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양자역학과좌파2]양자역학의 시작

 

양자역학의 시작


빛과 함께 당시 물리학자들 연구 대상은 물질의 구성과 관련된 원자의 구조였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가 원자라고 생각했었다. 원자는 영어로 아톰( Atom)이라하고 이 말은 그리스어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1911년 러더퍼드(Rutherford Birchard Hayes)는 알파입자를 금 박막에 충돌 시키는 실험을 통해서 원자 중심부에 양전하를 띈 원자핵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실험결과에 따르면 놀랍게도 원자는 99.9999999999%가 비어 있었다. 이것은 축구 경기장에 모래 알 크기와 유사하다. 이러한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러더퍼드는 마치 태양계 행성과 같이 원자가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돌고 있는 모델을 제안한다(그림 참조).

 

그러나 이 모델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러더퍼드 원자 모델에서는 전자가 핵 주위를 원운동 하고 있는데, 원운동을 하려면 전자가 지속적으로 운동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속도는 크기와 방향을 갖는 벡터(vector)양이므로, 크기는 같더라도 방향을 바꾸면 속도는 변한 것이 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속도가 변했다면 가속도 운동을 했다는 뜻이 되는데, 전자가 가속도 운동을 하면 전자기파가 발생해 운동 에너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운동에너지를 잃어버린 전자는 원자로 끌려들어가 붕괴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그렇지 않다. 

원자 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보어(Neils Bohr)는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전이론과의 단절을 시도하였다. 그는 양자 개념이나 에너지 불연속의 개념을 원자 모형에 적용하기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정을 제안했다. 우선 원자에서 전자는 특정한 불연속적인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고 이 궤도에 있는 전자는 전자기파 방출과 같은 에너지 방출은 없다. 그리고 전자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옮겨 갈 때는 궤도사이의 거리에 의존하는 에너지를 방출하거나 흡수한다. 이 모델로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여러 실험결과들을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가정의 근거가 무엇인지 그리고 전자가 원자핵과 충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는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은 바로 프랑스 귀족출신의 과학자 루이 드브로이(Louis de Broglie)였다. 그는 박사논문(1924)에서 전자도 파동의 성질을 갖는다는 혁명적인 물질파이론을 내놓았다. 그의 지도교수는 당시만 해도 황당했던 이 박사 논문에 대해 학위를 주기 어려웠다. 지도 교수는 귀족 출신인 점이 껄끄러워 직접 거부하지는 못하고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아인슈타인에게 논문 평가를 부탁했다. 그러나 이 논문을 본 아인슈타인은 오히려 드브로이의 업적의 중요성을 단번에 높게 평가하였다. 바로 다음해에  미국의 실험 물리학자 데이비슨(Clinton Joseph Davisson)은 전자도 광파와 마찬가지로 회절현상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해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물질파 개념은 보어의 원자모델에서 전자가 원자핵과 충돌하지 않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전자도 파동의 특성을 가지므로 원자핵 주의에서 '정상파'(standing wave)의 조건을 만족하고 있다면, 에너지를 잃어버리지 않고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원자 모형에 대해 안정적인 이론적인 틀이 완성되어 갔다.

그러나 당시에 고전역학에는 일반적인 입자와 파동의 운동을 기술하는 뉴턴의 운동방정식과 맥스웰의 파동방정식이 있었지만, 원자세계의 운동들을 기술하는 일반적인 운동방정식은 없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는 드브로이의 전자에 대한 물질파와 관련된 파동을 설명하기 위한 공식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양자역학의 본격적인 시작을 여는 유명한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다. 이 수식으로 원자 주의에 전자가 존재할 수 있는 에너지 준위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도 원자에서 빛을 흡수하고 방출하는 여러 가지 패턴을 설명할 수 있는 양자 형식주의(formalism)에 대해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 결과로 추상적인 수학적 형식주의를 통해 슈뢰딩거의 방정식에서와 같은 행렬역학을 발표하였다. 이후에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수학적으로 동일함이 증명되었다.

수학적 형식주의는 수학을 완전히 형식화하자는 태도 즉, 수학에 쓰이는 모든 표현을 의미가 없는 기호에 의해 어떤 규칙에 따라 나열한 묶음으로 보자는 태도이다. 형식주의는 공리를 세우고 그 공리계가 완전히 모순이 없다는 것을 기호조작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 무모순성에 대한 증명은 1931년 괴델에 의해 깨지고 만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형식주의를 무척 싫어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참고)

사람을 구분짓는 것은 나쁜 짓이지만, 양자역학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양자역학에는 두가지 흐름으로 나누면,

 

(원래 나뿐넘과 착한넘의 이분법으로 구분하면 이해하기는 좋다..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렇게 구분하는 것은 나쁜 짓이며,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점을 꼭 기억해 두자. 암튼, 한번 나누어 보자.)

 

우선 한쪽은 Max Plank-Einstein-de Broglie-Schrodinger로 이어지고 (실재론)

나머지 한쪽은 주류쪽으로 Niels Bohr-Heigenberg-Born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증주의)

이들 두 경향의 대립은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본주의를 넘어선 반-저작권 투쟁을 위해서

 /* 이 글은 [현장에서 미래를]에 실린글이며, 정보운동포럼에 발제할 글입니다.

    읽어 보시고 의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자본주의를 넘어선 반-저작권 투쟁을 위해서

현장에서 미래를 107호

개작1) 김영식

저작권법이 전면 개정된다고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부는 개악을 하고 노동-사회단체는 반대 성명서를 낼 것이다. 정부는 앞으로 또 개악을 할 것이고, 그리고 노동-사회단체들은 또 성명서‘만’ 낼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될까? 정부나 자본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자기네들 세상이니까 자기들 이로운 대로 하는 것은 논리에 모순이 없다. 그렇다면, 정부나 자본이 그 짓을 못하게 할 사명감을 가지고 태어난 노동-사회단체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1, 2년도 아니고 매 해 분위기가 이렇다면, 혹시 아직도 저작권법에 미련이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만약 그 미련이 (민중가요를 떠올리며) 저작권법이 없어진다면 무명의 창작자들이 그나마 있던 법적 보호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하는 우려에서, 그리고 또 저작권법 반대 투쟁 대신에 불법복제 마구하는 것이 더 나은 반자본주의 투쟁이 아닐까라는 좀 더 색다른 고민에서 나왔다면 나쁘지 않다 오히려 발전적이다. 사실 고민이 없거나 여기서 무관심으로 끝내 버리것이 더 큰 문제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 고민을 더 확장해야한다. 저작권법이 아니라면 무명의 창작자를 보호할 수 있는 대안은 없을까? 창작자를 보호하면서 공유(분배)를 하는 방법은 없을까? 또 불법복제를 마구하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 나올까?

 

 

-------------------

1) 이 글은 참고문헌 중 ‘Copyright/Copyleft :The Myth of Copyright‘의 글 일부를 번역하여 재구성한 글이다.



 

권위(authority)적인 낭만적 저자(romantic author)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 저술활동은 매우 지엽적인 활동이었다. 복사를 한다는 것이 원본보다 대부분 부정확했기 때문에, 널리 퍼질 수가 없었다. 강호의 고수들이 최신 권법이 적혀있는 원본을 두고 싸운 이유도 바로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쇄술은 많은 부분에서 혁신을 가져다주었다. 복사는 더 쉬워지고 정확해졌고, 복사된 책들은 활발하게 대중들에게 배포되었다. 또 인쇄술은 정보를 저장하고 복사하고 사용하는 것에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이렇듯 인쇄술을 통해 과거 정보가 축적됨에 따라 사회의 각 발전은 확실한 과거의 토대위에 건설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가 오래된 것 보다 더 개선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과거의 것을 개정하고 개선하여 더 높은 발전이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인쇄술은 새로운 읽을거리를 찾는 대중들의 공간을 형성하게 했다. 인쇄술의 발달은 예술이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신비적인 분위기를 소멸시키면서 대중의 비판적 수용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때부터 새로운 독서 대중들은 원본이든 복사본이든 정보를 요구했고, 정보의 소유자와 주요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저작권 역사학자 마크 로즈(Mark Rose)에 따르면 “지적재산권이 공식적인 제도가 되기 전에도 문화 생산의 상업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도서 시장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당시 시장은 길드(guild)의 조직인 영국 도서출판조합(the Stationers' Company)에 의해 독점되었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많은 지방 출판사들을이 출현했고, 이들은 독점 조합을 위협하였다. 또 증가하는 독서 대중들을 위해 값싼 복사본을 편찬하며 산업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방 출판사의 범람에 대해 문학계와 예술계는 ‘산업혁명의 병’이라 부르며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저자의 개념을 독특하고 초월적인 존재, 창의적 영혼을 갖는 존재로 묘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념을 흔히 낭만적 저자(romantic author)라고 하는데, 예술가들은 상품화할 수 없는 가상의 자아 속에 자산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예술가의 독창성은 외부와의 관계없이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 끄집어 올려지는 것이다. 예술가 개인은 독창적인 개성과 정신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예술가들이 창조한 작품이기에 독창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대중 상품이 확대되는 속에서 그들의 개성을 구별하였다. 그리고 이 낭만적 이론은 당시 널리 퍼져 있는 재산권 교리와 합쳐진다.  


존 로크(John Locke)는 개인은 노동을 통해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부터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한다고 했다. 이 이론은 왜 토지를 포함해서 공유지를 개인이 전유해야 하는지를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론으로 중요하게 주목받았다. 


런던에 있는 출판사는 이 ‘소유권을 갖는 현대적 저자’ 개념을 지방 출판사와의 분쟁에서 무기로 사용했다. 즉, 런던의 출판업자들이 지방 출판업자들의 출판행위를 견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법률상 영구 권리를 갖는 ‘저작자’라는 법적 개념을 창안한 것이다. 이 경우 저작자의 권리와 그들 사상의 개별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조장되었다. 이것은 1774년에 유명한 Donaldson v. Beckett 판결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판결에서 모든 주장이 저자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실재 저자는 관여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루어 졌다.


 이 판결은 당시 개인적인 후원에 의지했던 저자를 독립시켜, 저자의 저작물을 자유시 장에 자유롭게 팔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모든 저자는 출판하기 위해 출판사에 권리를 양도해야 했기때문에 저자권의 원초적인 수혜자는 출판업자들이었다. '소유권을 갖는 현대적 저자‘개념은 사실 출판사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완곡한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개념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나타났는데, 사회가 지식의 소유권을 인식하는 방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저자상의 성과는 개인의 기여가 공동체 지식의 개념을 훼손하고 개인의 개념을 소유자로 알리는 그런 지식생산의 특별한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재산권 이론에 구겨 넣어 버린 지적 생산물 


             당신과 내가 사과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서로 교환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나와 당신은 각각 하나의 사과를 가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과 내가 하나씩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고 서로 교환 한다면 우리는 두개의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버나드쇼


지적 생산물에 대한 재산권은 많은 부분 로크의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로크의 이론에는 세 가지 기본 원칙이 있다. 첫 번째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소유한다. 두 번째로 자연 상태에 있는 모든 것-아직 소유되지 않고 공유지로 남아 있는 것-은 신이 소유하라고 준 것이다. 세 번째로 노동으로 자연 상태의 것을 소유한다. 그것은 노동으로 사물에 가치를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크에 따르면, 만약 A가 자연 상태에 있는 것에 그의 노동을 가한다면 그 것은 A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저작권에 대해서 말하자면, 작가가 공유지에 있는 생각을 가져와서 그것에 노동을 더해 작품이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공유지에 있는 아이디어들에 노동을 더했을 때, 왜 그 결과가 작가의 재산이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로크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의 이론은 단지 재산권은 단순히 노동에 대한 보상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할 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자기 자신은  노동의 산물이 아닌데 어떻게 소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로크의 이론에는 다른 전제가 있어야 한다. 로크 이론의 핵심에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개념이 있다. 국가권력도 개인의 자유 보호에 제한된다. 이것과 관련해서 그는 다시 자기 자신의 소유를 가정하고 있다.


