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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손가락의 비밀(2006.12.29.)

새끼손가락의 비밀

 

 

우리 몸에서 감각이 가장 예민한 부분이 ‘손’과 입술입니다.

가장 감각이 둔한 부분은 등이라고 합니다.

손가락, 손바닥, 손목이 정확한 동작을 통해 얻은 감각을 척수를 통해 뇌에 전달할 때 우리는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새끼손가락의 비밀

 

순전히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손의 기능은 3가지입니다.

주먹을 쥐는 것, 물건을 잡는 것, 그리고 손을 펴는 것입니다.

이 3가지 기능 중 어느 하나라도 손상되면 손은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엄지와 주변 근육은 물건을 집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엄지손가락이 움직이는 범위도 가장 크고 화려하며 근력도 가장 셉니다.

나머지 손가락도 3가지 기능에 나름대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손가락의 기능과 관련해서 우리가 잘 모르거나 잊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새끼손가락의 역할입니다.

다른 손가락에 비해 별 쓸모없을 것 같아 보이는 새끼손가락이 사실은 손동작에서 중심축의 역할을 하고, 손힘을 사용할 때 기본축의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몸은 어떠한 동작을 하던 반드시 고정된 중심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정적인 동작을 할 수 있습니다.

 

손동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새끼손가락이 없으면 손힘을 제대로 쓸 수 없습니다.

가장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새끼손가락이 사실은 묵묵하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상대방과 약속을 할 때 새끼손가락을 걸고 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새끼손가락을 걸지 않고 엄지끼리만 하는 약속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건강한 감각

 

하나의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별 볼일 없는 위치에서 드러나지 않게 묵묵하게 새끼손가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중심축이 있어야 그 조직은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조직의 역동적인 힘은 이러한 중심축이 얼마나 잘 세워져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이 중심축, 기본축이 무너지면 그 조직은 전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엄지손가락의 화려한 동작도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거꾸로 이러한 중심축과 기본축이 탄탄하다면 엄지손가락은 물론 다른 손가락들도 힘 있고 자신감 있게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어느 조직이 위기나 어려움에 처했다면, 위기와 어려움이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바로 중심축이자 기본축의 역할을 해 왔던 활동가들이 무너지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 대개 금방 드러나지 않고, 그래서 소홀하게 판단하거나 지나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파급력은 만만치 않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모두가 다 새끼손가락과 같은 역할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는 다 스스로 새끼손가락 같은 역할을 자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조직은 현실 변화의 예민한 지점들을 읽어내고 대응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그 조직의 생명력과 건강함이 달려 있습니다.

건강한 감각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200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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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성 마비’를 넘어, 혼자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것!(2007.11.30.)

‘경직성 마비’를 넘어, 혼자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것!

 

 

지금은 다시 기억하기도 끔찍하지만, 꼭 4년 반전에 아내가 교통사고로 척추신경을 다치고, 몇 차례 고비를 넘기면서 재활치료를 통해 조금씩 걷기 시작했을 때, ‘경직’과 ‘통증’이라는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경추 3번과 4번 신경이 손상을 입었지만, 그나마 다행히 신경이 전부 끊기지 않아 완전 전신마비는 모면할 수 있었고, “걸을 수 있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재활 치료를 받는 중에 맞닿게 된 ‘도전’인 셈이었다.

사실 배설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즉 똥오줌을 스스로 가눌 수 없는 ‘완전마비’가 아니라는 점만으로도 위안을 삼고 있었는데, 힘겨운 물리치료의 결과로 근력이 생기고 신경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근력과 함께 ‘경직’이, 신경이 살아난 만큼의 ‘통증’이 동반된 것이다.

 

당시 재활 치료과정에서 알았지만, 마비에는 ‘경직성 마비’와 ‘이완성 마비’가 있었다.

‘경직성 마비’는 불필요하게 신경이 극도로 긴장하면서 온 몸이 뻣뻣하게 되는 것이고, ‘이완성 마비’는 몸이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못한 채 축 늘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아내는 ‘경직성 마비’였다.

조그만 자극에도 신경이 뻗쳤고, 사지 전체에 팽팽하게 긴장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경직만큼 통증이 수반됐다.

손상으로 흐트러진 신경은 온갖 알 수 없고 가눌 수 없는 통증을 뇌로 전달했다.

그 때마다 아내는 ‘경직’과 ‘통증’의 고통을 호소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도 없앨 수도 없다는 점에 절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초기 재활치료 과정에서는 이완성 마비에 비해 경직성 마비가 빨리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경직’으로 걷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잘 서고 잘 걷는다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다행히 경험이 풍부한 물리치료사는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통증’에 대해서는 “통증은 신경이 살아있다는 것”이라 위안해 주면서, “경직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무릎과 허리를 굽히고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기면서 그 탄력으로 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면서, ‘경직’으로 서는 것에 안주하지 않도록 물리치료를 했다.

