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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사람]의 창간.

첨부이미지

 

다산인권재단에서 발행하는 인권잡지, 월간 [사람]은 내게 꽤 큰 사건이었다.

 

매체에 대해 아는 것은 눈꼽만치도 없는 녀석이 창간호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만으로도 영광일 뿐. 이번 아니면 언제 '창간호'에 이름이라도 실어 볼 수 있을까.

 

사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서 무척 맘이 찔린다. (앞으로는 열심히 해볼랍니다. 불끈!)

어렵게 시작한 것이고 어려운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분들과 함께 하는 것인 만큼, 정말 좋은 잡지가 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만들 것이다.

 

 



 

‘가족처럼 대우해 드리겠습니다’ 속에 숨겨진 진실

-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감독: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힐러리 스웽크  2005년작품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하지만 그 순도를 따지자면 물이 더 진하다. 피는 90%이상의 물에 여러 불순물이 섞여져 있는 것일 뿐이다. 유전자나 적혈구 따위의 생물학적 요소들이 100%의 순수함을 자랑하는 물의 가치를 마구 깎아내릴 만큼 대단한 요소들이었나? 하기야 피를 돈 주고 사려면 물보다는 훨씬 비싼 것이 사실이지만.

괜찮고 실력 있는 선수를 키우기에는 의심도 많고 나이도 많은 클린트 이스트우드(프랭키 던)와, 서른이 되어서야 데뷔하겠다고 무작정 체육관을 찾아온 힐러리 스웽크(매기 피츠제럴드)에게는 엄청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가족에게 왕따 당하고 있다는 점. 왜 인지는 모르지만 부인과 딸에게 버림받은 듯 보이는 트레이너와 천박한(?) 권투선수라는 직업 때문에 무시당하는 여성 권투선수. 하지만 또 다른 공통점은 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 조금만 눈을 돌려보시죠, 가족 말고도 그 따뜻한 사랑과 애정을 퍼부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데 왜 ‘혈연’에 그렇게 연연하며 구질구질하게 감정을 낭비하십니까?

영화 막바지에 그들은 서로의 끈끈한 애정을 확인하고 새로운 가족-부녀관계-구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나마 마지막에라도 제대로 확인한 것이 나은 것일까. 하지만 ‘재능 있는 선수’와 ‘실력 있는 트레이너’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제대로 확인하기 전까지 그들은 그냥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아하!. 결국 끈끈한 애정을 얻기 위해서는 ‘능력’이라는 가치가 필요한 것이었군. 씁쓸하다. 무시하고 싶은 직업을 가진 딸-언니이지만 엄청난 대전료 앞에서 여주인공의 가족들은 ‘오~달링’을 부르짖으며 상큼?발랄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 등장한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럽지만 그녀는 대전료가 없으면 또 다시 버려질 운명. 쯧쯧, 결국 관계의 무게는 ‘돈-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는 꼴이다.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말로 운운하며 ‘가족’의 울타리를 공고히 하는 것은 사실 당신에 대한 부드러운 배신이다. 이익에 대해 첨예하게 부딪히며 싸우는 정글 같은 사회에서 가족은 당신에게 ‘혈연’을 빌미로 따뜻함을 제공하는 척 하다가 결국 뒤에서 도끼를 내려친다. ‘그래도 밥값(아니 핏줄 값!)은 해야지’하며 말이다. 그 따뜻함에 홀린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그 배신을 내치지 못하고 가정폭력에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감정/노동의 착취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가족처럼 대우해 드리겠습니다’라는 한줄 구인 광고가 무서운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과 착취에 굴복하라는 뜻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핏줄이 아니다. 새로운 관계의 형성이다. ‘가족처럼’이라는 말 앞에 숨어있는 것은 ‘자본주의적’이라는 단어이다. 정말 끈끈한 정이 그립다면 순도가 떨어지는 ‘피’에 기대지 마라. 그보다는 나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주고 소통할 수 있는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 훨씬 더 큰 보답으로 돌아올 것이다. ‘피’는 ‘자석’이 아니다.

(2005. 7. 월간 '사람' 창간호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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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생각해보면.