반면에 헤겔은 인간이 자연적으로 자유롭고, 그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고 보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사람이 자유롭고자 하는 자기-모순적 과정과 객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자기 신체와 정신의 발전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자신을 자유로운 것으로 자각하고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두 이론 모두에서 우리 자신의 소유권이 우리 신체를 자연적인 사물에 동화시켜 소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반대이론이 제기되었다.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흥미있는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내가 가지고 있는 한 접시의 방사선 물질이 담긴 스프를 바다에 쏟아 부어 버린다면 그리고 이 방사선 물질이 전체 바다에 고루 혼합되어 퍼진다면 나는 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가?


헤겔은 그 바다를 소유할 수 없다고 답할 것이다. 왜냐 하면 인격(개성)의 표현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헤겔의 재산권의 중심 개념에는 인격(개성)의 발전시킬 수 있는 필수 요소이고 실제 인격(개성)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헤겔은 18세기에 문학작품을 쏟아져 나오게 했던 낭만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


헤겔에 따르면 노동이 아니라 점유가 외부 사물을 재산화하는 행위이다. 이 점유, 혹은 점유하는 것은 3가지 방법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로 직접 물리적으로 붙잡아 버리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것을 만드는 것이고 세 번째로 자기 것이라고 표시하는 것이다. 이중 두 번째 방법이 우리가 관심있는 소유방식이다.  헤겔의 언급에 따르면, 재산은 인간이 스스로 세상에 알리는 하나의 표현으로, 개인의 의지와 인격을 객관화한 산물로서 그 소유주의 인격과 존재를 내포한다고 보고 있다. 즉, 재산은 곧 자기의 일부이며 자기표현의 수단이 된다. 이 것은 작품이 변질되거나 조각내어 훼손했을 때 저작권상의 작가의 권리를 반영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저작권법에서는 ‘조각내어 훼손하는 행위’를 작품을 통해 보여준 저작의 인격(개성)을 침해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헤겔 역시 그런 행위가 어떻게 작가의 ‘인격(개성)’을 침해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게다가 낭만적 저자의 개념은 창작물에 대한 외부적 영향을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의 의지의 표현이라는 헤겔의 재산권 개념은 이 ‘작품’이 다른 여러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화가, 음악가, 작가 모두는 그들의 기술을 배우고 장르와 형식으로 구분된다. 예술가들은 모든 장면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작가들은 잡담 속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소프트웨어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소프트웨어는 앞선 프로그래머들이 남겨놓은 모듈, 라이버러리에 크게 의존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작품’이 그들의 영혼의 표현으로 말할 수 있을까?


로크는 자원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에서 공유지를 재산권화하려는 욕망이 발생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자원이 공유지에 있다면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때로는 무시해버려서 그 유용성이  점차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들을 지나치게 많이 방목하거나 혹은 전혀 관리하지 않으면 불모지로 될 것이다. 로크는 일단 자원을 공유지에서 가져와 사적으로 소유하면 그 재산의 주인이 그 가치를 보존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가정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재산권화의 필요성에 대한 이 이론이 무형의 아이디어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아이디어를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무시해 버린다고해서 사용가치가 떨어지는지 의문이다.


버나드쇼의 지식공유에 대한 인용은 단순하지만 효과적으로 정보 상품과 지식의 본성을 표현하고 있다. 정보는 고전적인 ‘실 자산’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유포시킨다고 하더라도 사용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정보는 정보의 특정 부분을 이용할 때 그 정보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 경합2)’적인 상품이다. 그리고 어떤 정보의 일부를 사용할 때 그 정보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배제적’인 특성을 갖는다.3).


소프트웨어도 이러한 특성을 갖는데, 어떤 사람이 소프트웨어를 복사할 수 없게 하는 방법은 그 사람이 소프트웨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일단 접근이 허용되면 거의 비용 없이 복제할 수 있다. 게다가 복제를 해도 소프트웨어의 유용성 자체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않고 또 원 소유자가 그 소프트웨어를 사용을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디지털 콘텐츠는 그것을 서로 나눈다고 해서 그 상품의 질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확실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재산권에 대한 생각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저작권은 정보 기술의 발달에 의해 만들어지는 접근성을 통제라는 새로운 괴물을 키우는 쪽으로 고집스럽게 추동되고 있다.


저작권과 인센티브


저작권법에 대한 주요한 논리중 하나는 이 제도가 없으면 창작자들이 창작활동의 동기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들은 경제적인 인센티브 없이는 새로운 작품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적재산권법에 의해 새로운 작품에 시간과 돈의 투자가 촉진되고 또이 법에 의해 많은 저자들이 작품 출판으로부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저자의 작품을 보호하는 저작권이 없다면 경쟁자는 상대방의 작품을 아주 낮은 비용으로 복사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작품을 직접 생산하기보다 타인의 작품을 규제 없이 ‘훔치’려고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려는 작가의 동기는 크게 줄어든다. 경쟁자가 타인의 작품을 복사하고 가격을 내려버리기 때문에 창작자는 그들의 노력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비용만 발생한다. 창작자가 그들의 투자를 복구할 수 있는 희망이 없다면 작품을 생산하지 않을 것이고 사회적 이익은 줄어들 것이다.


인센티브 없이는 작자가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도 살펴봐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저작권법이 그런 인센티브를 충실히 제공해 주는지를 면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작권법이 인센티브와 동의어도 아니고 또 창작자는 저작권법 없이도 창작을 한다.


우선, 출판할 시장을 형성할 희망이 아주 적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저작권은 가치가 없어 보이는 많은 작가들이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까지도 계속 집필하고 있다.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 그리고 동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위해서 작품을 생산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도 저작권법칙과 인센티브는 관련이 없음을 나타내주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에는 저작권의 의미 있는 보호 없이도 문학작품에서 풍부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 저작권은 있었지만 그들의 작품에 대해 초기에 한번 사례금을 받는 것 말고는 저자들에게는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 당시 사례금은 작품의 교환가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익의 대부분은 출판사로 돌아갔으며, 심지어 작가는 출판비용까지 일부 요구받기도 했다. 또 거의 모든 작가들은 출판사 없이 출판할 수 없기 때문에, 저작권 보호는 대부분 출판사에 이익이 있지 저자들에게는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작권이 작가를 보호하기에는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더욱이, 지속적인 저작권법 개정에 따라 그나마 존재했던 저자들을 보호하기위한 조항은 축소되었다. 영국에서 1814년 이전에는 작품에 대한 저작권은 일정 기간 후 다시 저작에게 돌려주게 되어 있었다. 저자는 그의 작품에 대해 전유권을 갱신할 수 있고 저작권을 다시 양도하므로 써 확실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1814년 이후 그런 갱신기간은 사라졌고 저자는 저작권의 기구로부터 그 위치를 잃어 버렸다. 대부분 저자들은 한 번의 대가를 받고 저작권을 출판사에게 양도한다. 그 이후 저자는 그의 작품에 대해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고 그리고 앞으로 판매에 대해서 어떤 보수도 받을 수 없다.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작품 저작권을 영화사에 양도했을 때, 영화사 측에서 당시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인터넷에 자신의 작품을 올릴 때 대부분 자신의 저작권을 행사할 수 없다.


또 저작권과 다른 대안적인 형태의 인센티브의 존재한다면 저작권 보호만이 인센티브를 준다는 주장은 근거는 약해진다. 개인적 만족과 인정받는 것 등은 금전적이지 않는 인센티브에 해당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금전적 이익 없이 작품을 생산한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와 네루의 편지는 저작권 보호를 통한 금전적 이익을 얻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니다. 특정 분야에 뛰어난 작품으로 인식되면 그 명성과 가치는 책을 집필할 때마다 항상 따라 다닌다. 이러한 인센티브는 작가가 그의 작품에서 독점적 권리를 갖고 있든 없든 항상 가지게 된다.


실험: Street Performer 프로토콜


 실제 저작권은 대부분의 저자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데 실패하고 있다. 그래서 저작권 없이도 작가에게 적절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창작물은 공유할 수 있는 시도들이 있다. 대부분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것인데 Street Performer 프로토콜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많은 경우 시장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새롭게 재구성한다면 그 이상도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것은 앞으로의 과제로 돌릴까 한다. 아무튼 좀 더 자세히 소개해 보자. Street Performer 프로토콜에서 저자(생산자)는 자신이 창작할 작품(소설, 음악, 소프트웨어 등)과 계획(시간)을 알리고, 적절한 기부액을 공표한다. 그러면 그 작품을 보고 싶은 사람들이 요구된 금액에 필적하는 충분한 자금을 자발적으로 기부한다면 저자는 작품(생산물)을 생산한다. 그리고 창작된 작품(생산물)은 저작권의 제한 없이 디지털 형태로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책을 집필하려할 때 책이 출판되기 전 혹은 집필하기 전 출판사 없이 다음과 같은 주문서를 자신의 웹에 올린다. '1천만원 기부를 받으면 다음 작품(생산물)을 공개할 것이다'  독자들은 작가의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현재 얼마나 모금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또 일정액을 기부할 수 있다. 작가는 누가 얼마를 기부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부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봤는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이 목표한 1천만원의 금액이 모였는지 여부이다. 그 액수가 다 모였다면 그는 책을 "출판"하거나 집필한다. 이때 "출판"은 단순히 "이용 가능"하다는 의미이지 서점을 통해 책으로 묶어 배포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렇게 출판된 책은 모든 사람들이 무료로 볼 수있다.


이 시스템에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개념의 '출판사' 즉 믿을 수 있는 제 3자가 개입할 수 있다. 즉, 출판사는 기부금을 예탁하여  적절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을 때 기부자들에게 다시 기부금을 돌려 줄 수 있게 보장한다. 이때 출판사는 디지털로 출판된 책을 off-line으로 팔 수 있다. 물론 이때 책값에는 제본비 등만 포함되므로 아주 낮은 가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출판사 Web 페이지에 제일먼저 디지털 책이 공개될 수 있도록 요구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얻어진 평판(지명도)로 광고 등의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2002년에 소프트웨어회사 NaN Technologies BV라는 회사가 부도났을 Blender라는 소프트웨어의 지적재산권을 가지고 NaN Holding BV라는 회사를 새롭게 만들었다. 이 회사는  Street Performer 프로토콜과 같이 100,000유로(약 1억 3천만원)를 모금했다. 실제로 1,300이상의 이용자들이 각각 50유로(약 6만 5천원) 이상씩 기부하였고, 무기명 이용자, 비회원, 개인 회사 등 다양하게 기부되었으며 2002년 10월 13일 자신의 프로그램을 자유소프트웨어 규약으로 공개했다.



저작권과 무명의 작가


저작권에 왜곡된 이미지는 바로 가난하고 고군분투하는 저자들 즉 무명의 저자들의 작품을 해적질(무단복제)하고 표절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명확하게 정보공유를 주장하는 우리는 창조적 노동자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창조적 노동자들이 더욱 많이 인정받고 보상을 받는 그러한 시스템을 만들기를 더 원한다. 그러나 저작권 시스템은 그렇지 않다. 다음 질문에 답해보자. 저작권법이 정말로 무명의 저자들을 보호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가난하고 고군분투하는 저자를 보호한다는 이미지를 계속 가지고 있는가? 그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작품을 생산한 원작자(노동자, 작가)와 그것을 소유한 사람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보지 못하는데서 나온다.

