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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장 - 서준식

 
나의 주장 - 서준식

인간의 내심은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여기에 개진하려 하는 나의 내심을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도 근거로 살아 나의 신체를 구금해 놓을 판정을 내릴 권한은 당신들에게는 없다. 나의 내심을 심판할 권한이 없는 당신들에게 내가 나의 내심을 고백해야 함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감히 이런 모순된 행동을 하려고 한다. 그것은 내가 한낱 (처분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임을 주중하기 위함이다.

사회안전법 앞에 알몸으로 서본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흡사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괴물 앞에 알몸으로 선 인간의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정한 관료체계는 내가 알 수 없는 때에 내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나의 (동태)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나는 그것을 열람할 수가 없는 고로 그 보고서가 나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따라서 그것을 시인할 수도, 부인할 수도, 반대 4심문할 수도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보고서는 관료체계를 거슬러 올라가 보안처분심의위원회로 도달한다.

나에게는 그 심의위원들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며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 앞에 나의 모습을 드러내보일 것도 허락되지 않으며 그들도 서준식이 어떻게 생긴 인간인지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심의위원들은 거의 뻔한 내용인 (동태 보고서)를 건성건성 훑어보고는 (이것도 의심스럽다) 테이블 위에 쌓아놓고 아마도 그날 점심식사를 어느 식당에 가서 어떤 메뉴로 해결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보다 훤씬 쉽게 보안감호처분 2년 갱심을 의결한 것이다.

이리하여 어느 날,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믿고 전향을 거부할 뿐 아니라 사회안전법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등....."

이라고 두세 줄 타자된 (이유)가 첨부된 보안처분갱신결정서가 나의 감방으로 날아든다.

나는 또다시 2년을 이 싸늘한 2평짜리 감방에 감금되어 있어야 한다. 이 전과정에서 나는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처분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틀림없이 당신들은 내가 여기에 개진할 나의 내심 때문에 나에게 불이익을 주는 헌법위반을 감행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 내심을 개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 당신들은 (보고서)류에서 제멋대로 억측되고 단정된 나의 (사상)을 가지고 나에게 불이익을 주는 헌법위반을 역시 감행할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결과가 마찬가지라면 나는 내가 (처분대상) 이 아닌 (인간L)임을 주장하면서 불이익을 받는 쪽을 선택하겠다. 그러니까 이 (나의 주장)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내가 당신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한 진술인 것이다.

나는 (처분대상) 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이다.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고 사랑도 미움도 욕심도 호기심도 있는 연약한 한 사람의 인간이다. 죠르쥬 루오의 그림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사랑하고 J. S바하나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싶어, 이 삭막한 감방살이를 증오하고 서러워하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목청껏 한국 가곡을 불러제끼고 싶고 판소리. 창극을 간절하게 감상해 보고 싶은, 이문구씨의 소설에 울고 웃는 인간이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날 때문 가슴을 죄어오는 상념에 때로 잠 못이루는 인간이다.  16년 동안 이 쇠창살 속에서 옛친구들과 형제들을 그리워하며 살아왔고, 때로 어둡고 뜨거운 짐승적인 욕망에 몸을 지지며 번뇌하면서 그래도 한 여인을 소년과도 같은 두근거림으로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타고난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늘 국민학교 교원을 부러워하며 살아왔고 또 죽을 때까지도 부러워하면서 살아갈 한 사람의 인간이다.

이런 나는 그와 동시에 민족에 대한 사무치는 애정을 간직하는 한편, 모든 인간들이 비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웃과 더불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s한 사람의 인간이다.  나의 이 흔들림없는 사상적 기조이자 실체인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에 입각하면서 이것을 현실화시킬 방도를 늘 구상하며 회의하는, 이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내가 나의 조국과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늘 물으며 찾으며 고심하는, 이것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에 당연히 제물이 되어야만 옳은 나의 인생을 혹은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혹은 아쉬움과 미련을 가지고 실감해 보는, 나는 한사람의 인간이다.

1983년 3월에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나는, 흑백논리에 따라 <○○주의자>로서 개념규정받을 것을 거부하면서 내 생각의 알맹이, 즉 실체는 오로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사랑>만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주장한 바 있었다(「진술서」2항).  이와 같은 생각에는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다.  그러니 흑백논리에 따라 안이하게 <○○주의자>라고 개념구정당할 것을 거부하겠다는 말은 내가 스스로를 그 어떤 주의자로서 의식해본 일이 없었다거나 혹은 내가 모든 주의를 초월하는 허무주의자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나의 이국에서의 소년시절에 민족의식에 눈뜨고, 그리고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20세 전후 무렵 조국 동포들의 몸서리쳐지는 비참함 앞에서 인간해방을 간절히 소망하기 시작한 이후, <민족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의 길을 진지하게 모색하면서 달려오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었다.

나이 어려서 이렇게 영어(囹圄)의 몸이 된 까닭에 마르크스 학설을 깊이 연구해 볼 기회를 비록 갖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는 자신을 적어도 가장 넓은 의미로 마르크스주의자의 한 사람으로서 의식하면서 살아왔으며 장래에도 나의 사상이 어떠한 변용(變容)을 겪을지라도 (내가 종교에 귀의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도 !) 마르크스주의의 흔적은 끝끝내 나의 정신에 남아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고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정신 (내가 이해하는 한 과학사상과 휴머니즘의 실천적 결합이다)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일이 없이 살아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언명으로써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안이하게 개념규정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문서를 아예 작성하지 않는다면 모르되 일단 작성하고 나 자신을 드러내기로 한 이상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나의 소견을 고의로 모호케 해 두는 것은 당신들에 대한 불성실이요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대한 불성실이 아닐 수가 없기에 이 점을 분명히 해두려 할 분이다.  나는 자신을 안이하게 개념규정하려고 드는 것은 당신들이다.

냉정시대의 유물이요 분단시대의 조작물인 경직된 흑백논리에 골수까지 잘도 길들여진 당신들의 상투적 사고방식은 틀림없이 폭력적인 논리로써 나를 <○○주의자> 내지 <북(北)>이라고 쉽사리 개념구정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당신들은 마르크스주의 이해를 위한 정당한 노력을 회피. 생략한 채, 내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감명과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나의 절실한 정신사적 맥락에서 나의 <마르크스주의>를 억지로 떼어내어, 그것에다 각박한 분단상황이 악의와 어리석음으로써 멋대로  빚어낸 잘못된 마르크스주의 lrosja을 틀어넣은 다음 그것을 도로 나에게 안기려고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식의 안이한 개념규정을 단호히 거부하겠다.

나는 자신을 가장 넓은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자의 한 사람이라고 언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그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점과 알맹이 (실체)와 목적은 오로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사랑>의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을 굳건히 딛고 섬이 없는 기성품 이념체계로서의 <○○주의자> 에의 경도( 傾倒)가 나 자신과 나의 이웃들에게 크나큰 불행일 수가 있음을 잘 자각하고 있다(이것은 또한 백범 김구 선생이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나의 마르크스주의는 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사랑>위에 군림하는 도그마는 결코 아니다.

당신들에게는 나의 마르크스주의를 심판할 권한도 자격도 능력도 없다.

나는 1983년 3월에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한「진술서」에서 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사랑>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개진한바 있었다.

1. 인간에 대한 사랑

우리 사회의 빈부차이의 근본적 이유는 인간들 사이의 능력차이가 아니라 제도적 결함에 있으며, 우리 사회의 근본적 원동력이자 추진력인 <이윤추구경쟁>을 핵으로 하여 사납게 소용돌이치는 얄팍한 상업문명과 약육강식의 경쟁풍토는 강자와 약자,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인간다운 삶을 똑같이 상실케 하면서 인간을 자본의 자율적 증식운동에 종속시키고 있다.  진정 인간이 <아윳과 더불어 인간답게>살기 위하여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 수 있게 해줄 사회적. 객관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며, 그와 같은 객관적 조건을 나는 모든 사회주의 사상에 공통된 가장 핵심적인 원리이자 이상인 <생산수단의 공동소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생산수단의 공동소유>는 반드시 폭력적으로 지금 당장 강행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역사의 미래에 관한 나의 <전망>이요 <이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2. 민족에 대한 사랑

<제국주의>란 결국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자본주의 국가가 특유의 내적 모순을 후진국 수탈에 의한 초과이윤의 획득으로써 타개하려는 안간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현대의 모든 생명력 있는 사회과학 학설들은 이같은 마르크스주의적 견지에서의 설명을 결코 완전히는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선진자본주의국가(후발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야 하겠지만)인 일본제국주의로부터 자본의 운동법칙에 따라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지배를 받아왔던 피해자인 우리 민족은 그와 같은 착취라는 관계 그 자체를 과감히 거부해야 하며, 피압박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타자를 압박하지 않는 제 3의 길, 즉 <인간해방의 이상을 가슴에 간직하는 민족해방>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은 비자본주의적 발전, 아니면 적어도 독점화되지 않으면서도 타자에 예속되지도 않는 조건에서의 자본주의적 발전이여야 한다.

