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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를 향한 담대한 구상 - 장석준, 동시대인의 의견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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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마무리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약간 용두사미의 느낌도 있긴 하지만, 장석준 동지가 뭔가 답답함이 가득한 시기에 유용한 얘기들을 많이 풀어놓았다. 글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내용 중에 좀더 논의를 진전시키면 좋은 대안으로 발전할 것들이 많다. 그리고 기존에 내가 편협하게 생각해왔던 것들도 바로잡아 주었고... 이런 내용들이 다양한 논의과정을 거치면서 좀더 풍부한 내용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마 이에 대해서는 장석준 동지도 염두에 두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장동지는 설익은 단상이나 가설이라고 하였지만, 이러한 담대한 구상들이 쏟아져 나오고 토론의 장에 올라와야 하지 않을지... 
 
아래 글은 레디앙에 장석준 동지가 연재한 글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살필 수 있도록 주요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제목달기도 애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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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괴의 시대가 오고있다 (레디앙, 2008년 11월 03일 (월) 00:09:11 장석준 / 진보신당 서울당원)
[동시대인의 의견①] 격랑의 시기 제2창당의 역사적 의미 
 
미국발 금융 위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경제’보다는 차라리 ‘역사’다. 물론 이 둘을 이렇게 대비하는 것 자체가 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역사적 안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무리한 대비도 영 맹랑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 몇 주일간의 사태만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붕괴를 말할 수는 없다. 심지어는 20세기 말에 시작된 세계화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아직은, 힘들다. 그러나 지난 번 세계화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의 세계화도 결국은 이 혹성 전체의 기나긴 혼란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만은 이제 분명해졌다. 그렇다. 우리는 아직 붕괴를 경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목격한 것은 머지않아 붕괴의 시대가 시작될 수밖에 없다는 확실한 신호다. 기나긴 붕괴의 한 시대가 동터오고 있다. 
 
21세기 초반이 100년 전의 세상(20세기 초)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일 수는 없다. 세계화의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붕괴의 시대라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는 데가 있을지라도, 구체적으로는 많은 차이를 보일 것이다. 아니, 공통점보다는 차이가 더 뚜렷할 것이다.
 
지금 당장 필자가 지적할 수 있는 몇 가지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류의 학습 효과다. 누구보다도 체제의 주류 세력들 자신이 우리 시대와 지난 번 붕괴의 시대 사이의 유사성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정보는 기업, 국가, 국제기구 등 다양한 주체들의 행동에 분명히 영향을 준다. 1929년 대공황 직후와는 달리, 최근 몇 주간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 사이의 협조가 기민하게 이뤄진 것이 그 한 사례다. 그리고 미국 연준 의장(벤 버냉키)이 대공황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라거나 영국의 현 재무장관(알리스테어 달링)이 트로츠키주의 제4인터내셔널 출신이라는 사실도 에피소드만은 아니다. 
 
하지만 각각의 행위 주체들이 풍부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게 곧 지혜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각 행위 주체마다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선택을 시도하다가 그것이 전반적인 예측 불가능성을 더욱 높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과거보다 풍부해진 정보와 기술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정책 실패를 맛보게 되면, 그 때의 낭패감과 절망감은 대공황 직후의 미국이나 독일에서 나타났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 될지 모른다. 
 
두 번째는 대의 민주주의의 역할이다. 20세기 초만 해도 보통선거제도는 몇몇 나라의 예외적 실험이었다. 반면 지금은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보통선거를 실시한다. 더구나 그 경험의 뿌리도 깊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는 붕괴 과정에 대한 민중 측의 대응으로서 10월 혁명과 같은 사건이 반복되길 기대하기 힘들다. 일단 대의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정착하면, 그 다음부터는 노동 대중 자신이 선거를 유일한 집권 경로로 받아들이게 된다. 
 
