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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3회 – 판타지 세계로 빠져들기

 

 

 

1

 

저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서로를 보듬어주며 살아가는 그런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현실은 혼자 동떨어져서 개 한 마리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은 동생들과 어머니가 전부이고 그 마저도 일주일에 한번 볼까말까 할 정도입니다.

지금의 삶이 편안해서 좋기는 하지만 제가 꿈꾸던 삶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지요.

 

노희경 작가의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오래전에 가족들과 함께 눈물 흘리면서 봤던 드라마였는데 지금 와서 다시 보니 가슴에 와 닿지 않더군요.

가족들이 서로 지지고 볶고 하면서 끈끈한 관계의 실타래를 풀었다 엮었다 하는 과정이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드라마가 나오고 2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만큼 세상이 변한 것이겠죠.

 

세상 사람들은 점점 거리를 두면서 자신만의 공간에서 벽을 치며 살아가고

가족들마저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필요할 때 만났다가 멀어지고

이해관계에 따라서 다양한 관계들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그것도 가느다란 거미줄 같기만 합니다.

그래서 점점 자신의 평온과 안전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가죠.

 

나의 머리는 따뜻한 대안적 공동체를 추구하지만

나의 몸은 외딴 섬의 허름한 공간에 홀로 널브러져 있고

나의 심장은 서로 멀어지는 몸과 머리로 피와 산소를 보내려고 쉼 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부지런히 뛰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이 심장이 지치지 않고 계속 뛸 수 있도록 더 노력해봐야겠네요.

 

 

2

 

예전에 대학을 다닐 때, 과 동기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은 왜 세상의 어두운 면만 보려고 하냐?”

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세상에 분명히 어두운 곳이 존재하는데, 아무도 그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잖아.”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났습니다.

누가 애써 외치지 않아도 우리는 세상이 살벌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 대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요?

 

 

2015년 10월 1일 읽는 라디오 두 번째 시즌인 ‘들리세요?’ 54회 방송에서 했던 말입니다.

그때 저는 이 질문을 던져놓고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8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질문을 마주해봅니다.

 

살벌한 세상에 대해 무감각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런 세상을 애써 외면하면서 뒤로 물러나기만 해서 그런 것인지

세상의 고통이 숨 막히도록 조여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애써 들여다보려 했던 20대의 저는

불의에 대한 분노보다는 절망에 몸부림치는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몸이 뜨거워져 있었습니다.

살벌한 세상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40대의 저는

연민은 완전히 사라지고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분노만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뜨거웠던 연민의 열정도 사라지고 차가웠던 분노의 감정도 사그라든 지금

세상은 아직도 차갑고 살벌하니

뜨겁지는 않더라도 뜨뜻한 온기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3

 

“우리가 판타지 세계를 만드는 것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머무르기 위해서다.”

어느 책을 읽다가 나온 한 구절이 마음을 잡아끌었습니다.

과연 그럴까?

 

‘더 글로리’에서는 멋있고 처절하게 가해자들을 응징하지만

현실에서는 가해자들이 명문대가고 그 아버지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거기에 ‘더 글로리’를 만든 감독이 가해자라는 사실까지 더해지면

강력한 현타가 옵니다.

눈만 돌리면 나오는 여러 드라마와 영화들이 시원한 판타지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돈만 벌고 나면 다시 현실이 판타지에 복수를 해버리는데

‘판타지는 현실을 회피하고 돈을 벌기 위한 사기’가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더 판타지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판타지에 복수하는 현실을 또렷이 보여주면서

이 세상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니까요.

그래서 저도 판타지를 놓지 않으려고 노력해보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차갑고 살벌하고 외로운 현실에 수시로 몸서리쳐지기에

그 안에서 버티고 숨쉬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명상을 하는데

이런저런 상념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면서 명상을 방해할 때

암투병으로 고생하시는 이웃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 그 분의 얼굴을 붙잡으며 주문을 외웠습니다.

“내가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것처럼 모든 생명들이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갈 바랍니다.”

 

 

 

 

(전진희의 ‘떠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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