** 이 글은 부깽님의 [남성 페미니스트] 포스트에 트랙백 되어 있습니다.
** 그리고 [아직 정의내리지 못한 것] 포스트와 연결된 이야기입니다.

* 웹링의 문제를 너무 확장해서 바라봤다는 느낌이 없지않지만, 이런 생각들이 나의 여성주의에 대한 고민들을 넓힐 수 있다는 생각에 쓰게 됐다.

여전히도 여물지 못한 고민이지만, 부깽님의 글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과연 '여성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여기서의 '입장'이 부깽님의 글에서 표현된 것처럼 "단순히 하나의 시각을 갖는 정지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을 중심으로 탈바꿈시키는(사유하는) 동적인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100%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잡하면서도 간단하다. 성과주의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나는 '여성으로 살아남는 것'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바꾸어내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고, 말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주변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을 '생각'의 차원을 넘어 '행동'으로 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한다는 측면에서 일 것이다.)

여성주의적 입장의 동일성을 통해 웹상에서의 연대를 구축한다는 차원에서 mi-ring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오프공간이 아닌 온라인 공간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웹링이 진정 '특별한 연대'를 구성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시작인 웹링에 대해 그 의미를 사전에 평가하는 것은 분명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나는 여성운동이 이제 최소한의 '입장'만을 공유하는 것 만으로 연대를 확장하는 것 보다는, 좀 더 논쟁적인 방식으로 '확고한 연대'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여성행진에서 일어난 해프닝(기사 참조)을 보면서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공통점과 '여성주의'라는 광범위한 입장을 공유 이외에 진정한 연대와 확장을 위해서 생산적인 논쟁들이 구성되어져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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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과 경계, 톱니바퀴로 퍼즐 맞추기.

** 이글은 "나무"님의 [MSN이 개인정보보호 1등이라는 소문에 대하여] 포스트와 관련이 있는 것 같지만 없습니다. ^^;
 
프라이버시가 뭐냐? 참 뜬금없는 질문에 답변하기도 난감하다.
 
최근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다. 내가 생계비를 충당하고 있는 학원에서 대대적인 학생관리 DB 시스템을 만든다고 나선 것이다. (오우, 어감이 참. -_-a)
 
당연히, 앞뒤 재보지도 않고 거품부터 물었다. 다른건 다 몰라도 정보인권 때문에 억울한(!)일 겪어봤으니 얘기 듣는 순간 눈부터 뒤집히고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면서 애들한테 사회 문제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가지라고 말할 수 있냐?"(=> 뭐라고 그랬는지 사실 잘 기억 안남 -_-a) 등등.. 무조건 반대 입장을 딱 세우고 출발했다.
 

사교육 시장이라는게, 결국 '교육적 가치'보다는 '시장적 가치'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형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정말 온 힘을 다해 교육적 가치를 구현하고 아이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대학 합격증'이라는 성과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그 의미가 상실된다. 결국 학원에서는 학원 수강료 만큼의 '교육' 뿐만 아니라 경쟁력을 높여주기 위한 제반 시스템을 제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하여, 이제는 개인식별이 가능한 모드 정보중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이 없다. 아이들의 성적은 학원 마케팅의 자료로서 활용될 것이고, 아이들에 대한 평가는 적절한 '학교'를 찾아주고 그에 맞는 '맞춤형 학습'을 제공하기 위한 소스가 된다. 따라서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지 않는 것은 학원에게는 치명적인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보집적이 꼭 필수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필수적이다. 학원에서는 좀 더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타 학원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켜야 하고, '대학 합격증'의 레벨과 숫자가 학원의 생명을 결정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개별 학생들의 '자기정보결정권'은 '대학 합격 이후'로 행사할 수 있는 부차적인 권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유는, 결국 '판단의 기준'과 '조건'의 합의지점이 어디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중산층 이상의 고등학생들이 대학을 가지 않고도 선택할 수 있는 자아 실현의 범주란 상당히 좁은게 현실이고, 대학을 가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결국, 모든 것은 복합적인 상황에서 판단되고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활동에 있어서 여러 판단 기준들(원칙과 현실 사이의 수많은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판단은 오히려 내게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고민들에 부딪힐 때 마다, 나는 늘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더 걸림돌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내릴 수 있는 모든 결정에 대해 내가 늘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상황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따라서 판단의 근거도 변화한다. 나의 선택 기준은 최대한 위험성을 줄이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선택 기준 조차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것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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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동지'가 될 수 없는 우리.