강대국에 대한 사실상의 예속에서 벗어나 강대국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민족적 주체성을 회복할 때 우리 민족 내부에서의 민주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경제구조의 예속화. 외연화(外延化)는 조국통일을 곤란케 하는 물질적 토대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외국자본의 이해가 우리 나라 문제 전반에 깊이 얽힘으로써 우리 민족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우리 민족의 운명 결정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진다.  이의 극복을 위하여는, 외국 거대자본과의 예속적 유착의 과감한 청산, 따라서 자본으로서의 재생산 기반을 민족 경제 내부에 가지지 못하고 외국자본의 민족경제 압박의 사실상의 대행자로서 기능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이익을 발견하는 이른바 <매판자본>에 대한 단호한 억제를 통한 진정한 민족자립에의 의지와 결단이 필요하다.

내가 1983년에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했던 이상의 주장은 비록 썩 잘 정리되지도 않았고 미흡한 점도 많았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잘못된 주장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4년이 경과된 현재도 나는 이것에 수정을 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 4년 동안에 나의 위 주장을 시대착오라 할 만큼 민족경제에 구조적 변화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이런 장소에 감금되어 공정한 최신정보나 사회과학 관계서적 열독( 閱讀)을 무지막지하리만큼 대폭적으로 제한당하고 있는(이것 역시 분명한 현법 위반이다)  나에게는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3년 3월의 이 「진술서」는 한 인간의 사상을, 그것도 심판을 받기 위해, 문서형식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따라다니기 마련인 뚜렸한 한계를  노정시킨 것이었음을 지금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사람의 <인가>의 사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사회과학적 측면에서의 개진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으며, <인간에 대한 사랑>부분에서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객관적 조건>에 대해서만 언급했지<주관적 조건> 즉 우리 인간들의 개인윤리 내지 도덕적 노력이라는 측면에 대하여 언급을 소홀히 했던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이 (심판을 받는 <처분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의 진술이 되기 위하여는, 그와 같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사랑>의 사상을 나의 것으로 하게 된 과정, 나아가서 마르크스 사상으로부터 감명을 받고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의식하기에 이른 과정이 나의 유년, 소년, 청년시절의 현실체험의 맥락 속에서 부각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번 이 「나의 주장」을 쓰는 목적이 바로 나도 당신들과 똑같은 <인간>임을 주장하는 데 있다면, 83년에는 불가능하다고도 부질없는 짓이라고도 생각되어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던 이런 맥락을 나는 이제 여기서 조금이나마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서의 성질상 결코 만족스러운 정도의 진술을 할 수 없고 간략한 언급임을 면할 수 없다.  그리고 나의 표현능력도 한 인간의 정신적 역정(歷程)을 설득력있게 드러내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  나도 한 사람의 <인간>임을 당신들이 어느 정도 납득하여 주는 것으로써 만족할 수밖에 없다.

식민지 사회의 강제적 사회변동으로 인하여 수많은 식민지 백성들이 정든 땅을 버리고 살 길을 찾아 헤매어야 했듯이, 나의 부모님도 유년시에 각각 조부와 외조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셨다.  모친은 관부연락선의 어두침침한 3등 잡거선실에서 아껴가며 잡수신 <능금>맛을 두고두고 못잊어 하셨다.

그곳에서 정착, 결혼하신 두 분은 우리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분발하시어, 삶의 터전을 우리 동포들이 모여사는 빈궁하고 불결하고 황량한 동네가 아니, 서민들의 동네이기는 하되 참으로 평화로운 일본인 동네로 정하셨다. 아버지께서 너댓살 된 나에게 마치 앵무새 가르치듯 되풀이 되풀이 가르쳐 주신 우리 주소, 그 경도(京都)시 우경구 화원 양북동은 이병주씨의 대하소설 「지리산」 제 2권에 상세히  나오는 바로 그 일본의 평화로운 동네와 이웃하는 동네였다.  평생 소원이던 조그만 방직공장 경영을 꿈꾸시면서 섬유원료 중매상업에 종사하시던 부친은 온유하고 자상한 충청남도 사람의 전형이셨다.  모친은 그 천성적인 활달함과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인해 그 동네에서 사랑과 신임을 받으셨고, 형들은 동네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이자 대장이었으며 갖가지 신화적, 전설적 일화를 남겼다.

한국 사람이라곤 우리집 식구밖에 없던 그 동네에서 나는 태어났고 재치있게 말을 잘하는 아이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받고 일본 아이처럼 자랐다.  나는 벌레먹은 이빨이 아파서 자주자주 울었던 것 외에는 아무런 불편도 불안도 없이 참으로 행복했던 것 같다.  자신이 <조선인>인 줄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나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일본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내가 자신을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조선놈>임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 무렵부터 모친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참으로 시사한 <반(半)쪽발이>가 되었을 것이다.  모친의 가르침대로 어린 나는 그 누가 물어도 서슴없이 조선사람임을 밝힐 수가 있었다.  나는 때로 일본 아이들과 주먹으로 싸우곤 했는데 그 싸움은 따지고 보면 거의 모두가 직접.간접적으로 민족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놀이터 한 귀퉁이에서 서너 명의 일본 아이들로부터 몰매 맞은 일이며, 줄넘기 놀이하는 계집아이들과 함께 놀고 싶어 갔더니 그 아이들이 (마늘 냄새가 난다고) 코를 쥐는 시늉을 하면서 달아나 버린 일이며, 학력 테스트의 국어(일본어)에 98점을 받아 1등을 했을 때 담임 여선생이 그 답안지를 재검사하고 사소한 트집을 잡아 94점으로 감점, 3등으로 밀려난 일......  이런 사건들이 어린 나의 가슴에 깊은 슬픔이 되어 맺혔고,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막연하게나마 알지 못하는 나의 조국에 대한 동경을 키워나갔다.  물론 이러한 서러움만으로 일관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국민학교 시절은 나에게 일본인들 속에 섞여서 살아가는 일의 괴로움을 뼈속 깊이 가르쳐준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내가 당하는 슬픔과 서러움 속에서 나는 어린 마음에도 동네 환경이나 가정 환경이 좋지 못하여 불행한 아이들, 더러운 아이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동정할 수 있었고 이 무렵부터 나는 모친에게 늘 <인정이 많은 아이>라는 평을 들으며 자랐다(모친은 나의 작은 형 서승을 늘 <활달한 아이>, <소탈한 아이>라고 평하셨다).  조국을 동경하던 <인정 많은 아이>가 후일 조국에 와서 동포들의 몸서리쳐지게 비참한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아, 인간해방과 민족해방을 소망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마르크스 사상에 공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유년시절, 어린 마음에도 멀리 있는 조국을 그 얼마나 동경했던가!  애써<조선놈>임을 숨기려고 하던 학우들을 보면서 , 더러운 빈민가에서 제멋대로 성장하여 불량소년화되어 가던 동포 학우들을 보면서 나는 그 얼마나 안타까와 했던가!  그리고 까닭없는 불공정한 처사나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는 모든 못난 아이들을 나는 그 얼마나 깊이 동정하고 불쌍해했던가!

당신들이 나의 사상을 심판할 권한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나의 유년시대를 당신들이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시대를 공유하지 못하는 당신들의 입에서는(어떻게 해서든 나의 사상을 악의로 해석하고 나를 감금해 놓기 위해) "소년시절부터 민족적 차별감정에 의한 반항적 기질을 길로 오다가......"(1983년 고등법원 판걸) 따위의 모욕적이고 반민족적인 폭언밖에 나올 것이 없을 것이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외양은 비슷하게 생겼다.  일본사회에서 적극적으로 광고하고 다니지 않는 이상 누가 나를 <조선놈>으로 단정하겠는가.  중학교에 들어가 나는 어느새 일본인들 속에 묻혀버리고 있었다.  그런 생활이란 참으로 고통스러운 생활일 수밖에 없다. 일인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와도 식탁 위에 놓인 한글판 신문이나 김치가 마음에 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 하다가 <조선>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도 참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재일동포 청소년들은 거의가 그런 나날의 고통 속에서 성장했다.  그 정신적 중압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당신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나는 그래서 <광고>를 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야무지게 결단을 내려 교내 웅변대회에서 전교 학생들 앞에 나가 내가 한국인임을 고백했고, 민족적 차별이나 멸시풍조가 없어져야 할 것을 주장했고 1등을 따냈다.  내가 학교를 대표하는 잘 알려진 운동 선수였던 만큼 그 <광고>효과는 절대적이었다.

