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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좌파, 토니 벤을 추모하며 (서영표,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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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표 교수가 토니 벤의 삶을 잘 정리하였다. 물론 토니 벤을 추모하면서 그가 얘기하고 싶었던 바도 있다. 자신이 서영표 교수가 얘기하는 '좌파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러한 평가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어쩌면 이제는 토니 벤을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홉스봄, 홀, 그리고 벤이 떠나감은 이미 오래전에 막을 내린 한 세대의 종식을 완결짓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를 변혁하려고 했던 운동의 하나의 순환은 지적으로는 이미 끝났지만 생물학적으로도 종식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의 순환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지만 한국의 진보운동을 돌아보면 암담하다. 스스로 토니 벤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몇몇 좌파 정치인들이 결국에는 토니 블레어를 베끼려 한 것에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토니 벤이 되고 싶었지만, 그리고 토니 벤을 이상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의 실천은 블레어 추종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블레어가 가진 권력을 가질 수 없었다.
 
결국은 토니 벤이 했던 좌파적 비판의 목소리도 낼 수 없게 되었고 블레어처럼 권력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블레어처럼 행동하면서 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희망은 없다. 실천 속에서 우리 시대 토니 벤이 출현해야 하고, 우리 시대 스튜어트 홀이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벤과 홀은 거대한 대중운동의 출현 속에서만 가능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나저나 나에게 토니 벤은 무엇이었나? 켄 리빙스턴과 함께 그들의 당내 투쟁이 승리하지 못했던 걸 안타까워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한국의 상황은 또 다르기에... 한국에서의 벤은 어떻게 출현할 수 있을까? 거대한 대중운동의 출현과 동시에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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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heguardian.com/politics/2014/mar/14/tony-benn-obituary
Tony Benn obituary
Veteran leftwing Labour politician who went from being 'the most dangerous man in Britain' to a national radical treasure
Brian Brivati, The Guardian, Friday 14 March 2014 07.32 G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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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edian.org/archive/68147
영원한 좌파, 토니 벤을 추모하며 (레디앙, 서영표 제주대 교수 / 2014년 3월 18일, 9:51 AM)
[기고] 그들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그들을 기다리며
벤은 이 단기 20세기의 후반기 영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신좌파운동의 한 가운데 서 있었던 사람이다. 벤은 제국주의의 잔재, 급격한 경제적 쇠퇴와 좌파와 우파의 격렬한 투쟁, 1979년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정부 등장 이후 추진된 신자유주의적 드라이브에 의한 전후 역사적 타협의 붕괴와 사회적 혼란으로 점철된 시대를 일관된 정치적 좌파로 견뎌낸 사람이었다.
그는 유력한 자유당 정치인(나중에는 노동당)의 아들로 태어나 순탄하게 정치적 경력을 시작했지만 서서히 좌경화되었다. 자신의 정치적 경험 속에서 비민주적인 엘리트 정치와 자본의 힘을 보게 된 것이다. 그의 동시대 좌파들이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통해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면, 그래서 매우 경직된 이론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면, 그는 실천을 통해 좌파가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일관된 좌파이면서도 경직되지 않을 수 있었다.
우파는 벤을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았고 완고한 동유럽식 사회주의 신봉자로 낙인찍었지만 벤과 리빙스턴이 공유하고 있었던 사회주의는 교과서에 있는 ‘완결된 형식을 갖춘 사회주의’가 아니라 계속 살아 움직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물로서의 정치’를 현실적응의 구실로 삼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벤은 결코 현실에 대한 유연한 대응을 이유로 사회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말하면서 1973년에 제시된 사회주의 공약을 배신했던 윌슨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미 공식화된 마르크스주의를 잣대로 현실을 재단하려 했던 완고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역사 속에서 현실을 견뎌냈고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사회주의운동의 동력을 찾으려 했던 윌리엄스처럼 벤은 전사회적인 우경화와 지적 상대주의에 경도된 좌파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 여기’의 정치적 현안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벤은 20살에 조종사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 전쟁에서 그는 형 마이클을 잃는다. 그 후 1950년 브리스톨에서 최연소 의원으로 선출되어 하원에 진출한다. 이 시절 벤의 정치적 입장은 노동당 내 중도 또는 연성좌파(soft left)였다. 
