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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8회 – 저는 사이코페스 정신병자입니다

 

 

 

1

 

몇 년 전 경기도에 살 때 저의 직장은 지하철이었습니다.

개찰구에 카드를 찍어서 다섯 시간 동안은 기본요금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매일 그곳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특히 여름철에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지하철이 최고의 피서지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이용이 적은 낮 시간에

비교적 한산한 노선을 선택하고

가장 사람이 많지 않은 맨 앞 칸을 이용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지만

사람들에 시달리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큰소리로 통화하거나 대화하는 사람

이어폰 없이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보는 사람

옆 사람이 불편하든 말든 당당한 쩍벌남

좁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어깨로 옆 사람을 밀어내는 사람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둘만의 애정행각에 푹 빠져있는 연인

 

처음에는 내가 이해하고 조금 양보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은 더 당당하게 행동하더군요.

중간에 살짝 불편한 표정을 짓거나 괜한 헛기침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더군요.

조금 심하다싶으면 상대를 뻔히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이 자신의 행동을 이어가거나 가끔 눈이 마주치더라도 태연하게 무시해버리더군요.

너무 짜증나서 얼굴에 불편한 표정을 잔득 지으며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상대가 더 강한 레이저로 쏘아보기라도 하면 깨갱하고 바로 눈을 돌려버립니다.

심지어 불편해하는 저를 향해 노골적인 시비조로 빤히 쳐다보기라도 하면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다가 다음 역에서 내려버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도 매일 같이 지하철에 출근했던 이유는

제 집에 에어컨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 통장에 돈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저를 불러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찾아갈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지하철로의 출근이 몇 달 동안 이어지면

사람이 다가오는 게 싫어지고

점점 움츠러들게 됩니다.

지하철로의 출근이 1년을 넘어가면

사람들이 싫어져서 점점 외진 곳을 찾게 되고

자신감 없이 왜소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하철로의 출근이 몇 년이 지나도 계속 이어지면

극도로 예민해져서 조그만 것에도 날카로워지고

모든 신경은 사람들을 피하는데 집중하게 됩니다.

 

그때

“조그만 칼 하나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닐까” 하는 생각을 심각하게 해봤습니다.

누가 지하철에서 이기적인 행동을 하면 그냥 슬쩍 칼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위협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 어느 날

앞자리에 앉은 연인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사랑의 대화를 쉼 없이 조잘거리다가 서로 입을 맞추는 것을 목격한 순간

제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아마 제게 칼이 있었다면 두 연인의 입을 영화 다크나이트에 나오는 조커처럼 만들어버렸을 겁니다.

 

용기가 없는 저는 결국 칼을 들고 다니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있는 이들은 칼을 들고 거리로 나와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더군요.

 

 

2

 

벌써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다보니 삶의 기술이 조금씩 쌓여가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비울 수 없는 쓰리기통에 쓰레기를 계속 집어넣는 방법입니다.

“쓰레기통이 차면 비우면 되지”라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살다보니까 그런 일도 생기더라고요.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쓰레기를 마구 집어넣잖아요.

금방 쓰레기통이 차오르면 가볍게 툭툭 칩니다. 그러면 공간이 생겨요.

그래도 쌓이는 쓰레기 때문에 곧 차오르면 손으로 눌러서 넣지요.

그러다가 또 차면 발로 눌러서 또 넣고, 그러다 또 차면 신발을 신고 꽉꽉 누르면 공간이 또 생기지요.

그렇게 몇 번을 하다가 또 쌓이는 쓰레기 때문에 더 이상 공간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지면 화가 나서 쓰레기통을 발로 뻥 차버립니다. 그러면 그동안 차곡차곡 쌓여왔던 쓰레기들이 주변에 쏟아지지요. 잠시 그렇게 쓰레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화가 삭혀지면 할 수 없이 다시 쓰레기를 정리해서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종류별로 크기별로 정리해서 다시 담으면 또 공간이 생겨요.

그때부터는 쓰레기를 종류별로 크기별로 분류해서 잘 포개면서 넣게 되죠.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서 또 쓰레기가 차거든요. 그러면 쓰레기통을 다시 비워서 쓰레기들을 새롭게 정리해서 넣습니다. 신기하게도 공간이 또 생겨요. 하하하.

꽉 차서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을 것 같은데 들어갈 자리가 계속 생기더라고요.

 

 

2012년 3월 22일 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에서 소개해드렸던 얘기입니다.

후~ 그때는 그렇게 버텼습니다.

마음속에 쌓여만 가는 감정들을 비울수가 없어서 그저 꾹꾹 눌러가면서 버티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악착같이 버티다보면

몸은 망가지고 정신은 피폐해져서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도와달라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 봐도 세상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가끔씩 터지는 묻지마 범죄를 보며 우리 주위에 그런 시한폭탄들이 무수히 많다고 외쳐 봐도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진 사람들이 연이어 나와서 설쳐대기 시작하니까 그제야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의 존재를 바라보게 됐습니다.

언론은 호들갑스럽게 이들을 싸이코페스나 정신병자로 몰아가기 시작했고

경찰은 시내에 특공대와 장갑차를 배치하면서 겁을 주기 시작했고

정치권은 법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각종 대책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괜히 밖으로 나와서 설쳐대지 말고 혼자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라는 겁니다.

 

감정의 쓰레기들을 비우지 못해서 꾹꾹 쌓아두기만 하다가

미쳐가는 날씨에 임계점이 폭발해버린 이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참으라고만 하면

씨발, 어쩌라는 겁니까?

 

 

3

 

언론에서 온통 사이코패스와 정신병자의 범행에 대해 떠들어댈 때

차분하게 이 문제를 바라보는 글을 봤습니다.

몇 년 전 일본에서도 이런 문제가 심각했었는데

문제의 원인을 개인들의 사회적 고립으로 바라보면서 접근할 결과

조금씩 줄어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글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조용히 묻혀버렸습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오래간만에 메일을 돌렸습니다.

혹시 외롭고 힘든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자고 호소해봤습니다.

메일을 보내고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더니 일주일 만에 한 명에게서 답신이 왔습니다.

오래간만에 연락이 와서 반가웠다고

그런데 자기 주위에는 외롭고 힘든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그의 메일을 받고 답신을 하려다가 말았습니다.

외롭고 힘들게 버텼던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4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태풍이 지나가고 다시 맑은 하늘이 돌아왔습니다.

30도를 넘는 무더위는 여전하지만 기온은 살짝 떨어져서 훨씬 견딜만해졌습니다.

이런 날 팽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있으면 더없이 편안해집니다.

 

언론에서 사이코페스 정신병자 흉악범에 대한 기사는 싹 사라졌습니다.

우리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기회가 또 이렇게 사라졌습니다.

그저 참고 참고 참고 또 참으면서 살아가야 할 뿐입니다.

도저히 참기 힘들면 밖으로 나와서 설쳐대지 말고

자살률 세계 1위 국가답게 혼자서 현명하게 행동하면 됩니다.

 

오늘도 누군가의 어두침침한 방에서는

김윤아의 ‘가만히 두세요’가 흘러나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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