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박열, 기죽지 않고 당당하며 자유로운 영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준익 영화는 특유의 신파 분위기가 거슬려서 별로 즐기지 않는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동주’가 괜찮았고

비슷한 시기의 실존 인물을 다룬데다가

잘 알지 못하는 아나키스트를 다룬 것에 호기심이 가서

‘박열’을 보게 됐다.

 

 

시작과 동시에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인에게 멸시를 당하는 장면이 나왔다.

출발부터 신파조여서 기대를 내려놓고 그냥 봤다.

이어서 일본인 여성이 ‘개새끼’라는 시를 쓴 박열을 찾았고

박열을 만나자마자 결혼했는지를 묻더니 다짜고짜 동거하자고 한다.

신파분위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앞뒤 안 가린 화끈한 전개가 시원했다.

이후에도 폭탄을 만들려다 실패하는 과정이나 양아치 독립운동가를 린치하는 장면들이 시원시원하게 이어졌다.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갔던 인물이라고 필요이상으로 진지하게 그리지 않고

시종일관 호탕하고 장난스럽기까지 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 좋았다.

그러면서 신파는 서서히 힘이 빠지고 박열과 그 주변 인물들의 매력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매력을 즐기려고 할 때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나고

민심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에 대한 음해와 학살이 벌어졌고

동시에 불순한 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이뤄졌다.

그 혼란 속에 박열은 차라리 감옥이 더 안전하다며 도망가지 않고 검거에 순순히 응한다.

 

 

흉흉한 민심을 돌리고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일본정부는 조선인이 연류 된 공안사건을 만들려고 했고

그런 그림에 박열이 걸려들면서 그를 둘러싼 취조와 재판으로 얘기가 이어졌다.

그때부터는 일본검사와의 취조장면을 중심으로 밀고 당기는 과정과

재판을 전후로 해서 재판부와 밀고 당기는 과정이 전개되는데

이야기도 아주 단순하고 장면들도 너무 심플하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중간 중간 특유의 신파조 양념들이 들어가면서 뻔한 국뽕 영화처럼 흘러갔다.

 

 

그런데 자칫 지루하고 뻔할 수 있는 얘기를 반전시켜내는 건 박열과 그의 부인 후미코의 태도였다.

저들이 올가미를 쳐놓고 기다리면 순순히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는

당당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면서 국면을 전환시켜버리는 것이었다.

나름 예의를 갖춰 다가오면 아랫사람 대하듯이 여유롭게 맞이하며 관계를 틀어버리고

발톱을 드러내며 거칠게 들이대면 죽일테면 죽여봐라는 식으로 강렬하게 맞서며 기싸움을 벌이고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상대가 잠시 마음을 놓으면 예상치 못한 제안으로 상대를 허탈하게 만들어버렸다.

기죽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향연이었다.

 

 

예의를 갖춰 취조를 하는 일본검사를 향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

“나이는 왜?”

“묻잖아.”

“서른하나”

“나보다 위네... 말 편하게 놔, 나도 그게 편하니까.”

이런 식의 대화들은 기존의 모든 통념들을 뒤엎어버리는 것이어서 너무 통쾌하고 재밌었다.

박열과 후미코의 이런 식의 행동들은 모든 걸 뒤틀어놓고 즐기기에 충분했다.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장점은 주변 인물들도 함께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였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이 주인공 박열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부인인 후미코 역시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단순히 남자를 지지하고 뒷바라지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동지로서 투옥과 재판과 죽음까지 함께 해나가는 혁명 동지였다.

그러면서 역시 기죽지 않는 당당함과 자유로움은 박열과 쌍벽을 이루고 있어서 둘의 조합은 정말 환상이었다.

거기에 혁명 동지들도 부수적인 위치에 자리하기는 했지만

수동적으로 리더를 따르며 그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물이 아니라

거칠고 치열하면서도 자유분방함을 간직한 민중적 아나키스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사실 영화의 캐릭터로 본다면 어떤 영화에 뒤지지 않는 독보적인 캐릭터들이었는데

그들의 말과 행동들이 실제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한 것이라고 하니

그런 상황에서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이 경이로울 뿐이었다.

 

 

사형선고를 앞두고 박열과 후미코는 혼인신고를 하고

담당 검사의 양해로 함께 사진을 찍는데

그 상황에서도 둘은 자유로운 포즈로 마지막 사진을 함께 했다.

실제 역사 속 둘의 사진을 다시 보며 한마디 던져본다.

“박열, 덕분에 자네 얘기 잘 들었네. 나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야겠구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