저작권법 학자 피터 자스지(Peter Jaszi)에 따르면, 저자권법은 현 경제 구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낭만적 저자와 같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저작권법은 개인주의인 낭만적 저자의 개념과 정 반대되는 법률 즉 저자와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법률을 아무런 문제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에 아이러니이다고 말한다. 바로 '업무상 창작(work-for-hire)'라는 저작권법의 교리가 그러하다. 이 교리에 따르면 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원저작자가 아니라 돈을 지불한 사람(회사)가 저자권자의 실질 소유자 즉 저자로 간주된다. 현재 저자권이 있는 많은 작품(생산물)들은 대부분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같은 직장내 한 부서에 앉아 낭만적이지 않은 저자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한 작품이 ‘업무상’ 만들어졌다고 할 때, 노동의 소외는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완성된다. ‘작품’의 ‘저자’는 그것을 창조한 사람이 아니다. 법적으로 고용주의 권리는 창작한 노동자들에게 일정액의 보상금을 주고 그 창작물을 양도받는 것이 아니라 고용주이기 때문에 그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고용주는 낭만적 저자 개념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두 번째로, 만약 출판사와 저자 사이의 계약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유명한 저자가 아닐 경우 계약자체가 절대적으로 일방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저자 개인은 전혀 협상력이 없기 때문에 출판사에 유리하게 모든 권리가 출판사로 넘어간다. 보통 해적질이라는 말은 저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 음악 판매 사이트인 T-Series에서, 무명의 가잘(ghazal, 인도의 고전음악) 음악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해적-유통망을 통해 풀어 줄것을 요구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음악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최대 음반회사 HMV가 그들의 작품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들의 작품이 대중 공간에 활동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해적질(불법복제)는 시장의 요구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책들이 해적판이 도는 것은 아니다. 해적판이 돌기 위해서는 특별하게 인기가 있거나 어떤 가격 한계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해적판의 돌만큼의 위상에 도달했다면 그 저자는 더 이상 가난하지도 힘들게 발버둥치지도 않을 것이다.


최근에 해리포터 시리즈의 저자이자 이 작품을 통해 가난을 탈출하고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된 J. K. 롤링은 해적판에 대응하여 그녀의 저작권을 강력하게 행사해서 화제가 되었다. 한 때 가난했던 그녀는 여러 가지 의미로 저작권 집행자로 그려졌다. 고군분투하는 이혼모(single-mother)로서의 그녀의 위상은 저자권이 가난한 무명의 저자들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이미지를 강력하게 심어주고 있다. 가난을 극복하고 성공한 롤링은 모두를 기쁘게 한다. 그러나 그녀가 6번째와 7번째 해리포터 책을 낸 이후에도 그러한 이미지가 적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시기에 그녀는 이미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저작료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돈나 역시 생계수단을 앗아 갔다고 불법복제를 비난하는 TV광고를 냈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소유한 많은 섬과 빌라들을 마음속에 떠올리기 때문에 그리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자본이 조절하는 불법복제


저작권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는 불법복제 때문에 발생한 경제적 손실의 통계치에 대한 것이다. 미국에 있는 소프트웨어 출판 연맹(Software Publishers Association)의 연구에 따르면, 개인 컴퓨터 응용 소프트웨어의 불법복제 때문에 거의 전체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벌어들이는 수익과 비슷한 액수를 손해를 보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60% 이상은 불법다운로드를 한 경험이 있다고 했고 이를 바탕으로 영상물이 2000억, 음반이 6000억대의 경제적 손실을 추산한다. 이러한 통계치는 하나같이 단서 조항이 붙는다. 소프트웨어 불법복제의 정도와 그 불법복제에 의한 손실을 정확한 수치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계들은 보통 아주 신빙성이 떨어지는 경제학적 가정에 의존한다. 불법복제물을 구입한 사람들이 불법복제가 없다면 모두 합법적인 복사본을 살 것이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XP와 오피스의 불법복제 본를 무료로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특히 대안적인 자유소프트웨어도 있는데도 모두 합법적인 복사본을 산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하버드 경제학자 카를로스 오소리오(Carlos Osorio)는 좀더 면밀한 연구에서 불법복제 현상을 실험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비-경합적이며 준 비-배제적인 상품의 특성을 갖는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제3자가 그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의 새 버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밖에 없다. 일단 접근이 허용되면 그 소프트웨어는 거의 0의 비용으로 복제될 수 있다. 일단 복제가 쉽게 이루어지면 다른 이용자들이 이 소프트웨어를 사용 못하게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앞서도 지적했듯이 이러한 불법복제는 모든 자본가에게 해로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불법 복제를 이용하는 이용자들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집․간접적으로 네트워크 효과에 의해 전체 네트워크에 가치를 더한다."


그리고 다음 질문을 생각해 보자. 과연 소프트웨어 불법복제가 전체 소프트웨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어떤 소프트웨어 회사는 그들의 지적재산권을 나라마다 다르게 적용하는가?


자본의 입장에서 해적질은 '네트워크 효과'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불법이든 아니든 이용자들이 매번 증가할 때마다 그 상품의 인기는 증가한다는 것이다. 카를로스 오소리오에 따르면 소프트웨어 확산과정에서 불법 사용자의 중요성을 설명하는데 직 간접적으로 네트워크 효과를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시장이 미 성숙된 상황에서 소프트웨어 회사는 불법복제를 직간접적으로 도와주는데 역할을 했고 그것으로 인해 인센티브를 얻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체 이용자 관점에서 보면 소프트웨어의 불법 이용자들은 모든 이용자들에게 가치를 더하고 입에서 입으로 소프트웨어 확산을 촉진하는 대리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네트워크 효과는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간접적으로 소프트웨어 회사에 부과적인 긍정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자본가들은 네트워크 효과를 더욱 효율적으로 이용한다. 예를 들어 [아래아 한글]과 [MS 워드]는 유사하지만 사용방법이 많이 다르다. 이렇게 사용방법을 서로 호환되지 않게 하면 어떤 한 프로그램에 익숙해지면 다른 프로그램/시스템을 이용하기 힘들어 진다. 이것을 잠금 효과라고 한다. 여기서 해적질(불법복제)은 미개발된 시장에서 새로운 시장과 이용자 기반을 만드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그 기간 동안 잠금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개도국에서 시장이 형성될 때까지 지적재산권을 일괄되게 행사하지 않는다. 또 학교 내에 불법복제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자의 죽음 : 자본주의를 넘어선 반-저작권 투쟁을 위해서


해적질(불법복제)은 분명 분배측면에서 진보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불법복제는 자본주의 사회에 일탈행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자본주의 내에서 통제 조정되고 자본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여기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저작권을 둘러싼 투쟁에서 분배적 측면, 즉 이용자 측면에서만 본다면 자본주의를 넘어선 투쟁(대안)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자(노동자)들의 투쟁과 결합되어야지만 질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산자(노동자)가 단순히 결합한다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는 말은 아니다. 앞의 글에서 대안적인 인센티브의 예로 생산자(노동자) 개인적 만족과 인정받는 것(명성을 쌓는 것)을 들었다. 여기에 함정이 존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명성이 쌓이면 대부분 자동적으로 자본으로 이어져, 십중팔구 지배계급에 포섭된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사회라면 접근권에 대한 차별로 나타나, 역시 새로운 형태의 지배계급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롤랑 바르트는 올바른 해답을 제시한다.


 그는 1968년에 「저자의 죽음」이란 글에서 문학 작품이란 완벽하게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선조들과 문화가 남겨놓은 것을 조립한 것에 불과하다며 저자의 권위(명성)를 허물어 버린다. 그리고 저자와 독자는 일방적인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 서로를 찾고 만나고 텍스트를 즐겨야 할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민주적’ 결합을 강조한다. 맑스는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기존 계급질서의 전복과 함께 계급 자체를 소멸시켜야 된다고 했다. 이 말을 저작권 시스템에 적용한다면, 새로운 창작시스템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현 저작권 시스템을 폐지함은 물론이고 저자를 소멸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작권 폐지 운동이나 다양한 대안 운동에서 지향해야할 점일 것이다.

 

 --------------------------

 2) 어떤 재화나 서비스에 있어 어느 한 사람의 소비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을 의미

 3) 배제성(excludability)이란 소유자에게만 사용이 제한될 수 있는가, 네 것 내 것이 구분이 되는가를 따지는 것이고 경합성(rivalness)이란 내가 사용하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양이 줄어드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참고문헌 

1. Lawrence Liang, Atrayee Mazmdar and Mayur Suresh ‘Copyright/Copyleft :The Myth of Copyright’ Infochangeindia.org (2005)

   http://www.countercurrents.org/hr-suresh010205.htm

2. 임상수, ‘지적재산권의 정당화에 관한 정보윤리학적 접근’ 한국비블리아 제 12권 (2001)

3. John Kelsey and Bruce Schneier, "The Street Perfomer Protocol and Digital Copyrights", First Monday, Vol. 4 No. 6 (199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양자역학과좌파1]양자역학의 좌파적 이해를 위해

 

양자역학의 좌파적 이해를 위해

노동자의 힘  77호

소문에 의하면 양자역학이 모든 결정론을 부정하고 있으며, 또 모든 물리 현상은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고 한다. 이러한 양자역학으로 일부 논자들은 맑스주의를 결정론으로 몰아세우기도 하고, 모든 인과론을 부정하며 맑스주의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한다. 물론 그 선언 뒤에 남는 것은 ‘자본주의여 영원하라’는 이데올로기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양자역학에서 부정하는 결정론은 맑스주의에서도 끊임없이 부정해온 뉴턴식의 기계론적 결정론이다. 더욱이 맑스주의는 우연과 필연의 문제를 상호 배타적인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맑스 자신도 박사학위 논문에서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그의 후계자 에피쿠로스의 미묘한 차이가 아주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신에 의해 창조된 완벽한 존재였고, 그것이 물질을 근본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우연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기에 불완전했다.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양자역학에서 진리는 오직 그것을 관찰한 때만 알 수 있어 자연의 객관적 실체가 부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해석을 추종하는 일부 물리학자들은 인간의 ‘주관적’ 의식 없이는 물질적 실체를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정확하게 레닌이 그의 책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에서 포괄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주관적 관념론의 관점이다.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양자역학은 오랜 기계론적 결정론을 파괴하였지만 여전히 정교한 예측과 결과를 만들어 내면서 80년대를 극소전자혁명을 21세기에도 지속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양자역학의 해석을 둘러싸고 나오는 철학적 견해는 맑스주의를 근거 없이 부정하며 노동자-민중에게 유해한 관념론으로 이끌고 있다. 우리는 이 늪에서 맑스주의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맑스주의를 복원하고 싶지만 그 어려운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맑스주의 철학을 복원까지 한단 말인가? 난감할 뿐이다. 그래서 쉽진 않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과 같이 시도해 보고 싶다. 앞으로 관련 글을 필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jinbo.net/yskim) 혹은 노동자의 힘 기관지 홈페이지(www.pwc.or.kr)에 지속적으로 올릴 것이며(물론 지금도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고자 한다.




양자역학의 태동 : 빛에 대한 부정의 부정

 

빛이란 무엇일까? 기존의 물리학이 위기를 맞는 시기마다 빛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뉴턴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18세기 동안 빛이 작은 알갱이(미립자)로 구성되어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1678년에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빛에 관한 논문”에서 뉴턴의 ‘미립자’이론에 맞서 빛이 마치 파도처럼 전파되는 파동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 논문은 뉴턴의 그늘 아래서 빛을 보지 못하다가 100년이 지나 토마스 영(Young)의 빛의 회절/간섭실험을 거쳐 맥스웰에 의해 빛이 전자기파임을 증명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19세기말 다시 빛에 대한 논란이 붉어져 나왔다. 과학이 막다른 길에 도달했을 때, 더 이상 그 사실을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토대는 혁명을 준비한다. 그리고 새로운 과학이 나타난다.

