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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과학철학 III

*) 노동자와 과학철학II는 현장에서미래를 2006년 5월호(제119호)에 실려 있습니다.

 

[번역] 노동자와 과학철학 III

[출처] http://easyweb.easynet.co.uk/~socappeal/philosophy/chapter6.html

 

언어 철학의 막다른 골목

나는 형이상학론자들에게 스캘린(Scalinger)이 바스크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을 말하고 싶어진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샹포르(Chamfort)의 <잠언과 단상>(Maximes et Pensees), ch. 7.)

1929년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에서 캠브리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예전에 <논고, Tracticus>에서 밀고 나갔던 입장에서 많이 달라졌다[1]. 초기에 의존했던 논리-원자론에 대한 생각에 반대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 비트겐슈타인과 후기 비트겐슈타인 사이에 기묘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언어는] ‘과학적 시스템’을 대변한다는 초기 모든 주장을 거두고, 후기에 와서 그는 체계적인 사유보다는 방향감의 상실을 나타내는 연결되지 않은 문장과 느슨한 언급들에 관심을 두었다. 체계적 사유를 위해 우리는 수학 철학, 윤리, 미학 등에 사용되는 발음들을 분리해왔었다.

언어가 엄격한 원칙으로 환원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을) 접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언어는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한줌의 선험적인 원리로 결정될 수 없다. 러셀(과 초기 <논고, Tracticus>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기저에 기호 논리학이 깔려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형식논리학과 수학은 언어[를 대표하기에는] 지독히 나쁜 모델이다.

로크(Locke)는 생각을 의미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 올바른 규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규칙은 스스로 죽었다며 반대했다. 사용법을 모르는 사람의 손에 있는 자(Ruler)와 같이 그것은 단지 한 줄의 단어일 뿐이다. 규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모른다면 사람을 강제할 수도 심지어 지도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정신적인 상(image)이 언어 표현을 위한 표준(규칙)을 제공한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올바르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a) 개인의 정신적인 삶 속에서 뿜어 나오는 것은 이 사람이 혼자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언어로 전달할 수 있다.
b) 그런 ‘사적’ 언어는 결코 언어가 아니다.
c) ‘사적’ 언어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사적 언어 정의에 따르면 당사자를 제외하고 어떤 사람도 그 언어에 접근해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후기 저작에서는 해체 과정을 보여 준다. 후기 저작은 상호 관련성 없는 격언들, 일부 유용한 식견이 있지만 전체적인 시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사실 ‘학파’가 형성될 정도는 아니다. 일부는 스스로 비트겐슈타인 주의(G.E 앤스콤, 노만 말레온 등)라고 여기고 있지만 그들은 주로 ‘일상 언어’나, ‘상식’에 호소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를 형식 논리학적 규칙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는 언어 표현을 명확하게 할 수 있으므로 어떤 한계 내에서만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언어는 수백만 년 이상 진화되어 방대하고 풍부하게 변화된 강력한 도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형식논리학에서 규정된 좁은 한계내로 환원할 수 없다. 형식논리학은 극단적으로 제한된, 궁극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사고방식이다. 이 방식은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수학의 원리>에서 형식 언어로 확립하였는데, 이 논리학은 참 아니면 거짓으로 나눌 수 있는 진술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일면성을 잘 보여준다. “너희는 맞으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답하라. 그것을 벗어나는 모든 것은 악에서 비롯된 것이다(마태복음 5:37).”