* 이 글은 달군님의 [우리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 에 관련된 글입니다.

#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이제 이런 사건-이걸 뭐라 불러야 하나-따위는 그만 생겼으면 좋겠다.

"2003년 8월 현재 비정규직은 전체 임금노동자 1415만명 중 783만4천명(55.4%)에 달한다. 비정규직은 여성·청년·노인·저학력 계층 등 사회적 약자에 집중되고 있다. 특히 여성 비정규직이 407만명으로 여성 전체 임금노동자의 70%가 비정규직이다. 15∼24살 청년 노동자의 비정규직 비율도 70%를 넘는다. 중졸 이하 학력자는 5명 가운데 4명이 비정규직이다."

2004.5.27 "비정규직, 그들은 누구인가" 한겨레 기사(조계완 기자)

비정규직은 여성에게는 당연한거고, 능력있고 힘있는 남성들에게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나보다. 그네들이 죽도록 매달리는 '결혼'까지 미뤄두고, 마치 여성들에게 행복한 미래를 약속해 줄 것처럼 '정규직되면 결혼하자'라는 말로 달콤하게 속삭여준다. 행복한 미래를 약속해주는 '그'의 사랑에 눈물이라도 흘려줘야 할 것만 같다. -ㅠ-

그래도 여성 비정규직은 입닥치고 가만히 있는게 상책이다. 운좋은 '남성'정규직이 '어여삐'여겨줘서 '결혼'해 줄 기회를 놓친다면 그녀는 살아남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 어차피 '동지'라고 여겨줄거라고 바라지도 않았다. 이렇게 본심을 드러낼 거면 필요할 때만 '여성 동지들의 단결된 투쟁을~~'운운하지 말란 말이다. 언제는 우리가 너네-이 표현 참 웃긴다-동지였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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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한 고민.

* 이 글은 돕헤드님의 [결혼하지 않는 사회를 꿈꾼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결혼 문제에 대해 살짝(아주 진지했다고는 말 못하겠다) 고민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도 '결혼'자체에 대한 고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결혼'제도에 대한 고민은 내 생활과 연관되는 직접적인 고민이 되기보다는 그냥 주변 사람들의 상황을 보면서 '왜 저런데도 결혼을 할까'하는 생각 정도였다.

트랙백을 건 돕헤드의 글에 대해서는 물론 충분히ㅡ알엠님처럼 200%는 아니겠지만ㅡ공감하지만, 그게 막상 내 문제로 다가오면 저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직 '결혼'이라는 현실적 무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실제로 그에 부과되는 재정적, 공간적, 감정적 문제에 관해서는 그간 내가 별로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에ㅡ앞으로도 별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지도 않다ㅡ'결혼 할거야?'라는 물음에 대답하는 'Nooooooooooooo!'라는 시원한 대답은 사실 내 마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은 듯 하다.

결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공감가는 부분이라면 '여성 혼자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측면 때문에. 작게는 미혼 여성이 대출 받기 어렵다는 얘기들을 심심찮게 듣는 것 부터 시작해서 결혼을 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ㅡ기혼남성, 비혼남성, 기혼여성, 비혼여성의 순서대로 정해지는 엿같은 계층화ㅡ으로 떨어진다는 부담감도 일정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직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지 않지만, 사실 이런 고민을 심각하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하는 엄청난(!) 소망이 있다. 그래, 이 부분에서 만큼은 영원한 피터팬으로 머물렀으면 하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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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변명에 불과하지만.

