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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남자와 종이가 필요한 여자

부끄러운 남자와 종이가 필요한 여자

호 성 희 | 여성국장
 

난처함..그리고 화나는 이야기

나는 주말에만 약국에서 일을 하는데, 종종 당황스런 ‘사건’들을 겪게 된다.
대표적인 것인 ‘마취제 사건’이다. 한 아저씨가 들어와서 마취제가 있냐고 물어봤다.
“마취제요? 이제 약국에선 주사제를 다루지 않는데요..”
정말 없냐고 반복해서 묻는 아저씨한테 나는 의약분업 후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열심히 설명한다.
“그런데..마취제는 왜?...”
“에이~! 쪽팔리게...이렇게까지 말해야돼?! 거기다 뿌리는 거 있잖아!‘
전혀 모르겠다는 내 표정을 보고 아저씨는 투덜거리며 약국을 나갔다. 아저씨는 발기를 유지해주는 리도카인(마취제다^^) 스프레이를 찾았던 거다. 그런 게 있는 줄 알았나?! 내가 모르면 약국에 없는 거지..
이젠 쭈삣거리며 “저기...뿌리는..” 말만 들어도 알아서 ‘척’하고 꺼내준다. 이건 에피소드고.

대체로 병원들이 진료를 하지 않는 주말에만 일을 하는 나로선 미쳐 피임을 하지 못한 여성들이 사후피임약을 찾는 경우가 가장 당황스럽다. 엄청난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던 사후피임약인 ‘노레보’는 의사의 처방전을 조건으로 우리나라로 수입되었다(혹자는 이 과정을 의사들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처방전이 있더라도 약값(1만원)은 전액 본인부담이다.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할 수 있어야 하는 여성의 선택권은 의사의 ‘허락’과 비싼 약값을 지불해야만 주어(!)진다. 사후피임약은 성관계 후 가능한 빨리(12시간 이내 권장, 늦어도 72시간 이내) 복용할수록 효력이 높아진다. 주말이 지나면 헛된 시도가 되기 쉽상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불법행위를 한다. 그것 때문에 응급실을 가라고 할 수 없으니 먹는 피임약으로 용량을 조절하는 일종의 ‘대체용법’을 알려주는데, 이게 불법이다. 또한 이 방법은 피임의 ‘효과’면에서도 떨어지고, 부작용 가능성도 높다.

낙태합법화 국가가 선봉에 서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1일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년부터 자연분만시 산모가 따로 내야했던 본인부담비 8만원도 전액 건강보험에서 지원되고, 인큐베이터 사용료 등 미숙아 치료에 드는 건강보험 진료비도 전액 지원한다는 출산장려책을 내놨다. 반면 가족계획사업의 일환으로 보험 혜택을 받던 피임목적의 정,난관 결찰술 또는 절제술은 출산장려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강보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와 함께 예비군 훈련소에서 무료 시술되던 정관수술도 사라지게 된다. 어찌 보면,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데, 정부의 출산장려정책의 일관성이 없다는 문제제기가 신문지면에 종종 등장하였던 점에서 피임목적의 보험적용을 삭제하는 것은 정부의 때늦은 대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편에선 출산을 지원하고, 동시에 낙태는 물론 피임까지 억제하고자 하는 정부의 정책은 여성의 입장에선 정말 ‘현실성’ 없는 정책이다.

 

냉전시기 미국은 제3세계의 인구과잉은 빈곤문제를 야기해 공산화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인구통제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과거 박정희 정권은 ‘가족계획’을 국가정책으로 추진해 이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에서 피임기술과 기구는 이런 가족계획-출산억제 정책의 추진으로 여성들에게 대중적으로 보급되었다. 이런 이례적인 성공은 한국사회가 개인의 삶을 지원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거의 갖추지 않은 채 가족단위 생존전략이 유일한 상황에서, 여성들에게 출산조절의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족계획정책이 수행되기 전부터 여성들은 ‘위험한 낙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는 인구수에 관심을 기울였을뿐 여성들의 건강과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권리’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도 피임은 ‘부부’의 합의하에, ‘여성’의 책임이자 의무였을 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구를 빨리 줄이겠다는 목표 아래 낙태합법화를 시도한 세력이 박정권이었다(64년 첫 번째 시도는 사회적 반발로 실패하고, 72년 유신하에서 광범위한 인공유산을 인정하는 모자보건법을 통과시킴). 결혼한 여성들이나 독신 여성들이나 한번쯤은 묵인된 불법 낙태를 하는 상황에서 낙태합법화 운동이 벌어지지 않는 지금의 상황과 참 대조적이다.

내가 어쩌든 뭐라 하지 말란 말이야

자신의 출산력을 스스로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은 여성이 운명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삶에서 벗어나 자기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기 위한 기초적인 조건이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을 여성에게도 피임은 일상의 문제이며, 재생산과 분리된 성적 욕망을 실현하는 것 또한 침해되거나 평가받을 수 없는 여성의 권리이다. 그렇기때문이 여성이 선택하는 한에서 출산과 피임, 그리고 낙태 모두가 보장되어야 한다. 국가에겐 여성의 어떤 한 권리를 선택적으로 의무로 만들 권한이 없다. 다만, 권리를 보장할 책임이 있을 뿐이다.

칭찬하다

약국을 오는 남자손님 중...아무말 없이 두리번거리거나 쭈뼛거리는 사람..대부분은 콘돔을 찾는 중인거다. 그래서 우리 약국은 콘돔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었다. 그래도 대부분 어찌나 쭈뼛거리는지..그런 상황에서 잘 찾을 리가 없다. 그런데 알고보면 대부분 기혼자다. 계산할 때 나는 부러 붙잡고 이야기를 한다.
“왜 부끄러워해요? (속으론 ‘결혼도 했으면서~’) 여자한테나 남자한테나 참 좋은 일이예요.”
콘돔을 사러오는 남자들보다 먹는 피임약을 사러오는 여자들이 더 많다. 그리고 피임약을 먹는 여성들의 상대는 ‘콘돔’을 거부한다. 그러니 내게 콘돔을 사러오는 남자들은 더 이뻐보인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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