 

1890년대에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k)는 흑체에서 나오는 빛(black body radiation)의 독특한 물리적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모든 물질은 자신이 온도가 높을 때는 빛을 내고 낮을 때는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파장의 빛을 흡수하는 물체(검은 물체)는 반대로 모든 파장의 빛을 내놓기 때문에 흑체 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방사하는 물질은 없다. 이러한 생각으로 물리학자들은 빛을 모두 흡수하게 고안한 검은 상자를 흑체라고 불렀다. 아무튼 프랑크는 흑체의 온도에 따라 내보내는 빛의 스펙트럼을 관찰하였는데, 흑체의 온도가 증가함에 따라 그에 비례해서 빛의 색이 변하지 않았다. 고전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00년에 막스 플랑크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빛이 특정 크기를 갖는 다발(꾸러미, packet)로 가정 했고 이것을 '양자(quanta)‘라 불렀다. 이 이론은 뚜렷한 물리학적인 근거 없이 '운좋게 선택된 것'이었기에, 그는 그 근거를 찾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이론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05년 당시 24세였던 젊은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빛(전자기파)은 입자와 같은 에너지 다발로 구성되어 있다는 플랑크의 이론을 받아들여 금속판에 빛을 쪼였을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광전자 현상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발표하였다. 이후에 이 빛의 다발을 빛의 양자(quanta)화로 광자(photon)라고 불렀다. 이로서 빛이 다시 입자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빛에 대한 뉴턴의 입자 이론은 맥스웰의 파동이론에 의해 부정되었고 다시 이것은 막스 프랑크와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새로운 입자 이론으로 부정되었다. 처음 보기에는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듯 보이지만 다시 구식의 뉴턴 이론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질적인 도약으로 과학에서 진정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자 머리속에 나노 입자

노동자 머리속에 나노 입자 
                                                                                                           김영식

과학기술자 머릿속에 지우개

일반적으로 나노 입자라고 하면 100나노미터 길이(폭) 이하의 아주 미세한 입자를 말한다. 대략 머리카락의 지름이 8만 나노미터 정도이고 피 속의 적혈구는 5천 나노미터 그리고 DNA분자는 2.5나노미터 정도이다. 이러한 나노 입자는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항균특성이 있는 은-나노 입자는 세탁기와 휴대폰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피부흡수를 좋게 한다는 이유로 화장품, 샴푸 등에도 다양한 나노 입자들이 적용되고 있다. 심지어 아기 젖병에도 적용되고 있을 정도다.

나노 입자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탄소 나노 튜브’와 ‘나노 탄소 공(일명 버키볼(buckyball))’이다. 1985년에 처음 발견된 버키볼은 60개의 탄소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축구공 모양을 하고 있다. 탄소 나노튜브는 지름이 1 나노미터정도 이고 이름대로 튜브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인장력은 강철보다 100배 강하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도체, 반도체, 초전도체 등 다양한 특성을 보이기 때문에, 첨단 윤활유, 연료전지, 약물전달체계, 차세대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 등에서 연구되고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탄소로 구성되어 있어 탄소를 다량 함유하고 있는 우리 몸에 큰 해가 없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추측일 뿐이었다.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안전하다고 잘 알려진 물질이라도 나노 크기로 가공하면 완전히 새로운 특성을 보이고 있다. 영국 리버풀대의 독성학자인 비비언 하워드 교수는 "나노입자는 물질 자체의 독성보다 크기가 작아질수록 표면적이 상대적으로 넓어지면서 생체조직에 대한 반응성이 증가해 독성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사실 물질이 작을수록 더 위험한 공해물질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굵은 먼지는 기도나 코의 점막에서 배출되지만 미세먼지는 폐포 속 깊이 박혀버리기 때문에 훨씬 해롭다. 석영도 덩어리일 때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석영을 캐는 광산노동자, 수정을 연마하는 노동자는 미세 수정입자에 노출돼 폐 조직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나노입자는 미세먼지보다 100배-1000배 더 작다. 그렇다면 과학자들 사이에 나노입자의 잠재적 위험성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그리고 60년 전 과학자들은 나노크기의 입자들이 신경계를 따라 콧속이나 폐 그리고 뇌로 쉽게 침투하여 돌아다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 기억을 자본주의 상품 개발의 압력에 밀려, 강압적으로 망각해 버린 것이다. 이제 그 망각에서 깨어날 때가 된 듯하다. 

 



내(노동자) 머리속에 나노 입자

지난(2005년) 3월에  미국의 독성학 학회에서는 탄소나노입자들이 동물실험을 통해 인체에 해로울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쏟아 내었다. NASA의 제임스(John T. James) 박사는 쥐의 호흡기관에 탄소 나노 입자를 주사했을 때, 탄소나노튜브는 폐 기능에 심각한 장애를 일으켰고 몇 몇 동물들은 죽기까지 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면역체계내의 백혈구(대식세포)가 주입된 나노튜브를 잡아버리지만 그 뒤 그 세포는 죽어버리고 뒤이은 염증이 폐 조직에 상처를 낸다.

국립 직업 안정과 건강 학회(National Institute of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y)의 페티아 시메노바(Petia Simeonva)박사는 비슷한 양의 탄소 나노튜브를 주입 받은 쥐에서 나노입자를 다량 포함하는 거대세포인 폐 육아종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또 주입된 나노 입자는 대동맥이나 심장의 미트콘트리아 내 DNA에 손상을 입히는데, 이후 동맥경화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한다.

앞의 실험들은 인위적으로 나노입자를 주입한 실험이지만 인공의 나노 입자는 매우 작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들어올 수 있어 비현실적인 실험이 아니다. 더욱이 쥐에게 나노 입자를 주입하지 않고 흡입시켜도, 쥐의 콧구멍 속, 폐 그리고 뇌에 나노입자들이 축적된다는 사실이 로체스트 대학의 환경 의학과 교수 권터 오버되르스터(Gunter Oberdorster)박사의 실험에서 확인되었다(2004년 1월). 또 같은 해 3월에 그의 딸, 환경독극물학자인 에바 오버되르스터 박사는 미국화학회(ACS)에서 나노기술의 산물인 버키볼이 물고기의 뇌에 심각한 손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수조관속에 버키볼 500ppm을 첨가하고 48시간 후 어린 농어의 뇌 조직을 조사한 결과 정상보다 손상이 17배나 심각했다. 농어의 뇌 조직에 생긴 손상은 정상적인 세포막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인간의 알츠하이머병과 관련이 있는 증세라고 한다.

 

한국 그리고 나노기술

요즘 과기부는 [과학기술 혁신 본부] 신설하여 과학기술을 ‘혁신(?)’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노기술 분야 혁신은 과학기술부가 맡고 있던 연구개발과제의 상당부분을 산업자원부로 넘겨버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순수‘과학‘을 버리고 응용 ’기술‘로 몰아가겠다는 정부 혁신의 신자유주의적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정부 '혁신'사업의 실적을 위해서 나노기술 기술은 연구소에서 그대로 벤처로 그리고 공장으로 빠르게 이전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나노 물질의 안정성에 대한 엄밀한 검토는 뒤로 밀려날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특이한 점이 있다면 올해 나노기술 영향평가제도가 실시된다는 점이다. 기술영향평가란 ’한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안녕과 복지에 막대한 규정력을 미치는 중요한 과학기술 주제의 영향을 주로 사회, 윤리, 환경의 측면에서 연구 초기에 미리 평가하는 제도‘를 말한다. 무엇인가 '합의'하고 '논의'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 제도가 ’나노기술 개발 촉진법‘에 의해 나왔다는 점과 그 평가기관이 과기부 산하기관이자 그의 시녀역할을 해온 과학기술평가원(KISTEP)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진행될 결과를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설사 기술 영향평가 자체가 공정하게 잘 진행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법 자체가 ’나노기술을 촉진‘시키기 위한 법의 시행령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제대로 반영될지 여부도 미지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다른 정책과 마찬가지로 과학기술 정책도 정부와 자본가 그리고 시민사회 대표들(전문가들)만의 골방 속 합의로 이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유일한 정책 대안은 노동자-민중의 투쟁 속에서, 그들의 민주주의를 향상시키는 방향과 고민 속에서 나올 것이다. 핵폐기물 부지 선정사례와 위성방송 기술 대응 실패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참고로 캐나다의 과학기술 감시단체인 ETC 그룹은 '기술영향평가제도' 대신 잠재적인 위험성이 분석될 때까지 나노과학 연구를 일시 보류(모라토리엄을 선언)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번역]나노입자의 독성에 대한 10가지 경고

아래 글은 ETC 그룹의 짐 토마스가[The Ecologist]지 2004년 5월호에 “나노 감시(Nanowatch)”라는 글중 일부을 번역한 것이다. 이텔릭체로 적은 것은 이해를 돕기위해 번역자가 첨부하였다.

 나노입자의 독성에 대한 10가지 경고

1. 1997년 선스크린 로션속의 TiO2/ZnO 나노 입자는 피부에 유리기(free radicals)라는 유해요소를 피부에 점차 많이 형성시키고 DNA를 손상시킨다. 이 유리기는 콜라겐 조직을 붕괴시키고, 결과적으로 피부에 깊은 골(즉, 주름살)이 패이게 한다. (옥스포드 대학, 몬트레이 대학) 둔포드,  셀나노 등(Dunford, Salinaro etal)

Dunford, Salinaro et al. "Chemical oxidation and DNA damage catalysed by inorganic sunscreen ingredients," FEBS Letters , volume 418, no. 1-2, 24 November 1997, pp. 87-90.

2. 2002 3월, 라이스 대학의 생물 환경 나노 기술 센터(Center  for Biological and Environmental Nanotechnology)는 가공된 나노입자는 실험동물의 장기에 축적되어 세포 속으로 들어간다고 미국 환경국(EPA)에 보고했다. "나노 물질이 세포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는 경계해야한다. 만약 나노물질이 박테리아에 들어간다면, 나노물질은 먹이사슬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마크 와이제너(Mark Wiesner)

 Doug Brown, "Nano litterbugs? Experts See Potential Pollution Problems," Small Times March 15, 2002.  Available on the Internet, www.smalltimes.com

3. 2003년 3월 NASA/존슨 우주센터의 연구결과에서는 쥐의 폐 속에서 나노튜브는 석영 먼지보다 더 독성이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석영을 캐는 광원, 수정을 연마하는 작업자는 숨을 쉬면서 수정입자를 들이마시게 돼 폐조직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이런 병을 규폐증이라고 한다. 듀퐁의 헤스켈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나노튜브의 독성은 변하지만 여전히 우려스럽게 보고 있다. "여기서 교훈은 예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노튜브는 매우 높은 독성이 있을 수 있다" -Dr 로버트 헌터 (NASA 연구원)

Jenny Hogan, "How safe is nanotech?"  Special Report on Nano Pollution, New Scientist, Vol. 177, No. 2388, 29 March 2003, p. 14.

4. 2003년 3월, ETC 그룹은 독성병리학자 비비언 하워드에 의해 조사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입자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대부분 독성이 더 강해지고 특히 나노 입자의 경우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와서 뇌혈관장벽과 같은 막을 통과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로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나노입자의 제조가 허용되기 전에 이들 입자에 대한 안전성에 대한 평가를 전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잠재적으로 위험한 과정을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비비언 하워드(Vyvyan Howard)

ETC Group, "Size Matters! The Case for a Global Moratorium," Occasional Paper Series, Volume 7, no. 1, April 2003.  Available on the Internet, www.etcgroup.org

5. 2003년 7월 CBEN 과학자 메이슨 톰슨(Mason Tomson)은 [네이처]지에 한 보고서에서 버키볼이 땅속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팀에 의해 수행된 공개되지 않은 연구에서 나노 입자는 지렁이에 쉽게 흡수되고, 먹이사슬 과정을 통해 인간에 까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비키콜빈(Vicki Colvin)박사, 센터장

Geoff Brumfiel, "A Little Knowledge...," Nature, Vol. 424, no. 6946, 17 July 2003, p. 246.