선거 정치가 변혁적 좌파보다는 오히려 극우 민중주의자들(그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파시즘이었다)에게 더 손쉬운 경기장이라는 것은 이미 몇몇 사례로 분명히 드러난 바 있다. 또한 혁명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급진적, 구조적 개혁이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변혁 세력이 붕괴의 시대에 개입할 길은 선거를 통한 집권과 급진 개혁뿐이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든 칠레의 인민연합 정부나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혁명이 경험한 길고 지루하기까지 한 투쟁을 반복해야 하고 여기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의 시험은 훨씬 더 어려워진 셈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우리 시대의 위기가 지난 세기 초에 비해 훨씬 더 파괴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이번의 체제 위기가 생태 위기를 수반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에너지 위기와 식량 위기 양상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두 문제는 강대국 간의 군사 대립(지금은 그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을 폭발시킬 수 있는 결정적 변수다. 기후 변화의 가속화가 인간 사회와 국제 관계에 던질 하중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핵무기의 존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 순간에 우리는 새로운 진보정당의 주춧돌을 놓으려 하고 있다. 이 시간적 배경, 그것은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2008년에 진보정당을 건설한다는 것은 1990년대 초에 민중당을 만들던 일과 같을 수도 없고, 2000년대 초에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던 일과도 같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야 할 진보정당은 동시대인들과 함께 붕괴의 시대를 견뎌내고 그것을 헤쳐 나갈 정당이다. 이 정당은 3중의 임무를 지닌다. 첫째, 붕괴의 시대에 한국 사회의 좌초를 막아야 한다. 둘째, 단순히 좌초를 막는 수준을 넘어 미지의 대륙, 즉 대안 체제를 향해 방향을 잡아야 한다. 셋째, 전 지구적 차원에서 붕괴의 시대를 극복하고 인류 문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데 한 몫을 해야 한다. 즉, 지금 우리가 만들려는 것은 앞으로 족히 수십 년은 지속될 격랑의 세월 속에서 조타수의 역할을 할 집단적 리더십(우리 시대의 ‘유기적 지식인’)이다. 우리는 그 일원이 되려 하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이렇게, 우리 앞의 시대만큼이나 낯설고 어렵고 근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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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10월 혁명이 필요하다 (레디앙, 2008년 11월 07일 (금) 09:12:01 장석준 / 진보신당 서울 당원)
[동시대인의 의견②] 위기의 시대 좌파 상황, 1백년전과 지금 
 
1. 지난 번 대위기 시대, 좌파의 궤적
 
① 민주주의 대중운동 - 국민국가를 확보하고 그 참여권을 쟁취하자
진보 좌파의 밑바탕은, 언제나,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중의 운동이다. 1차 대전이 발발한 그 때에 서구에는 지난 수십 년간 성장해온 강력한 민주주의 대중운동들이 존재했다. 우선 노동계급과 여성의 보통선거권 쟁취 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세계화 과정에서 확산되던 미숙련, 반숙련 노동자들을 기존의 직업노조가 아닌 새로운 노동조합(그 귀결이 곧 산업노조였다)으로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또 다른 거대한 흐름은 식민지, 반식민지 세계의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이들은 국민국가가 없는 곳에서는 그것을 확보하려 했고, 이미 그것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그 참여권(보통선거권, 노사 단체교섭의 보장 등)을 쟁취하려 했다. 지구 곳곳의 토착 민주주의 대중운동들은 “국민국가를 확보하고 그 참여권을 쟁취하라”는 명제로 수렴하는 모습을 보였다. 
 
