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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로 교사의 위상까지 송두리째 흔들린다 (권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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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에 실린 권재원 샘의 글, 읽어볼 만하다. 그리고 생각할 꺼리를 준다. 아래는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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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5588.html
세월호 참사로 교사의 위상까지 송두리째 흔들린다 (사람매거진 나·들, 권재원 서울 풍성중학교 교사, 2014-05-03 16:22)
[사람매거진 나·들] “이제 우리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불신 가득 사회서 ‘자력구제’ 가르치자?
사회를 믿지 말라 가르치는 대신…
가르침이 거짓이 되지 않도록 해야

 
세월호 참사는 교사가 대변할 공적 가치와 규범을 침몰시켰다. 이제 ‘교사가 참사를 만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순직을 각오할 것인가?’ 수준을 넘어 ‘공인된 절차와 전문가의 지시를 따르라고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각자 스스로 판단해 살길을 찾으라고 가르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세월호에서 순직한 교사들이 “해난 사고 발생시 질서를 지키고 선장과 선원의 지시를 따른다”는 합의된 규범을 충실하게 이행한 결과 학생과 함께 모두 목숨을 잃었고, 오히려 규범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도덕을 무시하고 약삭빠르게 자기 이익을 챙기라는 주장을 비난한다. 그런데 세월호에서는 도덕적으로 행동한 교사들은 죽었고, 반대로 행동한 선원들은 살았다. 교사들이 대변해야 할 도덕이 침몰한 것이다.
 
‘선장과 선원을 의심하고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아라’라고 가르쳐야 옳았을까? 위기 상황에서 공인된 전문가나 권위 있는 자리에 있는 책임자의 지시를 따르지 말고 각자 상황을 판단해 ‘자력구제’하라고 가르쳐야 옳았을까?
 
세월호의 교사나 학생들 역시 우리 사회가 아무리 엉망이 되었을지라도 마지막 보루인 구조 시스템만큼은 믿고 있었을 것이다. 기울어진 세월호에서 질서정연하게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한 학생들은 일부 진보 지식인들의 비판처럼 복종과 순응을 학습한 순둥이라서 수동적으로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질서가 무너지고 저마다 살자고 나서면 공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적어도 우리나라의 구조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믿으며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이 생각 자체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심지어 세월호 참사 이후 강화된 야외 체험활동 안전교육 지침에도 여전히 “해난 사고가 발생하면 선원의 지시를 따른다”라고 돼 있다.
 
아무리 훌륭한 나라라도 부도덕한 개인은 있다. 그런 사람이 없더라도 가지가지 우연들이 겹쳐 대형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두려움 없이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까닭은 그런 사태를 예방하는 시스템과 사태가 발생했을 때 구조하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아무리 끔찍한 재난이 발생해도 우리를 보호하고 구하는 사회체계와 권위자가 있다는 믿음 덕분에 우리는 어떤 재난이 일어나더라도 멘붕에 빠지지 않는다. 육상 참사에서는 119 구조대가, 해상 참사에서는 해경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실제 직업신뢰도 조사에서 늘 1위를 달리는 직업은 구조대다. ‘오렌지색’은 사회에 대한 신뢰의 마지막 보루다.
 
세월호 참사는 오렌지색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신뢰체계를 무너뜨렸다. 선사와 선원들의 부도덕한 행태는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이를 감시하고 바로잡아야 할 사회체계는 하나도 작동하지 않았다. 선박 구조 변경의 인허가, 선박의 운항 허가, 선박의 항적 감시, 해난 사고 발생시 신고 접수와 처리, 구조, 상황 집계, 그리고 보도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멀쩡하게 돌아간 게 없다. 청와대는 ‘전원 구출’이라는 보도가 나왔을 때는 “청와대가 진두지휘했다”라고 하더니, 대참변으로 귀결되자 “청와대가 재난의 컨트롤타워는 아니다”라며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누군가는 “사회를 믿지 말고 스스로의 판단을 믿으라”고 가르치라고 한다. 학생들이 어른과 사회의 권위를 의심하기로 마음먹으면 자유로운 영혼과 비판적 정신의 소유자로 자랄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은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유대감을 느끼지 못할 경우 불안·우울 등의 상태에 빠지기 쉽다. ‘어른들을 믿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이들을 해방시키는 게 아니라 절망시키는 행위다.
 