나는 이때부터 스스로를 뚜렷이 민족주의자로서 의식해 왔다.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싶으면 그 삶 속에서 몸을 과감하게 던지는 결단을 해야 한다.  나의 중학교 3학년 때의 웅변은 바로 그런 결단이었고, 그 이후로 나의 조국에 대한 동경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고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기여하고 싶은 소망이 자꾸만 간절해져 갔다.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후꾸다(福田)>라는 혐오스러운 일본식 성(性)을 영원히 내던져 버리게 된다.  당신들과는 달리 나에게는 민족주의적 소망이 매우 간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소년시절에 나는 이렇듯 민족의식의 커다란 각성의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후꾸다(福田)>가 아닌 <서(徐)>를 고교 시절의 일인 학우들은 아껴주고 존중해 주었지만 고교시절에 나는 민족주의자로서 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재일동포 소년이 민족의식에 각성될 때 처음 갖는 의문은 <나의 부모님은 왜 고국을 버리고 일본으로 건너왔을까?>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우리 민족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민족으로서의 자기 민족을 의식하며 사랑한다.  이런 점이 아마도 국내에서 성장한 평균적 동포들이 우리 민족을 생각할 때 <국수주의>적 뉘앙스를 부여하는 경향을 가지는 것과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민족의식에 각성된 재일동포 소년이었으며, 그와 같은 사정은 나중에 사회과학에 눈을 뜨는 과정을 거쳐 생각이 성숙된 후에 나의 <민족에 대한 사항>을 83년도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한 그 「진술서」에 나타난 것과 같은 시야와 논리로써 표현하게 된 배경을 이루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어쨌든 나는 하루 빨리 나의 조국으로 갈 소망을 열심히 가슴속에서 키우면서 나의 고교시절을 보낸 것이다.

이렇듯 이제는 그 누가 말려도 민족주의자의 길에서 벗어나는 일이 불가능해져버린 나는 한 사람의 민족주의자로서 혼자 힘으로 <자립>하는 단계에 와 있었다.  이에 이르기까지를 돌이켜 보면 나는 걸음마단계에서의 부모님의 가르침도 그렇거니와 나의 장형인 서선웅씨의 무언(無言), 무형(無形)의 영향을 잊을 수가 없다.  장형은 성인이 된 다음에 우리말을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전반에 걸쳐서 아무런 불편없이 구사할 수 있게 될 만큼 거의 독학으로써 피나는 수련을 쌓은 분이다.  시종 일본에서만 생활하는 재일동포 2세로서(그것도 유년시부터 민족적 교양이 풍부한 부모 밑에서 체계적인 민족교육을 받을 기회도 갖지 않은 채) 장형만큼 우리말에 능통한 사람을 나는 아직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출세하기 위하여 눈에 핏발을 세우며 사법 시험 준비에 쏟아 부어야 할 만큼의 (어쩌면 그 이상의)노력과 맞먹을 노력을 <우리 말 학습>에 쏟아 부어야 하는 사람들의 처절한 민족의식을 당신들은 결코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소년 시절에(직접적인 배움을 받을 기회는 갖지 못했어도) 장형 서선웅씨의 성실하고도 진지하고도 강인한 민족의식에 크나큰 감명을 받았다.

고교시절에 나는 사회과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으나 사회주의 사상 같은 것을 나에게 절실한 것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적 사상을 무시무시하다거나 사악하고도 포악한 것이라고 인식할 수도 없었다.  내가 살던 경도라는 지방은 선거로써 당선되는 지사나 시장이 언제나 일본사회당. 일본공산당 계열의 인사였고 국회의원선거 때 최고득표를 기록한 인사는 공산당 후보였다.

경도시 의회에서 여당도 사회당 . 공산당 연립(連立)으로 차지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사람들은 선거 때마다 자신들의 소신을 공공연히 피력하고 다녔으며, 나는 길을 가다가 그런 장면을 예사로이 목격하면서 그 인사들의 어조나 표정에 보수계열 인사들과는 다른 열성같은 것이 있음을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인사들이 대한민국에 있다면 아마도 보안감호처분을 받고 죄없이 10년이나 감금되어 있어야 마땅할 무시무시한 악당이라고는 그 당시 조금도 생각되지가 않았다.  또한 학교를 졸업하고 조총련 계열인 조선대학교에 진학했던 몇 명의 동포 학우들을 나는 결코 포악하다고도 사악하다고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얌전하고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 부족 때문에 사악했던 것은 오히려 나였다.....

냉전상황과 분단상황에서 빚어진 좌익사상에 대한 히스테릭한 적개심과 증오밖에 모르고 성장한 당신들과 나는, 이렇게 상이한 성장경험을 당신들이 옳게 실감 못할진대 당신들에게는 나의 사상을 옳게 이해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당신들은 나의 내심을 심판할 자격을 갖지 못한다.

196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재일교포 모국유학생으로서 난생 처음으로 꿈에도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다.  나는 나의 조국에서 법관이나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나의 조국의 모습은 나에게 보이는 것마다 신기했고 감격이었으며 그러면서도 모든 것이 커다란 슬픔이었다.

아름다운 문화유산도, 산뜻한 대기, 푸른 하늘도, 순박한 인정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조국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비참>이었다.  거리마다 넘치는 알량한 미국말 흉내(영어의 영향하에 국어를 상실함이 없으면서도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통상적으로 <미스>나 <미스터>를 붙이는 나라는 아마도 대한민국밖에 없었을 것이다)와 어설픈 미국식 몸짓의 흉내는 조국을 찾은 나에게 큰 슬픔이었다.  신문이나 잡지마다 빠짐없이 실리는 성병치료약이나 강장제 광고도 슬픔이었고, 거리는 채워지지 않는 야비하고 끈끈한 성(性)에의 욕망과 기대로 충혈된 눈망울들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나에게는 참으로 기이하고 슬픈 현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무엇하나 부족없이 안락하게 성장해온 나에게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요 경악이었던 것은 사람들의 너무도 비참한 삶이었다.

그 당시 한때 나는 종로3가 저 악명 높던 골목들 중 한 골목에 위치한 당숙이 되는 분 댁에 몸을 의탁하면서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에 다니고 있었다.  그 <종3>의 한 골목에서 날마다 목격하고 배운 매춘부들의 슬픔에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인간이 떨어질 수 있는 가장 어둡고 깊은 구렁텅이 바로 그것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릴 쯤부터 <종3>의 거리와 골목은 수많은 여자들로 꽉 찼다.

저녁 내내 <손님>을 붙잡기 위하여 우리의 골목 어귀에까지 나가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 결국 그날은 공을 치고 지친 어린 창녀들이 팔짱을 끼고 처량하게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을 부르며 나의 앞을 지나 골목 안 자기네들의 <방>으로 돌아갈 제,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난생 처음으로 찾아왔던 19살 서준식이었기에 진심으로 그녀들을 위해 더운 눈물 몇 방울을 떨구어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종로 3가 뿐이겠는가. 서울 자체가 매춘을 해서 목숨을 이어나가야 할 소녀들로 바글거리지 않았던가.

거지들은 또 왜 그리도 많았는지, 아침 햇살 얼굴에 받으며 등교하던 종로5가 인도에서 신문 몇 장을 뒤집어쓰고 정신없이 잠자고 있던 나이어린 거지 형제의 얼굴이며, 입석버스에 시커먼 맨발로 기어올라와 흡사 노파와도 같은 쉰 목소리로 이미자 노래를 한자락 부르고 나서 취객들에게 고사리같은 손을 내어밀고 다니던 계집아이의 처참한 얼굴은 지금도, 아니 죽을 때 까지라도 나의 망막에서 떠나지 않는다.

언제나 어린이들을 무척 사랑했던 나에게 학교에도 다니지 않은 채 신문이나 껌을 팔고 다니고 혹은 구두를 닦고 다니는 그 많은 어린이들 또한 경악이자 큰 슬픔이었다.  겨우 자신 한 몸의 침식만을 해결하기 위해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결코 인격으로서 존경받음이 없이 혹사당하던 어린 식모들, 서울로 도망쳐 온 저 투박하고 정이 많던 소녀들도 또한 나의 마음을 늘 암담케 하였다.  지게 지고 리어카 끌고 뭣하고 뭣하고......하는 앙상한 사람들......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도 안되었다.  불쌍했다.   짜증스러웠다.

나는 매일매일 충격을 받으며 분노하며 슬픔에 젖으며 19살, 20살 무렵을 정신없이 살았다.  조르쥬 루오가 그린 그림도 예수의 얼굴의 슬픔과 번민 가득찬 커다란 눈, 가련한 눈으로 저 불행한 사람들을 용서해본 기억이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나는 이 체험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나만을 웃음거리고 만들기가 십상인 부질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로부터 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내용을 심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서글프게 생각한다.