한 5년 전만 해도, 소위 '운동권 사투리'에 심하게 찌들어 있었다.
그때 당시에 쓴 문서 뿐만 아니라 자유게시판 따위에 글을 올려도 딱딱하고 말도 안되는 추상적인 개념어들을 사용한 이상한 글이 튀어나오곤 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지금은, 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썼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예전에도 친구와 '대중운동을 하려는 활동가'가 쉬운 언어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면서 서로를 질책하고 자아비판을 종종 하곤 했는데, 특히 요즘에는 정말 '쉬운말'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1.
 
요즘 만나는 고등학생 친구들에게 내가 늘 하는 말은 '제발 거짓말좀 하지 마!'라는 얘기다. '착한 사람 컴플렉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친구들은, 자신의 잔인함, 비겁함, 야비함을 숨기고 새하얀 양의 탈을 쓰고 내 앞에 선다. 그럴때는 가차없이 한마디 던진다. '구라 치지마.'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모두 이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생태적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독도문제에 대해서 '일본놈들 다 주거써!'/ KTX 있으면 편하잖아요? 라고 금방 속내를 드러내는 녀석들은 그래도 아직 놀려먹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자신이 '쌩구라'를 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녀석들과의 말 싸움이 피곤하다.
 
#2.
 
여기서가 진짜 변명.
영어를 못 읽고, 못 읽는다면 번역서 자료들이라도 끝까지 쫓아가지 않은 것은 나의 게으름 탓이고 내 잘못이지만. 문맹은 내가 부끄러워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영어를 잘 알지 못하면 점점 운동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을 접하면서, (영어) 문맹은 이제 정말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 되어간다. 자기 계발을 안한다는 욕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자꾸 주눅드는 분위기가 좋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쉽고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운동을 만들기 위해서 영어가 필요한 걸까, 아니면 영어는 이미 너무 기본이라 내가 대중운동을 못 따라가고 있는걸까;;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 떠오른다.
 
왠지, CCL과 정보공유라이선스 관련 논쟁이 서로간의 입장을 긍정적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씁쓸하다는 생각이 드는건, 직접적으로 라이선스 운동을 하고 있지 않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한(특히 CCL은 전혀 모르니;;) 내 잘못이라고 생각되게 하고, 그래서 다시 산더미 처럼 쌓인 운동과제들을 앞에 두고 망연자실해 하는 내 모습을 보게 만든다.
그냥, 뭐든 '원칙'을 가지고 가볍게 다가갈 수는 없는걸까. 그래서 나는 정보공유라이선스가 만들어진게 사실 고맙다. 내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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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독도 문제.

* 이 글은 개굴님의 [독도는 바다제비와 괭이갈매기의 것이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개굴님이 올린 포스트의 글과는 상관없지만 그래도 독도에 대한 문제니까..
사실 글을 먼저 썼다가 포스트를 보고 나중에 트랙백 했다. 남들 다 한번씩 했던 얘기지만 그래도 또 한번.

