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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9회 – 찌질하고 한심해 보이겠지만...

 

 

 

1

 

10대였을 때, 드라마나 영화의 멋있는 주인공 같은 삶을 꿈꿨습니다.

20대가 됐을 때, 내 위치가 그리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멋있는 주인공보다는 나름대로 폼 나는 조연 같은 삶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30대가 됐을 때,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내 능력이 미칠 수 있는 범위가 넓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분량은 많지 않아도 나름 비중 있는 역할의 배우들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40대가 됐을 때, 지옥과 같은 세상 속에서 발버둥치가다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보게 되며 잠시 등장해서 민폐를 끼치거나 황당한 행동으로 비웃음을 사는 별 볼일 없는 캐릭터가 내 삶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50대가 된 지금, 세상에서 한 발 떨어져 홀로 살아가다보니 화려하고 장대한 대하드라마에서 잠시 얼굴이 비춘 듯 만 듯한 엑스트라가 내 인생이겠거니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인지

혼자 지내며 드라마나 영화를 자주 보지만

어떤 인물에도 마음이 가닿질 않으니

감정을 이입해 볼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좋좋소’라는 웹드라마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조그만 중소기업에 취직하게 된 20대 사회초년생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였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흔히 경험해 볼 법한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거기다가 하나 같이 평범하다 못해 찌질하고 한심하기까지 한 캐릭터들이 중심인데

여느 드라마처럼 멋진 주인공을 빛내주기 위한 병풍같은 존재들이 아니라

나름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로 그려지고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마치 제 자신의 경험을 각색해서 펼쳐놓는 것 같은 기분에 금방 빠져들어 보고 있더니

‘인생에 의미 없는 엑스트라는 없다’는 듯이 제 영혼을 달래주더군요.

 

 

2

 

저는 30년 평생을 내성적이고 소극적으로 살아와서 사회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고생을 좀 했고

심지어 도망도 갔었습니다.

그러다가 힘든 상황이 됐을 때 자꾸 회피만 하려는 제 자신이 너무 환멸 나고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망갔던 회사에 다시 들어가서 제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번에는 달라지자.

작은 회사였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관계를 형성했고

그 중소기업을 다니면서 그 전에는 겪을 수 없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했습니다.

비록 회사는 다른 이유로 그만두게 됐지만

그 중소기업을 다니면서 그동안 소극적이었고 내성적이었던 제 자신을 바꿔줬기 때문에

전 회사에서 겪었던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드라마 ‘좋좋소’의 주인공인 조충범이 시즌 말미에 했던 말입니다.

조충범 특유의 말투와 그가 겪었던 회사생활의 애환들을 다 빼놓고

그 대사만을 이렇게 늘어놓으니 무척 건조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저는 이 대사가 참 마음에 들더라고요.

 

별로 좋은 회사도 아니었고

그곳에서 경험한 일들이 사회생활 하는데 유용하게 쓰일 것도 아니었고

그곳에서 만났던 인간들을 다시 만날 일도 없겠지만

그는 그곳에서의 경험을 자신의 자양분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것은 머리 숙이면서 배워야 하고

어떤 것은 꼭 누르면서 참아야 하고

어떤 것은 아무렇지 않은 듯 흘려보내야 하고

어떤 것은 용기내서 내뱉어야 하고

어떤 것은 마음을 다해서 해내야 하고

어떤 것은 서로의 마음을 쓰다듬어야 한다는 것을

그곳에서 배웠다는 말이었습니다.

 

어벙한 조충범이

허접한 회사에서

별 영양가 없는 일들을 하며

배운 그 삶의 기술들은

제게도 필요하네요.

 

 

3

 

예전에 일선에서 한창 열정적으로 일할 때

다양한 실무능력을 갖추고

인간관계도 두루두루 원만하고

열정이 넘쳐 추진력도 좋았고

조직 안팎으로 인적 물적 자원도 갖춰져 있어서

겁 없이 앞으로 치고 나갔었습니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일들을 해내고 있으면

주위에서 함께 하는 이들이 생겨서 더 힘이 났고

그 힘으로 어려움을 하나씩 이겨내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독려하며 한발 한발 나가고 있을 때

반발 정도 뒤에 떨어져서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쌓여가는 일에 치여 정신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는 그 분을 보면

모른 척 외면하는 사람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서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게 되면

단 한 사람이 아쉬워지는데

그때도 반발 떨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만 하려는 모습을 보면

짜증이 올라와

그 분이 들리게 한숨을 쉬며 그 분 일까지 제가 해버립니다.

그러면 그 분은 뻘쭘하니 물러서서 제 눈치를 보곤 했었죠.

 

이제 시간이 흘러서

그 분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고

저도 지금 이렇게 별 볼일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드라마를 보다가 갑자기 그 분이 떠올라 그 시절을 돌아보니

그 분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제가 뻘쭘하니 서 있는 걸 알게 됐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처해진 조건과 위치가 그를 어정쩡하게 만든 것이고

그저 앞만 보며 달렸던 그 열정이 그를 위축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제가 그 위치에 서있고 보니 이제야 깨닫게 됐습니다.

 

그 분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조충범에게 너무나 고마워서

제 자신을 꼭 안아줬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Marketa Irglova와 Glen Hansard의 ‘If You Wan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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