그러나 일상 언어는 이처럼 제한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좁은 세포 속에 가두려는 시도들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언어를 사용하면서 단순히 ‘예’ 혹은 ‘아니오’로만 대답하지 않는다. 질문을 하고, 명령을 하고 약속을 하거나(혹은 깨거나) 믿음을 표현한다(이러한 것은 모두 논리적이지 않다). 우리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확실한 것만큼이나 확률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게다가 감정과 감성을 나타내고 표현하다. 이것들은 수식으로 나타낼 수 없지만 확실히 사람의 삶에 있어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수학의 원리>의 전체 구성이 얼마나 임의적이며 표면적인지를, 즉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간단하게 생각해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새로운 “논리학 시스템”을 개발해서 이러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형식논리학의 근본적인 오류를 분명히 지적하고 자진해서 부닥쳐 싸울 준비를 하지 않았다. 형식논리학은 그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었다. 논리학자들 중 어떤 그룹은 배중률(A는 B가 아니다)을 거부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발전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더욱이 동일률(A는 A다)은 그 속에서 모순율이 유도되기 때문에 그것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발전이 가능하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함께 언어를 그의 임의적인 시스템에 강제적으로 맞추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 후 그는 전체적인 접근이 잘못되었고,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그의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언어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다. 그리고 언어 속에는 확실히 유사하지만 상당히 다른, 심지어는 모순되는 의미를 가진 것들도 있다. 이미 헤겔은 <논리학의 과학, The Science of Logic>에서 이것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언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현대 과학에 중요한 업무이고 정보 기술 및 “인공 지능” 연구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연구를 언어의 구조에 대한 추상적인 연구로 제한 한다면, 사람의 성대에서 만들어지는 소리에 실제 내용과 의미를 부과하는 사회와 물질세계 그리고 신경계와 뇌의 작용 심리학과 생리학과 별개로 진행한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언어 연구를 순전히 문단 구조 문제로 환원할 수 없다. 언어의 사회적 역사적 토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를 그 세계의 한계로 보았다. 이누잇족(에스키모)의 언어는 다른 언어보다 눈(snow)에 대해 더 많은 단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눈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훨씬 더 정교하게 분류할 수 있다. 이들에게 눈의 종류는 사냥하는데 중요하고, 그러므로 생존과 관련이 있다. 이와 유사한 예는 모든 언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언어는 긴 기간 동안 사회적 발전의 산물이다. 언어의 내용과 형식은 반복적으로 변화되어 왔으며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매우 유연하고(fluid) 복잡한 현상을 강제적으로 임의적인 ‘논리적’ 족쇄에 속박하려는 시도는 잘해야 언어를 과도하게 단순하게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최악의 경우 많은 철학적인 실수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단순하고 엄격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 간단하고 단순해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반대로 매우 복잡하고 모순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카르납(Carnap), 라이헨바흐(Reichenbach) 등에 의해 대표되는 논리 경험주의 학파는 논리 실증주의 주류 경향을 대표한다. 이것은 모든 철학을 언어의 논리적 분석, 그리고 구문론적 분석(1930년대 까지)과 의미론상 분석으로 환원해 버린다. 그리고 이들은 물질세계의 존재에 대한 객관적 증거가 없다고 한다. 그들은 “실증적인 과학 언어”를 제공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객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도적인” 형태로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학파는 초기 입장에서 진보하고 있다. 철학적인 일반화논리를 버리고 특정 연구 영역에 대해 집중하면서, 논리 연구 분야에 있어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에이어(A. J. Ayer)