당시 노동당 내 좌파는 나이 베반(Aneurin Bevan)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베반은 광부출신으로 노동당의 대표적 정치인이 되었으며 1945년 구성된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lee)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에서 보건부 장관이 된다. 그때 그가 정치생명을 걸고 도입한 것이 전국의료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였다. 그래서 그 시절 좌파는 베반주의자(Bevanite)로 불린다. 베반주의는 노동당 내 강성좌파를 형성하면서도 법의 테두리를 지키려는 헌정주의에 충실했다. 그리고 1960년대 좌파 정치의 부흥을 불러오는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위로부터의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좌파였지만 벤이 평생 견지했던 ‘민주적’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젊은 벤은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된다. 1960년 2차 대전 중에 남작의 작위를 받았던 아버지가 사망함으로써 귀족의 작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법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그의 투쟁은 1963년 제정된 작위를 포기할 수 있도록 허용한 법안을 통해 성공한다. 벤은 최초로 작위를 버린 귀족이 된 것이다. 이러한 벤의 선택은 아직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급진적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있었던 젊은 정치인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벤의 정치적 전성기는 70-80년대였다. 베반주의를 잇는 벤주의(Bennism)가 노동당의 좌파블록을 의미하게 되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벤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대변자였고 노동당을 의원단을 중심으로 하는 당권파들이 아닌 당원의 의사에 따라 이끌자는 당 민주화 운동의 최선두에 있었다. 노동자운동을 넘어선 다양한 신사회운동의 힘을 정치의 토대로 생각했던 신좌파이기도 했다. 그리고 비민주적이고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공동시장 정책이었던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960년대 말에 시작되어 1970년대 초 절정에 이른 현장 노동자들의 좌경화와 지역의 사회운동으로부터 새로운 동력을 얻은 노동당 지구당의 좌경화는 벤에게 기회를 가져다준다. 1970년 노동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아간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의 보수당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드라이브는 노동자들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 좌초했고 이 과정은 노동당을 더욱 왼쪽으로 밀고 간다.
비록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과반을 넘긴 노동당은 1974년 윌슨의 두 번째 정부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때 제시된 노동당 강령(1973년의 The Labour Programme)은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었고 이것을 내각에서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벤이었다.
벤은 이 내각에서 산업부 장관이 된다. 이 시절 벤은 경제위기 속에 도산하는 기업을 노동자가 인수하여 노동자통제 기업으로 전환하는데 관심을 갖는다. 벤은 동시에 유럽공동체 참여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반대 캠페인을 전개한다. 국민투표의 결과는 공동체에 남는 것이었고 이 결과는 벤에게 정치적 타격을 준다.
1976년 통화위기가 IMF에게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것으로 귀결되면서 벤은 더 이상 내각에 머물 수 없었다. 이시기 벤이 당내에서 공론화시키려 했던 것이 ‘대안적 경제 전략’이었다. 벤은 당원들로부터 지지를 얻었지만 의원단과 당지도부와는 등을 돌리게 된다.
정치적 이력에서 중대한 계기는 1981년에 찾아온다. 노동당이 분열의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다른 말로 하면 당 내 좌파의 도전이 거셀 때마다 당 지도부는 중도 좌파(soft left)로부터 당 대표를 선택함으로써 좌파의 도전을 무마시켰다. 윌슨이 그러한 경우였고, 당이 가장 큰 혼란에 빠져 있던 1980년에 당수가 되었던 마이클 풋(Michael Foot)도 그런 선택이었다. 풋은 반전운동으로 잘 알려진 좌파였다. 역사 속에서 반복되었던 수둔은 강경좌파와 중도좌파가 분리됨으로써 좌파블록의 힘이 약화되고 당지도부는 자신들의 우경적 노선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풋이 당수가 된 후 부당수 선거가 이어졌다. 풋과 당 지도부는 우파였던 데니스 힐리(Denis Healey)를 부대표로 낙점한다. 풋은 당의 통합을 위해 힐리를 지지하라고 벤에게 종용한다. 하지만 벤은 거부한다. 힐리와 벤의 대결은 0.4%라는 근소한 차이로 힐의 승리로 끝났다.
