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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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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석. 2008. 『대한민국 원주민』. 서울: 창비.
 
“내 누이들의 이야기를 하면 도시에서 자란 그 또래의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어째서. 농활도 가고 노동현장에 투신할 만큼 그러한 이웃들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졌던 세대들이 어째서 내 누이들을 신기해하는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그들이 본 것은 농민이고 노동자일 뿐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 누이들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의 외로움이고, 모든 ‘원주민’들의 외로움일 것이다. 그들이 제 이야기 하나 제대로 내놓지 못한 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없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도시에서 태어나 유치원이나 피아노학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엄마와 함께 가봤거나 생일파티란 걸 해본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 분노, 경멸, 조소 등이 한데 뭉쳐진 자그마한 덩어리가 있다.
부모님이 종종 결혼을 재촉하는 요즘 이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쩌면 존재하게 될 지도 모를 내 자식을 상상하게 된다.
상상하다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오,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 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최규석은 77년생이다. 이제 30대 초반인 그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삶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꼭 나의 형이나 누나뻘 되는 이들의 이야기 같았다.
 
최규석의 분류대로라면 나는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약간은 생경함이 있었다. 이것은 내 출생지의 문제도 있고,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유치원에 다닌 적도 없고, 무슨 주산, 피아노, 태권도 학원에 다닌 적도 없으며, 티브이가 어렸을 적의 내 일상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해할 구석도 없지 않다.
 
어머니가 이 책을 보신다면 그깟 만화책을 돈 주고 샀느냐라고 뭐라 하실 것 같다. 내 어머니는 최규석의 어머니처럼 너무 알뜰하시기 때문이다. ‘엄마의 경제’에 보면 미더덕을 2천원어치 받아다 2만원에 팔고 나서 “똑 도둑질한 거맨치로 가심이 벌렁벌렁”해하는 어머니 얘기가 나온다. 그 어머니를 닮아서 자신도 협상을 잘 못한다는 말과 함께... 내 어머니도 그러하신데, 협상을 잘 못하는 것도 그래서일까. 그래도 고지식한 내가 별로다.
 
책을 보면서 어머니의 삶이 겹쳐서 보였다. 그래서 한편으로 낄낄대기도 하면서도 괜시리 울컥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버스가 거부한, 나뭇짐이 있는 자신을 태워준 트럭 운전사가 고마워서 몇 번을 기도하는 어머니.
뭔가 극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도통 시시한 것들뿐인 엄마와의 인터뷰.
50년을 하루도 빼지 않고 아파서 죽을 것 같으면 기어서라도 아침밥을 지었던 어머니의 삶.
보리가마니가 있어서 배는 안곪겠다 싶어서 좋다는 것으로 정리되는 시집살이.
촌놈인 것이 죄라서 도시 사람에게 아무 말 못하는 어머니.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점심으로 나온 우동을 아들에게 주고 국물이라도 좀 남기겠지 했지만, 국물까지 싹 비운 그리 쿨하지 않은 아들에게 아무 말 않는 어머니.
 
아마 우리네 어머니도 비슷할 듯하다.
 
자신의 삶을 그림으로 남길 수 있는 최규석이 부럽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내 삶을 정리한 적이 있었던가. 어머니와의 대화도 많이 부족했던 것 같은데... 물론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동생에게 물어보면 과거사를 어느 정도 복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림에 담긴 소소한 코멘트 중에 심금을 울리는 글귀가 많다. 아마도 공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나의 꿈’에서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미술학원에 다니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오랜 동안 ‘안 간다’라고 애써 덮어두었던 것이 ‘못 간다’라는 본래 모습을 드러낸 것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괜히 서러웠다”라고 쓰고 있는 것. 자신을 뒷바라지한 셋째 누나가 만기가 된 적금으로 자신의 학원비랑 물감 값을 댄 것을 보고 “어디 옷과 화장품 뿐이겠는가. 그것의 존재를 느낄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잘라내버린 그녀의 꿈까지 내 알량한 재주 아래 어딘가 가만히 묻혀 있을 것이다”라고 한 부분.
 
최규석은 개고기를 먹는 것에서도 자신이 변하는 것을 보여준다. “살았을 때의 메리는 순하고 귀여웠다. 그리고 죽은 메리는 맛있었다,” 이러던 것에서 덫에 걸려 죽어가는 쥐에게마저 연민을 느끼게 되면서 “이것이 성장인지 도시화의 결과인지 아니면 원래의 심성인지”를 의아해한다.
 