② 대안 이념의 상황 - 사회주의, 과학적이기보다는 종교적인
이 당시 대안 이념의 수준은 그 신뢰의 강도에 비해 그렇게 높지 아니었다. 다들 미래 사회의 모습으로 막연한 국가사회주의 정도를 떠올렸다. ‘과학적’ 사회주의라고는 하지만 사실 대중에게 그것은 기존 종교를 대체하는 막연한 신앙에 가까웠다.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나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 맑스(엥겔스)의 주요 저작들은 1932년에야 출판되었고, 그 이후에도 한 동안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자본』조차 여전히 학문 저작보다는 선전 책자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 
 
③ 좌파의 양극화 - 전 지구적 비전과 국민국가 내 실천의 괴리
20세기 초 위기의 시대에 좌파는 대분열을 경험했다.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분열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분열에는 또 다른, 근본적인 측면이 있다. 그것은 전 지구적 비전과 국민국가 내 실천 사이의 양극화다.
 
③-1. 최초의 전 지구적 변혁 비전의 등장과 쇠퇴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세계 혁명 운동이 시작되면서, 전 지구적 비전과 민주주의 대중운동들 사이의 결합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이 드러났다. 10월 혁명 자체가 혁명 당-국가의 자기 방어 운동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구에서 코민테른 운동은 한 세대 이상의 역사를 지닌 각국 내 민주적 대중운동들의 다수를 쟁취하는 데 실패했다. 독일 혁명의 실패가 결정적이었다. 오직 중국과 같은 식민지, 반(半)식민지 세계에서만 괄목할만한 성공이 있었다. 서구에서 코민테른 소속 정당이 자국의 민주적 대중운동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 것은 프랑스의 반파시즘 인민전선 운동이 거의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때에는 다시 정반대의 오류와 한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코민테른 지도부는 이미 10월 혁명의 전 지구적 비전을 포기하고 나치 독일로부터 소련 국가를 방어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한 반파시즘 인민전선 세력들에게는 자국 내 정치를 넘어서 국제적 반파시즘 전선을 형성할 비전도, 능력도 없었다. 
 
③-2. 국민국가 내 개혁 정치의 실패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보통선거권 도입(대개 1차 대전 직후) 이후 국민국가의 정치에서 주도적 세력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 때부터 예외 없이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했다. 이들은 지속적인 국제 위기의 원흉이었던 금융 자본의 힘을 억제할 정치적 의지와 정책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상황을 정리해준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대혼돈기의 마지막 대사건인 이 전쟁으로 유럽의 과잉 축적된 자본의 상당 부분이 감가되고 파시즘을 지지했던 각국 대자본가들의 헤게모니가 흔들렸다. 오직 이러한 상황을 겪고 나서야 거대 자본은 사회의 압력에 일정하게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④ 대위기 시대의 최후의 승자 - 윌슨-FDR 비전
이런 상황에서 지난 번 대혼돈기의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은 ‘윌슨-FDR(프랭클린 D. 루즈벨트)’ 비전이었다. 미국의 1차 대전 참전 명분으로 노동조합 활동 보장, 민족자결권 인정 등을 들고 나온 윌슨의 비전은 루즈벨트의 뉴딜과 대서양 선언으로 부활했다. ‘윌슨-FDR’ 비전의 내용은 한 마디로 서구의 국민국가를 복지국가로 개편하고 식민지, 반식민지 세계에는 국민국가를 허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종주국이 됐고, 사람들은 과연 자신들이 ‘해방’된 게 맞는지, 이것이 과연 ‘해방’인지, 새로운 물음을 던져야 했다. 
 
2. 지난 번 대위기 시대와 비교해본 현재 좌파의 상황
 
① 21세기 대중운동의 상황 - 국민국가에 뿌리박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의심하는?
일단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를 요구하는 대중운동은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 구성 요소가 크게 바뀌었다. 노동계급 운동으로는, 세계화 과정에서 특히 배제되고 차별받는 부분, 즉 비정규직 노동자나 이주 노동자, 실업자의 운동이 주목받고 있다. 실질적 평등에 대한 여성들의 기대와 요구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또한 지난 세기 초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운동으로서, 생명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생태운동이 등장했다.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은 전 지구적 정의를 부르짖는 남반구 민중운동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들 운동은 모두 각각의 국민국가에 뿌리박고 있다. 민중들은 저마다의 역사와 문화, 당면 과제들을 갖고 있고, 무엇보다도 국민국가 내의 정치를 주된 무대로 삼는다. 하지만 동시에 최근의 민중운동들은 국민국가를 넘어서거나 국민국가의 역량과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쟁점들을 제기한다. 이주 노동자 운동이 그렇고, 기후변화 대응 운동이 그러하며, 전 지구적 남북 격차에 대한 문제제기가 그러하다. 
 
