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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비판’과 ‘계급적 선택’(2004.07.07.)

‘도덕적 비판’과 ‘계급적 선택’

 

‘도덕적 비판’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2004년 임금협상을 위한 파업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6월 말,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은 “고소득 노동자의 임금인상 자제를 통해 노노간 임금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비정규직 해결방안(?)을 제출했다.

당연히 시의적절하게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줬다.

지난 6월 10일에는, 144명의 사회원로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동결과 삭감을 요구”하면서, “대기업 노조의 이기심”에 대해 “도덕적인 비판”을 가했다.

5월말 청와대 노사정 간담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대기업 노조들이 중소기업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현대차 노조를 질타(?)한 지 얼마 안되서의 일이다.

“노동계의 정규직 지상주의는 노동시장 왜곡과 고용시장 악화를 초래할 뿐”이고, “정규직 근로자의 근로조건 양보와 경영계의 노력을 통해 비정규직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현실적인 해결책 마련”에 노동계가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경제5단체가 강변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두 달 전인 5월 초의 일이다.

 

이로서 지난 몇 달에 걸쳐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도덕적 해법(?)’은 완성됐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자제와 노동유연화의 전면화’가 그것이다.

정부와 재계와 보수언론이 주도하고, 사회원로와 노총의 지도부가 들러리를 서면서, ‘사회적 합의’는 이루어지고 있다.

비정규직 해결의 공은 이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넘겨졌다.

정규직 이기주의를 넘어 선 ‘도덕적 선택’의 문제로 됐다.

 

‘계급적 선택’

 

도덕적 선택을 강요하는 거대한 공세 앞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도덕적으로” 혼란스러워 하고 동요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공헌 기금’을 제안하기도 하고, 비정규직을 대리한 임금협상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혼란과 동요는 위로부터의 위선적인 ‘도덕적 비판’과 아래로부터 비정규직의 ‘계급적 비판’이라는 이중의 공세에 더욱 빠지게 할 뿐이다.

이런 혼란과 동요가 지속될수록,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의 문제의 진정한 원인이 바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그 자체라는 점은 은폐된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상대적인 고임금일 뿐이고, 사실은 잔업특근 등 장시간 노동과 근골격계로 대표되는 노동강도 강화의 결과라는 점은 가려진다.

 

‘도덕적 비판’ 앞에서 동요할수록 계급적 현실은 은폐된다.

계급적 현실이 은폐될수록, 노노간 대립이 더욱 부각되고, 정규직 노동자는 더욱 고립되며, 비정규직 문제해결은 지연된다.

정규직 노동자는 이러한 계급적 현실을 은폐하는 사슬을 끊어야 한다.

그 출발은 먼저 잔업특근과 노동강도 강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실노동시간을 단축하여 ‘법정노동시간’으로도 ‘생활임금’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출발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일상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존재가 정규직 고용안정의 안전판”이라는, 강요된 현실을 계급적 단결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실천이 지금 시기 민주노조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다.

 

2004.07.07.

[현자노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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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 ‘유연화’, ‘개혁’, 그리고 ‘사회적 합의’(2004.06.07.)

‘안정’, ‘유연화’, ‘개혁’, 그리고 ‘사회적 합의’

 

‘임금안정’

 

‘안정’이란 말이 있다.

그 자체로는 좋은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이 단어를 ‘임금’이란 말과 연결하면, 즉 ‘임금 안정’은 곧 임금을 동결하거나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뜻이 된다.

그래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일단 ‘안정’을 해치는 것이 된다.

지난 2월 노사정위원회가 추진했던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에서는 “향후 경영계가 인위적인 고용조정을 최대한 자제”하는 대신 노동계는 “2년간 임금안정에 협력”하기로 했다.

이 표현을 사실 그대로 “임금을 동결”하거나 “임금인상을 자제하기로 했다”고 바꿔 보자.

합의의 결과로 생길 대중적 분노를 미리 거세해 버린 느낌이 들지 않는가?

 

‘노동유연화’

 

‘노동 유연화’라는 말도 지난 10여 년간 익숙하게 듣던 말이다.

1990년대 초반에 소위 ‘신경영전략’이 일반화되면서 알려진 용어다.

‘유연화’! 얼마나 부드러운 표현인가?

그러나 이 부드러운 표현도 ‘노동’과 결합하면 으시으시해 진다.

‘노동유연화’!, 곧 기업가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노동자를 해고시킬 수 있고, 필요한 시간에 언제든지 일을 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노동시장의 유연화’라고 고상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만약 이러한 ‘유연화’에 노동자들이 저항한다면, 그 노동자들은 해고로 인한 삶의 고통에 항변하기도 전에, 노동시장을 ‘경직화’시켜 국가의 경제발전과 회사의 발전을 저해하는 자로 찍히게 된다.