참, 빼먹을 뻔 했는데, 한국전쟁을 얘기하는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안긴 것은 미군의 비행기였음을 보여준다. 실제 현대사를 다룬 드라마를 보면 많은 이들이 피난을 가다가 미군의 폭격이나 기총사격에 의해 사망하는 걸 본다. 그게 민간인들이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많은 이유일 텐데, 우리의 기억은 왜곡된다. 최규석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역사투쟁이 중요한 것일 게다.
 
‘변하는 건 없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최규석은 당연히 대학까지 마친 그들과 운 좋게 중학교에 들어간 내 누이들은 같은 세대지만 다른 시대를 살았다고 얘기한다. “결국 불행은 그것을 겪는 자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상상하는 만큼의 불행을 우리는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행이란 놈은 친절하게도 인간의 상식을 불행 수준으로 떨어뜨려 불행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일에도 분노하지 않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최규석이 말하는 ‘그들’에 포함될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별난 것 같기도 하다. 최규석과 비슷하게 “자고로 위를 보며 살라 했는데, 자꾸 아래를 보니 부정적인 생각만 드는,” 그런 류이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블로그를 둘러보다가 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이라는 책이 나온 것을 보고 냉큼 주문을 해버렸다. 최규석의 그림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김규항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김규항이 창작과 비평에 쓴 <대한민국 원주민>에 대한 서평과 함께, 이전에 논란이 되었고, 김규항의 서평에도 나오는 '불행한 소년' 관련 글과 그림을 옮겨온다. 서평 중에 밑줄을 그은 부분은 내가 왜 불행한 소년 관련 글을 담아오는지를 잘 설명해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가능한 이번 촛불 시위 동안에 벌어졌던 폭력-비폭력 논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참고로, 나중에 <대한민국 원주민>을 읽고 난 다음의 소감을 쓴다면 아마 진보블로그에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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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야유를 잃어버린 사람들 (김규항 블로그, 2008/08/09 09:55)
 
내가 발행인 노릇을 하고 있는 어린이잡지 <고래가그랬어>에 최규석이 ‘코딱지만 한 이야기’라는 꼭지를 연재했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보는 우화 같은 것이었는데 분량은 짧아도 함축과 은유가 많은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연재를 쉬기 얼마 전에 실린 ‘불행한 소년’이라는 작품이 말썽이 나서 몇몇 독자가 항의하고 정기구독을 취소하는 일이 있었다. 내용인즉슨 아주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나 참고 또 참으며 평생을 죽도록 노동했으나 결국 비참하게 인생을 마치게 된 사내가 제 정당한 분노를 늘 삭이게 했던, 그리고 이제 죽어가는 그에게 “비참해하지 말아요. 당신의 삶은 가치 있는 삶이었어요.”라고 말하는 천사를 죽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천사는 그저 천사의 탈을 쓴 악마에 불과했지만 기독교(개신교)가 비공식적 국교이다시피 한 국가인 한국에서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에서 천사를 죽이는 장면을  실었다는 것은 문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실은 그 작품이 편집부에 들어왔을 때 편집장이 걱정이 된다며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문제가 되겠지만 문제없는 작품”이니 싣자고 했다. 싣지 않았으면 말썽도 없었을 테니 작가에겐 책임이 없었지만 <고래가그랬어>의 지지자인 최규석은 독자수를 늘이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줄였다는 데 대해 몹시 미안해했다. 그때 최규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게 그렇게 충격적인가요? 저는 늘 소 잡고 돼지잡고 하는 것 보고자라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미안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그 말 속엔 얼마간의 야유가 들어 있었다. 제 새끼들을 볼 것 안 볼 것 들을 것 안 들을 것 알뜰하게 다 가려가며 키울 수 있는 안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야유. 최규석은 그런 야유를 할 만한 사람이다. 그는 늘 소잡고 돼지잡고 하는 것 보고자란 사람, 볼 것 안 볼 것 들을 것 안 들을 것 다 가리며 키울 수 없는 조건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바로 그 기록이다.
 