교사가 누리는 높은 신뢰는 교사 개인의 인품 덕분이 아니다. 아무나 교사가 되는 게 아니라 국가가 선발하고 인증한 사람이 교사가 된다는 믿음의 공유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사회 시스템 전체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 교사가 여전히 사회를 믿고 어른을 믿고 공인된 권위자를 따르라고 가르친다면 이는 거짓을 가르치는 것이다. 실제로 1970∼80년대의 많은 교사들이 거짓을 가르치도록 강요받는 걸 고통스러워해 해직을 불사하며 싸웠다. 그렇다고 사회, 어른, 공인된 권위자를 믿지 말라고 한다면 이는 교사에 대한 신뢰의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결과가 되어 ‘그렇게 말하는 당신 말은 어떻게 믿느냐?’는 반문에 직면하게 된다.
 
다행히도 이 난처한 상황을 벗어날 길이 있다. 그것은 어른 중에서 ‘믿을 만한 어른’, 사회 시스템 중 ‘믿을 만한 시스템’, 공인된 권위자 중 ‘믿을 만한 권위자’를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말로 이뤄지는 가르침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사회에서 믿을 만한 대상을 가려내는 경험과 훈련을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이게 바로 비판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교육이다. 비판적 사고 능력은 어른과 사회를 믿지 않고 비판하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어른과 사회 시스템을 가려내는 데 필요한 능력이다.
 
비판 교육은 사회와 어른에게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믿을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사회는 비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학생들은 우리 사회와 권위, 어른들 전체를 의문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판 교육이 아니라 반사회 교육, 반교육적 선동이 잘 먹히며 이는 역사적으로 파시즘으로 가는 전주곡과도 같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 세상이 무조건 침몰 위험에 처한 배는 아니며, 또 설사 그런 위험에 처하더라도 그런 배를 방치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님을 입증시켜야 한다. 교사가 사회를 비판하고 바로잡는 능동적 시민으로서 본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교사는 다음의 두 과제를 이행해야 한다. 첫째, 학생들이 스스로 믿을 만한 어른, 시스템, 권위를 가려내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 이 경험에는 교사 자신에 대한 비판도 포함돼야 한다. 둘째, 교사 자신이 학생들이 살아갈 사회를 믿을 만하게 개선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믿을 만한 어른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
 
다시 ‘참사를 만나면 교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원래의 물음으로 돌아가보자. 놀랍게도 그 대답은 여전히 ‘선장과 선원들, 그리고 구조대의 지시에 따라 질서 있게 탈출하게 지도하라’다. 그리고 더 나아가 ‘위기 상황에서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권위자나 전문가의 지시를 따르라’고 가르쳐야 한다. 어떤 해난 참사에서도 선장과 선원의 지시를 따르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또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경험 많은 전문가의 지시를 따르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교사에게는 이제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책무가 추가됐다. 가르침을 바꿀 수 없다면, 그 가르침이 거짓이 되지 않도록 현실을 바로잡는 것까지가 교사의 책무가 되었다. 과거에는 교육 내용이 ‘세상이 이러이러하다’라는 서술이었다면, 세월호 참사 이후의 교육 내용은 ‘세상을 이러이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비판이 되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탈출하기 가장 좋은 선실에 있다가 굳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가장 위험한 사지로 뛰어들었던 단원고등학교의 동료들처럼 지금 살아 있는 교사들도 침몰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호에서 가장 위험한 사지에 뛰어들어야 한다. 더구나 이 배에는 구명정도 없고, 구조대도 없고, 선장과 선원들의 자질도 의심스럽다. 이 배의 승객들이 가장 든든하게 믿고 있던 오렌지색에 대한 믿음도 무너졌다. 이제 남은 길은 어떻게든 배를 고치고, 선장과 선원들을 다그쳐서 배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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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7 15:45 2014/05/0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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