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마농의 샘, 보는 이의 마음까지 경건하...
- 12/13
1
정말 오래간만에 예전에 같이 활동했던 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친하게 지냈던 분이라서 반갑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지난 달에 레몬을 수확해서 아는 분에게 조금 보내드렸는데
그분이 그것을 또 주위에 나눠주면서 자신에게도 전달이 됐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정이 돌고 도는 모습이 좋아서 기분이 살짝 펴지려는 찰나
은근하게 자신에게도 보내줬으면 하는 마음을 보이더군요.
한 그루 있는 레몬나무에서 수확한 걸 조금 보낸 것이라고 얘기했더니
아쉬워하는 마음이 살짝 느껴졌고
이어서 그분의 근황에 대한 짧은 대화가 이어지다가 통화가 끝났습니다.
통화는 정다운 목소리로 밝게 이어지고 끝났지만
전화를 끊고 난 후 마음은 불편하더군요.
예전에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그동안 연락 한 번 없이 지내다가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가 이런 내용이었으니...
제주도에서 농사짓고 살다보면 이런 식의 연락을 가끔 받습니다.
평소에 연락을 주고받지 않던 분도 제주도에 놀러왔다면서 찾아오겠다고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고
제가 농사지어 보낸 택배를 대신 수령하신 분이 자기도 조금 먹어도 되냐고 묻기도 하고
제를 통해 제주도 여행을 즐겁게 마치고 돌아간 후 그곳에서 만났을 때는 까칠한 도시남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기도 하고
그리 친하지 않던 분도 처음으로 전화를 걸어와서 제주도 놀러 가는데 좋은 정보 좀 알려달라고도 하고
제가 농사지은 걸 보내주겠다고 하면 반갑게들 연락을 해주시지만 제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침묵으로 답을 해주시는 분도 많았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그저 낭만적 관광의 대상일 뿐이고
농부는 공짜로 뭔가를 얻어먹을 수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제가 얼마나 힘겨운 나날을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이곳에서의 삶은 어떤 고민과 어려움이 있는지에 대해서
제가 정말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혁명과 투쟁과 민중을 외치는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 겪어왔던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서 퇴적층을 이루고 있는데
그 위에 또 하나의 퇴적물이 쌓였고
제 과거의 기억에서 또 한 사람을 밀어냈습니다.
2
자꾸만 비난하고 싶거나 못마땅한 점이 눈에 띄는 사람이 눈앞에 있을 때는
그를 향해 비난의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못마땅하게 여긴 그 점이
내게는 없었는지 돌아보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나와 상충한다고 해서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부족함은 번뇌에서 오는 것이므로
이해심을 가지고 그들을 자비롭게 대해야 합니다.
내가 행한 실수로 나는 현명해지며 겸손해지고
내가 받은 상처로 나는 자비심을 배울 기회를 얻습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정목스님이 들려주시는 기도문을 가만히 들으면서
그 말들이 제 마음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봤습니다.
하지만 내공이 높은 이들만이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 말들은
소심하고 예민한 제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입니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도
그들은 때로 알지도 못하고
마음을 나누지도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찰나라는 사실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기도문을 가만히 듣고 있는데
이 기도문이 제 마음을 살며시 어루만지면서
날카로워져 있던 저를 무장해제 시켜버렸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주구장창 외쳤던 저는
사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에는
제 노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또한
제가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저의 사랑이 선택받지 못할 수 있음도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3
도시인의 시선으로 제주도를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프로그램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 속의 제주도 사람들은 순박하고 다정합니다.
상처 입은 이들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넉넉한 인심으로 기꺼이 나눠주는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지요.
‘제주도의 푸른 밤’처럼 낭만적으로 포장해놓고
각종 쓰레기들과 마음의 상처만을 남겨놓고 떠나버리는 현실이 때로는 화가 나지만
포장된 이미지들처럼 순박하고 다정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네요.
제 마음이 아직은 그리 넓지 못해서
자기에게도 레몬을 보내줬으면 하는 이의 마음을 받아 안지는 못하지만
올해는 텃밭에 채소들을 여유 있게 심어서 좀 더 많은 분들과 나눌 수 있도록 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지 조심하며 살아야겠네요.
(정밀아의 ‘언니’)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