6. 2004년 1월 권터 오버되르스터 박사의 연구에서는 나노 입자가 사람의 코를 통해 쉽게 뇌로 전달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나노기술 혁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입자를 화학적으로 전혀 다르게 설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그것들은 더 위험한 특성들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켄 도날드슨( Ken Donaldson)교수, 에딘버르 대학

Alex Kirby, "Tiny Particles Threaten Brain," BBC News Online, 8 January, 2004. Available on the Internet, http://news.bbc.co.uk/1/hi/sci/tech/3379759.stm

7. 2004년 1월, 루벵 대학의 나노안전성 연구원은 [네이처]지에서 나노입자에 대한 새로운 독성 실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나노 물질 생산자들은 위험 평가 국제 가이드라인에 따라 모든 새로운 물질에 대해 관련 독성 검사 결과를 제출하는 것을 의무하 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일부 ‘오래전부터 사용한’ 화학 약품들도 물리적 상태가 처음 평가한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다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Peter H.M Hoet Abderrahim Nemmar and Benoit Nemery.

Peter Hoet, Abderrahim Nemmar and Benoit Nemery, "Health Impact of Nanomaterials?" Nature Biotechnology, Vol. 22, no.1, January 2004, p. 19.

8. 2004년 1월 - 나노물질의 독성에 대한 첫 번째 과학 학회인 Nanotox 2004,에서 비비안 하워드 박사는 금(Gold) 나노 입자는 태반을 통해 태아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다.

Ben Wootliff, ""Bristish Scientist: Nanoparticles Might Move from Mom to Fetus," Small Times, 14 January 2004.  Available on the Internet, www.smalltimes.com

9. 2004년 2월 산디에고의 캘리보니아 대학 과학자는 CdSe 나노 입자(퀀텀 닷)는 인간 몸속에서 분해되어 잠재적으로 카드늄 중독의 원인이 된다. “아마 이 결과는 [연구원] 사회가듣기 싫어할 것 같다.”- 마이크 셀러(Mike Sailor) UC San Diego.

Justin Mullins, "Safety concerns over injectable quantum dots, New Scientist, Vol. 181, No. 2436 , 28 February 2004, p. 10.

10. 2004년 3월 에바 오버되르스터 박사는 미국 화학 학회 모임에서 버키볼은 치어(Juvenile fish)의 뇌를 손상시키고 유전자 역할을 변화시킨다고 보고하였다. 또 그것은 작은 물벼룩에 독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뇌손상이 빠르게 시작되면 새로운 기술이 더 이상 확대 되기 전에 위험성과 이익을 더 심도 있게 평가하고 검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에바 오버되르스터 박사

Mark T. Sampson, "Type of buckyball shown to cause brain damage in fish," Eurekalert, March 28, 2004.  Available on the Internet, www.eurekalert.or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1세기 첨단기술-나노기술과 노동자

/* 이 글은 지난 2002년도에 노동자의 힘 15호에 실린 글이다. 그 동안 나노입자의 유해성을 증명하는 과학적 결과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현재 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있다. */

 

 

21세기 첨단기술-나노기술과 노동자

노동자의 힘 15호

중동지역의 한 신화에 따르면 인류 역사 초기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한 지배자 '니므롯'은 여러 종족들을 지배하기 위해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기 위한 높은 탑’ 즉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21세기, 자본은 바벨탑과 유사한 또 다른 극한 기술에 도전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노기술’이다. 차이가 있다면 바벨탑은 무한히 크게 만들겠다는 거대 극한 기술이었고 나노기술은 무한히 작은 것을 만들겠다는 미세 극한 기술에 해당한다. 

나노(nano)란 그리이스어의 '난쟁이'에서 유래한 말로 1나노미터라고 하면 10억분의 1미터를 뜻한다. 머리카락 1개를 10만번 자른 크기로 원자 3-4개가 모인 정도 크기로 환산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물질이라고 하더라도 나노 크기로 잘게 쪼개면 색이나 화학적 전기적 성질들이 모두 변하게 되고 새로운 특성이 나타난다. 이 ‘새로운 특성, 다시 말하면,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무한히 가능성 있을 것 같은 이 특성’은 21세기의 희망을 장식하고 있다.

나노기술에는 기존의 물질을 잘게 쪼개어 ‘나노 입자’로 만드는 기술이 있는가 하면 ‘탄소 나노 튜브’와 같이 새로운 형태의 물질도 연구되고 있다. 나노 입자의 경우 이미 많은 기업에서 화장품, 페인트, 코팅재, 섬유 그리고 심지어 아기 우유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촉매재 혹은 강화재로 사용하고 있다. 탄소 나노 튜브는 말 그대로 탄소로 구성된 미세한 튜브 형태의 물질로 생명공학, 재료, 전자 분야에서 미래 이용가능성이 높아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나노기술이 21세기를 꽃 피울 희망이라고 하지만, 그 희망이 자본 주도로 이루어지는 희망이라면 노동자에게는 다른 의미일 것이다. 이미 나노기술의 ‘새로운 특성’은 나노물질 생산을 담당할 노동자들에게 다르게 다가오고 있다. 최근 미국 환경 보호국 EPA에 보고된 동물실험 자료에 따르면, 나노 입자는 동물의 살아 있는 세포에 직접 침투되고 동물 장기에 축적되며, 세균에 실려 먹이 사슬을 통해 유입되어 축적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특히 탄소 나노 튜브의 경우 탄소는 기본적으로 몸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축적되었을 때 몸의 면역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모양이 석면과도 유사하여 석면에서 발생한 문제(발암물질)를 되풀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나노입자가 의학쪽에 이용될 경우 그 위험성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전체 민중으로 확대된다. 만약 혈액 속에 나노입자가 있으면, 단백질이 나노 입자 표면에 붙어 단백질의 모양과 기능은 바뀌게 된다. 이 특성은 의약 분야에서 매우 유용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선전되고 있지만 단백질의 변화는 의도하지 못한 위험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바벨탑은 노아 홍수의 재현을 막고 지배자로서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당시 첨단 건축기술 로 지어졌다. 그러나 민중들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과 분열뿐이었다. 20세기를 이끈 첨단 반도체 기술은 20세기를 발전시켰지만, 철저하게 자본의 의도로 진행되었기에 결국 노동자들에게는 실업과 새로운 직업병만 남았다.(<노동자의 힘> 제10호 참조). 이제 또 다시 21세기 자본은 ‘그들의’ 희망의 기술로 나노기술을 지목하고 기획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나노기술은 노동자의 건강과는 무관하게 그리고 인간의 환경과는 무관하게 자본의 축적만을 위한 그들의 희망의 기술로 자리잡고 있다.

(참고 자료: ‘No Small Matter!', http://www.etcgroup.or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자기 소개

/*사회진보연대에서 저를 (회원) 인터뷰를 했습니다.  특별하게 하는 일이 없어 그런지 숙스럽더군요. 암튼, 인터뷰라 그런지 좀더 대범하게 표현하게 됩디다. 부족하지만 제 고민거리(생각들)를 이야기했습니다. 읽어 보시고 제가 참조했으면 하는 내용이나 의견 주세요.(사회진보연대 1.2합본호)*/

 

분배라는 면이 갖는 함정도 볼 수 있어야 하는데요, 분배가 완벽하게 되는 그런 사회가 있다고 칩시다. 분배를 많이 받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 있습니다. 십중 팔구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게 되죠.  (중략)

    (대안적 생산 방식으로) 자유소프트웨어 생산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공개되고 열려 있고, 네트워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하는 것들을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생산합니다. 또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서로 버그를 찾는 등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그것을 다 같이 공유합니다. 자유소프트 생산은 참여, 이용이 열려있는 것이죠.


Q.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모 전자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맡은 분야는 요즘 유행하는 ‘나노’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Q. 사회진보연대를 알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2000년  정보연대 SING, 찬우물 등 진보통신동호회들이 모여서 통신연대를 만들었어요.저는 한국과학기술청년회라는 단체의 소속으로 통신연대에 참여해 활동했습니다. 통신연대의 활동이 나중에 진보네트워크건설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던 거죠. 그때 통신연대 활동을 같이 했던 홍석만씨를 통해 사회진보연대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자유주의 분석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는데,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에 공감이 갔습니다. 당시에는 ‘지식인 연대’였는데, 사실 지식인연대라는 이름이 좀 마음에 안 들긴했죠(웃음) 



Q. 2000년, 2001년에 월간 사회진보연대 <과학과 진실>란에 글을 기고하셨지요.

네, 당시 사회진보연대 편집실에서 과학기술운동에 대한 글을 써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셔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글 쓰는 일을 해보지도 않았고 글을 쓴다는 것을  매우 어려워했습니다. 점점 나아진다는 주위 사람들의 격려를 들으면서,  자신감을 갖고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사실, 월간 사회진보연대에 실리는 글들이 논문같은 무거운 글들이 많다보니 더더욱 부담되고 힘들었습니다. 그냥 가볍고 편하게 쓸 수가 없어서요. 제가 과학기술에 대해  특별하게 공부한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이공계 쪽 공부를 하다가 사회과학쪽에 관심이 생겼던 거라서요, 내공도 떨어지고 그러다 보니 한달에 한번 글을 써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죠. 바빴지만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고민하고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최근 기고되는 <과학과 진실>을 잘 읽고 있습니다. 11월호에 실린 합의회의에 대한 글처럼 이론뿐 아니라 존재하는 현실운동에 대한 접근과 평가를 담는 것이 매우 좋은 것 같아요.

Q.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소리바다에 대한 이야기 좀 해주세요.

소리바다는 진보적인 면도 있고, 자본주의 면도 있죠. 복합적으로 작용을 하고 있는 거죠.   벨라미가 말했던 것처럼, 복제가 많으면 예술작품의 귀족적인 면이 없어지고 대중화되면서 대중의 문화가 된다는 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량복제가 민중의 의식을 자극하는 것이고, 문화가 확산되면서 민중의 문화가 확산된다는 거죠. 즉, 분배가 되어서 대중화되면 민중들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자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배라는 면이 갖는 함정도 볼 수 있어야 하는데요, 분배가 완벽하게 되는 그런 사회가 있다고 칩시다. 분배를 많이 받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 있습니다. 십중 팔구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게 되죠. 

분배를 많이 받기 위하려면 노동강도를 높여야 되고 그러면 노동 감시 시스템을 자본주의와 같이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있죠. 그 과정에서 새롭게 관료주의를 낳고 감시자와 평가자로 나누지는 것이죠. 단순히 분배적 시각에서만 보면 그런 부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분배라는 한정된 틀만 보면 자본주의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Q. 그러한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가요?

 (대안적 생산 방식으로) 자유소프트웨어 생산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공개되고 열려 있고, 네트워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하는 것들을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생산합니다. 또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서로 버그를 찾는 등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그것을 다 같이 공유합니다. 자유소프트 생산은 참여, 이용이 열려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아직까지 소프트웨어 분야에만 한정되어 있지요. 어떻게든지 그 담론/방법을 확대시킬 수 있는 방법이 뭐냐 그걸 찾는 게 관건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유소프트웨어는 시장에 거래되는 상품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장관계 없이도 자유소프트웨어는 굉장히 발전하고 있죠. 주목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소리바다와 같은 P2P 공유방식 속에서도 자기 스스로 생산하려는 맹아들이 보입니다.  장기적으로 P2P 공유방식도 스스로 생산을 하면서 저절로 공유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자본가들이 P2P를 억압하려고 하는 이유죠. 생산과 분배가 통제가 안되는 상황이죠.(주1) 

아무튼 이러한 새로운 면들은 디지털만의 특수성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라, 진보적인 부분을 이끌어내고 재해석해서 다른 부분에 적용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소리바다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지금까지는 소리바다에 대해 분배에 대한 이야기만 주로 했다면 이젠 달라져야지요.