세계화 과정에서 남반구 곳곳의 새로운 인구가 산업 노동자로 편입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공동의 정체성과 연대의식은 지난 번 세계화-위기 시대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사실이다.
 
② 대안 이념의 상황 - 좌파의 다원주의
맑스주의가 국가 교리의 짐을 덜면 덜수록 이 전통에 속한 사상가들의 사고는 더욱 깊고 풍성해졌다. 또한 이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 비판가로서 맑스 외에도 T. 베블런, K. 폴라니 등의 이름들이 더 알려져 있다. 게다가 여성주의, 생태주의, 탈식민주의의 풍부한 성과도 있다. 해방신학의 등장 이후 좌파운동과 종교 사이의 관계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야말로 좌파의 다원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다양성이 증대한 만큼 원심력도 강해졌다. 이제는 사회주의 교리가 기독교 신앙을 대체하던 지난 세기 초와 비슷한 이념적 응집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좌파의 다양성을 일정한 방향으로 모아가는 노력은 필요하다.
 
③ 전 지구적 비전 - 아직은 부재
지난 세기 초에 레닌이 제시했던 것 같은 전 지구적 비전은 지금 우리에게 없다. 우리의 ‘4월 테제’(레닌이 러시아 민중들에게 자신의 전망을 최초로 제시한 문서)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허나, 대혼돈의 시기에 인류를 야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대신 문명의 새로운 단계로 이끌려면(“사회주의냐 야만이냐”), 진보 좌파는 반드시 전 지구적 비전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100년 전의 안타까운 경험과는 달리 이 비전을 각각의 국민국가 내에서 싹트는 민주적 대중운동들, 국민국가 내부의 정치와 효과적으로 결합시켜야 한다.
 
아마도 다음의 세 가지 물음과 그에 대한 답이 이루는 함수 관계가 새로운 전 지구적 비전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 첫째, 어떻게 전 지구적인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것인가? 둘째, 그러면서 동시에 어떻게 남반구 민중들(물론 북반구 내의 남반구, 즉 배제되고 소외된 불안정 고용층을 포함한다)의 삶을 개선시킬 것인가? 셋째, 이 모든 과제를 위하여 북반구의 과잉 축적된 자본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혹은 사회에 환원시킬 것인가? 
 
④ 국민국가 내의 개혁 - 케인스주의의 복귀로 충분한가?
과연 국가 주도 재분배 정책만으로 장기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금융 자본에 대해 몇 가지 새로운 규제책을 마련한다고 해서 이들의 세력을 제압할 수 있을지도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이번에도 결국 해결은 정책가의 이성보다는 피 비린 내 나는 현실에서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닌가?
 
2차 대전 이후 서구 국가들이 보편적으로 채택했던 국가 주도 정책 수단들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분명히 부분적이고 단기적인 대책일 뿐이다. 우리는 이른바 케인스주의 + 몇몇 급진적 조치 식으로 ‘구조 개혁’을 상상하던 상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대목에서 지금 당장 지적할 수 있는 두 가지 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제는 국가기구가 아니라 민중들, 다양한 결사체로 조직된 민중들 자신이 위기 해결 과정의 주역으로 전면에 나서야 한다. 전통적인 국가기구 외의 결사체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면, 시장과 국가의 이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기존 사회과학의 시각도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어느 나라 좌파 정치 세력이든 이제는 국민국가 내의 정치에 뿌리박으면서도 동시에 그 경계를 넘나들고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 해당 국민국가 자체의 변형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⑤ 최후의 승자는?
세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없이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을 바꾸려는 거대한 운동이 없이는 최악의 ‘야만’을 막는 일조차 불가능하다는 진실을. 10월 혁명은 결코 그대로 반복될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식의 ‘10월’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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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혼합경제와 풀뿌리경제 (레디앙, 2008년 11월 13일 (목) 09:01:04 장석준 / 진보신당 서울 당원)
[동시대인의 의견③-1] 민주적 생태적 사회주의의 길 
 