사회주의적인 사상이라는 것은, 악의에 찬 프로퍼갠더가 당신들의 머릿속에 아침마다 저녁마다 우겨넣는 것처럼, <북>이 있기 때문에<남>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한줌의 <공작원>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심어져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나라 반도의 북쪽 부분을 공산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 나라가 좌익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태평성대를 구가하리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만약에 북한이 없었다면 남한은 자체 내부의 사회적 모순에 자극되고 인간해방을 소망하게 된 자생적 혁신사상 및 운동을 이토록 완벽하고도 철두철미하게 제압할 수 있는 근거도 구실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남한의 자생적인 혁신운동이나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으로부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 있는 것은 차라리 북한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다.  자생적 혁신운동과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으로부터의 <위협>을 모면하고 있으려면 집권자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 분단체계를 붙들고 팽팽하게 유지해 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사상이란, 궁극적으로는, 인간들이 자본의 자율적 증식운동에 종속되어 인간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하고도 생생한 인간소외의 현장에서 자생적으로 싹트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 인간소외의 현장에 매춘부, 거지,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식모가 있든 <공순이>, <공돌이>가 있든, 또 다른 무엇이 있든 간에 자본의 자유적 증식운동은 늘 인간소외의 현장을 만들어 내며 따라서 인간해방의 사상, 나아가서는 사회주의 경향이 온갖 사상과 소망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다.

어쨋거나 나의 <인간해방>에의 열망과 대단히 소박한 형태로나마 사회주의적 원리에의 소망은 1960년대 후반기의 우리 나라의 그 몸서리쳐지는 인간소외의 현장에서 동포들의 비참을 밑거름으로 하여 싹이 텄다. 즉 자생했다.  이 자생에 이르는 한 인간의 정신적 역정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모욕이다.

자유란 본래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일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스러우려면 인간은 존재 그 자체를 그만두어야 한다.  즉 인간의 자유란 그 본질에 있어 선택적,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구성원리를 달리하는 각각의 사회마다 특정한 자유가 허용되고 불허되고(형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하는 것은 당연하다.  소트 타임에 곰탕 두어 그릇과 맞먹는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자유를 소녀들에게 허용하는 세상이 있는가 하면 매춘부로 전락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소녀들에게 보장하는 세상도 있다.  미성년자가 취업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가 하면 생계를 위한 고역으로부터의 자유를 미성년자에게 보장하는 세상도 있다.

인간을 광범위하게 상품화할 것이 허락된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그런 것을 인간 존엄의 침해로서 규정하면서 엄금하는 나라도 있다.  야비한 싸구려 에로 소설이나 포르노 비디오, 프로야구나 프로복싱, 도박, 마약, 호스테스, 기생, 무위도식, 일부다처, O.K종교(이것은 강원룡 목사의 술어?), 모든 종류의 투기적 중개업......이런 것들을 인간의 자유로 치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부자유로 치는 관점이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20세 무렵의 나는, 내가 항유하고 있었던 달콤한 부르조아적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대신에 나의 누이들과 아우들이 매춘부로, 거지로,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식모, <공돌이> <공순이>, 기생, 깡패로 전락할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세상, 그런 시대를 소망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소위 <적화야욕>을 품고 나의 비참한 동포들을 정복. 지배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감미로운 부르조아적 자유를 내어놓고 동포들의 비참에 동참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제 나는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울러 나는 3선개헌 반대투쟁(1969년, 법과대학 2학년 때)을 전개하는 학우들 틈에서 난생 처음으로 학생운동에 입문했으며, 국내 정치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모든 관심들은 나에게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 있어서의 사회. 경제적 구조에 대한 보다 깊은 인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분노에 떨고 슬픔에 젖은 한낱 나의 감정의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사랑>의 소망이 우리 동포와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현실적인 기여를 옳게 해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나의 그러한 소망을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으로 뒷받침된 소망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그리하여 방학 때마다 일본으로 가서 (그 당시 우리 나라에는 사회과학 서적 같은 것이 없었지 않은가!) 한 권 두 권 손에 쥐어보는 사회과학 서적들 중에서 마르크스주의 계통의 저작으로부터 감명을 받기 시작하였다.

나의 마르크스주의는 어린 매춘부들의 저 처량한 동요소리, 거지아이가 내미는 더러운 고사리 손, 껌팔이 계집아이의 불안에 떨던 노동자, 변소에 숨어서 소리죽여 흐느끼던 아이의 울음소리, 나이 어린 노동자의 여위고 핏기없던 얼굴......이런 모든 것들과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이 견고하게 결합되고 있던 것이다.

1970년(서울대학교 법과대학 3년 재학시) 여름방학 때 나는 북한에 다녀왔다.  형 서선웅씨는 이 일에 관계가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작은 형 서승씨의 권유를 받았으나 장형의 권유를 받은 사실은 없다.  거기에 가서 그쪽 사람들(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인지 모르나 우리를 안내하던 사람들)과 오고간 이야기들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조목조목 번호를 달고 "이것이 바로 네가 북에서 받은 지령이다.  너는 간첩이다"라고 나에게 가르쳐준 사람은 내가 체포된 후 나를 취조한 수사관이었다.  나는 나의 인생이 끝장이다라는 절망과 자포자기 속에서, "순순히<협조>하면 공소보류도 가(可), 그렇지 않으면 사형, 최소한 무기징역"이라는 유혹과 <몽둥이>의 침 아래 일사천리로 취조를 받았다.  영장 발부 없이 체포되었을 때의 기초 취조 때에 절망 속에서 했던 여러 가지 허위자백들은 후에 구속영장이 정식으로 발부된 후의 정식취조에서 차마 번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다.  당시 절망의 밑바닥에서, 아직 우리말을 하기도 알아듣기도 적지 않게 불편했던 22살짜리 백면서생에게 노련한 수사관이 진술시켜, 재판하고 결론을 내린 판결문대로 당신들은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믿어도 좋다.  당신들이 어떻게 믿거나 말거나 나는 당신들이 나에게 준 <죄의 대가>를 떳떳하게 치러낸 지가 옛날이고 (그것도 끊임없이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온갖 형태의 폭력 속에서!)이제 내가 당신들에게 진 빚은 없다.

1970년 당시의 북한에서, 나는 남한에 비해 건전한 면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하교길에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길가에서 은전을 주고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모습이나 극장에서의 여고생들 모습, 혹은 을밀대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노년 부인들의 표정에 "결국은 여기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구나......"라는 새삼스러운 감회 같은 것도 있었다.  소비품의 질과 양이 남한사회에 비하여 훨씬 떨어지는 것 같았고 사람들은 모두 피로한 표정이었지만, 어설픈 미국놈의 어설픈 흉내도 없었고 요란스러운 성병치료약 광고도, 창녀, 거지, 구두닦이......도 나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나에게 1970년 당시의 북한을 그 편린이나마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그 자체로서는 하나의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북한행을 지금도 뼈를 깎아내는 아픔으로 후회하고 있다.  그 후회가 <과거의 범죄>에 대한 도덕적 뉘우침은 결코 아니다.  나는 나의 그 행동이 세상과 동포들에 대한 부끄러운 행동이요 <죄>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내가 후회하는 이유는 우선 내가 8일간의 방문 때문에 너무도 오랜 옥고를 치러야 했고 (현재로서는 구경 1일당 2년의 대가!) 나의 인생의 황금기를 고스란히 쇠창살 속에서 보내야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니다.  이까짓 옥고쯤이야 만약에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튼튼하게 맺어져 있고 그들이 나의 아픔을 함께 아파해 주고 나의 옥고가 그들을 위한 것이라면야 늙어 숨이 끊어질 때까지라도 살아 주겠다.

진정 뼈아픈 나의 후회는 이런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실로 괴로운 것은 나에게 <북과의 관계>가 인정됨으로써 나는 저 그리운 방과 대학 시절의 모든 친구들, 우리 사회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정력적으로 분투하는 존경하는 인사들, 인정 많던 아주머니들, 사랑스런 어린이들, 나를 필요로 할 모든 불행하고 불쌍한 동포들, 모든 동포들, 글자 그대로! 나를 심판하고 감금하는 당신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동포들, 내가 이국에서 어깨에 배낭을 메고 다니던 시절부터 바로 그 한가운데 뛰어들기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전진하기를 꿈에도 소원하던 바로 그 모든 조국의 동포들로부터 나는 생살이 뜯기는 아픔으로 떼어냄을 당해야 했다.  나는 비단 지금 내가 감옥에 격리되어 있다는 뻔한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낙인>이 찍혀 버렸다.  <북>이라는 <낙인>이......, 똑같은 감옥에서 학우를 만났을 때도 그의 처지와 나의 처지는 달랐다.  70년대에 대통령 긴급조치령 관계로 가령 10년형을 받고 옛 학우가 들어왔다고 하자.  "자네 10년이나 받았으니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 있게 됐구나. 반갑네!" 그러나 그는 3년 만에 가석방인지 특사인지로 석방되어 버린다.  나가면서 나에게 말한다.  "먼저 나가게 되어 미안하이, 자네 만기 때 밖에서 만나세." 그러나 7년 형기를 받은 나는 만기 때가 지나도 9년 동안이나 그를 만날 수가 없다......