지팡이나 기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서서 걸을 수 있을 즈음에, 물리치료사는 “지금 몸이 완전히 고정된 상태다. ‘안정’된 것과 ‘고정’된 것은 다르다. 몸통이 움직이면서 안정돼야 제대로 걸을 수 있다”고, ‘고정’된 몸과 ‘안정’된 몸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양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몸통’을 움직이면서 안정돼야 제대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혼자 걸으려면 위급한 상황에서 혼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병원은 온실이고, 바깥세상은 현장이기 때문이다.”

4년 반이 지난 지금, 아내는 아직도 양 손에 힘을 빼지 못하고 있고, 몸통이 자유롭지 못하며, 위급한 상황에서 혼자 대처할 수 없어서, 혼자 서서 걷기는 하지만 ‘제대로’ 걷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모든 사람이 갓난아기 시절에 이미 마친 걷기 학습을 아내는 지금 ‘의식적’으로 훈련하고 있다.

제대로 걷기 위해.

4년 전 6개월간의 재활치료를 마치고 병실을 나설 때 물리치료사가 했던 마지막 이야기가 아직도 귓전에 남아있다.

 

“경직은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다. 경직을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 한번은 넘어질 것이다. 그 때 어떻게 순간적으로 대처하느냐가 혼자 걸을 수 있는지에 관건이다.”

 

2007.11.30.

관악산 남쪽 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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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고추나무는 일으켜 세우지 말라!(2003.08.19)

쓰러진 고추나무는 일으켜 세우지 말라!

 

몇 달 전 개인 사정으로 농가주택으로 이사 온 뒤, 계속 눈에 거슬렸던 것이 텃밭에 심어져 있던 고추였다.

좋은 종자로 심었다는 고추가 집주인의 관리 소홀로 쓰러져 방치되고 있었고, 농사에는 애초부터 무지랭이인 나는 집을 나가고 들어오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쓰러진 고추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더 이상 바라만 보지 않고 쓰러진 고추나무를 일으켜 세워야겠다고 어줍지 않은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쓰러진 고추들이 막 썩기 시작할 때에서야 였다.

 

고추나무 세우기

 

쇠막대기를 땅에 박고 비닐끈으로 쓰러진 고추들을 묶어 세우면서 내가 놀란(?) 것은 고추나무가 너무 좋은 종자여서 풍성하고 실하게 열린 고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쓰러졌다는 점이었다.

이웃집 농부들이 고추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때’를 놓치지 않고 지지대를 받쳐 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놀란 이유는 ‘때’를 놓쳤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다.

고추나무가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열매를 맺어, 결국 사람이 지지대를 받쳐 주지 않으면 자신이 맺은 열매의 무게마저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썩을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무릇 이것은 ‘자연’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더 많은 수확을 원하는 사람들에 의한 종자 ‘개량’의 결과였다.

이 ‘개량’된 고추나무는 주인을 잘못 만나 다 자라기도 전에 쓰러져 썩게 됐지만, 주인을 잘 만나 ‘때’를 맞춰 풍성하게 수확된 고추들의 운명은 어떨 것인가?

다 팔려서 소비되지 않으면 그대로 밭에서 썩거나 창고에서 썩을 것이니, 결국 고추의 운명은 ‘자연의 때’만이 아니라 ‘시장의 때’와도 궁합이 맞아야 온전하게 자신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고추나무 하나 세우면서 드는 괜한 상념에 마음이 씁쓰레 해졌다.

 

밭 여섯 이랑이 보기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둘이서 한나절을 끙끙대야 간신히 쓰러진 고추나무를 세울 수 있었다.

‘때’를 놓쳐 아쉬웠지만, “남은 고추라도 건질 수 있겠지”하는 조금은 흡족한 마음으로 밭두렁에 주저앉아 매판장에서 사온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데, 마침 곁을 지나가던 뒷집 통장 아저씨 왈(曰),

 

“쓰러진 고추는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여, 뿌리가 흔들려 바람이 들어가면 고추가 다 죽어. 괜한 일들을 했구먼.”

 

조급한 기대와 설레임

 

이날 이후, 나는 집을 드나들 때마다 어설픈 마음으로 세운 고추나무들이 하나씩 둘씩 누렇게 시들어 가고, 붉게 익다가 병이 들어 썩은 채 무게를 감당 못하는 시든 나무에 메달린 고추를 하염없이 바라보아야만 했다.

이러길 보름가량 지났을까?

여름 장마가 끝나가자 고추밭을 하루 빨리 뒤집어엎어 김장 배추와 무우를 뿌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씩 긴장되고 흥분되어 갔다.

누렇게 시들어 빠진 고추나무를 뽑아내고, 밭이랑을 뒤집어엎어 고른 다음, 거기에 새로 김장 배추와 무우 묘종을 심을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해지는 듯했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대와 셀레임이 가볍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시들어 빠진 고추나무와 붉게 익다말고 썩어가는 고추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밭을 뒤짚어 엎고, 새로운 묘종을 심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은 벌써 내년 봄에 파릇파릇 솟아날 배추와 무우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런 기대와 설레임으로 자랑삼아 장모님한테 이야기했는데, 정색을 하며 장모님 왈(曰),

 

“고추를 버리지 말고 일일이 다 따야 혀, 얼마나 좋은 고추인데. 썩은 부분만 도려내면 돼.”

 

2003.08.19.

세곡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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