나는 이 책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보았다. 잡지에 연재될 때 몇 번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보니 본 게 거의 없었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매우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 만화가 후배의 소개로 대학 졸업작품집에 실린 최규석의 작품을 본 이후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 등 그의 주요한 작품들을 모두 보아왔지만 이번처럼 강한 인상을 주는 적은 없었다. 두어 시간 그렇게 빠져서 책을 다 보고나서야 난 그 두어 시간 동안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참, 이게 다 지 이야기지.’ 그 이야기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한 아이의 체험임을 되새기며 난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이삼십년 전이었다면, 말하자면 한국의 인텔리들(이를테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민중이 각별한 의미를 갖던 시절이었다면 이 책은 지금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졌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이 책은 ‘민중의 자식이 그린 가슴 아픈 성장기’라 수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90년대 이후 한국의 인텔리들은 더 이상 민중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시민이라는 말을 즐겨 쓰게 되었다.(그렇게 된 사연과 과정은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분명한 사실은 민중은 예나 지금이나 민중이라는 것. 그리고 민중은 인텔리들이 자신들을 위해 ‘투신’하던 시절이나 자신들을 ‘배신’하고 시민을 말하는 지금이나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인텔리들의 민중과의 관계는 실재했던 게 아니라 단지 인텔리들끼리의 가상극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오늘 한국의 인텔리들에게 민중은 그들이 오래 전 외치던 대로 ‘역사의 주인공, 생산의 주인공’이 아니라 단지 부인할 순 없지만 애써 외면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런 변화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원주민>은, 이른바 진보적인 성향의 인텔리들이 즐겨 읽는 잡지에 연재되고 역시 진보적인 인텔리들을 주요한 독자로 하는 출판사에서 발행된 이 책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사실 이런 질문은 매우 싱거운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이미 그에 대한 답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한 민중의 자식의 가슴 아픈 성장기’를 이젠 제 세계관이나 사회적 실천에 결코 연결시키지 않은 채 잠시 구경하려는 인텔리들에 대한 야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그 야유가 작가 자신에게까지 뻗어있다는 점이다. 최규석은 이젠 모든 면에서 ‘원주민이 되어버린 민중’에서 떨어져 나와, 단 한 번도 입신양명을 꿈꾼 바 없으나 어느 새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만화가가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야유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야유는 사회적 지위와 문화자본이 갈수록 늘어가는 제 삶의 추이와 속도에 정직하게 맞추어져 있다. 부모와 누이들과 형에 관한 이야기들을 가까스로 마친 작가는 책의 끝 무렵 제 옆얼굴을 그린 페이지 왼편에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나와는 꽤 다른 환경에서 자랄 내 아이’에 대해 적는다.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요,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근래 보기 드문 민중 출신 작가’가 제공한 ‘모처럼의 민중 구경’이 되었을지도 모를 이 책은 작가 자신에 대한 야유, 심지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야유를 포함하면서 ‘그들’에 관한 책이 아니라 ‘우리(인텔리들)’에 관한 책이 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우리의 잃어버린 야유를 복원하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민중에 대해 ‘우리끼리’ 해치운 개연성 없는 투신과 배신에 대해 정당한 야유를 받은 바 없이 살아왔으며, 우리의 삶이 이렇게 욕지기가 날 만큼 졸렬해진 것 역시 우리가 세상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야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면서부터였음을 복원하게 한다. 모든 ‘우리’에게 이 책을 권한다. 모처럼의 구경은 어느새 모처럼의 정화가 될 터이니. (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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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 불행한 소년, 천사를 죽이다 2007/04/25 00:57
 
<고래가 그랬어>에 실린 최규석 님의 '불행한 소년'이라는 우화는 몇몇 독자들의 절독까지 야기하는 등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는 많은 논쟁점이 들어있다.
하지만 지금 이에 대해 깊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김규항 님의 블로그에 실린 관련글과 최규석 님의 우화를 담아온다.
그리고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한겨레21에 실린 박노자의 글을 링크한다.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21 2007년04월12일 제655호,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이완용 테러를 막다가 죽은 인력거꾼 박원문과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에서 무고하게 죽은 일본인들
 
