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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영연구소의 변영주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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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주 감독의 이 인터뷰, 곱씹어 들을 게 많다. 트위터와 페북에서 많은 지인들이 링크를 하거나 언급을 해서 왜 이러나 했는데, 그럴만 했다. 아래에는 쓸만한 것을 발췌한 것인데, 전문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 어쩌면 글로 한 인터뷰라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가 영화로 말하는 것이나, 집회나 행사에서 사회를 볼 때를 감안하면 인터뷰한 내용이 실제와 그리 다르지 않다 - 변영주 감독 정말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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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과 통화하던 그날, "이런, 젠장 할…" (프레시안,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2012-10-01 오전 10:54:38)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화차> 변영주 감독 "꼰대들과 싸우는 것이 임무"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것은 나에게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런 역사적 사실들이 아니라, 오십 년 동안 세상 사람들 앞에 자기를 철저하게 숨겼던 사람들이 갑자기 세상에 커밍아웃을 했을 때 이후에 할머니들의 삶이 과연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사건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보게 되는 관점을 거기서 배운 것 같다. 어떤 일이 터지면 어떤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안에 누가 있는지, 그 사람은 누구인지에 훨씬 더 궁금해지게 되었다.
 
듣는 것이 나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고, 결국 나로부터 그 대답을 들으려고 애써보는 일이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쌍한 할머니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과 맞서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용감해져야 하는 거지'라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언제나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정치적인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코미디영화를 만들더라도 새누리당 지지자와 진보신당 지지자의 영화는 다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정치적인 성향이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와 캐릭터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이 되는지, 하고 싶은 것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인 것이다.
 
생산을 한다는 것은 우아를 떨며 살롱 같은 곳에서 깊은 시름에 잠겨 있다가 어느 순간 시상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이고, 어떻게 살기로 결심했고, 그 세상을 향해 이렇게 전진할 거야'라고 결심하며 사는 어느 순간, 내 시선에 의해서 잡힌 어떤 세상이 영화가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삶이 불안정한 것이 무섭거나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해야만 하는 일을 선택한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 부모님을 부양하기 위해 직장을 선택하고 돈을 버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사람과 삶의 안정성이 같으면 정말 거지같은 나라 아닌가? 나는 내가 삶의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걸 하고 있다면 삶이 조금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현실적 상황이 자기연민의 도구가 되면 망한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생활이 안정적인 것은 우리 세대들도 못해본 일이고 전 세계도 못하는 일이다.
 
영화를 안 만든다고 내가 죽지는 않는다. 나는 영화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 나는 영화보다 내가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들고 싶다고 느껴지는 그 영화를 만들면서 그것을 관객들이 사랑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포기해야 할까?'라는 생각도 안 한다. 내가 만약 어느 날 영화감독을 더 이상 못하게 되면 불행해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다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거다. 내가 만약 꿈꾸는 어떤 삶이 있고 내가 세상을 손을 잡고 걸어가려는 어떤 길이 있다면 책 대여점을 하면서 꼬맹이들한테 "야 판타지 재밌는데, 이 책 죽여~"라며 책을 권하는 걸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NL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에 내가 NL이 될 수 없었던 유일한 이유는 처음 보는 사람과 친숙하게 지내야 하는 일종의 집단주의적 공동체 놀이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념과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다.
 
<화차>를 막 찍기 시작했는데 '희망버스'가 시작되었다. 이 녀석은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전화해서 오라고 하지, 나는 촬영을 해야 하지,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다. 촬영 현장에서 감독은 굉장히 쾌적한 숙소에 독방까지 주는데 침대에서 못 자겠는 거다. 사람들은 끌려간다고 그러지 김진숙 씨는 크레인 위에서 저러고 있지. 심지어는 침대에서 누워서 잔다는 것이 토가 나올 정도여서 맨날 바닥에서 잤다.
 
진보신당은 계속 작고 후지더라도 이 사회에 의미 있는 발언들을 계속하면서 존재하면 안 되나? 우리가 집권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 않나. 진보신당이 집권하면 난 이민 갈 거다. 무서워서 어떻게 사나. 그런 수권능력이 없는 애들이 주도권을 잡으면…. 진보신당을 여전히 지지한다는 것은 이 당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지지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그 당의 기동성에 대한 지지일 것이고 그 당의 과감함에 대한 지지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책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정말 X같다고 생각한다. 지들이 애들을 저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고서 심지어 처방전이라고 써서 그것을 돈을 받아먹나? 내용과 상관없이 애들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무가지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걸 팔아먹나? 아픈 애들이라며? 아니면 보건소 가격으로 해 주던가.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그 친구들이 함정에 빠졌을 때 충분히 그 함정을 즐기고 다시 나올 수 있도록 위에서 손을 내밀고 사다리를 내려주는 일이지, "거기 함정이다"라고 하거나 "야, 그건 빠진 것도 아니야. 내가 옛날에 빠졌던 것은 더 깊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압박은 견디라고 있는 것이고 스트레스는 받으라고 있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려면 열심히 덕을 쌓아서 다음 생애에 친환경 농장에서 병아리나 소나 돼지로 태어나서 안전하게 스트레스 하나도 안 받고 무항생제로 살다가 맛있는 음식이 되면 된다.
 
<밀애>나 <발레교습소>를 생각해보면 매번 중간에 멈췄던 것이 흥행에 실패했던 것 같다. 바꿔 말하면 <화차>가 그나마 좀 잘된 것은 내가 상업적인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멈춰 서지 않고 끝까지 가 보고 싶은 방향을 향해 걸어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고흐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대한 벽을 허무는 일'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벽을 한꺼번에 뽀개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끌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긁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자유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디테일하게 행동하는 거다. 꿈이라는 말보다 욕망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데, 누구에게나 욕망이 있다. 근원에 있는 욕망을 알아내려고 할 때 내 머릿속에 누군가가 그건 아니지, 그건 잘못된 거지라고 해서 제어하지 않는 것이 자유인 것 같다. 가장 더러운 상상에서부터 가장 고귀한 상상까지 마음껏 할 수 있고 그것을 아주 디테일하게 행동하면서 내 삶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은 이렇게 할 거고, 이건 이렇게 할 거야. 그게 싫다면 당당하게 나한테 아니라고 얘기해. 뒤에서 뒤통수치지 말고"까지를 토해내는 게 자유인 것 같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너와 내가 어디가 비슷한 것인가'이다. '너와 내가 어디가 다른가'가 아니라 '너와 내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를 찾는 것이 더 먼저라는 것이다. 그래야 '너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그것이 연동되어져서 나의 문제도 조금씩 나아지게 되는 것을 찾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손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다들 자기가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서워서 그러는 거다. 스스로 무리 안에 있으면서 그 무리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으니까 자기는 독특하다고 하는 거다. 핵심은 승리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 주는 거지, 애들을 가짜로 독특하다고 인정해 주는 게 아니다.
 
후배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을 하든 지지해 주고 안전망을 마련해주고 손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구경하고 있거나 '너희들을 구원해주겠다'거나 '너희들,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치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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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1 23:08 2012/10/01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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