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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와 나뭇꾼> 놀이

네 살이 되니, 여자/남자를 알기 시작했다.

"엄마는 여자야, 남자야?" "나는?"이란 원초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편리하게 대답만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근본 원리를 설명해주는 것이 교육이란 걸 일찌기 깨달았던 나는 엄마는 여자, 아빠는 남자, 규민이도 여자,라고 대답을 해주었다가 이 답을 찾아가는 근본원리는 무엇일까, 잠깐 생각했다. 여자는 치마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도, 남자는 서서 쉬를 하는 사람이란 것도, 순간 머리 속에 떠오른 모든 것들은 다 사회 습관일 뿐, '근본원리'는 아닌 것 같았다. 남자도 치마를 입을 수 있고, 남자도 앉아서 쉬를 할 수도 있지. 그래서 나름대로 근본원리라고 생각하는 사실만 전달하기로 했다.

"잠지가 있는 사람은 여자고, 고추가 있는 사람은 남자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몇 해전 한겨레 만화 비빔툰에서 보았던 장면이 불현듯 스쳤다.

비빔툰의 꼬마, 정다운이 역시 남자와 여자를 알아가는 무렵, 할아버지 할머니와 저녁식사 도중, 할아버지 고추 운운하는 짱구짓을 해서 엄마얼굴이 벌개졌다는 내용.

엇, 나도 실수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잠지/고추 나누기 질문이 시작되었다.

 

"엄마, 별똥별(규민이 선생님)도 잠지있지이~?"(이미 여자라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묻는 확인질문)

짱구같은 짓도 역시 벌어졌다.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저녁상에서 "할머니도 잠지있지이~? 할아버지는 고추있지이~?" 막상 일이 벌어지고 나니, 그게 그렇게 낯뜨거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게 뭐 그리 이상한 질문이겠는가, 싶었다. 

 

여자와 남자를 알기 시작하더니, 진도가 빠르다.

 

우리집에 규민이와 같은 반 친구 둘이 놀러왔었다.

가영이는 여자아이, 태우는 남자아이.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고, 친구들과의 벅적한 시간의 여운이 남은 규민, 엄마에게 <선녀와 나뭇꾼> 연극을 제의했다.

엄마는 나뭇꾼역 -그런데 엄마가 이 역을 맡는 게 아니라, 태우가 이 역을 맡는거란다. 그러니까 엄마는 태우로서 나뭇꾼이 되는 것이다.

규민은 선녀역 - 규민이도 규민이가 아니라 가영이가 되어 선녀 역을 맡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태우와 가영이가 되어 <선녀와 나뭇꾼>연극을 하는 것이다.

 

태우는 산 꼭대기에 올라, 연못에서 목욕하는 선녀 옷을 하나 몰래 훔친다. 그랬는데, 선녀 가영은 애기 둘을 안고 하늘로 올라가버린다. 태우 나뭇꾼은 다시 산에 올라 하늘에서 내려온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선녀와 아이들을 만난다. (이 장면이 클라이막스) 그러나 나뭇꾼의 엄마를 만나러 땅으로 내려왔다가 엄마가 주는 호박죽이 너무 뜨거워 하늘을 나는 말이 먼저 날아가버려 영영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울다 죽는다.

 

규민은, 태우와 가영이가 상봉하는 클라이막스에서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자기도 모르게 입이 스윽 열리다 탄성을 지를 듯 크게 벌어지고 급기야 흥분으로 꺄악 외친다. 이 장면을 위해 연극을 몇번이나 반복한다. 반복할 수록 클라이막스 부분 할당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점점 연출자(규민)의 의도가 짙어진다.

 

연출자의 의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처음에 태우와 가영은 여보~라고 외치며 그저 손을 맞잡고 벙벙 뛰었다. 

다음엔 벙벙 뛰는 것을 줄이고 껴안는 시간을 늘였다.

그 다음엔 나는 앉고 규민은 서서 껴안았다(규민과 나의 키차이를 생각해보면, 서서 껴안는 것과 앉아서 껴안는 것의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 내가 앉으면 눈높이가 같아진다).

그 다음엔 앉아서 껴안고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기서 웃지 말라고 규민이가 지시.

그 다음엔 앉아서 껴안고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뽀뽀한다. 내가 볼에 뽀뽀하려고 했더니 고개를 설레설레하고는 입술을 살짝 내민다. 역시 웃으면 안됨.

그 다음엔 앉아서 껴안고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술로 뽀뽀하는데 뽀뽀의 시간이 무척 길어졌다.

이것은 그러니까, 태우와 가영의 키스씬이었다. 영화에서의 키스씬 저리가라 할만한.

 

나는 규민이가 언제 이런 키스씬을 보았길래 이런 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걸까, 놀랐다.

테레비에서 슬쩍 보았겠지. 아, 미키비디오에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가 키스하는 장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슬쩍 본 키스씬을 이렇게 연출할 정도이니 규민의 잠재된 성애욕구를 감히 짐작할 수 있겠는가. 하긴 잘 생각해보면 나도 여섯살 무렵 즈음 성애의 호기심이 스멀대었던 것 같다. 기억할 수 있는 나이가 여섯살 정도라서 그렇지, 그 이전부터 였을 것이다.

새삼 성욕의 이 막강한 에너지에 전율을 느낀다.

성애의 신을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

이 날의 연극은 물론 즐거웠지만, 다시 한 번, 규민에게 '시간낭비하지 않는 성욕 혹은 성생활' 강의를 어떡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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