지금 상황은 약간 과도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엘리트들만이 문화를 생산한 하고, 이용자들은 수동적으로 주는 대로 받기만하는 위계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생산통제가 용이합니다. 그래서 일단 생산자 통제가 쉽기 때문에 P2P 방식이 분배를 엄청나게 쉽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오히려 자본가들이 이용하고 싶어 합니다.

Q.  P2P서비스를 통한 자본의 이익도 간과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되고 있는데요. 

 네. 일부 자본가들이 P2P에 대해 기대를 갖고 있어 함부로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엄청난 광고 기계로서의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죠. 이제까지는 엄청 저렴한 가격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접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죠. 주요 시간대에 광고비용은 엄청나잖아요. 일부 (신자유주의적인) 디지털론자들이 P2P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컨텐츠를 생산하는 업체가 아닌 디지털TV를 생산하는 업체들은 일정정도 정보공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통의 MP3폰은 무료로 다운 받은 MP3는 핸드폰에서 동작 못하게 되어 있는데, LG는 무료로 다운로드 받은 MP3도 돌아가게 해서 짭짤한 이익을 얻었죠. 협약위반인데 말이죠. 또 MP3 플레이어 업체들도, 소리바다와 같은 P2P에 많은 이익을 보고 있습니다. P2P를 분석할 때는 이런 것까지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익은 전체 자본이 아니라 일부 자본의 이익이죠. 그래서 현재 P2P의 활성화는 자본의 구조를 바꾸어 놓을 것 같습니다.  MP3 음반자본가들과 MP3-플레이어 등의 산업자본가들은 연합을 할 것입니다. 이미 자유소프트웨어에 위협받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는 90년대에 인텔과 연합해서 윈텔을 형성했고 2005년도에도 MS는 인텔과 휴대폰 업체인 삼성, LG 등과 제 2의 윈텔을 형성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죠. 이렇게 형성된 자본의 연대는 다시 독점이윤을 위해서 P2P와 자유소프트웨어를 공격합니다.

무엇보다도 자본이 두려워하는 앞서 지적했듯이 자유소프트웨어식의 생산과 분배라고 생각합니다. MP3 공유로 대표되는 P2P 공유방식도 그렇게 발전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죠. 자유소프트웨어 생산 방식은 이용자와 생산자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어떻게든 막아야하죠.  P2P 공유방식은 그들의 충실한 광고 기계가 될 수 있게 어떻게든 변화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문화 생산자는 소수 엘리트로 통제가능해야 하고 이용자들은 수동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통제가능하고, 독점의 방식으로 문화를 상품화하는 것이 가능하죠.

Q. 이러한 흐름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이용자, 생산자 모두의 역동적 이용/생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산자니까요. 그러나 자유소프트웨어는 그 주체가 엘리트라서 한계가 있고 크게 주목을 못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방식을 노동자-민중의 일상으로 확대할 수 있을까가 중요하겠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힙합음악은 엘리트들이 생산한 음악을 흑인 민중들이 소위 ‘짜집기’방식으로 그러나 창조적으로 재생한 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듯 문화영역에서는 역동적인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디카 동호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이제 생산자들입니다. 문제는 다양은 있는데 강력한 반자본주의 뼈대(주체 흐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반자본주의 문화를 어떻게 생산영역으로 끌어 오느냐는 것은 좌파의 중요한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점이 가장 고민되는 부분입니다.(주2)

Q. 요즘 인간복제, 배아복제 등이 중요한 화두중에 하나인데요, 작년 청소년들이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뽑은 사람이 황우석교수이기도 하구요.

참 어려운 이야기이죠. 황우석교수의 연구내용을 들여다보면, 어떤 체계적인 이론을 가지고 하는게 아니라, 그냥 한번 해보는 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황우석교수의 연구방법은 굉장히 조잡한 수준이라고 비판하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론 틀안에서만 갇혀서 각종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주의적 과학(?)을 생산하는 이들 보다 낳죠.

그러나 한번 해보는 식의 연구는 위험을 초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자본주의의 상업성과 결합된다면 더욱 위험하죠. 복제양 둘리의 경우에도, 170개정도의 난소가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기술이 성공해서 치료약이 개발되어 상업적으로 이용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연히 난소판매의 문제까지 갈 수 밖에 없을 텐데, 그것이야말로 통제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산된 약은 매우 고가로 팔릴 것입니다. 결국 부자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난소를 팔게 되겠죠.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배아복제가 전면 허용될 때, 기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노동자-민중의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기업에서 하는 일은 기업비밀로 숨겨 버립니다. 기업들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런 연구들이 민주적으로 공개되어 연구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철학적인 토론도 많이 필요하구요. 어디까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치료 수준의 장기인지를 판단해야지요.

간단한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설사나 홍역과 같인 일반적인 질병으로도 일년에 7백만명 이상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나 정부가 첨단 의약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뻔하지 않을까요?  배아 복제를 통해 불치병, 난치병 치료약 개발의 문제 등은 엄격한 통제 하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공유되어야 하겠죠. 

아무튼, 첨단 과학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통제, 그리고 그 성과의 공유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과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배아복제라는 건 중장기연구입니다. 신약이 만들어지고 임상실험되면 개발이 되면 10년이상 걸릴텐데 너무 부풀려 있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Q. 부풀려 있다는 것은 어떤 말이죠.

그렇죠. 한때 IT(정보통신기술)이 유행이더니, 다음은 NT(나노기술)로 넘어갔죠. 요즘은 BT(생명공학기술) 넘어갔습니다. 대학에서도 온통 바이오열풍입니다. 그냥 그렇게 휩쓸려서 부각되는 것을 보면 애들 장난 같아요. 말도 안되는 장난들이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요. 이런 것들이 다 주식의 가치를 높이려는 수작입니다. 그래야 투자를 받고 또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죠. 또 그 다음해에 가면 더 부풀려 발표해야 하는 악순환으로 돌아가죠. 결국 남는 것은 노동자-민중들의 세금을 낭비하는 결과를 낳죠. 여기저기서 같은 연구를 하면서 다른 것인냥  정부 돈을 받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습니다. 아주 비효율적이기도 하지요.

Q. 회사이야기좀 해주세요.

사실 이 바닥이 워낙 좁아서요.(웃음)  5년정도 되었는데, 회사에서는 직급도 올라가고 하니까 여러 가지로 신경쓰이는 일들이 많네요. 회사에서도 이데올로기교육을 강화하는 것 같아요. 요즘 사원들을 대상으로 진급교육을 하고 있는데요, 스파르타식으로 관리하고 토론도 타이트하게 진행합니다. 첫날은 이론 강의를 했는데, 모든 악의 근원은 공기업이라는 내용을 매우 재밌고 흥미롭게 이야기합니다. 정말 어처구니없고 내용은 파쇼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인데, 함께 교육받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보면 그 얘기가 먹혀들어갑니다. 워낙 재밌게 얘기해서 그런지... 히틀러가 군중에게 기립박수받는 장면이 생각나더라구요.

둘째날은 돈을 벌기 위해 효과적으로 전략 짜는 방법, 셋째날은 협상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Win-Win을 목표로한다고 하면서, 강성으로 가는 것이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넷째날은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방법인데, 부하직원이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그것을 기술적으로 무마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교육받는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며 적극적으로 임하는 분위기입니다. 아무튼 자본은 철저하게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실습과 이론을 교육시키고 있더군요. 

Q. 사회진보연대에 바라는 것이 있으면 얘기해주세요.

무거운 주제들을 무겁지 않게 다룰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진보연대의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게 말이죠.

----------------------------------

(주1) 인터뷰 한글을 읽다 보니 빠뜨린 것이 있군요. 여기까지 부족하지만 과학기술의 분배와 생산방식을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빠뜨린 것이란, 어떤 과학기술(내용)을 생산할 것인지도 분배/생산방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IQ와 같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똘똘 뭉쳐진 과학기술을 P2P방식으로 생산다면, 또 저작권 보호기술(예를 들어 DRM과 같은 것)을 P2P방식으로 생산한다고 정당화 될 수없겠죠. 

요약하면 과학기술의 문제는 1.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2.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여기에 참여문제가 들어가죠). 3.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로 요약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실 이 3가지 문제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서로 복합적으로 얽히고 엮여서 서로간에 모순으로 작용하며 발전하겠지요. 그러나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쉽게 자본주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지 않을까요?

(주2) 이러한 생산방식은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킬 것이므로, 주체의 반자본주의 투쟁이 새로운 생산 방식을 확대 발전시켜내는데 핵심이 되겠죠. 혹시 오해가 있을까 싶어 각주로 강조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소리바다 무죄 판결의 의미와 자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P2P 서비스

 /*또 시작해 보죠*/

 

소리바다 무죄 판결의 의미와 자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P2P 서비스(*) 

노동자의 힘 71호

 

지난 12일 소리바다에 대해 법원은 형사상 저작권 침해 방조는 무죄 선고했다. “소리바다를 통해 음악을 공유한 이용자들의 복제권 침해는 인정되지만 소리바다 운영자인 피고인들이 이들의 저작권 침해 행위를 방지할 적극적인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같은 날 국내외 음반사 11곳이 제기한 민사재판에서는 “채무자들의 ‘소리바다’ 프로그램 운영과 소리바다를 통한 MP3 파일 다운로드 방조 행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또 25일에는 2천만원 정도의 손해 배상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러한 상반된 두 판결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물론, 형사 판결의 경우 기존의 정보운동단체를 비롯한 네티즌들의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가 반영되었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법원의 판단에는 그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주요하게 P2P 서비스를 둘러싸고 있는 자본일반의 이익이 반영되어 있다. 소리바다와 같은 P2P서비스에는 크게 거대 음반사가 있고 P2P서비스를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IT 업체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MP3 플레이어 종주국이고, 세계적인 MP3-폰과 디지털 TV 생산 업체(특히 삼성!, LG)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 TV가 상용화 되는 현 시점에서 소리바다와 같은 P2P 서비스는 자본에도 상당한 매력이 있다. 한 가지 예로, 디지털 TV 콘텐츠를 공유하게 하는 대신, 콘텐츠 내용 곳곳에 광고를 삽입하는 방법이 있다. 드라마 주인공의 안경을 클릭하면 바로 인터넷쇼핑몰로 연결되는 식이다. 자본의 입장에서 P2P 서비스는 TV광고와 같은 것으로, 엄청나게 저렴한 자본과 노력으로 엄청나게 많은 고객들과 접촉할 수 있는 ‘광고 기계’인 것이다.