 

‘노사관계 개혁’

 

‘개혁’이라는 말도 그렇다.

현실을 바꾼다는 뜻이다.

만약 그 현실이 부당하다면, 그래서 지켜야만 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그 현실을 ‘개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개혁’이 ‘노사관계 개혁’으로 되면, 바꿔야 할 내용과 대상이 전혀 엉뚱해져 버린다.

노무현 정권이 ‘선진노사관계 로드맵(단계별 일정표)’이라는 것을 만들어 노사관계를 선진적 수준 국제적 수준으로 개혁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개혁’한다는 것이 다름 아니라, 정리해고와 변형근로, 그리고 파견근로를 기업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법적으로 확실하게 보장하겠다는 내용이다.

당연히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이러한 정리해고나 파견근로에 저항하는 노동자나 민주노조가 되고, 이들은 ‘반개혁 세력’이 된다.

게다가 IMF 외환위기 이후 전면화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로 양산된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 때문이고, 따라서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해 정규직이 임금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하지 못한 결과, 이러한 여론 공세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합의’

 

노무현 정권 2기 들어, ‘사회적 합의’가 위로부터 대대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6월 4일에 ‘노사정 대표자회의’가 만들어져서 ‘노사정위원회 기구 개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추진될 내용은 ‘임금안정’, ‘노동유연화’의 제도화, 그리고 그를 통한 ‘노사관계의 개혁’이 될 것이다.

‘사회적 합의’라는 용어에 현혹되지 않고 ‘임금억제’와 ‘정리해고’, 그리고 ‘비정규직의 제도화’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적 단결’ 뿐이다.

 

2004.06.07.

[현자노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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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들의 촛불시위를 보며(2005.05.11.)

‘경쟁위주의 입시정책 반대, 내신등급제 상대평가 반대’ 촛불시위를 보며

 

지난 5월 7일, 내신등급제와 상대평가제를 반대하는 고등학생들의 촛불시위로 언론이 떠들썩할 때, 필자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이었다.

촛불시위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교육청 관계자 및 학교교사 760명이 동원되고, 100개 중대 1만여 명의 경찰 동원되어 결국 전국적인 시위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400여명의 고등학생들만이 광화문에 모여 ‘입시 경쟁 교육에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촛불 추모제’를 치렀지만, 그들의 이 사회와 어른들과 교육정책을 향한 절규와 울부짖음에는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때 이 땅의 천만노동자들이 외쳤던 절규와 울부짖음이 그대로 베어 있었다.

 

그것은 철부지들의 투정이 아니라, 한마디로 학생들의 ‘인간 선언’이었다.

그들이 “학생들은 돼지처럼 학교라는 우리에 갇혀서 시험이라는 것에 사육돼, 등급에 따라 백화점(일류대학)과 정육점(이삼류대학)으로 간다”고 외쳤을 때, 학교나 학원에 수감되어 격리되어 경쟁을 강요받는 생활이 강제수용소처럼 느껴져 “친구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곳이 학교가 되었고, 이건 더 이상 학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87년 당시 병영 같은 공장의 현실을 폭로하고,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들이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 이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춰 살지 않겠다”고 주장했을 때, 공장의 진정한 주인은 노동자이고,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민주노조를 건설해야 한다던 87년의 노동자들의 뜨거운 바램과 열망을 다시 보는 듯 했다.

 

그들은 이 땅의 교육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내신등급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서열화의 입시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대학서열화’와 ‘학벌주의’가 공고한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살인적인 대학입시경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한나라당이나 일부 보수언론들이 학생들의 주장을 빌미로 ‘고교등급제의 적용과 ‘본고사 부활’의 흐름으로 연계시키려는 정략적인 시도가 한심하고 치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올 들어 벌써 20여명의 학생들이 성적을 비관하며 자살한 것은 ‘개인적인 자살’이 아니라고, 그것은 “학생들이 학교와 선생님들을 불신하게 하고, 학생들끼리 무한 경쟁으로 치고 받으라는 식의 입시제도”때문이라고, 그래서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내용에 바보같이 억눌려온 시대의 종말을 선포하기 위해 우리가 모인 것”이라고 그들이 선언했을 때, 그들은 이미 ‘교육의 한 주체’로 우뚝 선 것이었다.

 

우리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학생들에게 ‘어른’이고자 한다면,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이 땅의 교육 현실을 헤쳐 나갈 한 주체로 인정하고, 나아가 논술이든, 내신이든, 수능이든 어느 하나 놓칠 수 없어 결국 3,4중고에 처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경쟁 위주의 신자유주의적 입시정책’과 ‘대학 서열화’, 그리고 ‘학벌주의’에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

더 이상 그들만의 외로운 ‘촛불시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2005.05.11.

[현자노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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