나는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으나 당신들 속의 한 사람이고 싶다.  당신들과 슬픔, 기쁨, 아픔, 아니 당신들의 무지나 편견까지도 나누어 지니면서 당신들 속의 한 사람이고 싶다. 그것은 나의 어린 시절부터의 소중한 꿈이었다.  그러나 당신들은 나에게 나의 가장 본질적인 것을 요구하면서 나의 소원을 거절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당신들 속의 한 사람이 될 것을 거부하고, 나의 알맹이, 나의 양심, 나의 인간 존엄을 내어놓을 것을 당신들은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경솔은 죄악이다.  그 어떤 심각한 필요성도 절실한 욕구도 없었던 나의 북한행은 결국 죄악을 낳았다.  보통 대공 수사기관에서는 간첩 내지 국가보안법 등의 용의자는 구속영장 없이 일단 체포, 취조하는 것이 상식이며 이런 사안에 관해서는 재판할 때에 법관들도 영장없는 채로, 취조를 문제삼지 않고 덮어둔다.  그리하여 <기관>에서는 용의자를 무한정(때로는 몇 년을!) 자기들 손바닥에 올려놓고 취조하기도 하고 <역공작(逆工作)>에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기관>에서 반드시 쥐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된 사건은 때로는 적절한 시기에 발표되면서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민주화 투쟁의 고조기, 정치놀음에서 집권당이 곤경으로 몰릴 때, 그리고 선거 때 매스컴을 통해 요란스럽게 집중적으로 발표되는 <간첩단 사건>들은 <북의 위험>으로 국민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간첩>이나 그 어떤 <역적모의>에는 영장제도를 보장해 줄 필요가 없음에 암묵으로 동의를 하고 있다.

<간첩>에게 인권은 무슨 놈의 인권이란 말인가?  멀쩡한 사람도 인권보장 못받는 처지에!  그러나 인권보장에 그런 식의 <예외>를 인정하는 데 익숙해진다는 것은 결국은 여러 방면으로부터 스스로의 숨통을 죄게 하는 운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상 나찌스 독일이나 일제 시대에 이런 실례를 흔히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골수 공산주의자만을 구금하기 때문에 인권침해 우려는 없다"고 설명되고 있는 (그러나 내가 보는 바로는 이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이곳에서 김경순이라는 사람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단순한 반공법 4조 1항과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의 경합으로 2년 9개월의 형기를 복역했을 뿐이었다) 이 사회안전법이 <골수 공산분자>의 개념을 확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  내가 <간첩>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해두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구속영장은 내가 육군보안사령부에 체포되고 조사를 받기 시작한 지 약 50일 후인 1971년 4월 18일에 정식으로 발부되었다고 한다.  1971년 4월 18일, 그것은 박정희- 김대중의 대통령 선거 1주일 전이었고 장충단에서의 김대중 후보 유세에 서울 시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때는 고려대학생들 4천 명이 안암동 거리에서 기동순찰대 4천 명과 육탄전을 전개하는 등 최고조에 달한 교련반대투쟁의 과정이기도 했다.  이 50일 중 일정기간 동안 나는 <역공작> 명목으로 풀려 나와 감시를 받으면서 최루탄 연기에 휩싸인 법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구속영장이 정식으로 발부되면서 대대적으로 매스컴에 발표되기를 내가 <북의 지령을 받고 교련반대투쟁을 배후 조종. 선동하는 간첩>이란 거였다.  실은 내가 한 일이란 보안사령부 공작요원에게 서울법대 교련반대투쟁에 관한 정보(그 감시를 받으며 학교에 다니던 기간에 보고 들었던 정보)를 제공한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후일 서울구치소내에서 나는 모 대학생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쏘아 붙였다.  "당신들 때문에 교련반대가 깨져버렸소.  우리가 쫓겨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오?"

참으로 경솔은 죄악이다. 경솔한 인간은 죽어야 한다.

이제 나의 청소년 시절의 정신적 역정은 끝났다.  교도소에 수감된 후에 관해서 나의 사상과 관련해서 한두 가지 덧붙이고 싶다.

미결수였던 기간 중 반년 가량을 나는 6-7명의 절도범들과 비좁은 감방에서 함께 기거했다.  이때 나는 이 세상이란, 넘나들기가 절망적으로 어려운 울타리,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사이에 둔 두 가지 <인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실감했다. 나는 그들과 확실히 다른 <인종>이었다.  평화롭고 교육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지 못했던, 혹은 부모, 선생, 친구......를 옳게 만나지 못했던 그들은 뒷골목에서 제멋대로 자랐고, 눈치밥 먹으며 자랐고, 얻어맞으며 혹은 베를 곯으며 자랐다.

그들에게는 이 어리석고 사악한 세상이 그들을 위해 부단히 만들어 내는 빤질빤질하고 얼룩덜룩한 어리석은 것들이 무엇이든 떠맡겨진다.  퇴폐적이거나 선정적인 대중가요, 허위투성이인 얄팍한 오락영화나 TV프로, 백치같은 육체파 여배우, 야비한 온갖 에로 문화, 포르노 문화, 싸구려 매춘부, 프로 복싱, 고고춤, 대마초, 환각제, 잠시 유행하다가 사라져가는 온갖 옷차림......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문화는 이같은 <싸구려 나일론 문화>, 껍데기 문화 뿐이다.  찌꺼기 뿐이다.  사람의 영혼을 살찌워 주고 고귀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일의 기쁨을 가르쳐 주는 감동적인 예술들, 지식과 지성을 쌓아 세계를 한걸음 한걸음 터득해가는 환희, 기지와 유머가 번뜩이는 진지한 대화를 더불어 나눌 수 있는 벗, 교양있고 발랄한 여대생과 조용한 찻집에서 마주 앉는 즐거움...... 이런 것들에의 저금 가능성을 그들은 거의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채 살아간다. 늙어간다.

그들은 꿈 없이 야박한 세상을 각박하게 살아왔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출세, 안정된 직장, 사회적 존경, 평화로운 가정, 아름답고 교양있는 아내.....  이런 것들이 그들의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미래의 꿈은 단 한가지, 즉 <돈벌이>.  돈은 그들의 모든 서러움을 일거에 해결해 줄 전능의 신이다.  이 사악한 시대는 그들을 더욱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트리기 위해 그들에게 돈의 신화를 떠 안긴다.  억울하면 돈벌어라!  그러나 그들이 돈을 벌면 도대체 얼마나 벌겠는가?  도둑질을 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그 돈으로 실컷 재미를 보아봤자 얼마나 재미를 볼 것이며, 행복해 봤자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들이 늙도록 번번이 징역을 살면서 실컷 도둑질을 해봐야 그까짓 나의 부모님이 오늘날까지 이 못난 인간에게 쏟아 부으셨던 돈만큼이나 하겠는가!

그들은 세상이 그들에게 쥐어주는 가장 열악한 가치관을 가지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골라 아이를 낳고 키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키우는 아이는 그들이 아무리 애쓰고 사랑하며 키운다 해도 결국은 <재생산>된 그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다시 세상이 그들을 위해 부지런히 만들어주는 온갖 어리석은 쓰레기들을 도맡아 먹어 삼킬 것이다. 돈 있고 교양있는 부모의 자식이 다시 돈 있고 교양있는 부모로 <재생산>되어 소위 고급문화를 차지하듯이......

눈치밥 먹고 뒷골목 누비며 주먹 휘두르고 속이고 도둑질하면서 살아온 그들 가운데 마음씨 착하고 소박한 사람이 결코 적지 않음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역시 참으로 어쩔 수 없이 비뚤어지고 뒤틀리고 배열해진 인간들도 역시 적지 않았고 나는 가끔 감방안에서  살벌하게 그들과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밤이 되어 서로 살을 맞대고 부비며 드러눕는 비좁은 감방에서, 혹은 잠을 자는 척하고, 혹은 나란히 누워 맞장구라도 쳐주면서 무한한 연민을 느끼며 그들의 신세타령을 들었다.  한 사람의 인간을 연민하고 사랑하려거든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촌구석에서 살기가 싫어서......"  "아버지가 <노가다>노릇 했었어....."  "내 엄마가 계모인데 말이야......"  "내가 어려서 동두천에서 자랐거든....."  나는 그럴 때 가금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낮에 그들과 싸운 것을 후회했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촌구석과 서울>이 없어져야 하고, <노가다>가 없어져야 하고, <창녀>가 없어져야 하고, <계모>가 없어져야 하고, <동두천>이 기어이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끝내는 나와 너희들 사이에 가로놓인 이 완강한 <울타리>는 없어져야 한다!