[‘당신에게 영광이 있어라!’ 그런데 네가 말하는 ‘영광’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하고 엘리스는 말했다. ‘아주 꽤 죽이는 말을 했다는 뜻이야’ 그런데 ‘영광’은 죽이는 말이라는 뜻은 아니잖아. 엘리스는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자 험프티 덤프티는 다소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내가 단어를 사용할 때, 나는 그것의 의미도 내가 선택한다는 뜻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루이스 캐롤 Lewis Carroll,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에이어(A. J. Ayer)의 글은 신-실증주의 사상가들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힌다.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매우 난해해 몇몇 사람들만 읽을 수 있는 반면에 에이어의 <언어, 진리 그리고 논리, Language, Truth and Logic (1936)>와 〈지식의 문제 The Problem of Knowledge〉(1956)는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적은 대중서이다. 에이어의 기본 가정은 ‘실증적인 과학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감각을 통해 세계를 해석한다.”는 낡은 실증주의자들의 철학을 요약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cf. 로커의 유명한 문장: “감각이 우선하지 않고서는 마음속에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마흐처럼 에이어의 모든 입장은 거의 표절이다. 에이어는 주관적 관념론을 거부하는 척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은 단지 감각-내용(sense-contents)(마흐의 감각-인상)만을 알 수 있으며 실제 세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한다. <지식의 문제>에서 그는 [주관적 관념론을 반대하는 척 하면서 실재로] 소위 소박한 실재론(소박한 유물론)에 반대하는 마흐의 정직하지 못한 주장을 거의 모두 반복하고 있다. 이런 속임수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러한 철학에 의해 옹호되는 ‘소박한 실재’는 필경 가장 값싼 궤변이다. 정신병자나 관념론 철학자의 제자가 아닌, 건전한 사람의 ‘소박한 실재론’이란 사물이나 환경, 세계가 우리의 감각이나 의식과 독립하여, 또 우리의 자아나 인간 일반과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견해이다. 그것은 높은, 작은, 노란, 단단한 등등의 나의 감각의 단순한 복합체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굳은 확신을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동일한 경험(마흐주의자의 의미에 있어서가 아니라 일반인의 의미에 있어서)이 또한 사물이나 세계, 환경이 우리와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감각, 우리의 의식은 외적 세계의 모사에 불과하고 이러한 모사는 모사되는 것(실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은(실재, 모사되는 것) 모사하는 것(의식)과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 유물론은 의식적으로 인류의 이와 같은 ‘소박한’ 믿음을 그 인식론의 기초로 삼는다.” (레닌 저작선, Vol. 14, p. 69-70.유물론과 경험 비판론 p. 70)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저서들이 갖는 공통된 특징은 논리적 왜곡이 이상한 정도까지 이르렀다는 점이다. <지식의 문제>에서도, 에이어는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정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질문에 전체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빨이 아프다고 하면 나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같은 것에 집착하고 있다. 여기서 부터는 독자의 인내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리 사과 말을 전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누가 이빨이 아프다고 했을 때 그 존재 혹은 그들이 아프다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한 이 지겨운 이야기를] 인용하지 않고 [요약만 한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완전히 꾸며낸 일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를 위해 약간의 인용을 한다.

“만약 내가 내 자신에게 아프다고 애기하면 나는 오직 나 혼자만 의식하고 있는 감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고통스럽다는 신호를 밖으로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신호가 아프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할 것이라고는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표현한 것 중 일부는 의미가 달리 전달되거나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김씨가 아프다고 애기 한다면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김씨가 고통의 신호를 보였다는 점, 그의 몸이 그렇고 그런 상태라는 점 혹은 그가 그렇고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내가 김씨에게서 명확하게 관찰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테제[소박 실제론]에 대한 명확한 반론은 내가 품고 있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내가 품고 있는 의미를 똑 같이 전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누가 나에게 아픈지를 물어 보고 내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내 대답은, 내가 이해하듯이, 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다. 나는 나의 감정 상태를 이야기 했지만 그는 단지 나의 육체적인 상태를 묻는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내 대답이 틀렸고 해도, 그는 완전히 나와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부정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적당한 고통의 신호를 보여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것은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나를 이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내가 내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명확히 다르다.” (에이어, 앞의 책 pp. 214-5.)

이러한 정신훈련 (mental gymnastics)을 하는 이유는 에이어 스스로 그가 가지고 있는 입장이 결국 유아론-오직 나만 존재한다는 개념-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마흐를 통해 논리 실증주의가 물질세계의 객관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결론은 피해갈 수 없다. 마흐와 같이 에이어도 회의주의의 일종인 유아론에 반대하는 척 하는 핑계거리를 찾았지만 유물론(소박실재론)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의주의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만약 이 이론이 옳다면 정신과 육체 사이에 구별,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별은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있을 수 없다... 이 이론이 나타내려고 하는 그림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의 요새 내로 문을 닫아 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요새의 높은 벽을 관찰할 수 있겠지만 그 벽을 통과할 수는 없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 내면에 있는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다.” (같은 책, pp. 215-6.)