연성좌파(트리뷴 그룹)의 지지를 기대했던 벤에게 돌아온 것은 그들의 조직적인 보이콧이었였다. 벤의 부당수 도전 좌절은 우파의 대대적인 좌파에 대한 마녀사냥과 민주주의의 후퇴로 귀결된다. 형식적으로는 노조의 블록투표를 약화시키고 당원 1인 1표라는 민주주의의 외양을 띠었지만 그동안 노동당을 움직였던 조직화된 좌익분파들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키고 당대표 주변으로 권력을 집중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당의 현대화(modernisation)전략이었다. 노동조합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지구당을 근거로 한 활동가들을 무력화시키며, 전국 집행위원회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것이 그 골자였다. 원내 노동당, 특히 당수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구조로 변화를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전개되었다. 당내 좌파의 대표였던 토니 벤은 정치적 힘을 상실했고 트로츠키주의자 의원 4명은 출당되었다. 이제 분란은 사라졌다. 하지만 당 내의 민주주의와 활기는 사라졌다.
그리고 1994년 당수가 된 토니 블레어는 당 강령 4조를 폐지해 버렸다. 그것은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공공소유(common ownership)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현대화 전략의 정점이 바로 신노동당(New Labour) 노선이었다. 벤은 이 과정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었지만 반향은 크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노동당 신좌파의 저항이 신사회운동과 결합하여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전개된 짧은 부흥기가 있었다. 하지만 ‘철의 여인’ 대처는 이 도전마저도 광역시의회 폐지라는 강수로 돌파한다. 그리고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 정부는 대처주의의 품안으로 투항한다.
벤은 2001년 은퇴한다. 그는 50년 동안 노동당 의원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중 반은 노동당 내 좌파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 경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3년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반전운동이 출현하고 벤은 그 선두에 선다. 그는 ‘전쟁을 멈춰라 연맹’(Stop the War Coalition)의 의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며 반전과 평화운동에 헌신한다. 하지만 짐작컨대 생의 마지막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처의 시장-자유주의를 사람들의 일상과 의식 속으로 밀어 넣어 뿌리 내리게 한 것은 노동당이었다. 다시 마르크스를 꺼내어 그의 주장을 곱씹었던 홉스봄에게 이러한 현실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좌파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대처주의의 힘을 통찰했던 홀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리고 벤은?
벤은 아버지의 귀족 작위를 거부하기 위해 법적 투쟁을 벌였고, 왕정폐지론자였으며 내각에 참여하고서도 끝까지 좌파의 정치적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노동당 좌파 정치인이었다. 
그를 싫어했던 보수주의자들과 그들의 입이었던 타블로이드신문에게는 정신 나간 좌파(looney left)였지만 2007년 BBC의 여론 조사에서 그의 정치적 적수였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를 제치고 영국(United Kingdom)의 ‘정치적 영웅’(political hero)에서 1위를 차지한 유명인사였다.
어쩌면 홉스봄, 홀, 그리고 벤이 떠나감은 이미 오래전에 막을 내린 한 세대의 종식을 완결짓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를 변혁하려고 했던 운동의 하나의 순환은 지적으로는 이미 끝났지만 생물학적으로도 종식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순환은 또 다른 시작을 내포한다. 홉스봄과 홀, 그리고 벤이 동시대 신좌파와 신사회운동과 공감했던 탈자본주의적 정치의 새로운 전망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주체로 또 다른 순환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의 순환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지만 한국의 진보운동을 돌아보면 암담하다. 스스로 토니 벤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몇몇 좌파 정치인들이 결국에는 토니 블레어를 베끼려 한 것에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토니 벤이 되고 싶었지만, 그리고 토니 벤을 이상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의 실천은 블레어 추종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블레어가 가진 권력을 가질 수 없었다.
결국은 토니 벤이 했던 좌파적 비판의 목소리도 낼 수 없게 되었고 블레어처럼 권력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블레어처럼 행동하면서 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희망은 없다. 실천 속에서 우리 시대 토니 벤이 출현해야 하고, 우리 시대 스튜어트 홀이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벤과 홀은 거대한 대중운동의 출현 속에서만 가능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스타 정치인과 이론가는 밑으로부터의 거대한 운동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럴 때에만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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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9 00:17 2014/03/19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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