내가 83년 「진술서」중 <인간에 대한 사랑> 부분에서 개진했던 논리는 바로 이와 같은 의미였다.  그 <울타리> 덕분에 교양있고 아름다운 아내와 고급 문화를 차지하고 사회적 존경을 받고 사는 당신들이, 그리고 그 <울타리>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지키는 일을 하는 당신들이 나에 대한 <보안감호처분 무효확인소송>을 온갖 열변과 강변과 묵살을 구사하며 번번이 기각시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결수가 된 후 만기까지의 나의 감옥 생활은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압력, 폭력, 고문에 대해 나의 양심, 나의 존엄을 지키는 일을 그 내용으로 한다.  필사적으로 폭력에 항거하는 인간에게는 자신의 사상을 차분히 재검토해 볼 정신적 여유가 없는 법이다.  1973년에 좌익수 전향전담 <교화사> 대폭 증원과 더불어 전국 교도소에서 비전향 좌익 사상범들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국가정책>(당시 광주교도소 교무과장의 말)으로서 조직적으로 행해지는 압력. 폭력. 고문이었다.  말단정보기관원이 하루 아침에 <교화사>로 버젓이 둔갑하고, 정보기관에서 배우고 익혔던 온갖 못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좌익사상범 <정리. 사업에 빛나는 업적을 쌓는 한편, 대낮부터 술로 발그레해진 얼굴로 잡범들에게 대량의 담배를 갖다 주고 대신 그 잡범들로부터 용돈을 뜯어 냈다.

나는 이런 <교화사>들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이 인간들이 폭력적으로 탄압하려는 내 사상의 정당성을 의심해 볼 수가 없었다.  사상을 선도하기 위하여 왜 온갖 형태의 폭력이 필요하며 왜 고문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신들이 당신들 사상의 진리에 자신을 못갖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그리고 다른 좌익사상범들이 겪어야 했던 갖은 고난, 전향을 거부하는 자식으로 인해 나의 돌아가신 모친이 받으신 모든 서러움, 그리고 9년간의 죄 없는 감금--이런 모든 것들이 이제 나의 사상전향을 어려운 것으로 만드는 결코 무시못할 요인이 되고 있다.  사상전향은 때로는 <사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사상>의 문제이기를 떠나, 단순히 한 사람의 인간이 폭력 앞에서 폭력에 대하여 무릎을 끓어야 하느냐 꿇지 말아야 하느냐라는 훤씬 더 절박한 문제일수도 있는 것이다.

당신들과 같은 무사상자들, 아니면 적어도 자기의 양심으로 인하여 박해받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내 앞에서 경솔한 사상전향 운운을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광주교도소 시절 나는 처음으로 성서를 통독해본 일이 있었다.  공관복음서를 읽으며 뭔가 마음에 와 부딪히는 것이 있었는데 그 당시는 그것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보안감호소에 온 후로 나는 다시 공관복음서를 정독했다.  아니 공관복음서를 (차라리) 사색했다.  그 후로 결코 경직된 도그마에 매몰될 수 없는 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에게 기독교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해 왔다.  기독교는 이 한 사람의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나는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의 견지에서 나의 소망의 실험을 위하여 마르크스주의가 기여하는 바가 결코 미미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이 어려서 감옥에 갖힌 몸이 된 나는 마르크스 학설을 깊이 연구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내가 아는 한 지식과 사회의 진보와 더불어 늘 현실로부터 생명을 길어 올리면서 자기를 넘어서 발전하는 개방적 체계이며, 인간을 고정적 도그마로써 결박하는 사상은 아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 정신과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골격에 원칙적으로 공감을 느끼고 있으며, 따라서 나는 내가 가장 넓은 의미의 마르크스주의 흐름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의식치 않을 수가 없다.

우선 나는 나의 삶의 솔직한 실감으로써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인간에 대한 사랑>의 실천적 견지에서 볼 때 사람이 이웃과 더불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닐지 모르나) 최소한 필요조건으로써의 <객관적(제도적)조직>의 성립을 소망하기 때문에 유물론의 입장에 서지 않을 수가 없다.

다음으로 나는, 물질, 사회, 인간, 인간의 사상은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경험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그리고 그 변화가 보다 나의 단계로의 발전적 변화라는 점을 우리 시대의 모든 불행한 사람들의 심정과 함께 간절히 희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천적 경험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실천에 의해서 검증되지 않는 그 어떠한 이론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고 믿는 까닭에 변증법적 인식논리에 호감을 느낀다.

이런 전제에 설 때 역사란 당연히 보다 나은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며, 그 발전의 원동력은 (몇몇 영웅, 위인들의 의지나 위업에 있다기 보다) 궁극적으로는 수많은 민중들의 보다 나은 삶에의 소박한 소망과 노력의 축적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민중의 이와 같은 소망과 노력이란 바로 생활물자의 생산을 위하여 인간들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고 서로 관계를 맺는가라는 문제가 역사를, 역사의 발전을, 역사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그리고 그 인간들이 이루는 사회의 성격을 가장 근본적 차원에서 이해하기 위한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간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지만 자기가 만든 그 역사로부터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아 역사에 의하여 만들어져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은 옳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보다 착한 존재로 서서히 진화해 갈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수단을 소수 자본가가 소유함으로써 그것을 매개로 ('인간'이 아닌 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노동자의 '상품'인 노동력 일부를 착취(이것이 바로 이윤)하는 부도덕성을 그 본질로서 지니고 있다.  이윤극대화가 언제나 자본의 목적이기 때문에 계급간의 항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제도적 결점에서 탈각, 사람과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루고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려는 사상은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 (종교적. 도덕적. 공상적. 무정부주의적.....)에 공통되나, 나는 헌실사회의 구조와 메카니즘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튼튼히 입각하면서 나의 도덕적 소망, <인간에 대한 사랑>의 소망인 사회주의로의 길을 모색하고 싶다.

이상과 같은 나의 생각은 내가 스스로를 넓은 의미의 마르크스주의 한 사람이라고 의식하는 근거가 된다.

앞서 나는 기독교에 대한 나의 관심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였다.  나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이미 83년에 쓴 「진술서」시점에서 상당히 뚜렷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정리되어 있지도 않으며 또 이내 엷어지고 사라질지도 모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그런 문서에서 표명할 수 없었고, 표명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지금까지의 4년 동안, 나는 기독교에 대하여 적지 않은 사색을 쌓아왔고 기독교는 이제 나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그 어떤 활력을 부어넣고, 또 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부단히 순화해주는 하나의 요소가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하나 한 사람의 마르크스주의자와 기독교와의 관계는 좀처럼 정립되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채 여전히 답답한 상태로 남아있다.  자유주의계통 신학(나아가서 해방신학 계통) 저작의 열독이 거의 금지되고 있으며 (안병무 박사 저작들도 재소자 열독 금지 도서로 분류, 지정되고 있다), 네오마르크시즘 관계 저작들도 모두 금지되어 있는 이 조건에서, 그리고 나의 생각 또는 느낌을 실천이나 토론으로써 검증해 보지도 못하는 이 조건에서 거의 독자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사색은 언제나 얼마 못가서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며,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 확신이 서지 않는 것 투성이임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내가 한 사람의 '인간'임을 주장하는 「나의 주장」에서 나의 수 년래의 적지 않은 관심사요 사상적 고뇌의 흔적인 기독교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이 문서는 「나의 주장」의 구실을 옳게 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고 모른 것, 모호한 것 투성이인 것을 당신들에게 진술한다는 일에 나는 심한 곤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고뇌했던 편린의 흔적만을 비침으로써 내가 '인간'임을 당신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인간해방에 대한 막강한 기여를 나는 의심하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감을 간직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켜왔다. 그것은 내가 청년이라는 범주에서 점점 벗어나기 시작하는 무렵부터 다음과 같은 정신적 변화를 겪어온 과정과 병행되었다.  즉,

① 세상이나 인간이란 내가 젊어서 믿었던 것처럼 간단명료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 역사발전에 기여하는 경로란 결코 단선적일 수 없다는 느낌이 점점 절실해졌다.    
② (부분적으로는 공관복음서의 정독과정에서) 심화된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에게 이웃과 더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의 성취에 노력함과 동시에, 그 성취가 참된 것이 되려면 그것이 이르는 일상에서의 구체적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이 <축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점점  많이 하게 되었다.

③ 인간 실존의 깊이를 실감, 재인식하게 되었다.

④ 나 개인의 완강한 인간적 한계의 벽을 실감하였다.  즉 고난 앞에서의 고질적인 유약함을, 그리고 그 어떤 확고한 처점 없이 자신을 부단히 상대화시켜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그러기에는 나의 의지라는 것이 그 얼마나 박약한가를 통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신적 변화가 그때까지의 나의 신념체계를 상대로 해서 일으키는 치열한 갈등과 팽팽한 긴장이란 실로 고뇌에 찬 회의의 무시무시한 소용돌이, 바로 그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르게 되는 부도덕에 대하여 큰 슬픔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의 이 짐승적 목숨을 지탱하면서 인간해방의 이상을 위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때로, 때때로 저지르지 않을 수 없는 부도덕들에 대하여 깊은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가?  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구체적 인간에 대한 구체적 사랑을 굳게 딛고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높은 도덕성을 인간에게 요구하는 사회주의적 인간관계를 자신의 부도덕에 대한 깊은 슬픔. 두려움을 느낄 수 없는 인간들은 어떻게 감당해 나가는 것일까?  인간의 심성에 깊이 박힌 부도덕(내지 악)이 객관적 조건의 변혁으로써 <자동적으로>사라져 가는 것일까?  인간 실존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일까?

