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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슬립의 대세 속에서 읽은 '화성의 타임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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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K. 딕 걸작선 1. 화성의 타임슬립(Martian Time-Slip), 1965.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 2011.
 
필립 K. 딕의 소시민적 주인공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갈등은 거의 언제나 현실 인식과 직결된 개인 정체성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런 불확실성은 플롯을 통해 해소되기보다는 현실 자체의 다중화를 유발하고, 나아가서는 현실 붕괴로까지 이어진다. 딕이 전세계적으로 공감을 얻는 이유는 그가 부조리한 미래 사회를 정확하게 ‘예언’해서가 아니라 편집증과 분열증으로 상징되는 20세기 과학문명사회 특유의 ‘일그러짐’을 SF 작가의 입장에서 성실하게 직시했기 때문이다. 그런 성실함의 끝자락에서 제시되는 것은 예정조화적인 카타르시스와는 거리가 먼 모호하고 불만족스러운 철학적 비전[啓示]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설 중에서)
 
전반적인 줄거리를 해설에서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1994년, 물 부족에 허덕이는 화성 식민지에서는 인구 증가와 환경오염이 극에 달한 지구를 떠난 이민자들이 관할 당국인 UN으로부터 최소량의 물을 배급받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던 과거의 아픈 경험을 잊기 위해 화성의 한 거류지에서 수리공으로 근무하는 잭 볼렌은 우연한 기회에 화성의 수자원노동조합장인 어느 코트와 만나 그의 피고용인이 되고, 권력자인 어니의 생활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편, UN이 화성의 아무 쓸모도 없는 황야를 구입해서 거대한 복합 거주지를 세울 작정이라는 경천동지할 사실을 알게 된 어니는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자폐아 만프레드 슈타이너의 특수한 예지능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일상성으로부터 차단당한 채 생지옥과도 같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던 만프레드는 어니의 예상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
 
내용을 요약하자면, UN의 화성개발계획으로 인해 화성에서의 자신의 기득권을 상실할 처지에 놓인 권력자 어니가 인구 6명당 1명이 걸릴 정도로 만연하는 분열증에 걸린 잭 볼렌과 자폐아 만프레드 슈타이너의 예지능력을 이용해서 부동산 투기를 하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게 되고, 잭 볼렌은 집으로 돌아간다는 얘기.
 
해설에서도 정체성, 다중 현실, 시뮬라크라, 약물에 의한 의식의 변용, 융 심리학, 불안감, 편집증, 음모론, 거대 기업, 전체주의 등이 딕의 작품세계를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라고 하는데, 『화성의 타임슬립』에서도 어김없이 이러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화성이고, 시대적 배경은 1964년이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바로 지금 서울의 변두리 얘기를 옮겨놓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부동산 투기는 전형적인 사례이고... 게다가 등장인물들 중에서 제대로 된 사람이 거의 없다. 다들 어느 한 구석은 문제를 가지고 산다. 어쩌면 이게 현대인의 일반적인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편집증과 분열증으로 상징되는 20세기 과학문명사회 특유의 ‘일그러짐’”을 잘 묘사했다는 해설의 표현에 동의가 된다.
 
소설에는 화성인이 나오지만, 상투적인 SF에서처럼 특별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고, 어느 지역의 토착 원주민 정도라고 해야 하나. 그 정도의 의미만 부여된다. 그래서 약간은 아쉬웠다는...
 
요즘 부쩍 타임슬립(time-slip)이라는 단어를 자주 보게 된다. 예전엔 그냥 시간여행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타임슬립이라는 용어가 이를 대체한 듯하다. 드라마는 타임슬립의 전성시대다. SBS <옥탑방 왕세자>에 이어 tvN에서는 <인현왕후의 남자>가 방영되고, MBC에서는 일본만화를 리메이크한 <닥터진>이 방영되면서 타임슬립은 드라마 제목에까지 등장했다. 괜시리 SF에 가깝다는 생각에 이러한 드라마에 더 관심이 간다.
 
해설은 『화성의 타임슬립』이 딕 중기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가받는다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다. 이런 피곤한 현실을 SF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나는 게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냥 딕의 걸작선 하나를 읽었다는 정도?
항상 그렇듯이 인상적인 내용 발췌.

 
슈타이너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것도 깊은 곳까지. 강렬하고, 예리한 느낌. 직감이라고 불리는 것. 직접 얼굴을 맞댔을 때조차도 한두 마디 이상 얘기를 나눈 적이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망자의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든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며, 생에 맞먹는 외포를 불러일으키는 대격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죽음은 생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힘들다. (111쪽)
 
잭 자신은 티칭머신에 대해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다. 예의 ‘공립학교’의 이념 자체가 그의 기질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학교’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가르치는 장소가 아니라, 아이들을 일정한 틀, 그것도 지독하게 제한적인 틀에 넣어 새로 찍어내는 곳이다. 따라서 ‘학교’는 아이들이 이어받은 문화에 대한 연결고리였고, 그들을 상대로 문화 전체를 조금씩 잘라 파는 도구에 불과했다. 아이들을 문화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도 당연히 정당화되었다. 문화의 계승이야말로 ‘학교’의 지상과제였다. 엉뚱한 방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개인의 성향은 가치 없이 교정된다.
이것은 ‘학교’라고 불리는 복합정신과 아이들 개개인의 정신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이 투쟁에서 중요한 패를 모두 쥐고 있는 것은 물론 전자다.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동은 자폐증 진단을 받는다. 바꿔 말해서, 그 아동의 객관적 현실감각에 우선하는 주관적 인자에 순응하도록 다시금 유도받는다는 뜻이다. (118쪽)
 
