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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왜 흥행에 성공하나?

(추가 수정)

얼마전 괴물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봉준호 감독이 만든영화여서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가 내 머리에 남아서 였을까 신문방송에서 괴물이 대박을 터트렸다는 기사로 도배질했을때 나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배급사가 청어람이라는 곳이였을 게다. 잘알지는 못하지만 이름은 쌈박해 보인다.

대박기사를 보며 흐뭇해 하면서도 나는 선뜻 영화를 보지 못했다. 대박 기세가 너무 가파르게 치고 올라 한국영화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어서 였다. 이러면 스크린쿼터가 시작된 마당에 이영화 하나로 한국영화를 걸어버리면 나머진 외국영화만 걸어도 되는게 아닌가?

 

물론 그럴리 없다.

하지만 알짜배기 영화가 흥행성이 없으면 아예 걸리지 못하게 되는건 당연한것 아닌가 .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를 사수하자며 한동안 지면을 잠식하더니 이젠 잠잠해지고 ...

괴물이 흥행몰이가 계속되자 한곳의 멀티영화관에서는 거의 절방에 가까운 관람실을 괴물로 채웠다. 그러니 다시 이 영화 하나가 스크린쿼터제를 들썩이게 만든꼴이 되었다.

 

이제 영화 ‘괴물’이 개봉 21일 만인 16일을 전후해 1000만 관객을 돌파할 전망이다. 13일 괴물의 투자 배급사 쇼박스에 따르면 12일까지 관객은 866만 명으로 16일쯤 1000만 명을 넘어설 예정.

이 경우 괴물은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에 이어 네 번째로, 그것도 최단기간에 ‘1000만 관객 영화’가 된다. 왜 괴물이 흥행에 성공하는가?

첫째로는 감독의 지명도이다. 그는 섬세한 감독으로 평이나있고  이번에도 자신의 전작에 출연한 배우들로 성격을 짓고 스토리를 구성했다 한다. 이에 배우들의 명연기도 빛을 발했다. 연기력이 돋보이는 배우들로 주연조연을 처리했고 맛깔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괴물은 이러한 감독과 연기자의 일치된 힘이 흥행을 낳은결과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데 그 이유로는 영화의 힘에 배급력이 더해졌다는 게 정확하다는 쇼박스 김태성 부장의 말이 설득력있다. ‘괴물’ 흥행의 원인으로 전국 스크린 수(1648개)의 38%에 이르는 620개의 스크린을 ‘독점’했다는 비난 섞인 분석이 많았다.  
 
‘될 영화’인 것은 분명했지만 최단기간 기록 행진은 스크린 수의 덕이 크다는 것. 멀티플렉스마다 가장 큰 상영관을 차지한 것을 감안하면 실제 비율은 더 커진다. ‘왕의 남자’는 256개로 시작해 397개까지 늘려 갔다.

그러나 ‘태풍’은 540개로 시작했지만 흥행하지 못했다.

‘괴물’의 스크린 수는 620개에서 10일부터 580개로 줄었다.

 

괴물의 흥행이유로는 칸 영화제에서부터 제작보고회, 시사회까지 서서히 기대감을 높인 것이 주효했다는점이다. (제작사 청어람 심영순 마케팅팀장)

‘괴물’이 화제의 중심이 된 것은 상당 부분 ‘칸 마케팅’의 힘.

제작사는 ‘괴물’이 5월 제59회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서 기립박수를 이끌어 내고 뉴욕타임스가 “칸 최고의 영화”라고 극찬한 내용들을 발 빠르게 전하면서 마케팅에 적극 이용했다. 칸 영화제에서의 반응을 찍어 TV 광고에 삽입하기도 했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괴물’이 정말 괴물”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배우들이 토크쇼 출연 등을 자제하고 예고편의 후반 작업에만 한 달을 소요하는 등 ‘큰 영화’보다는 ‘완성도 높은 영화’라는 느낌, 뭔가 ‘있어 보이는’ 감을 줬다.

 

“한국 1000만 관객 영화의 공통점은 밝고 건강한 이야기로는 어렵다는 것. 1000만 관객 영화 네 편에서 개인이나 가족은 외부의 힘에 의해 부서진다.

고민과 위기는 그들의 탓이 아니고 무능한 권력이나 불가항력의 힘에 의해 ‘당하는 것’일 뿐. 한국인의 국가와 권력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건드려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나는 최선을 다하는데 다른 나쁜 놈들 때문에 안 된다’며 공격 대상을 정하면 관객이 쉽게 공감한다. ”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형제는 전쟁에 휘말리게 되고 가정은 풍비박산이 된다.

