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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버스커 버스커의 여수 밤바다.
 
언젠가부터 겨울과 여름 일 년에 두 번 가족여행을 떠난다. 지난 1 15일부터 18일까지 여수로 3 4일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내게는 여순사건으로 더 각인 된 지역이지만, 여수 밤바다는 평온하고 좋았다. 생각해보니 여수에는 처음 내려간 것 같다.
 
지난 2019년 구로시민회 새해맞이걷기를 위해 섬진강을 걸으며 하동까지 가기는 했지만, 여수까지 내려가지 않았고, 2009년 해남까지 도보를 할 때에도 그 길에 여수는 없었다.
 
여수.
 
숙소 인근을 돌아다니며 걷는 길. 늦은 시간 겨울이라 그런지 주변에 사람이 없다.
 
1948 10 19일 제주 4.3 진압에 반대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 아직까지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니고, 여수 밤바다는 좋았다.
 
아픔.
 
교회가 철산동에서 광명7동의 끝자락(위치가 광명4동 동사무소가 더 가까웠다)으로 이사를 했다. 새롭게 이사를 한 곳은 3층 건물. 2층은 교회와 도서관 옥상에는 빈 깡통만 있었다. 그곳을 나이 많은 기술자 한 분과 둘이서 방을 만들었다. 가끔 손을 떠시는 어르신. 일당으로 계약을 했는데, 시간은 흘러가고, 차라리 업체와 계약을 했으면 몸이라도 편했을 텐데, 어찌되었든 힘이 들 때마다 한번 씩 광명감찰회 목사님들이 오셔서 도움을 주셨다. 그렇게 옥상에 방도 만들도, 2층에 교회를 꾸몄다. 옥상에는 아버지와 평상도 만들었다. 그때부터 옥상이라는 공간이 좋았다.
 
2층 교회의 반을 자바라로 막아서 평일에는 어린이도서관으로 사용했다. 2004년 지역주민들에게 도서관 이름을 공모를 해서 징검다리로 정하고, 아내는 도서관 실무를 담당하고, 나는 관장으로 있으면서 자원봉사자 관리를 했다. 2005년 아내가 암 수술을 받았고, 광명시 평생학습원과 관련해서 만났던 엄마들이 아내의 빈자리를 채웠다. 이 후 2007년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많은 도움을 줬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아내와 집에 돌아왔을 때 이른 바 JMS라 불리던 단체와 그 회원들이 제기한 50억에 가까운 손해배상 청구 송장이 기다리고 있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05가합52165인터넷싸이트 폐쇄 및 손해배상)
 
당시 나를 포함한 반JMS 활동을 하던 여러 명을 대상으로 JMS 단체는 20억의 손해배상, JMS 회원 942명은 각각 3백만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민사 소송을 제기하였다.(4 8 2 6백만원, 원고소가 4 8 7 6백만 1백원)
 
재판을 준비하던 중 JMS 단체와 그 회원들은 소를 제기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을 빼고 다른 이들에 대한 소를 취하했다. 하지만 나는 반JMS 집행부와 상의 후 소취하부동의서를 제출하고 재판을 받았지만, 결국 답변서가 소 취하보다 늦게 제출되었다는 재판부의 판단으로 소 취하로 판결 받았다.
 
2005년 징검다리 어린이 도서관은 경향신문사와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이 펼친 작은도서관을 지원합니다의 지원 대상 중 한 곳으로 선정되어 스크린과 빔프로젝트를 지원받았다. 그때 지원받은 빔프로젝트는 망가졌지만 스크린은 아직도 여기저기 필요한 곳에서 쓰여지고 있다.
 
2007년 어느 날 건물을 산 새로운 건물주가 3층으로 이사를 하기 전 공사를 하겠다고 했다. 공사는 한 달 가까이 진행되었고, 공사로 발생한 먼지로 교회와 어린이도서관은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공사가 끝날 쯤 새로운 건물주는 교회가 있는 2층을 자신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만드는 가구들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겠다며 나가라고 했다.
 
건물을 판 전 주인은 새로운 건물주와 복덕방 사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새로운 주인이 월세를 올려 받으려고 교회를 내보내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이사할 곳을 알아보다가 2008년 초 광명시를 떠나 구로구 궁동으로 이사를 했다. 시간이 지나 그곳에 가보니 새로운 교회가 있었다.
 
2008년 여러 가지 일로 아내와 갈등이 깊어졌고, 결국 아내가 폭발을 했다. .
 
목회를 한다며 돈을 버는 일과는 상관없이 지내던 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지금보다 더 가장으로서 책임감 없이 지냈다. 어찌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아내 덕에 산다.
 
2001년 늦은 결혼을 할 때, 물론 지금은 그리 늦은 나이가 아니자만, 당시 목회를 하면서 34살에 결혼을 하면 조금 늦은 나이에 들었다. 결혼을 하면서 내가 당신 공부를 하는 것에 재정적 도움을 줄 수 없지만, 당신이 가진 돈은 손을 대지 않겠으니, 그 돈으로 공부를 하라고 아내에게 말을 했지만, 아내는 늦게 다시 시작한 공부를 중단했다.
 
아내가 암과 관련한 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하기 전 날 저녁 광명역 인근 서독터널 앞에서 대화를 하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가끔은 바람이라도 쐬러 나갔다면. 힘들어도 아내와 함께 조용하게 쉴만한 곳을 찾아다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막상, 아내가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내 삶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05년 봄에 다시 시작한 공부는 2006년 겨울을 끝으로 마무리했다. 2005년 아내가 아플 때 기도와 도움을 줬던 선배 목사님들과 후배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어려운 중에도 공부를 한다며, 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목사님이 교회에 말을 해서 2006년 학기를 마칠 때 소정의 장학금을 줬다. 나는 그 돈을 받고 학교를 그만 뒀다. 장학금으로 받은 돈은 자동차세로 사라졌다. 장학금을 주셨던 목사님께 나는 돈만 받고 사라진 어처구니없는 인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직도 나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해도 형편이 넉넉해지면, 내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학교 후배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버겁다.
 
여행.
 
재정적인 버거운 상황에서도 매 년 가족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일 년을 살고, 또 일 년을 산다. 여수와 순천에 담긴 아픔을 나는 모른다. 단지, 여수에서 바라 본 사람들은 아름다웠다.
 
청춘들이 벽화마을을 걷고, 이순신광장 주변을 걷는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한다면, 아니 최선은 아니더라도 현실의 삶을 부정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또 다른 삶의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삶은 그래서 아름답다.
 
누구에게는 아픔은 있다. 그리고 그 아픔이 때로는 오늘을 힘들게 한다. 과거의 아픔이 오늘의 삶을 망칠 능력은 없다. 하지만, 내가 오늘의 삶을 망칠 수는 있다.
 
여수에서 바라본 바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는 아름다웠고, 해가 지는 하늘은 아름다웠다. 인생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닐까? 아무리 힘들었던 과거도 그냥 지나간 기억일 뿐. 오늘 하루하루가 또 다른 과거가 되는 날. 나는 오늘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삶이 아름다울 수밖에
 
여수 밤바다에 떠 있는 크고 작은 배들과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자니 마음이 설렌다.
 
2023. 1. 19.
그리움이 머무는 자리
 
2023 1 17일 여수에서 해가 뜨기 전
#일상 #여수밤바다 #아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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