그러나 자본은 P2P 서비스를 ‘현재 상태’로는 허용은 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상태의 P2P 서비스로는 이용자/생산자들의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이 태생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료화 길을 착실히 걷고 있는 소리바다에 대해, 그것도 이미 서비스를 중지한 '소리바다-1'에 대해, 마치 죽은 자를 또 처형하는 ’부관참시‘와 같이, 다시 중지 명령을 내렸고, 이것도 모자라 손해 배상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형사 판결의 경우는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듯한데, 미국에서 큰 성공을 기록하고 있는 Apple사의 경우가 아닐까 판단된다. Apple사가 운영하는 음악 서비스인 아이툰스(iTunes Music Store)는 MP3 한 곡당 '99센트(저작권료는 평균 65센트)로 저렴하게 판매한다. 또한 Apple사는 MP3를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 공유할 수 있는 당근 정책으로 이용자들을 유인하고 있다. Apple사가 판매하는 MP3 플레이어인 아이포드(iPod)에 마음대로 저장할 수 있고, CD로는 10장, 메켄토시 컴퓨터와는 3대까지 공유를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Apple사의 성공에는 P2P서비스 이용자들을 ‘해적질’하는 마녀로 몰아 이용자 통제가 가능한 유료 서비스로 ‘이용자 몰이’를 한 정부의 역할이 주요했다. 이것이 이번 형사 판결에서 '음악을 공유한 이용자들의 복제권 침해'를 확실하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Apple사는 음악 서비스를 통해 단기적으로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지만 이것은 정부의 정책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장기적으로 하드웨어인 MP3 플레이어(iPod)판매에서 더 많은 이윤을 챙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윤 일부를 음반 자본가들에게 ‘이전’해 줄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방식이라기보다 잉여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자본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산업자본으로부터 서비스 명목으로 그 일부를 이전 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렇듯 이번 판결은 음악, 영화와 같은 콘텐츠 자본이 기존의 하드웨어 자본과 연합해야 한다는 자본일반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있고, P2P서비스 업체들로 하여금 현재와 같은 P2P시스템이 아닌 이용자/생산자 통제가 가능한 시스템 혹은 ‘광고기계’로의 개발을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통제 불가능한 P2P 서비스 이용자/생산자들을 강제적으로 혹은 기만적인 당근(***)을 이용해서 통제 가능한 시스템으로 전환하려고 하는 것이다.


---------------

(*) P2P를 노동자 관점에서는 기관지 11호와 31호에서 설명하려고 했고, 이 글과 함께  ‘대량 복제의 기술은 예술이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신비적인 분위기를 소멸시키면서 대중의 비판적 수용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주장도 경청할 만하다.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노동이라고 그것이 불필요한 노동이거나 낭비적인 노동은 아니다.

(***) 당근은 정보통신 운동단체와 네티즌들의 투쟁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자-농민의 민주적 통제만이 유전자 조작 작물에 대한 해답이다.

/* 이 글은 기관지 [노동자의 힘] 55호에 실린 글을 약간 수정한 글입니다 오늘(2004. 11. 5.) 9시 뉴스에 GMO에 대한 보도가 있어 관련글 3개를 연속적으로 올렸습니다 */

노동자-농민의 민주적 통제만이 유전자 조작 작물에 대한 해답이다.

- 베네수엘라 유전자 조작 작물 재배 금지의 의미

김해민

지난 4월 21일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유전자 조작 작물(이하 GMO)에 대해 재배 금지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아직 구체적인 정책은 나오지 않았지만 우선 차베스 대통령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몬산토와의 진행 중인 협상을 즉각 중단한다고 선언하였다. 얼마 전 수도 카라카스에 열린 볼리비아 혁명 기념집회에서도 차베스 대통령은 GMO는 농민과 농업 노동자들의 필요와 이익에 배치된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고 6억 평 규모의 토지에 유전자 조작 콩을 경작하려는 몬산토 계획을 백지화 시켰다.

GMO 기술

 농업에서 생명과학 기술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8,000년 동안 인간은 빵·맥주· 포도주 등을 만들기 위해 교잡(hybridization)으로 식물과 동물의 유전자를 조작해왔다. 단지 이 기술은 수년의 기간을 필요로 하고, 재배 혹은 사육할 면적을 필요로 할 뿐이다. 현대 유전자 조작 기술은 소수의 과학기술자에 의해 연구실에서 이루어지며 새로운 유전자를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방식이다. 시간과 공간이 필요 없고, 원하는 세포를 작은 유리 배양기에서 20분 만에 수배로 배양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기술은 일부 학자들로부터 "조악하고 부정확한 기술" 또는 "무작정 한번 해보는 식의 기술"로 평가되기도 한다. 1975년에 시작된 이 기술은 낭포성 섬유증 (cystic fibrosis)이나 근이영양증 (Muscular Dystrophy) 등 유전자 질병의 치료를 위한 과학기술자들의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미국 다국적 기업(몬산토, 노바티스, 듀퐁 등)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와 다국적 기업은 유전자 조작 기술로 제3세계의 기아와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저렴한 농산물을 공급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부시와 그 측근들도 유전자 조작 기술이 세계 기아문제 해결을 위한 일환이라고 주장하며 "유전자 조작 작물을 반대"하는 것은 "아프리카 기아문제를 해결할 최선책"을 가로막는 행위라고 비난하고 있다 (인터네셔날 헤럴드 트리뷴지, 2003년 5월 29일자)

미국은 왜 GMO를 심는가?

기술적으로 GMO는 제초제를 대량 살포 가능하기 때문에 잡초로 뒤덥힌 휴경농지를 손쉽게 농지로 전환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기존 작물은 제초제를 뿌릴 수 있는 기간이 제한되지만 GMO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기계화가 더욱 용이하여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GMO는 일반적으로 종자 값은 비싸지만 제초제 값과 노동력이 절감된다고 평가 받고 있다.

 미국에서 GMO재배가 확산된 원인은 GMO가 생산성이 높은 첨단기술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의 농업정책과 경영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클린턴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고 WTO이행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농산물 가격 인하시 보상을 해주는 '부족불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생산품목·면적 등을 농민자율로 결정할 수 있게 했다. 물론 이 과정에 다국적 기업이 로비도 무시할 수 없다. 그 결과 곡물 재배 면적이 증가하였으며 농산물 가격 경쟁은 더욱 치열해 졌다. 미국 농민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은 GMO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으로 중소 농민의 몰락하고 있으며,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은 가속화 되고 있다.

이렇듯 GMO 도입의 배후에는 미국 정부와 WTO 그리고 GMO를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이 있다. 이들이 제 3세계 기아와 빈곤 때문에 GMO를 개발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재 종자산업 세계 2위이자 농화학산업 세계 3위 그리고 GMO 특허 70%를 보유하고 있는 몬산토(Monsanto)의 다음 예는 GMO의 위상을 잘 설명해 준다.

몬산토는 제초제인 '라운드업'에만 저항성을 갖도록 유전자 조작된 '라운드업 레디'라는 콩을 특허화 해서, 이를 제초제와 한 세트로 팔고 있다. 몬산토는 유전자 조작콩을 판매할 때 특허로 특정 계약을 강제하는데, 몬산토의 유전자 조작 콩으로 다음해 씨앗을 마련해서도, 팔아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또 미국에서 몬산토는 이 계약에 따라 3년 동안 농민들이 재배하는 작물을 감시할 권리를 갖게 된다. 이로서 몬산토는 해마다 종자와 농약 둘 다를 판매하여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 있다. 그러나 일반 농민은 재배한 식물에서 종자를 얻어 파종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다. 이 계약은 종자를 구할 자금이 없는 가난한 제 3세계 농민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이다. 또 제 3세계 국가는 식량산업이 다국적 기업과 미 제국주의의 통제아래 놓이게 하므로 식량주권을 위협받아 종속적인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농업시장은 세계 경제의 65%를 차지하며 유전자 조작 식품의 시장규모는 2005년에는 200억 달러, 2020년에는 75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과 다국적기업은 이 시장을 노리고 있다. 미국은 농업 경쟁력 우위를 바탕으로 WTO협상에서 농산물 무역 자유화와 지적재산권 보호 압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내 다국적기업의 로비도 대단한데 일부에서는 군수-산업 복합체의  정치적 영향력이 이제는 바이오-제약-농기업 복합체로 바뀌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남미의 교훈

GMO도입과 관련해서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보다 명확하게 그 의미를 전해준다. 올해(2004년) 아르헨티나에서는 약 420억 평(경작지의 약 54%)에서  3천 4백5십만 톤의 유전자 조작 콩(전체 곡류의 50%)을 생산한다. 그리고  1인당 3톤으로 식량 생산량은 세계 최대이며 7천만 톤의 곡식과 5천 6백 마리의 소와 이와 비슷한 수의 양과 돼지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3천8백만의 인구 중에서 2천만의 사람들이 최저생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6백만 명의 사람들이 가난에 의해 극단적 기아에 고통 받고 있으며, 매일 55명의 아이들, 35명의 성인과 15명의 노인들이 기아관련 원인으로 죽어가고 있다. GMO도입으로 식량 생산량은 증가했으나 아르헨티나에서는 기아와 가난문제는 해결될 실마리는 커녕 오히려 더욱 비참해 지고 있다. 브라질의 룰라 정부도 몬산토와 미국으로부터 GMO에 대한 금지를 철회하라고 압력을 지속적으로 받았고 작년(2003년) 브라질은 한시적으로 GMO를 허용하였다. 그러자 몬산토는 라운드 업 면역성 콩의 유전자에 대한 로열티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농민의 민주적 통제만이 해답이다.

GMO기술 개발을 영원히 중단하자라고 주장하면 매우 간단한 것 같다. 지금과 같이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다국적기업에 의해 주도된다면 이 주장은 타당하겠지만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 사회에서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GMO기술에는 상당한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안정성면에서도 비단 GMO가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식량산업에 의해 첨가된 각종 화학 생산물에도 상당한 위험성이 있다. 오히려 GMO 개발의 전면 중단은 과학기술을 부정하고 과거로의 회기를 주장하는 일부 생태주의자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과학기술의 내용 성격 방향을 판단해야 하는 주체는 노동자-민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농민들은 '가방 끈이 짧기 때문에' GMO와 같은 과학기술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의 문제를 전문가 그룹의 판단에 맡겨 버린다. 일반적으로 과학 기술은 생산에 적용되어 생산력을 발전시키지만, 그 '현상'은 과학 기술을 조정 통제하고 다시 과학기술 내용과 발전방향을 규제하는 '본질'로서의 사회경제적 관계로 규정된다. 즉 과학기술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을 둘러싼 사회 경제적 관계이며, 이 것들을 상호 연관해서 분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소위 전문가들이 과학기술을 내용 중심으로 파악한다면, 노동자-농민은 그 과학 기술이 어떻게 결정되고 통제/배분되는지, 그리고 각 주체의 특성과 권력관계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과학기술 내용까지 더 잘 규명할 수 있다. 한국에서 부안을 보라. 핵 폐기장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대학에서 핵관련 전공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핵 폐기장 건설이 어떤 절차로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그 일을 맡고 있는 정부 관료들과 과학자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했는지를 통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간단하게 따져 보자. 현재 GMO를 배포하고 생산하는 사람들이 이미 GMO 농산물을 사용해서 전 세계 농산물 가격 하락을 주도하고 있으며, 또 제 3세계 소농들에게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종자를 구입하기 위해 IMF 대출을 강제한 자라면, 또 자신들의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 자원을 통제하기 원하는 제국주의 국가라면 이들의 GMO를 믿을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몬산토는 1920년대에 논란이 많은 인공 감미료인 사카린을 도입하여 제조 판매 하였고, 1960년대에는 발암성 물질인 PCB를 전자 장비에 도입하였고, 베트남 전에서는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고엽제를 생산하였다. 1980년대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다이옥신과 기타 유해 화학물질에 자사 노동자들이 노출된 사실을 숨기기는 등 악명 높은 기업이다. 그들이 생산한 GMO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 즉 그 생산물을 직접 먹어야 하는 일반 노동자-농민들을 믿어야 한다. 만약 GMO의 개발을 모두 이윤 동기에 사로잡힌 정부와 자본이 통제한다면 믿을 수 없겠지만 그 식품을 직접 먹어야 하는 노동자-농민이 민주적으로 엄격하게 통제한다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은 오직 거대 다국적 기업을 사회화해서 노동자 농민들의 통제와 경영하에 운영해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GMO 재배 금지의 의미

1970년대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은 농업을 농약, 화학비료, 농기계 등의 석유화학산업에 의존하게끔 재편하였고, 점점 더 다국적기업들의 통제 속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 결과적으로 3세계 국가들에게 농지 황폐화와 흉작 그리고 기아만을 남겼다. 그리고 지금은 생명공학과 GMO를 매개로 종자·농화학·제약·식품·곡물유통·동물약품 분야를 하나의 기업으로, 또는 제휴의 형식으로 수직 통합하여 독점을 더욱 강화하고 재편하는 과정에 있다.