마흐와 같이 에이어는 이러한 터무니없는 결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달라질 것이 없다. 그는 실재로 철학적인 견해를 통해서 회의주의에 반대한다는 실질적인 언급을 한 적이 없다. 결국 그는 ‘상식’에, 물리 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른 사람이 관찰하기 전에도 세계는 존재한다는 사실에 호소하게 된다. 이것은 그 자신의 진술에서 논리적으로 유추(연역)되지 않는다. 사실 그의 주장은 객관세계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 보다 더 일관성이 없다. 문제는 얼간이들과 얼간이들의 논리로 논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논리학과 윤리학

텔레비전이 없던 평화로운 옛날, 사람들은 공포소설을 읽곤 했다. 보통 남자 주인공은 묶여 있고 반면에 여자 주인공은 죽음보다 더한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 독자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다음 장을 넘긴다. 다음 장에서 마침내 위대한 주인공은 “단번에 자유롭게 되었다”는 유명한 문구와 함께 해방된다.

윤리 철학의 영역에 왔을 때, 과학 철학은 소설속의 영응만큼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과학철학의 정신적 조상 격인 흄(Hume)은 사실(matters of fact)로부터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당위적인 것, what ought to be) 결론을 유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증의 원리라는 좁은 관점으로 윤리 전체는 터무니없고 가장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어 버린다. 철학자들은 ‘선’과 ‘악’의 정의에 대해 수 세기동안 그들의 머리를 괴롭혀 왔다. 그러나 과학철학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험적인 증명”하자는 말을 꺼내자마자 모두 정리해 버린다. 이 모두를 규칙에서 벗어나 있다(무의미하다)고 규정해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선’에 대한 질문은 수천 년 동안 위대한 철학자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칸트 헤겔에 의해 논의되어 왔고 마침내 맑스와 헤겔에 와서 윤리는 초-역사적인 카테고리(범주)가 아니라 항상 그 시대를 반영하지만 사회에 따라 진화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기존 사회와 경제적 질서에 의해 결정되며 명확하게 계급적인 태도와 이익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윤리의 역사적 상대성은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는 항상 이해할 수 없는 것(closed book)이었다. 그들에게 윤리는 사회관계와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의식의 특별한 형태가 아니라 단지 언어의 문제!일 뿐이다. 극단적으로 복잡한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은 수세기 동안 위대한 사상가들에게는 무거운 짐이었는데, 그들은 이 문제를 단순히 단어 분석으로 환원시켜 모든 것을 한 번에 달성하려고 하고 있다.

윤리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현실 생활 속에서 무엇에 기초하는지를 묻지 않고 그들은 윤리적 판단과 조건(terms)의 정의에 대해 질문한다. 그들의 품질 증명서인 겸손을 내세우며, 새롭고 혁명적인 단어-‘메타윤리학’을 고안해 내었다. 그들은 메타윤리학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윤리학 이론이라기보다 추상적이며 형식적인(scholalstic) 개념으로 실재 삶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개념이다. 윤리의 근원에 대한 실질적 연구는 하지 않고 그들은 끊임없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논쟁한다. 그리고 ‘선’, ‘악’, ‘악마’, ‘의무’와 같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을 통해서 윤리학을 이해하려하고 있다.

부정확한 방법은 부정확한 결론을 이끌어 낼 뿐이다. 과학철학자들은 자연 과학의 관점에서 도덕적 의미를 접근한다. 일반적으로 논리 실증주의의 임의적인 카테고리(범주)는 사실상 물리학에는 의미가 없을 뿐더러 윤리의 영역에서 훨씬 더 무의미하다. 이 방법이 만들어내는 세기적인 결과는 무엇일까? 선과 악은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결과는 자명하다. 이것들은 과학적이지 않으며 형이상학적인 가짜-개념(pseudo-concepts)이다. 이것은 자존심 강한 과학철학자들이 삿대로 더듬어서 알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이러한 거짓-개념이 지속적으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 그것도 사회생활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는 사실은 인류의 무지와 고집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과학철학자의 계시를 들으며, 그들 방식의 오류에 집착하고 거짓-개념에 의해 동기를 부여 받고 거짓-이슈에 대해 논쟁한다. 결국, 과학철학자들은 머리를 설레설레 젓고 그들의 연구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계시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세상에 문을 굳게 닫아 버린다.