마르크스주의는 개인윤리의 문제를 유구한 역사과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실천을 통한 세계의 변화와 더불어 서서히 해결되어갈 것을 기대하는 것 같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가 개인윤리의 문제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지적은 적당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적어도 마르크스주의는 그 체계 속에 이와 같은 개인윤리의 영역에서의 인간의 주체적 노력을 고무하는 강력한 배치와 메카니즘(예를 들어 '신에 의한 인간의 자기 상대화'와 같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역사이론, 사회이론으로서의 남성적 기질을 연 마르크스주의 인간해방사상을 감당하고 마음이 편하기에는 나는 이렇듯 너무도 <지적 소인(知的小人)>이다.

인간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차원의 기도(企圖) 및 노력은 인간 해방을 위하여 절대 필요하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인간의 문제>의 해결일까?  궁극적인 인간해방일까?

인간 삶의 궁극적 희망이 현실적 차원의 노력의 성공여부에 달려있는 것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인간이 현실적 차원의 기도에만 사로잡히고 역사적, 사회적, 혹은 정치적 상황 속에 매몰된다면 나는 그 인간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정치를 넘어선 거점을 딛고 정치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혁명적 사회이론을 궁극적 인간해방의 교리로서 인정할 때 그 이론은 결국에 가서 스스로를 절대화시켜 인간 위에 군림할지도 모른다.....

나의 생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현실적 차원의 기도에만 사로잡혀 있다고 단정, 비난하는 것은 옮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의 인간해방론은 마르크스주의를 규정하는 정신과 물질의 변증법적 논리의 당연한 귀결로서 물질적 차원의 해방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는 분명 인간으로 하여금 주어진 것을 넘어, 미래를 향해 자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초월성>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가 위의 나의 회의에 충분한 답을 주고 있는 것인지를 나는  잘 알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주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약속은 분명히 인간 해방의 커다란 과제를 짊어지고 고난을 이겨나가야 할 사람에게 거의 신앙에 가까운 막강한 지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나에게는 어디까지나 과학이었고, 그것은 온갖 엄청난 과제의 무게에 허덕이는 이 못난 인간에게 강력하고 직접적이고, 인간 해방을 위한 고난에 찬 투쟁 속에서 나는  확고히 지탱해 줄 절대적인 지주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만 같다.

이와 같은 회의와 고뇌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나의 관심은 깊어갔다.

모든 사상은 사회운동화되는 과정에서 대중에 의해 어느 정도가지는 통속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는 흔히 소박한 유물론적 기질을 가진 신봉자에 의하여 늘 통속적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  때로는 그들은 현실의 정치상황에 매몰되어 버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의 아름다운 이상을 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아의 인격변화 없이 생활조건의 참된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유물론적 환상>에 빠지곤 한다.  그것은 나에게는 몹시 안타깝고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유물론적 환상>은 생활조건의 변화 없이 인격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관념론적 환상>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관념론적 환상>은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인간의 실천에 대한 <닻>이 되어 지배의 이데올로기로 통합되고 반동적 역할을 수행하기가 십상이나, <유물론적 환상>에는 인간해방의 객관적 조건을 성립시키기 위한 추진력, 행동력이 있다.  나는 <유물론적 환상>을 몹시 안타깝게, 슬프게 생각했지만 어차피 이것도 저것도 환상이라면 <유물론적 환상>을 옹호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편종교>의 <관념론적 환상>, 즉 역사 내에서의 구원, 평화와 정의에의 관심, 예언자적 정열 등을 외면하고 허위의식으로 조작된 위로로 일관되는 그 흔해빠진 <아편종교>의 개인윤리로부터는 배우고 싶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슬픔이 단순히 우리 개개인이 높은 개인윤리, 높은 도덕성을 성취하지 못하는 슬픔이 아니라, 인간해방의 이상을 위하여 역사의 현장에서 눈에 핏발을 세우고 피투성이가 되어 굶주리며 업신여김을 받으며 싸워야 할 사람들이 자신을 상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나 도덕성을, 그리고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사람을 소홀히 하게 되는 데 대한 슬픔이요 두려움이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나는 가슴에 가득한 슬픔을 안으며 <유물론적 환상>과 함께 전진했다.

그러다가 나는 공관복음서의 예수를 만나게 된다.  공관복음서를 정독하는 과정에서 나는, 현실의 기독교를 통하여 나의 내부에 <관념론적 환상>의 원흉으로서 형성되어 있었던 예수상이 그 얼마나 그릇된 선입관이었는가를 마치 벼락 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판에 박은 듯한 기독교 교리가 가르치는 바와는 달리 철저히 약자, 피압박자, 더러운 자, 무지한 자......에 대한 사랑(흔히 목사들이 설교하듯, 예수의 사랑은 눌린 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향한 사랑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거짓인가는 선입관없이 공관복음서를 읽어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다)에서 출발하고, 그들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하고, 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적나라한 해방자의 모습을, 자유롭고 인간을 억압하는 기존의 모든 것에 래디컬(radical)하게 도전하고 사랑과 정의의 왕국의 도래를 꿈꾸다가 처형당한 감동적인 <종말론적 실존>을 보았다.  거기에는 <관념론적 환상>도 <유물론적 환상>도 없었다.

나는 그 무럽 한 때를, 밥을 먹으면서도 변소에서 용변을 보면서도 (나의 삶의 경험의 맥락에서) 예수를 사색하고 예수에게 가슴이 저려오는 듯한 공감을 느끼며 예수와 더불어 나날을 보냈다.  예전에 목사들로부터, 혹은 종교 책자에서 듣고 보았던 예수의 말씀들, 행동들이 모두가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띠고, 정열을 띠고 정신없이 나의 가슴에 와 박혔다. 엉뚱하게도 공관복음서, 특히 마르코에 의한 복음(마가복음)에 대한 서준식류 주석(commentary)을 써보고 싶은 충동을 번번이 느끼기까지 했다.

아아, 내가 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찢긴 신의 독생자로서 해방자 예수를 신앙할 수 있으면!  그리하여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확신케 해주고 우리에게 해방을 약속해 줄 신의 독생자의 바로 그 십자가를 나도 짊어지고 그의 길을, 그의 삶을 넘치는 기쁨으로 따라갈 수 있으면!

나는 신학을 무시하고 신학이 없는 곳에서 살아있는 예수를 만났다.  내가 예수의 감동을 이야기할 때, 기독교인들은 점잖게 웃으며 나에게 기독교 교리의 ABC를 가르쳐주려 했고, 마르크스주의는 이마에 염려의 빛을 띠며 나에게 유물론 철학의 ABC를 가르쳐주려 했다......,

공관복음서의 예수와의 만남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의 대사건으로서 남을 것이다.  이 만남이 나의 젊은 시절에 이루어졌더라면 나는 신을 믿게 되었을 것 같다.  나는 예수의 이야기를 정독하면서 나의 기질속에 원래 예수에 대한 동경과 경도가 잠재해 있었음을 실감치 않을 수가 없었다.  예수를 정오(正誤)하고 사색하면서 나는 내가 학생시절에, 혹은 이 악독한 감옥속에서 만났던 억눌리고, 빼앗기고, 매맞고, 결박당하고, 업신여김을 받고, 불안에 떨던 그 수많은 얼굴들을, 창녀의, 거지의, 신문팔이, 껌팔이의, 식모의 <도둑놈>들의 얼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해방자 예수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처음으로 나의 조국땅을 밟았을 때의 시절에 내가 보았던 기독교는 후일에 내가 공관복음서 속에서 만난 이 예수의 기독교는 아니었다.  교회는 흡사 뜨뜻미지근한 중산계층 자식들의 사교장이 아니었는가?  미국교단의 재력을 등에 업고 미국화되는 교세 확장에만 혈안이 되지 않았는가?  역사 속의 구원을 부인하고 평화와 정의를 외면하고 예언자적 정열에 눈을 찌푸리지 않았는가?  거리에, 골목에 넘치던 그 많은 약자, 억눌린 자, 버림받은 자들의 행방을 위하여 분투하기를 두려워하고, 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그 비참을 견디어내는 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라는 따위의 거짓을 가르친 아편종교이지 않았는가?  교만만을 죄라고 가르치고,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기를 주저하는 죄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지 않았는가?  <예수믿고 천국가자!>식의 종교였지 않은가?  나는 그런 기독교의 신, 인간을 죽음으로 속박하는 그런 신을 저주하면서 나의 유물론, 무신론 철학을 나의 인간해방의 길잡이로써 소중히 간직했고 이 철학과 더불어 이렇게 나이를 먹어 버렸다.  오랫동안 나를 살찌워준 이 철학을 이제와서 내가 어떻게 내팽개치고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앞에서 내가 겪은 정신적 변화와 그에 따른 실로 고뇌에 찬 회의에 대하여 언급했었다.  나는 그런 정신적 변화와 회의 속에서 공관 복음서의 예수를, 그리고 해방과 부활의 신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하나의 있을 수 있는 결단을 앞에 놓고 방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의 존재를 내가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참으로 참으로 고독한 방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유물론 철학과 더불어 살아왔다. <유신론적 변증법적 유물론>의 유무의 검토는 나에게 너무도 벅찬 과제였다.  나는 나의 이 철학의 정당성을 끝까지 의심해 낼 수가 없었고, 나의 실천적 요청을 위하여 의심할 수 없는 철학을 방척(放擲)하고 신의 존재를 믿고 외총(畏寵)의 초월성에 나를 내어 맡길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나에게 그것은 어쩌면 자기기만처럼 느껴왔던 것이다.  더불어 상의할 사람도 없고 필요한 참고서적도 열람이 허락되지 않는 고립상태에서의 방황.  