한참 중국의 동북아공정 때문에 시끄럽더니, 이제는 독도 문제로 시끄럽다. 오늘 뉴스를 보니 “‘욘사마’의 독도 발언 회피에 대해 네티즌들 섭섭” 이런 제목의 기사까지 있었다.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는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가사 한 줄 정도는 외우고 있을 정도로 국민 가요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시네마현의 ‘다케시마의 날’조례 제정은 한마디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비단 일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경쟁’이 될 만한 꺼리에서는 언제나 ‘화끈한 공동체주의’를 보여주는 우리나라가 아니던가. 축구경기를 보는 순간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변신하는 면모를 보여주지 않는 사람, 별로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독도 문제로 단지(斷指)하여 결의를 보이는 모자가 등장하는 시위 기사를 보고 있노라니, 영 마음이 편치는 않다. 예전에 한 친구에게 ‘중국의 동북아 공정에 대한 시비를 역사교과서등의 사료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 판단을 통해 접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며 지나가듯 말 한 적이 있었다. 요컨대, 역사라는 것이 결국 현재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이라면 그의 왜곡은 현실에서의 문제를 반영하는 하나의 액션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 쯤이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결국 ‘국토’라는 것은 국가를 구성하는 하나의 조건일 뿐이고, 그게 결정적으로 “국민”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 본적이 별로 없다.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주제에..라고 하면 할 말 없다. 하지만 내가 국적을 달라고 구걸한 기억도 없다. 여기에 태어난 것은 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니까.) 독도 ‘사태’의 원인은 아무래도 영유권 분쟁/어민들의 조업 가능 구역 설정의 문제가 가장 핵심이 아닐까. 생존의 절박함-극심한 환경변화로 예전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하는 어민들이 좀 더 조업을 잘 해볼 요량으로 뭍에서 조금 멀리 나가고 싶어하는 것-이 영유권, 군사문제, 국토의 문제 등 아주 까다로운 절차에서 걸려버린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이라면, 그들에게 조업을 허 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조업을 허락 받고 싶다면(은연중에 묻어나는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각인) 그냥 강제로 ‘다케시마의 날’조례 따위를 만들 것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그 근방 어민들이 함께 모여 손잡고 평화협정을 맺어도 될 일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좀 더 간단하게 내 식대로 이야기한다면, 사람 사는 일을 지도 위에 선 긋기로 구획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게는 독도 문제가 (좀 희화화하자면) 여기까지는 대한민국 바다/저기는 일본 바다 라고 갈라봤자 바다는 바다 그 자체일 뿐이다. 잘 때는 우리나라바다쪽 해초에 머물렀다가 깨어나서 먹이를 잡을 때 일본바다로 헤엄쳐가는 물고기를 누구것이라고 단정해서 나누는 문제처럼 ‘피식’하고 웃음 나는 얘기처럼 들린다. 오히려 내가 화내고 싶은 지점은, 친일 과거 청산문제나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서는 찍 소리도 못 내다가 독도 문제가 불거진 이후 부랴부랴 ‘친일 카페 폐쇄’로 대응한 정부의 ‘웃기지도 않는’ 행태이다.

오늘 싸이월드에 갔더니, 이런 그림이 떴다. 그러나 평소에 국토와 영유권 문제 따위에 우리가 신경쓰고 살 일이 뭐가 있었나. 정부의 역할이라는 것이 원천적으로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국가의 필요성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실질적인 분쟁의 원인과 그에 대한 대처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과 ‘남의 것’을 우선 갈라놓고 극단적인 반일감정을 무기 삼아 ‘우리 민족의 단결을 보여줄 때’라며 이럴때 정부의 역할을 기대한다 운운하는, 그래서 정부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역할과 힘을 실어주는게 못마땅할 뿐이다. 정부가 이것도 저것도 해야 하는 초 울트라 강력 집단도 아니고(오히려 너무 무기력해서 기대하고 싶지 조차 않은 집단 아닌가.) 국가와 국가의 역할을 대체할,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국가’라는 울타리의 대결로 몰고 가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떠한 상상력도 배제되는 것이 짜증날 뿐이다.

- 음. 뭔가 조목조목 잘 정리해보고 싶었지만. 귀찮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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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써먹는건지 익혀야겠다.

* 이 글은 진보네님의 [불여우와 진보 블로그] 에 관련된 글입니다.

그래서 트랙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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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가무 싫어하는 사람들은 좋겠다.

* 이 글은 Tori~님의 [(펀글)저작권법이 시행되면서 달라지는 우리생활] 에 관련된 글입니다.

 
이제 노래 시키면 '저작권법에 걸려~'라고 내빼면 될테니. - 트랙백 건 글 보세요.
 
-ㅅ-;;
 
가만히 있다가도 저작권법 얘기 들으면 정말 '불법유포권법'으로 저걸 작살내고 싶은 마음이 불끈불끈 솟아난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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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시집살이 보다 더한 저작권법.

안듣고, 안보고, 그냥 죽어버릴까? 이건 뭐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이라는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시집살이보다 더 한거 아녀. 완전 좌절. OTL.
 
 
이런거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대체 뭐가 들었을까? 예전에 추리소설 '쥐덫'에서 가방이 가볍다는 표현을 '신문지로 싼 돌멩이만 들었다'고 표현한게 생각난다. 그 넘들 머리는 신문지로 싼 돌멩이만 몇개 들었을거야.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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