‘실미도’에서는 부당한 국가권력에 의해 개인이 억압과 배신을 당한다.

‘괴물’에서는 괴물, 나아가 미국이라는 존재가 소시민의 삶을 망가뜨린다.

 ‘왕의 남자’는 조금 다르지만 왕과 광대 모두 피해자인 데다 태생적으로 슬픈 존재들이었다. ‘해피엔드’는 하나도 없다.

 

아래는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의 칼럼이다.

 

 

 스크린쿼터사수는 대선공약
| 강준만칼럼 2006.05.02 22:51


인터넷 패권주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통 매체들이 인터넷에 굴복하고 있다. 인터넷의 강점은 무엇인가? 유통 파워다. 자체의 콘텐츠 생산 능력으로 보자면 인터넷 포털업체는 신문사의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감히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신문사에 대한 모독이다. 그럼에도 신문사들이 포털에 납작 엎드린 이유는 우리 시대의 대중이 ‘접속’을 의식주(衣食住)에 이은 삶의 4대 요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접속’의 흔적인 댓글마저도 콘텐츠로 축적되는 세상이다. 우리 시대의 콘텐츠는 동어반복이다. 남들이 관심을 갖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다. 검색 순위에서 밀려나면 있어도 없는 게 된다. 빼어난 콘텐츠는 반드시 빛을 보게 돼 있다는 속설은 믿지 않는 게 좋다. 콘텐츠는 기본일 뿐, 대중은 주류 유통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콘텐츠를 만날 길이 없다.

 

●정부 고충 있겠지만 방식이 비겁

 

인터넷을 기반으로 삼은 신경제의 문법은 오프라인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통산업의 거대화는 유통을 엔터테인먼트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백화점과 할인점 애용자들이 단지 상품 콘텐츠 때문에만 그곳을 찾는 건 아니다. 그들은 재래시장에선 찾을 수 없는 편의와 쾌락을 동시에 즐기고자 한다.

사정이 그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콘텐츠 파워에 대한 신앙은 여전하다. 왜 그럴까? 우리는 유통 권력에 대해선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스타는 콘텐츠 스타다. 영화배우 이름은 알아도 제작ㆍ배급사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베스트셀러 작가 이름은 알아도 출판사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지키기 투쟁에 대중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영화인들의 책임도 있다. 극소수 영화가 ‘대박’이 터질 때마다 대박 관련 영화인들은 “대다수 영화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말을 반복해서 강조했어야 했다. 인터뷰를 하는 기자들에게 사정을 해서라도 다른 다수 영화인들의 비참한 처지가 널리 알려지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좋은 홍보 기회를 다 놓치고 말았다.

대중은 영화시장에서 유통 권력이 누리는 괴력에 별 관심이 없다. 자신이 최근 본 영화들이 대부분 한국영화였다는 기억만으로 콘텐츠 파워를 신봉하는 것이다. 정부는 그 점을 노리고 ‘왕의 남자’라는 대박 분위기를 이용해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을 발표한 건지도 모르겠다. 정부의 고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방식이 비겁했다. 지원책이라고 내놓은 것도 엉터리였다.

스크린쿼터제가 없어진다 해도 ‘왕의 남자’와 같은 대박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인들이 염려하는 건 영화산업 전체다. 정부가 그 염려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대안을 모색하고자 했다면, 영화인들이 지금처럼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선 사과하면서 격려했어야

 

묘한 일이다. 유사 이래 현 정권처럼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 정권도 없었건만 왜 이리 진정성 없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 드는지 말이다. 스크린쿼터제 사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기에 그걸 뒤엎고자 한다면 더욱 진정성을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닐까?

국산영화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졌다는 이유는 너무 궁색하다. 대선공약이 나온 2002년에도 국산영화의 시장점유율은 48.3%였다. 아니면 대선 땐 몰랐는데 이젠 스크린쿼터제 사수가 영화인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불과하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든가 하는 무슨 해명이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노 정권에게 최소한의 염치라는 게 있다면, “영화인들의 주장이 타당하지만, 형편이 이리 됐으니 죄송하게 됐다, 우리 한번 최선을 다해 미국 영화들과 붙어보자”고 사과하면서 격려했어야 했던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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