자폐증이란 수많은 성인들을 엄습하는 정신분열증의 유아적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정신분열증은 늦든 빠르든 거의 모든 가정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 질병이며, 자폐증 환자란 요컨대 사회가 심어놓은 동인(動因)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분열증 환자들이 적응을 포기했거나 처음부터 아예 받아들이지 못한 현실이란 대인관계로 이루어진 현실이며, 특정 가치를 내포한 특정 문화 속에서 그들이 직접 살아가며 경험하게 되는 현실을 의미한다.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퇴학시키는 ‘학교’의 처사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학교’가 가르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고, 돈 버는 방법도 아니고, 먹고 사는 데 유용한 기술도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을 배운다. 자신을 에워싼 문화의 일부는 그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지킬 가치가 있다고 교육받는 것이다. 그 결과 어린아이의 가치관은 실존하는 인간의 행위와 구체적으로 결부된다. 어린아이는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이 이어받은 전통의 일부가 된다. 살아가면서 그런 전통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살찌우기까지 한다는 뜻이다.
결국 진정한 자폐증이란 공공의 노력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가치관을 전달받고 보존하는 주체임을 외면하고, 마치 혼자 힘으로 모든 가치를 창조한 것처럼 행동할 경우 나타나는 존재의 한 양식인 것이다. 그러나 잭 볼렌은 타칭머신만을 가치 판단의 유일한 권위로 간주하는 ‘학교’의 시스템을 끝끝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회의 가치관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학교’는 그런 가치들을 안정시키고, 고착시키고, 방부 처리하려는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20-21쪽)
→ 이상의 글들은 잭 볼렌이 생각하는, 학교의 기능과 자폐증에 대한 정의이다. 하지만 딕은 책의 시선을 통해서 체제 유지에 기능하는 학교를 고발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자 환각이―정말로 환각이었다면 말이지만―출현했다. 인사부장이 다른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는 죽어 있었다.
피부를 통해 골격이 보였다. 뼈들은 가느다란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내장은 인공 신장이나 심장, 폐 따위로 대체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강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서로 연계해서 매끄럽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진짜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사내의 목소리는 테이프에 녹음된 소리였고, 앰프와 스피커 시스템을 통해서 들려왔다.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이 사내가 실제로 존재하고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상태는 이미 끝났고, 아무도 모르는 새에 다른 것으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교체작업은 한 장기(臟器)씩 차례로 조금씩 진행되었다. 오로지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잭을 속이기 위해서 말이다. (129-30쪽)
 
잭이 말했다. “실제적이어야 해. 모든 것은 언젠가는 닳기 마련이지. 영원한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변화야말로 유일하게 일정불변한 거야. 안 그래, ‘상냥한 아저씨’?” (140쪽)
→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티칭머신 중에 ‘상냥한 아저씨’가 있는데, 난 처음에 이를 ‘상냥한 아가씨’로 보았다. 이것도 강박이라면 강박이다.
 
가족의 방문이 난감한 것은 바로 이럴 때다. 모르는 것이 없는데다가 현명한 어른이라는 옛 역할을 다시 한 번 수행하고 싶다는 유혹에 결코 저항하지 못한다. 레오에게 잭은 아내와 자식이 있는 어른이 아니라 그저 아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03쪽)
 
흐음,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군. 잭은 생각했다. 소년은 앞으로 이곳에 존재할 건물들을 그리고 있었다. 현재 그들의 눈에 비치는 풍경이 아니라 미래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 소년이 묘사한 것은 단지 건물만이 아니었다. 지금 소년이 그리고 있는 조합 주택의 거대한 아파트 건물들은 그들이 바라보는 동안에도 점점 불길한 느낌을 더해가고 있었다. … 낡은 건물들. 오래되어서 다 무너져가는 느낌이다. … 황폐하고 절망적인 풍경이었다. 생기와 활력이 결여된, 시간을 초월한 둔중함의 표상과도 같은 광경.
그렇다. 쇠락해가는 슬럼의 정경이다. 세워진 지 몇 년, 아니 몇십 년이 지난. 이미 전성기를 지나 황혼의 노년기로 들어섰고, 조락과 체념의 길을 밟기 시작한 건물들. 만프레드는 방금 자신이 그린, 거대한 아가리를 닮은 균열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비쉬.” (231-32쪽)
 
도린의 말. “만프레드는 단지 미래를 예지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들어.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제어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나 할까. 여러 가능성 중에서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는 재능이 있는 것 같아. 만프레드에게는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고, 현실이니까. 마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 아이의 현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만프레드의 현실이 우리를 침식하고, 우리의 인식을 대체해버리는 거야. 그 결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익숙해진 사건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 내가 이런 느낌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워. 미래에 관해 이런 느낌을 가져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 (261쪽)
 
완전히 미친 이 소년에게 내가 한 걸음씩 착실하게 다가간다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정신병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그것은 외부 세계의 사물을 지각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특히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세계로부터 완전히 격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뒤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몰려왔다가 후퇴하는 자기 속으로의 소름끼치는 몰입이다. 내부에 기인한 변화는 오로지 내부 세계에만 영향을 끼칠 뿐이다. 세계는 안과 밖으로 분열되고, 쌍방이 서로를 지각하는 일은 결코 없다. 양쪽 모두 계속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들의 길이 교차하는 일은 없다.
그것은 시간의 정지를 의미한다. 경험의, 새로운 것의 종말이다. 일단 정신병에 걸린 인간에게는 더 이상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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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1 23:56 2012/05/31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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