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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6회 – 오만하고 추한 자들을 보며

 

 

 

1

 

결국 아머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언어력의 깊이와 크기 차이다. 아마추어는 언어가 가난하다. 언어가 가난하니 생각도 가난하고, 생각이 가난하니 행동의 폭도 좁다. 프로는 같은 문제에 직면해 기존 생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다른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 주어진 문제를 다른 관점과 언어로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천박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생각의 높이가 낮고 인격이 무너져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도 없다. 생각과 느낌은 모두 언어를 매개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언어가 빈약하면 사고도 더불어 빈약해진다. 사람은 비슷한 사람과 어울린다. 같은 수준의 언어 공동체가 결성되는 셈이다. 여기서 주고받는 언어가 그 공동체의 사고수준을 결정한다. 잘 다듬어진 언어 없이 생각하려는 사람, 감동적인 언어 없이 꿈을 꾸는 사람, 가슴 뛰는 언어 없이 성공을 쟁취하려는 사람에게 미래는 걱정과 우려뿐이다. 아니, 심각한 위기와 암담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

 

‘언어를 디자인하라’라는 책을 골라서 펼쳐봤습니다.

‘무심결에 쉽게 내뱉는 말들을 한번쯤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읽어 가다나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서 나오는 이 문단을 읽고는 책을 내려놔버렸습니다.

 

천박한 언어를 즐겨 사용하는 제가 갑자기 개 돼지가 된 기분이 들어버렸습니다.

옆을 돌아봤더니 편안하게 누워있는 사랑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개가 뭐 어째서?”라고 항의할 것 같아서 얼른 눈을 돌려버렸죠.

 

고상한 자들이 천박한 아랫것들을 훈계하듯이 이런 말들을 씹어제끼면

김남주 시인의 ‘종과 주인’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낫 놓고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2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다룬 드라마 ‘더 데이즈’를 봤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아주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더군요.

 

갑작스러운 지진과 거대한 쓰나미, 그 후 통제를 상실한 채 폭주하는 원전

극심한 혼란과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상황에 대처해나갔습니다.

현장의 직원들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나갔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도망가고자 하는 갈등도 있었습니다.

정부 관료와 원전 고위층은 혼란을 수습하려 하면서도 최악을 걱정하며 자신의 살길을 찾기에 바빴습니다. 물론 그들은 도망갈 필요가 없었기에 끝까지 그 자리를 보전했습니다.

 

2011년 일본에서 보여줬던 일과 비슷한 일을 지금 우리도 보고 있지요.

폭주하는 날씨와 거대한 자연재해, 통제력을 잃어버린 채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현장의 직원들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이래저래 대처를 해보지만 역부족이고

정부 관료들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뜬금없는 마녀사냥과 꼬리자르기에 열심입니다.

윗분의 심기가 불편한 일에 대해서는 정치적 생명을 걸겠다며 분기탱천하지만

국민의 생명이 위급한 일에 대해서는 너무도 여유롭고 의연하기만 합니다.

골프라도 배워서 속세의 혼란과 번잡스러움을 잊으며 살아야 할까요?

 

 

3

 

끔찍한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될 즈음

서울 신림동에서 살벌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한 젊은 남성이 대낮에 칼을 들고 거리에서 사람들을 찔러댔다는...

미국에서 무차별 총기난사 소식이 더 이상 쇼킹하지 않듯이

한국에서 묻지마 폭행과 살인도 더 이상 쇼킹하지 않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뉴스였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저는 그 흉악한 범인에게 감정이 이입됩니다.

아마도 그는

어디에도 버릴 곳이 없는 감정의 찌꺼기들을 가슴 속에 쌓고 쌓고 쌓고 쌓으면서 버티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도와달라고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질러댔지만 차가운 세상만을 확인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발버둥 치면 칠수록 점점 촘촘히 옥죄어 오는 현실에 숨이 막혔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수시로 자살을 생각하면서도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버티며 살아갔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틸수록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보며 몸서리쳤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몇 년 전 저였을지 모릅니다.

 

오만하고 추한 자들을 자근자근 씹어제껴도

마음이 시원해지지 않는 것은

무더위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아마도 이자람밴드의 ‘우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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