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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가 투명해진’ 선거, 좌파의 책임은?/한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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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적인 조직화로 민주노동당에 20만 표 이상을 끌어주던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가 상실된 상황에서 김소연, 김순자 두 후보가 사회당도 넘기 힘들었던 ‘5만 표의 벽’을 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그렇기에 설령 문재인 후보가 낙선한다 해도 그 책임을 ‘좌파 후보’들에게 묻기는 어려울 거라는 것이다." 서글픈 현실.
 
암튼 한윤형의 글에 공감하는 바가 많다. 그래서 발췌하여 옮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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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가 투명해진’ 선거, 좌파의 책임은? (미디어스, 한윤형 기자, 2012.12.10  17:30:27)
정치적 전망 제시 없으면 ‘네거티브’ 못 벗어나
 
민주당 정권이 이 이상의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비상한 준비와 엄청난 결단이 필요하단 사실은 지속적으로 지적해야 한다. 최저임금 문제, 비정규직/파견노동자 문제, 지나치게 많은 영세자영업자 문제, 대중소기업 일자리의 질의 현격한 차이를 조정하는 문제 등을 개혁정권이 해결하려면 경제 기득권 세력과 강단 있게 싸울 수 있는 투지와 굉장히 섬세한 정책 디자인 및 협상능력이 동시에 요구된다. 이 영역에서 민주당 정권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가 미지수란 지적은 합당하다.
 
비판의 논리를 “노동자에겐 차이가 없다”고 가져간다면, 명백하게 차이를 느낄 수 있는 특정 산업 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닌 사람으로 배제하는 논리가 된다. 진보담론은 노동자란 말이 공장노동자를 넘어 더 폭넓은 영역에서 사용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특정한 유형의 노동자를 보편으로 삼는 이러한 말버릇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노동운동이 무력화된 이유가 민주노총 등의 조직이 특정한 계층 안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러한 실패의 원인을 무분별하게 답습해서야 답이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담론지형의 변화를 보면 ‘노동의 정치’의 측면에서도 문재인 후보가 박근혜 후보와 전혀 차이를 보여주지 못할 거라는 예측은 가능하긴 해도 단정적이진 않다. 참여정부가 우경화를 주도했다면, 지금의 민주당은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의 세계경제위기 국면에서 많이 좌클릭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친노의 귀환이므로 무조건 비정규직에게 가혹할 거라고 말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가 집권하면 박정희 정권 때의 정책(?)을 추진할 거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개연성밖에 없다.  
 
선거는 정치적 욕망을 표출하고 수렴하는 장이면서 여러 종류의 전략이 교차하는 장이기도 하다. 이 경우 좌파후보가 ‘노동의 문제’의 중요성에 공감하는 유권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대안은 일종의 ‘장기투자’다. 당장 당선되어서 뭔가를 혁신적으로 바꿀 수 없는 건 문재인이 아니라 김소연과 김순자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성을 지적하는 민주당 지지자 앞에서 좌파들은 “당장 우리가 집권하는 건 당신들 말대로 가능성이 없지 않느냐.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이들이 모이고 의석이 생기고 정당이 확장되고 유력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서는 그 과정 속에서 문제가 더 근본적인 심급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단기간에 결과가 나지만 당신이 원하는 것을 보장받을 수 없는 임시방편이다. 눈 질끈 감고 이쪽을 수십 년 밀어주면 당신 살아있는 동안엔 결과가 나온다”라는 식으로 말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의 ‘노동자 후보’들이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적어도 선거라는 공간에 개입했을 때는, ‘노동자’들에 대해 ‘계급투표’라는 주체화를 주문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정치세력을 주도하는 ‘주체’들 역시 연속성 있는 활동을 전개할 거라는 신뢰를 줘야 표를 요구할 염치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의 좌파세력은, 아쉽게도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시민으로부터 받은 지지를 다음 활동과 조직 재생산과 선거 준비의 자양반으로 삼을 수 있는 정치세력을 누구와 어떻게 만들겠다는 계획이 제출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뚜렷하지 않은 현재의 상황에서, 누군가가 김소연이나 김순자를 지지한다는 것의 의미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한 시민의 이념적 정체성이나 세계인식을 다잡는 역할로 국한되게 된다. 물론 두 후보가 이런 역할만을 한다 해서 폄하할 필요는 없지만,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선 그보다 더 폭넓게 ‘장기투자’를 하는 핵심지지층들과 ‘전략적 투표’를 하는 층을 포섭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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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1 09:39 2012/12/1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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