주지하다시피 모든 가치판단을 수학과 논리학처럼 “반드시 과학의 부속물일 필요는 없다.” 더욱이 언어관례(linguistic convention)나 정의에 의해서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골치 아픈 점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은 선한 것이라 주장하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믿음이 너무 확신에 차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증명할 수 없다는 설명을 아무리 여러 번 해주어도 그들은 고집스럽게 그 믿음을 고수한다. 더욱 심한 것은 사람들이 행동하는데 있어서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매우 중요한 것까지 즉, 셔츠를 사는 일에서부터 선거에서 투표하는 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과학철학에 의해 의미 없고 관련 없는 것이라고 삭제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생활에 있어서 때로 아주 중요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여전히 설명을 필요로 한다. 바꾸어 말하면, 단순히 문제꺼리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타조가 모래 속에 머릴 묻고 육식 동물을 피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실증주의에서는 도덕성이 주어진 상황에서의 감정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도둑질하지 말아야 한다.”는 문장은 단순히 “나는 도둑질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도덕성은 완전히 개인의 주관적인 마음 상태로 환원된다. 어떻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것도 아주 잘 변하는 대상에 대해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는 완전히 미스터리다. 더 미스터리한 것은 그런 집단적인 마음 상태가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혹은 종족 공산주의 사회 중 어느 시기냐에 따라 어떻게 반대로 변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논리 실중주의자들이 가치가 있으려면 그들이 누울 자리에 그 속에 누워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격식도 없이 논리학, 수학, 윤리학, 도덕성을 추방했기 때문에 예전 보다 훨씬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적어도 그들은 이 과정에서 종교나 형이상학도 제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불가지론을 유지하였으며, 종교의 문제에 대해서는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슈화하지 않고 회피했을 뿐이다. 마치 예의바른 사람이 저녁식사 테이블에서 불쾌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처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종교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큰 논쟁거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가볍게 처리할 수 없다. 종교의 환상주의와 근본주의자들을 반대하기 때문에 불가지론은 올바른 방향으로 반보 진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하게 반보이기 때문에 불충분하다. 그러므로 방대한 영역에서 다시 낡은 난센스를 복권시키고 있다.

현재 ‘분석 철학’ 지지자들 중 일부는 아마 그들 자신을 유물론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신과 육체의 차이와 관련된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점점 더 이론은 물리적 틀의 기준 없이 정교화 되고, 주어진 공리(axioms)로부터 연역(deduction)된다. 그 결과로 다시 이론(theorems)이 되고 수식으로 정교화 된다. 더욱 열악한 것은 사실들이 이들 이론에 강제적으로 맞추어진다는 점이다. ‘분석 철학’의 옥스퍼드학파는 철학은 ‘선험적 규율(priori discipline)’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철학자들은 관찰하지 않더라도 분석을 위해 필요한 개념을 미리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배가 ‘터지기’전까지 배를 부풀리는 이솝우화의 황소개구리처럼 ‘분석 철학’의 자부심은 터져버리고 있다. 분석철학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일상 언어의 뿌리를 찾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의 오용으로부터 실수를 드러내는 것으로 철학의 모든 문제를 풀려고 하고 있다. 대신에 그들은 단지 혼란에 혼란을 쌓아 올리고 있고 결국에는 피할 수 없는 종말로 치닫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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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역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며, 전기는 <논리철학논고>로, 후기는 <철학적 탐구>가 대표한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언어 논리가 오해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철학의 과제는 언어의 논리를 보여줌으로써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오면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 중대한 잘못을 비판하고 언어의 다양성, 언어와 행위와의 관계 등에 주목하고서 언어놀이(language game)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제 언어는 더 이상 실재의 그림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극히 다양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 파악된다.
이리하여 언어는 실재를 그리는 것으로 본 전기에 비해, 후기에는 언어와 삶의 형식의 관계로 그 축이 바뀐다. http://www.nalm.info/critics.html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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