그러나 언제까지나 방황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통스럽고 고독한 너무 오랜 방황은 한 사람의 인간을 폐인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 범죄적인 사회안전법에는 굴복할 수가 없는 노릇이 아니가?  나는 결국은 한 사람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나의 이 난마와도 같은 회의를 극복해 나가야 할 것 같고, 한 사람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기독교로부터 배우고 또 기독교에 대하여 기여를 해야 하는 것이리라.  내가 <인간에 대한 사랑>을 튼튼히 딛고 살아갈진대, 그리고 나의 마르크스주의가 경직된 도그마일 수 없는 늘 개방되어 있는 체계일진대, 나는 이 일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이리하여 고뇌에 찬 방황의 계절 뒤에 남은 것은 내가 기독교인들을, 그들의 믿음을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자의 한 사람이고 싶다는 소망,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할 오늘 날에 내가 양자를 잇는 가교의 지극히 작은 한 토막이 되어 엎드릴 수 있으면 하는 소망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와의 관계에 관한 나의 사색의 편린들을 여기에 내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문서의 목적은 나의 사상을 제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주장을 함에 있으므로 나는 대단히 시시한 인간이다.  두뇌도 좋지 못하다. 이런 내가 광범위한 독서 제한으로써 사상형성의 자유를 무자비하게 침해받고 있는 조건에서 그나마 지어낸 이른바 사색이란 것이,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관계라는 과제의 엄청남에 비하여 그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시시한 장난이겠는가?
분명한 사실, 마르크스주의가 됐든 기독교가 됐든 당신들은 나를 달가와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를 믿어도 신을 믿어도 당신들은 나를 감금해 둘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당신들의 비위를 긁어대기 때문,
자, 이제 <인간> 서준식의 이야기는 끝났다. 거듭 말하거니와 당신들은 나의 사상을 심판할 권한을 가지지 않는다.  법률가가 사람의 내심을 심판한다는 것은 비유컨대 푸주한(정육점 주인-편집자 주)이 소, 돼지 잡던 칼을 가지고 사람의 몸을 수술하려고 드는 것과 같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위험하기가 짝이 없는 노릇이라 하겠다.  나는 푸주한더러 내 몸을 수술해 달라고 이 「나의 주장」을 쓴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런 일이 불가능함을 주장하기 위하여 썼다.  즉 사상을 이유로 한 사람의 인간을 무한정 한 평짜리 감방에 감금해 둘 권리가 있는지의 여부를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라고 나는 이 「나의 주장」을 쓴 것이다.

그러나 나의 사상을 심판한다고 당신들에게 불평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당신들에 대한 <과찬의 말씀>일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할 사상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한 지식이나 지성도 그리고 인간과 민족에 대한 사랑의 정열도 지니고 있지 않은 무사상자(無思想者)이기가 십상일 당신들은 결국은 나의 사상을 참되게 이해할 수 없는 고로 언제나 <전향>여부에만 의존하고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푸주한에게는 인체에 관한 과학적 지식도 인술 휴머니즘도 필요없을 것이다.  푸주한은 <전향거부>의 낙인이 찍힌 것은 무엇이든 때려잡기만 하면 된다.  실로 좌익 사상범들에게 내심을 고백케 하는 이런 전향제도가 없으면 사회안전법은 하루도 지탱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사회안전법의 결정적 존립 조건인 이 사상전향제도가 사상범을 때려잡는 데 편리한 줄만 알았지, 이런 제도가 어떤 법적 근거를 가지고 행하여지고 있는지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한심한 <법률가>인 당신들은 이에 관한 나의 물음에 애써 못들은 채 번번이 묵살해 왔다.  당신들은 보나마나 또 묵살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다시 같은 물음으로 되풀이해야겠다.  당신들은 대답을 해야 한다.
  
물음
우리 헌법 제 18조는 양심의 자유권을 규정하고 있는 바, <.....침묵의 자유는 직접적으로 양심을 표명하도록 강제하는 것 뿐 아니라, 충성선서나 십자가 밟기 등과 같은 외부적 행위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내면의 양심을 추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김철수, <신판 헌법학개론>373쪽) 것이라면,
① 교도소에서 요식(문서서식-편집자 주)을 마련해 놓고 국가보안법 사범을 비롯한 좌익수들에게 사상전향 여부의 의지를 표명케 하고 있는 것은 위헌이 아니가?
② 헌법 제 35조 2항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법률로써 제한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바, 법률에도 전혀 근거없는 위 행위는 위헌이 아닌가?
③ 법적 근거도 없고 위헌인 그와 같은 사상전향 여부 의사표명을 근거로 하여 <전향거부>를 보안처분 결정을 위한 가장 중요한<사실상 유일한>자료로 삼을 뿐 아니라, 보안처분 결정 통지서 문면에 이유로써 버젓이 <전향거부>를 들고 있는 사회안전법 및 그에 의거한 행정처분은 위헌이 아니가?

전향 요구는 인간의 가장 깊은 성역에 대한 국가 권력의 폭력적 침입이며, 극에 달한 정치적 폭력의 한 표현이다.  전향이란, 만주사변을 거쳐 가속적으로 군국주의화의 길을 치닫던 일본제국주의가 (우리의 독립운동도 포함하는) 반체체 사상에 대한 탄압을 히스텔릭하게 격화시켜 가던 과정에서 점점 형성되고, 1933년 <사법당국통첩>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확립된 왜놈의 참으로 왜놈다운 발명품이요 왜놈이 만들어 낸 조어다.  일제의 압제하에서 일상의 인권 침해에 잘 길들여진 우리 동포들은 일제의 폭력에서 해방된 후에도 이 광적인 사상탄압 수단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왔고, 당신들은 그와 같은 제도는 물론, 왜놈이 만들어 낸 그 <전향>이라는 조어가지도 그대로 이어받아 이것을 애지중지 떠받들고 있다.

동시에 당신들이 <실로 국가적 필요>라고 주장하는 이 사회안전법이, 일제가 망하기 직전인 그 똥 오줌 못 가리게 극단적이었던 최후의 발악의 시기에 그들이 독창적으로 발명해 낸 <사상범 예방 구금령>의 내용을 <사법처분이었던 것을 행정처분으로 더욱 악랄하게 변형시킨 것 외는> 놀랄 정도로 그대로 이어받아 놓은 것임을 생각할 때, 나는 조선놈들은 창조적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는 왜놈들의 빈정거림을 반박할 말을 잃는다. 당신들에게도 묻고 싶다. 인간의 내심을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로 고백케 하고 그 고백에 따라서 죽을 때까지라도 무한정 철창 속에 감금시켜 놓겠다는 나라가 제국주의 일본과 우리 대한민국 외에 어디 있는가를.  일제 시대에는 또한 사상범 예방 구금소가 지금 대한민국의 보안감호소가 위치하는 바로 이 청주시에 있었다고 하니......못된 아비로부터 못된 버르장머리 고스란히 물려받은 못된 자식처럼 당신들은 어쩌면 그다지도 일본제국주의를 똑 닮았는가?

사회 안전법에 의하면 보안처분에 세 가지 종류가 있는바,
① 보안관찰어분--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이 있다고 의심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
② 거주제한처분--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
③ 보안감호처분--죄를 다시 범할 현저한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분은 헛된 말장난에 불과하다. 당신들은 실지에 있어서 (개개의 구체적인 대상자, 가령 이 서준식의 처분을 결정함에 있어서)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고 의심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지, 재범의 위험성이 있는지, 아니면 재범의 현저한 위험성이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겠단 말인가?  이 지구상에서 이런 따위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진우가 지은 「사회안전법 강해」의 설명에 의하면 이것은 "결정권자의 건전한 양식에 따라 구별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사회안전법의 세 가지 처분 요건이 완전히 주관적인 데다가 지극히 애매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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