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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0회 – 긍정적으로 살아봅시다

 

 

1

 

농업용수의 수압이 떨어져서 마을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작년까지는 담당자가 없어서 이장이 임시로 맡아서 했는데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엄청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담당자가 바뀐 이후 농업용수로 인한 걱정이 확 줄어들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죠.

 

전화를 받은 담당자는 편안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계량기가 연결되는 부분에 이물질이 끼어서 그런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면서

자세하게 해결 방법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설명해주신 대로 계량기를 풀어서 안을 살펴봤더니

이물질이 잔득 끼어 있더군요.

간단히 이물질을 제거하고 계량기를 다시 연결하려는데

푸는 것과 달리 연결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도저히 안 되서 그분에게 연락을 했더니

역시나 편안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해결방법을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방법대로 다시 시도를 해봤지만 역시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다시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죄송하지만 와서 봐 줄 수 없냐’고 했더니

흔쾌히 알았다고 하더군요.

 

몇 분 후 그분이 스쿠터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목소리처럼 편안한 인상의 그분은

직접 챙겨온 공구함에 공구를 꺼내들고는 계량기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업이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낑낑거리며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계속 실패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옆에서 딱히 도와줄 것이 없는 저는 미안함만 커져갔죠.

하다가 도저히 안 돼서 조그만 부품 하나를 교체하기까지 했는데도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음료수를 드렸는데도 마시지 않고 계량기 연결에만 집중하다가 한 시간 만에 겨우 연결에 성공했습니다.

 

어렵게 연결을 하고나서

고마움과 후련함을 담아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는

수고비를 드리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너무 미안해서

담가놓은 레몬청을 드리려고 했더니

그것도 한사코 안 받으시더라고요.

마을 일을 하면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이라는 태도여서

더 미안하고 고맙고 그랬습니다.

더군다나 그분과는 초면이었습니다.

 

다음날 연결부위에서 물이 세서 어쩔 수 없이 수리업자를 불러 비용을 지불하고 고쳐야했고

그날 수압이 떨어졌던 문제는 저희 밭의 문제가 아니라 농업용수 관정의 문제였음이 확인됐지만

그때 그 분이 보여주는 태도는 마음에 진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 분의 성격이나 살아온 이력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고

사람인 이상 이런저런 단점들도 있겠지만

순박한 시골농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면서

저도 그렇게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2

 

오래간만에 오일장에 가려고 나섰다가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엄한 동네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다른 버스로 갈아타고 가기에는 노선이 애매해서

조금 멀지만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뜨거운 태양을 맞으면서 걸어가려니 조금 덥더군요.

30분 정도 걸었더니 살짝 땀이 나는데

마침 나무 아래 벤치가 보였습니다.

관리를 하지 않아서 풀이 무성했지만

앉을 자리 주면 풀만 발로 밟고는

잠시 앉아 쉬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살살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면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머릿속은 쉴 생각이 없는지 달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부정적인 생각들이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전화를 하며 쉼 없이 떠들어대던 할머니

건널목에서 사람이 건너고 있는데도 빠른 속도로 지나갔던 차량

일부러 팔아주러 갔던 식당에서 밑반찬을 좀 더 달라고 했더니 불편한 표정을 지었던 사장

농업용수 문제로 전화를 하면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마을이장

내가 힘들 때 도와달라고 했더니 따박따박 이치를 따지며 기를 죽여 놨던 후배

 

잠시 쉬려고 앉았던 자리에서

불편한 감정들만 쌓이는 것 같아

머리를 흔들며 감정의 쓰레기를 비워보려 했지만

발아래 잡초들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생각들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는

가만히 그 생각들을 바라보며 자기가 알아서 가라앉길 기다리거나

일부러라도 긍정적인 생각들을 끄집어내서 부정적인 것들을 덮어버려야 하는데

어느 것도 쉽지가 않더군요.

 

고마웠고 가슴 따뜻했던 기억들은 왜 그리 빨리 날아가 버리는지...

빨리 흘려버리고 싶은 기억들은 왜 그리 생명력이 강한지...

특별한 맥락도 없이 이 상념들은 왜 그리 자주 찾아오는지...

 

이런 저런 상념에 상념이 꼬리를 물고 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걸었습니다.

땀도 식고 발걸음도 가벼워져서

발걸음에 맞춰

일부러 좋은 기억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봤습니다.

 

국민학교 때 다정하게 내 마음을 쓰다듬어줬던 선생님

오랫동안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연락이 끊긴 국민학교 동창

수시로 연락해서 감귤재배에 대해 물어보면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아버지 친구

울산을 떠나 한참 방황하고 있을 때 끝까지 나를 챙겨주려 했던 선배

든든하게 내 의지할 곳이 되어주는 동생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포근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나를 대하시는 고모할머니

나의 둘도 없는 단짝 사랑이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느 마을에 있는 팽나무의 모습입니다.

보아하니 백년은 훨씬 넘어 보이는 오래된 나무인데

한쪽 가지가 뭉떵하니 잘려있었습니다.

인위적으로 최근에 잘린 것은 아니고

오래 전에 어떤 이유에 의해서 자려나간 이후

그대로 생명을 유지하며 자란 것 같았습니다.

 

큰 상처를 입었는데도

주눅 들지 않고 의연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시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고목 소리

- 조오현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 소리 들을라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장독杖毒들도 남아 있어야

 

 

 

(시인과 촌장의 '좋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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