

<화씨 9/11>에서 무어가 제기하는 비판과 주장은 넓게 보면 대부분 수긍할 만한 것이다. 솔직히 감히 누가 그의 견해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어떤 점에서 무어의 논변은 전체적으로 볼 때 일종의 ‘우물에 독 타기’(poison in the well)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문제는 그의 견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개되는 방식에 있다. 무어는 <로저와 나>, <볼링 포 콜럼바인>(2002), 그리고 <화씨 9/11>에서 언제나 쟁점이 될 만한 핵심적인 문제를 곧바로 제기하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수다는 종종 지엽적인 것으로 향하고 또한 지엽적인 것을 과장함으로써 원래의 논지를 흐리곤 한다. ‘무능한’ 대통령 부시가 백악관 참모들과 결탁하여 9·11 사태에 뒤이은 대중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게 된 경위를 비판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기는 하지만 여기엔 위험천만한 제노포비아(xenophobia)적 사고 또한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무어는 9·11 직후 미 정부가 빈 라덴 가문의 일원들이 국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치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해, 부시 가와 빈 라덴 가의 오랜 유착관계를 파헤치고 나서, 갑자기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이 미국 경제의 7%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가- 전형적으로 마이클 무어적인 치기어린 질문, “만일 그들이 돈을 다 빼내간다면 우린 어떻게 될까요?”- 를 강조한다.

결말부에 이르기까지 <화씨 9/11>은 9·11 사태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치의 역학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침묵한다. 대신 순박하고 애국적인 시민들이 국가권력의 거짓에 속아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가를 고발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점에서 <화씨 9/11>은 미국인의, 미국인에 의한, 미국인을 위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보수적인 백인 민주당원임을 자처하는 한 여성이 이라크로 파병된 아들을 잃고 나서 백악관을 서성이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감동적이라기보다는 감상적이다. 무어 자신이 상원의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자식들을 이라크로 보내라고 권유하는 것은 <화씨 9/11>의 논리적 허점들을 다분히 치졸한 방식으로 메워보려는 시도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화씨 9/11>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주장이 얄팍한 지성과 조우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거의 모든 폐단을 안고 있는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일씨 피살사태 및 이라크 파병문제 등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재의 상황하에서라면 이 영화가 어느 정도 유효하게 기능할 수 있으리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 ‘안티-마이클 무어’ 영화제

보수주의자들, 무어에게 이의를 제기하다

제작과정에서부터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화씨 9/11>은 이제 미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과연 이 작품은 부시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이때 마이클 무어의 반대자들이 ‘안티-마이클 무어’ 영화들을 모아 영화제를 개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눈길을 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제는 미국 내 거물급 보수주의자들의 후원을 받아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올해 9월9일에서 11일까지 댈러스에서 열릴 예정이며 대략 24편 정도의 영화가 상영될 것이라 한다.

이 영화제를 기획한 이들은 텍사스에 거주하는 변호사 부부인데, 남편인 짐 허버드는 영화제를 구상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언제나 영화 속의 문화적, 정치적 메시지들에 흥미를 느껴왔다. 솔직히 영화 속에 나타난 그러한 메시지들은 언제나 진보주의적이었다. 근 40년 동안 좌파들이 독점해왔던 이러한 영화들에 대해 우리는 이의를 제기하려 한다.” 허버드가 현재 교섭 중인 작품 가운데는 <마이클 무어는 미국을 증오한다>(마이클 윌슨)와 <마이클과 나>(래리 엘더) 같은 영화들이 있는데, 이 두 영화의 연출자들은 모두 무어가 자신의 영화에서 그러했듯이 그와의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한편 마이클 무어는 이런 영화들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영화제에서는 노골적인 ‘안티-마이클 무어’ 영화들뿐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들도 상영될 예정인데, 역시 영화제의 보수주의적 색채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은 작품들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여간 <화씨 9/11>이 불러일으킨 파장은 급기야 다큐멘터리 영화계에 대대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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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유

흔히 '리버럴'이란 입장을 보이면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의 '자유'를 얘기하지만 나에게 있어서의 자유는 ROCKER나 히피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적 자유다.


사실 나에게 자유란 실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모든 개념과 대상에 대한 정의를 내가 내리겠다는 자유... 타인으로 부터 나의 사상과 관념을 나의 기호와 취사를 간섭받지 않고 독자적 울타리에서 주유하고 싶은 자유..

하지만 '신자유주의'적인 이 대한민국, 그리고 더 '신자유주의'적인 서울에서 자유주의자로 살기엔 너무도 답답하고 심신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다.

문화적,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일괄 시스템에서 자유주의자는 언제나 익셉션으로 처리된다.

아래 해체론을 말하면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이 일괄 시스템에서 '다름'을 주장하는 데엔 치졸한 보복이 따른다.
수능식 비효율적 걸러내기 필터를 거부함에 따른 보복, 신앙적 양심에 의해서 다른 형태의 복무의 의무를 담당하겠다는 집단을 깜빵 보내는 보복,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겠다는 경계인에게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을 때리는 보복, 직장에서 불합리한 상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데 따르는 보복.... (이런 공감대로 인해 내가 요즘 이들에게 유달리 관심을 보였나 보다..)

버나드 쇼가 말한 "사상의 자유는 그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터무니없다고 할지라도 표현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 로자 룩센브루크가 말한 "나에게 자유란 언제나 정치적 반대자의 자유"...
이렇게 다양성과 이질성을 관용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다시 자연인으로서의 '자유'로 돌아가서... ^^;
락커는 자유를 찾기 위해 저항한다. 자유는 거기에 따른 투쟁이 따른다. 그러므로 자유는 흔히 말하는 것 처럼 말랑말랑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고생해서? 얻은 자유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유로운 나'에 의미를 둔다.
그렇다면 이 자연인으로서의 자유란 무엇일까?
방해받지 않고 관여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탐닉할 수 있는 상태를 바랄 것이다. 이것은 나름대로의 열반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리버럴'이란 단어는 일반 통념적인 수식이 아니다.

나에게 자유는 빠삐용 가슴의 나비처럼 그냥 '나 나름 자체'로의 자유다..



이 형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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