 이번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의 GMO금지 조치는 안전하지 않은 식량 생산을 금지했다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우리(좌파)에게는 가난한 농민들이 자신의 고유한 권리(와 지식)를 다국적 기업에 특허로 빼앗기는 것을 차단하고, 제 3세계 식량주권을 통재하려는 자본의 음모에 반대하며 특히 미 제국주의의 세계지배에 대항하는 의미가 더 중요하게 와 닿는다. 특히 이번 조치는 작년 GMO관련 다국적 기업에 굴복한 브라질 룰라 정부와 비교해 볼 때, 베네수엘라 좌파 정권의 면모를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베네수엘라 좌파 정권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GMO를 비롯한 농업정책과 과학기술이 어떤 절차를 통해, 누구에 의해 통제되는지가 더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자가 유전자 조작 식품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

노동자가 유전자 조작 식품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

기관지노힘  제41호  

최근 영국에서 3가지 종류의 유전자 조작 농산물에 대한 주목할만한 실험결과가 발표되었다. 3가지 작물 중에서 사탕무우(sugar beet)와 제초제 저항성 품종인 기름씨 평지(Oil seed rape, 씨앗에서 기름을 짜내는 식물)는 환경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 이 논문의 결론이다.(주 1)

유전자 조작 식품의 첫 번째 세대는 1995년 미국 몬산토(Monsanto)(주 2)라는 회사가 개발한 콩(Round-up Ready Soybean)과 스위스의 노바티스(Norvartis)라는 회사가 개발한 'Bt 옥수수'와 같이 제초제나 병충해에 내성이 있는 농작물이다. 이들 유전자 조작 농작물은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환경은 물론이고 사람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주 3)

유전자 조작 농작물을 고려할 때 내재된 위험성은 물론이고, 그 농작물이 자본에 의해 계획되고 개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몬산토의 유전자 조작 콩은 자사의 제초제인 '라운드업'에만 저항성을 갖고 있다. 만약 이 콩이 세상에 퍼진다면, 몬산토사는 종자와 농약 둘 다 판매함으로써 엄청난 이윤을 챙길 수 있게 된다. 또한 유전자 조작 기술 중 "터미네이터 기술"(주 4)은 자본의 숨은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터미네이터 기술이란 올해 심은 씨앗이 다음 해에는 싹이 트지 않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기술을 말하는데, 이 기술은 자신이 재배한 식물의 씨앗을 거둬들여서 다시 뿌릴 수 있게 농부의 권리를 박탈하여 그 만큼(전 세계적으로 50%)의 종자시장을 더 차지하고자 하는 기술이다.

거대 자본은 이러한 유전자 조작 기술의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엘리트 과학자 집단들과 결탁하여 반대 사례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며, 정부 차원에서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미국 정부는 한국과 유럽연합 등의 국가에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통관절차가 복잡하다며 이를 간소화해줄 것을 요구해왔고 지난 8월에는 EU의 유전자 조작 식품 금수조치와 관련해 WTO에 제소한 바 있다.

2세대에 접어들면 1세대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하여 시장확대를 꾀한다. 이를 위해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광고 전략을 바꾸었는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전자 조작 기술로 굶주리는 제 3세계 민중들을 먹여 살릴 수 있고 기적의 치료약과 유전자 치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유전자 조작 식품이 식량 문제를 해결한다?

식량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개발된 대표적인 유전자 조작 농작물은 비타민 A를 보강한 '황금쌀(Golden rice)'(주 5)이다. 황금쌀의 경우 신젠타라는 다국적 기업이 특허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 기업은 노바티스와 아스트라제카의 농업부문을 합병해 탄생한 농약 분야 세계 1위, 종묘 분야 세계 3위의 기업이다.

그러나 황금쌀과 같이 독점된 유전자 조작 기술은 식량 문제 해결이 목적도 아니며 해결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황금쌀에 포함된 비타민 A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지방과 또 다른 비타민 그리고 미네랄 등이 필요하다. 또한 비타민 A를 얻기 위해서 꼭 특허로 독점되고 위험성이 있는 황금쌀일 필요는 없다. 이미 기존의 식품인 현미에는 비타민 A와 다량의 미네랄이 포함되어 있다. 자본은 이러한 손쉬운 대안에는 이윤이 남지 않기 때문에 외면한다. 아울러 바이오 부분의 연구 자금 중에서 단지 1%만이 가난한 농민을 위한 농작물 개발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식량문제 해결이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전략은 극심한 식량난에 봉착한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유전자 조작 식품을 원조하는 방법이다. 마치 마약 상인이 마약 소비자를 확대하기 위해 중독될 때까지 마약을 공짜로 뿌리는 판매전략과 동일하다. 미국은 그런 방법으로 말라위, 스와질랜드, 레소토, 짐바브웨와 모잠비크 등의 나라들로 하여금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모두가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장기간 식품 생산, 환경, 무역 및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할 중요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240만 잠비아 민중들은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거절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바로 잠비아에 옥수수 공급과 원조를 중단했다. 이러한 예는 그들의 목적이 식량문제 해결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보여준다. 신젠타의 황금쌀도 연간 수입이 1만불 이하의 농민들에 대해서는 종자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계약을 했지만, 이 계약이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명확하지 않다.

전 세계 인구 중 적어도 60억의 인구가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매우 시급하다. 그러나 현재 전체 식량 생산량은 이미 소비량보다 1.5배 많으며, 일부에서는 도리어 비만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지구상의 식량문제가 유전자 조작 식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왜곡된 분배구조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제 3세계 민중들이 필요한 것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과 음식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이다. 굶주림을 막기 위해서는 가난에 찌든 국가의 부채를 탕감하고,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배분하고, 관계 용수와 식품 창고를 만들기 위한 기술적 도움과 무이자 대출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한 유전자 조작 식품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 사회인 것이다.

유전자 조작 기술과 의약품

유전자 조작기술로 기적의 치료법을 개발하고 유전자 치료가 가능하다며 선전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개발된 약품은 인터페론(주 6)과 인슐린 2가지뿐이다. 다른 치료방법이 없는 난치병의 경우, 유전자 조작 기술을 적용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인터페론은 1950년대에 알려져 C형 간염(hepatitis C)이나 혈액암(blood cancer), 다발성경화증(multiple sclerosis)(주 7)등 다른 치료방법으로 불가능한 병들의 치료제로 사용되고 있다. 인슐린이라는 호르몬도 과거에는 돼지와 소에서 추출했지만 지금은 유전자 조작 기술로 다량 제조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제 역시 독점된 기술이라면, 노동자-민중의 접근권이 상당히 제한될 수 있음을 우리는 에이즈(AIDS) 치료제와 백혈병 치료제(글리벡)를 둘러싼 투쟁에서 잘 알 수 있다. 일부에서는 '콜레라 백신을 생산하는 유전자를 갖는 바나나'와 같은 유전자 조작 식품으로 저 개발 국가들의 의약품 접근권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기술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백신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에게 건강 보조식품이나 약품을 생산하는 기술로 전락할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 3세계 민중들의 건강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보다 많은 진료소를 설치하고 의사-간호사들을 양성하며, 필수 의약품에 대한 특허를 폐지하여 접근권을 확대하는 일을 우선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현재 연구 프로그램 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가능하다.

유전자 조작 식품을 반대하는 이유

이렇듯 전 세계 식량 문제와 보건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대안들이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자본이 유전자 조작 식품에 집착하는 이유는 특허를 통해 쉽게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에 미국 대법원이 생명체에 특허권을 부여함으로써, 살아있는 생물로부터 유전자를 분리하는 방법뿐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 자체도 개인 소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바이오 산업에는 이미 10여 개의 거대 독점 기업이 이 산업을 지배하고 있고, 유전적으로 변형된 작물의 70%가 몬산토 특허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전자 조작 기술은 정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으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기술로서, 노동자-민중에게 특정분야에 한해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술이 어떻게 연구되어야 하고 어떤 것들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 연구의 대부분은 공공자금으로 수행되고는 있지만 소수의 거대 기업들이 바이오 산업을 지배하고 있고, 이들은 소수 거대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서 유전자 조작 기술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의 좌파 과학자 스티븐 로즈는 "유전자 조작 식품을 먹는 것은 위험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유전자 조작 음식보다도) 훨씬 우려되는 독성 물질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유전자 조작 토마토를 먹지 않을 것이다. 내가 몬산토의 이익에 기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라며 계급적 관점에서 반대를 주장한다.

---------------------------------------------

(주 1) 이 결과는 the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이라는 논문지에 2003년 10월 16일자로 발표되었다. 3개 중 나머지 하나는 유전자 조작 콩이다.

(주 2) 몬산토는 고엽제를 생산했던 기업으로 악명 높다.

(주 3) 유전자 조작 기술의 기술적 문제에 대해서는 매완-호 교수의 논문 "생명공학 거품"에 잘 설명되어 있다. http://phps.snu.ac.kr/people/walker71/biotech_bubble.htm에 서 번역문을 볼 수 있다.

(주 4) 미국의 농무부와 목화 종자회사인 델타 앤드 파인 랜드사가 이 기술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특허(US 5,723,765)받았으며, 현재 카나다(CA 2196410), 호주(AU 9532050), 유럽특허청(EP 775212) 등에서 심사계류 중이다. 현재 실시권을 허여 할 수 있는 권리는 델타 앤드 파인 랜드사에 귀속되어 있으며 농무부는 본 특허권이 상업화 되는 경우 순매출액의 약 5%를 로얄티로 지급받게 된다. 국제특허출원(PCT)을 하면서 한국을 지정하였으나 국내절차를 밟기 위한 번역문을 소정 기간 내에 제출하지 않아 1997. 5. 25자로 취하 처분됨으로써 한국에 대한 특허출원은 포기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주 5) '황금쌀'이란, 쌀에 두개의 수선화 유전자와 박테리아 유전자를 삽입한 것으로 쌀의 프로-비타민 A를 강화한 것이다. 이 프로-비타민 A는 몸 속에서 비타민 A로 바뀐다. 실제로 WHO(세계보건기구) 보고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에 1억 명 이상의 비타민 A 결핍증 어린이가 있고, 이 중 25만-50만 명이 매년 눈이 멀고 있으며 이 가운데 50%가 1년 이내에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 6) 세포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인터페론(interferon)이란 단백질이 생성되어 다른 세포들을 감염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지난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 7) 정상적인 면역계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와 같은 외부물질을 공격함으로써 우리 몸을 보호한다. 그러나 면역체계가 외부물질과 자가세포를 구별하지 못해 신경세포 섬유의 수초 (마이엘린)를 공격하게 되면 수초가 서서히 파괴되는 질환이 발생하여 무감각, 근육 위축, 강직, 시력 감소, 운동 실조 등에 걸리게 되는데 그것이 다발성 경화증이다.

참고 사이트

http://www.agri-korea.or.kr/gmo/gmoq&a.htm

http://phps.snu.ac.kr/people/walker71/myth_of_agribiotech.htm

http://www.guardian.co.uk/gmdebate/Story/0,2763,1053917,00.htm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