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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평화공원에서
어릴 적 제사나 명절 때마다 어른들이 숨죽이며 증언했던 4.3을 떠올렸다.
80년대 초반, 선후배⋅동료들과 4.3에 관련한 자료를 구해 토론하고, 연구하고, 분노했던 4.3이 다시 기억 저편으로부터 생경하게 떠올랐다.
지난 5월16일, 모친의 49제를 마치고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4.3평화공원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다가 온 것은 과거의 ‘기억’이었다.
그것은 ‘다랑쉬굴에서의 학살’에 대한 기억이었고, ‘숨막힘’과 ‘공포’의 기억이었고, ‘분노’와 ‘절망’의 기억이었다.
4.3은 할아버지의 ‘죽음’이었고, 셋아버지의 ‘행방불명’이었고, 아버지의 ‘가난’이었고, 우리 모두의 ‘숨죽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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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90년대 초반 이후, 나는 4.3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 어둡고 끔찍한 기억이 싫었고, 숨막힘이 싫었고, 그 고통과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90년대 후반쯤이라고 기억한다.
4.3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이 한창일 때, 학술토론회를 마친 뒷풀이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4.3은 더 이상 학살과 주검이 돼서는 안된다. 4.3이 더 이상 패배의 기억으로만 남아서는 안된다. 4.3은 우리 노동자민중운동의 진전만큼 밝혀질 것이다. 역사의 진전만큼만 4.3은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강요배 화백의 ‘4.3 연작 그림’ 가운데, 한라산을 배경으로 제주도민들이 밝은 모습으로 서 있는 그림을 가장 좋아했다.
해방 직후 제주도민들이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자신들의 힘으로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꿈이었을 거다.
진정으로 ‘해방’된 세상을 스스로 직접 만들어 가야하고 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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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한 매듭이 지어졌다.
2003년 ‘4.3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했으며, 방대한 4.3평화공원이 만들어짐으로써 한 매듭 지어졌다.
50여 년간 ‘없었던 역사’, ‘억울한 죽음의 역사’는 이제 ‘평화’와 ‘인권’의 관점에서 한 매듭됐다.
아버지와 함께 찾아간 위령제단에서 13,000여개가 넘는 4.3희생자 명패 가운데 할아버지와 셋아버지의 명패도 있었다.
이제 모두 ‘학살’과 ‘공포’의 기억을 잊고 편히들 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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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평화공원을 나서면서 지난 20여 년간 제주를 잊고 제주를 떠나고자 했던 나의 ‘의지’도 그곳에 묻고 나왔다.
4.3 당시 ‘해방’을 꿈꾸었던, 당시 제주도민들의 꿈, 그 해방을 향한 열망만을 오롯이 가슴에 품고 나섰다.
그리고 4.3평화공원을 뒤로 하고 달리는 자동차에서 멀리 한라산을 바라보며, 이런 상념이 언뜻 스쳐간다.
“제주도는 자연이 역사를 압도하고, 그 자연을 거대자본이 장악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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