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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가보자.

이 글은 퍼온것 임.

 

지리산은 투쟁을 시작하는 우리들에게는 동경의 성산(聖山)이었습니다. 동경은 언제나 그리움을 낳았지만 쉽게 가지지는 않았던 산이었습니다.

그 지리산을 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가고 싶었던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함부로는 가기 싫었던 산이었습니다. 지난날 우리들의 선구자들이 그 산을 배경으로 아리따운 젊음과 사랑을 모두 바쳐 저항하고, 투쟁하였던 현장이기에 포시라운 우리들의 현재로서는 쉽게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성스러운 산을 단순하게 호기심만으로 접근한다는 것, 그것도 선열들에게 참으로 죄스러웠다고 할까요...

그러던 내가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불현듯 지리산을 가게된 것은 현장의 산악회에서 6월 정기산행으로 지리산코스를 잡았다고 하는 공고를 보고 나서였습니다. 공고는 인터넷에 떠오르면서 마치 너 안가면 안된다는 메세지를 강력히 쏘는 것 같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평상 시에 그렇게 망설이던 지리산행을 이렇게 쉽게 할줄 알았더라면 진작에나 시도해 볼 것을...

산행코스는 산청군의 거림매표소에서 시작하여 세석산장으로, 다시 촛대봉으로 가서 삼신봉, 연화봉을 거쳐 장터목산장으로갔다가 천왕봉으로 오르는 코스입니다. 거기서 바로 아래의 깎아지른 비탈을 타고 법계사를 거쳐 중산리매표소 쪽으로 내려오는 장장 9시간여의 산행입니다.



울산에서 아침 6시에 출발을 하였습니다. 마침 토요일이라 고속도로엔 차가 그리 많지 않은 관계로 약 3시간을 소요한 끝에 9시 조금 넘어 산청의 거림매표소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평상시 노동현장에서 함께 생활하던 동료들인지라 그리 낯선 조건이 아니다보니 쉽게 어우러져 서로간의 믿음 때문인지 긴 산행을 앞두고 있었지만 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야 실토한 것이지만 내가 이 산행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게된 사람들은 혹시 산행도중 낙오라도 하면 어쩌나하는 불안감 때문에 노심초사하였다는군요. 마찬가지로 나도 이번 샌행에서 혹여나 내가 들어 산행을 망치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버스를 타고 가면서 여러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런 불안감은 어느새 날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거림매표소에는 아직 사람들이 붐비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매표소 주차장 아랫쪽의 개울에 놓여진 다리가 아름다운 계곡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습니다. 간단한 주의사항을 등반대장으로부터 듣고난 후 바로 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어차피 이런저런 사진을 찍는다, 경치 구경한다 하며 늦을 것을 예상하여 처음은 선두그룹을 뒤처져서는 안되겠다하여 허겁지겁 따라 붙었지만 이내 저멀리 처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홀가분하게 이런저런 경치나 역사를 생각 하면서 느긋하게 오르게 되었습니다.



거림매표소에서 출발하기 직전입니다.
힘차게 출발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긴 산행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리산은 경남 산청과 하동, 함양 그리고 전남 구례, 전북 남원 등 3도 5군에 걸쳐 위치하고 있습니다. 둘레는 320km, 동서 길이 50km, 남북 32km, 면적 440.5km(1억3천만 평)에 달하는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설악산의 1.2배, 한라산의 3배를 자랑한다는군요. 1967년 12월29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는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으로 숭배받았답니다. 또한 백두산과 묘향산, 금강산, 구월산과 더불어 신라오악으로 숭상되던 영험한 산이랍니다.

산이 깊다 보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골짜기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제각기의 전설과 역사를 담아 산의 역사보다 더 많은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는데 특히 지난날 대역죄인이나 여염에서 함께 누리지 못할 사람들이 그 깊은 한과 증오를 담아 이 깊은 골짜기로 스며들어오는 그야말로 은신처 역할도 마다 않는 산이었습니다. 특히 근래에는 일본의 침탈과 회색 반공주의자들의 학탈에 항거하여 홀홀이 산으로 들어와 항거한 항쟁의 현장이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 내려 이곳까지 이러렀다고 하여 이 산의 본래 이름은 두류산(頭流山)으로 불리워 졌는데 산세가 멀리 넓게 둘러 있는 것을 의미하는 우리말 '둘러, 두루, 두리'의 한자음사(漢字音寫)로 본다는 학계의 견해도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 익숙해진 이름으로 굳어진 지리산은 '어리석은 사람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산'라는 말도 있고, '특이한 지혜를 간직한 산'이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한편 옛 문헌에는 고대 불교에서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이 이 산에 머물면서 불법을 지키고 중생을 깨우치는 도량으로 삼았기 때문에 문수사리의 '리'자를 따서 지리산으로 하였다'고도 한다는군요. 또한 삼신산, 방장산으로도 불리워 졌으며, 이성계의 제를 지낼 때 소지가 타오르지 않았다고 하여 불복산이라고도 하며, 빨치산의 오랜 활동으로 인하여 적구산이라고도 불리어졌답니다. 산이 품은 기상이 스스로 긍정적 삶의 의미를 거부한다해서 반역산이라고도 불리워진 이 산은 이름만큼이나 많은 죄인(?)들을 품은 산이 되었었지요.



거림골에서는 시작부터 거친 오솔길로 되어있습니다.
거림쪽의 계곡은 힘찬 물소리로부터 시작하는군요. 그 물소리로도 아늑하다는 느낌입니다.

지리산은 해발 1천미터가 넘는 봉우리만도 20여개에 이르고, 그 사이사이에 펼쳐진 깊은 골 또한 70여개니 100여개니하며 정확한 숫자를 모를 정도라고 합니다. 이름이 알려진 것만 열거해보아도 화개동, 악양동, 청학동, 덕산동(현 중산리계곡), 밤밭골(대원사계곡의 지곡(枝谷)), 마천동, 칠선동, 백무동, 뱀사골, 들돌골(뱀사골 상류일대를 일컬음), 피아골, 연곡골 12동천, 빗점골, 대성골, 고운동계곡, 거림골, 내원사 계곡, 장당골, 대원사 계곡(일명 유평계곡), 한판골, 신밭골, 조개골, 한신골, 견성골, 광대골, 와운골, 달궁계곡, 심원골, 화엄사계곡 등 무려 30여개를 넘을 정도로 광대하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계곡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한번 지리산으로 흡수되어 버리고 나면 본인이 나타나기 전에는 결코 찾을 수 없다고 하여 지난날 나라의 대역죄인으로 몰리거나, 동네에서 얼굴 내 놓고 지내기 어려운 조건에 처한 사람들이 한사코 지리산으로 들어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시원한 물소리를 동무삼아 걷는 등산길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우거져 있었습니다.
간간이 펼쳐지는 길가의 세죽들이 힘든 산행을 마중하고 있었습니다.







거림골은 오르는 길목마다 아름다운 다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다리들이 산과의 조화 속에서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더군요.







길 가에 솟아 나온 나무 뿌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밟았는지 반들반들 닦여져 있었습니다.
저 나무를 50여년 전의 빨치산도 밟고 지나다녔겠죠.

아니 빨치산을 토벌하던 토벌대도 밟았을 것이고, 반공 이데올로기 주입을 위한 교육의 현장에서도 밟았을 것이 겠죠. 그 길을 오늘 내가 갑니다. 그 나무를 밟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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