 
천사를 죽이다 (2007.03.04 Sun)
최규석은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로 출발한 문제적 만화가다. 고래 창간 때부터 그의 작품을 싣고 싶었으나 그의 형편(한동안 거처를 마련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한) 때문에 미루어지다가 지난해 말부터 ‘코딱지 만한 이야기’로 고래에 참여하고 있다. ‘코딱지 만한 이야기’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보는 우화다. 짐작대로(혹은 기대했던 대로) 최규석의 우화엔 모순과 불의로 가득찬 현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그런 태도와 ‘어린이잡지’는 문제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어른들, 특히 한국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겐 맑고 깨끗한 것만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고래 40호의 코딱지 만한 이야기 ‘불행한 소년’에 대해 몇몇 독자들이 항의했고 몇몇 독자들이 절독했다. 발행인의 해명을 요구해온 분들도 있는데 그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내 생각을 조금 적어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천사는 천사가 아니라 천사의 탈을 쓴 악마입니다. 세상엔 그런 가짜 천사들이 참 많습니다. 무작정 운명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든가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고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든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저항을 폭력이라 몰아붙인다거나 하면서 힘센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가짜 천사들 말입니다. 아무 죄없는 사람이 일생을 그 가짜 천사에 속아 살았다면 그에겐 분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현실의 추악함을 되도록 보여주지 않고 싶어 합니다. 하긴 누가 그게 즐겁겠습니까? 그러나 아이들에게 현실의 추악함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추악함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단지 그 추악함을 감출 뿐입니다. 그것은 늘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설명되지만 실은 우리 속을 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추악함을 만든 게 바로 우리라는 것, 아이들은 그 추악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 아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그 지옥에 빠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이들은 그런 가짜 천사들이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그 추악함을 아이들에게 알려줄 정직함의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그 방법은 가장 신중하고 사려깊어야 합니다. 예술작품은 그런 면에서 매우 훌륭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예술작품을 통해 그런 현실의 추악함을 간접 체험하면서 스스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이 작품을 보고 어른들이 걱정하듯 심각한 충격이나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나쁜 천사네’ 할 뿐입니다. 천사는 무작정 착하고 좋다는 판타지가 깨지는 건 아이들의 마음을 더럽히는 걸까요, 현명하게 하는 걸까요? 어른들, 특히 한국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맑고 깨끗한 것만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그런 강박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매우 위험합니다. 현실은 그렇게 맑고 깨끗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강박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아이는 그런 추악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당하기만 하는 사람이 되거나 그런 추악한 현실에 같은 추악함으로 적응하는 비루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듯 말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의 불편함이 아니라 아이들의 인생입니다. 천사를 죽이는 장면에 집착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 작품을 보시길 권합니다. 이 작품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폭력메모 (2007.03.14 Wed)
 
최규석 만화와 관련한 이런저런 의견들을 읽다가 조금씩 마음이 답답해졌다. 다들 일리가 있는 말들인데 공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폭력은 나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그 만화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아이에게 살해 장면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할 건 그런 지당한 말씀이나 논평이 아니라 아니라 그 만화에 그려진 주인공의 참혹한 인생과 그 인생을 그렇게 만든 가짜 천사,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가짜 천사들에 둘러쌓여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인생, 에 대해서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트랙백에 붙은 한 의견이 참으로 반갑다. 그 주인공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더이상 지당한 말씀이나 논평은 불가능한 법이다. 안그래도 폭력(과 비폭력)에 대해 한번 쓸 생각이지만, 메모 삼아 몇자 적어본다.
 
1. 세상에 모든 폭력주의자들은 비폭력주의자다. 다들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폭력을 사용한다고 말할 뿐이다. 이를테면 지금 지구를 대표하는 폭력주의자라 할 부시도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저 “폭력은 나쁘다”라고 말하는 건 하나마나한 일이다. 어떤 폭력주의자도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다.
 
2. 진정한 비폭력주의는 ‘현장’에서만 주장될 수 있다. 진정한 비폭력주의는 일년 내내 뺨한번 맞을 일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긋이 눈을 내려깔고 설파하는 게 아니라,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에 함께 노출된 사람들만이, 분노와 원한을 넘어 이루는 숭고한 경지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비폭력주의자들이 반드시 폭력에 희생 당한 건 그래서다. 목숨이 위협당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비폭력주의자가 아니다.
 
3. 현장에서 벗어난, 현장을 구경하고 논평하는 비폭력주의는 폭력주의자들(역시 비폭력주의자인)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게릴라나 똑같아!”라는 말은 이스라엘 극우세력을 향한 가장 흐뭇한 선물이자, 미사일에 맞아 찢겨진 새끼를 부둥켜 않고 오열하는 가난한 팔레스타인 어미의 가슴에 꽂는 더 끔찍한 미사일이다.
 
4. 폭력의 실체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이해관계’다. 폭력은 강자가 약자를 상대로 제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한 가장 분명한 수단이다. 폭력의 목적은 폭력이 아니라 ‘빼앗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극악한 폭력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빼앗는 것’이다. 그런 폭력은 폭력적으로 보이긴커녕 이런저런 명분과 대중 조작으로 아름답게 포장된다. 애석하게도 모든 순진한 비폭력주의가 그 포장지 노릇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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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9 19:12 2008/09/19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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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박물관에 전시되어 버린 사람들 &lt;대한민국 원주민&gt; Tracked from 2009/07/04 11:12

    ▲ 최규석 글, 그림 <대한민국 원주민> (창비) 만화가 최규석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블로그와 게시판에 절찬리 스크랩되었던 패러디 만화 때문이었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라는 제목을 보고 아기공룡 둘리를 기대하고 클릭했다가, 임노동자가 되어버린 둘리아저씨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린 둘리, 박카스아줌마 또치와 해부용으로 팔려가는 도우너 등등 더 이상 명랑만화의 주인공이 아닌 그들이 몸으로 겪는 세상의 황량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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