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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7회 – 잡초 뽑기

 

 

 

1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봤습니다.

30년 전에 봤을 때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기는 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한 부분도 많아서

새로운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이런저런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해방을 전후한 그 시점을 정면으로 바라본 아주 뛰어난 드라마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해방공간을 지나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따라가면서

역사의 거대한 파도 속에 여러 인물들이 어떻게 적응하고 변화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이 드라마가 지닌 힘이고 매력이었습니다.

 

그 긴 여정이 끝나가는 마지막 회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이어왔던 두 인물이

빨치산 활동을 벌이던 지리산 속 은신처에서

마지막을 예감하면 나누던 대화가 있었습니다.

 

 

최대치 : 후회하십니까?

김기문 : 아니 후회는 안 해. 후회를 해서는... 절대로 후회를 해서는 안 돼. 알겠나?

때로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을 거야. 과연 역사란 발전하는 것일까? 나와 이 역사는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을까?

그러나 후회를 해서는 안 돼. 윤홍철 선생을 죽이고 난 울었네. 그 분을 존경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도 내가 한 일이 옳다고 생각하네.

그런 거야. 자네도 나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잖나. 우리 같은 사람이 있어서 역사는 발전하는 거야. 그럼 후회할 게 뭐가 있어. 질문 같은 건 몇 십 년 뒤에 편안한 세대에 사는 후세들이 하면 되는 거야.

 

 

치열하게 살았던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고

7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편안한 세대인 저는

그 말을 되새겨봤습니다.

 

좌파활동을 하고 있는 많은 이들은 아직도 김기문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일선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며 살았던 저 역시 그런 생각으로 버텨왔습니다.

투쟁을 할 때는 앞만 봐야 한다고, 이런저런 평가는 나중에 투쟁이 끝나고 해도 된다고, 역사와 민중에 대한 신념을 잃지 말고 버티며 나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공산주의자인 김기문이 민족주의자인 윤홍철을 죽인 것은 잘못된 행동이었고

만주파인 김일성이 연안파인 김기문을 숙청한 것도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혁명을 위해 앞만 보고 가야했던 그들에게서

그 오류는 시정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앞만 보고 달려가기만 하는 좌파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갈라치기하기에 여념이 없고

뒤에 낙오된 이들을 돌아볼 여력이 없고

격변하는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부실한 정권이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로

노동조합을 두들겨 패고 있는데

사람들은 두들겨 맞는 노동조합을 외면하고 있으니

황당한 논리로 혹세무민하는 정권을 탓해야 합니까?

대중과 멀어진 채 이익집단으로 변질된 노동조합을 탓해야 합니까?

좁은 시야로 자기 이해관계만을 계산하는 대중을 탓해야 합니까?

 

 

2

 

텃밭을 갈다가 땅에 깔린 수도 파이프를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급하게 물을 잠그고 근처에 있는 수리업체 사장님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다행히 빨리 도착한 사장님은 파이프 상태를 확인하고는 새 파이프를 사고 와서 뚝딱하고 고쳐주셨습니다.

간단한 장비와 원리만 알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사장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수리비를 물었더니 7만원을 달라고 하더군요.

평소에도 수리비를 조금 비싸게 받는 편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간단한 수리에 7만원이라니...

하지만 군소리 없이 돈을 들리고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며 사장님을 보냈습니다.

농기계가 고장 나거나 하우스 시설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인근에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 분이 유일하기 때문에 비싸더라고 어쩔 수가 없습니다.

 

시설 하우스를 하다보면 웬만한 건 혼자서 해결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래본 경험도 없고 주위에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으니

이렇게 간단한 수리도 호갱이 되는 걸 감수하면서 사람을 불러야 합니다.

영세한 농사꾼을 등쳐먹는 건 교활한 상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문제는 이런 폭리를 알면서도 문제가 생기면 그 분에게 다시 연락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편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긍정적인 면들을 생각해보려고 노력해봤지만

그럴수록 불편함이 불쾌함으로 변하기만 하더군요.

그래서 텃밭에 들어가서 잡초를 뽑았습니다.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텃밭에 심어놓은 여름작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오이는 벌써 따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됐고

토마토와 고추도 조그만 열매들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수박과 참외는 하루가 다르게 줄기를 뻗어나가고 있고

순이 너무 늦게 올라와서 걱정했던 땅콩도 곳곳에서 순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그 외에 가지랑 대파랑 파프리카도 다른 작물에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자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작물들이 왕성하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인데

문제는 잡초들도 만만치 않게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수박이나 참외가 넝쿨을 일찍 뻗어버렸으면 잡초가 덜할 텐데

넝쿨보다 잡초가 먼저 자리를 잡아버렸으니 넝쿨을 위해서도 잡초를 제거해줘야 합니다.

 

곳곳에 각종 작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제초제나 예초기를 쓸 수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호미를 들고 잡초들을 일일이 뿌리까지 뽑아버리는 것인데

이 넓은 곳을 그런 식으로 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감귤나무에도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만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어서

틈이 날 때 마다 와서 길게 자란 잡초들을 손으로 뽑아주는 정도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이삼일에 한 번씩 잡초 뽑기 작업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땀 흘리며 뽑고 나면 어느새 더 수북이 자라있는 잡초를

다시 뽑고 뽑고를 반복하다보면

넝쿨이 자리를 잡아서 잡초들을 밀어내겠죠.

잡초를 뽑는 일은 단순하고 금방금방 성과가 보이기 때문에

그 일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잡초를 뽑다보면 머릿속 잡념들도 함께 뽑혀나갑니다.

 

 

 

(비비의 ‘나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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