우리는 기본적으로 상속자의 입장을 취해야 하되 환자를 죽게 내버려둘 수도 없다. 아니, 일단 살려놔야 한다. 그리고 그 체질을 바꿔야 한다.
세계사의 격랑 속에서 진보정당이 할 일은 한국 사회의 좌초를 막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방향으로 그 키를 돌리는 것이다. 한편으로 위기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응력을 높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름 아닌 바로 그 대응 과정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를 바꾸어야 한다. 서로 다른 두 과제를 하나의 실천 과정 안에 결합시켜야 한다. 
 
이제는 아무도 고성장을 약속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전 세계적인 침체 상황에서는 국내에서 아무리 생산성이 향상되더라도 이것이 곧바로 경제 실적 개선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수출 경쟁이 더욱 가열될 것이고, 실물 경제와 괴리된 금융 부문의 롤러코스터 운동도 계속될 터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산업화, 김대중의 자유화 모두 저마다의 세계사적 배경 아래서 가능했음을 잊지 말자. 우리는 대혼돈의 시대라는 또 다른 시대 상황 앞에 서 있다. 어떤 진공 상태가 아니라 바로 이 난처한 무대 배경 위에서 한국 사회의 방향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우리의 경제 이상은 ‘소박하지만 보람 있고 안정된 삶’의 보장이어야 한다. 부자가 되기는 이전보다 더 힘들지 모르지만, 적어도 소외되고 배제되는 일은 없는 경제 생활. 진보 좌파는 지금부터 이러한 이상을 확산시키고 그 지지 세력을 규합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경제 이상은 시장이 거의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현재의 한국 경제 체제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꿈일 뿐이다. 지금부터 새로운 요소들을 싹 틔우고 키우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이 새로운 요소들은 장기 위기 속에서 한국 사회의 대응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대위기 이후의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혼합 경제를 건설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보 좌파가 추진할 구조 개혁의 핵심 과제다.

과거 케인스주의 시기에 ‘혼합 경제’라고 하면 흔히 사적 시장과 공공 부문의 공존을 뜻했다. 하지만 또 다른 한 축이 존재한다. 다양한 생산 및 소비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풀뿌리 결사체가 생산과 교환의 주역이 되는 영역이다. 이 풀뿌리 부문을 건설하는 일이 지금부터 진보 세력의 주된 과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풀뿌리 부문은 다음과 같은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 대안 경제 정책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실천 주체 역할을 한다. 어떤 정책이든 정책 집행 수단이 없다면, 공문구에 불과하다. 집권을 준비하는 세력은 단지 정책을 준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정책을 집행할 수단들을 미리 구비해나가야 한다. 기존 국가기구 외에 확보해야 할 ‘또 다른 사회적 주체들’의 유력한 후보 중 하나가 바로 풀뿌리 부문의 다양한 민중 결사체들이다(또 다른 후보로는 강력한 초기업단위 노동조합 등이 있을 것이다).
 
이미 대공황 시기에도 미국의 사회주의자 업튼 싱클레어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뉴딜형 재정 팽창 계획을 농업 협동조합 건설과 연결하는 EPIC(End Poverty in California) 프로그램을 제시한 바 있다. 최근에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가 핵심 경제 정책으로서, 협동조합 기업 설립을 지원하고 있다. 
 
둘째, 풀뿌리 부문은 생태적 전환의 주된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다. 생태 전환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대자본과 국가 관료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지역 주민들의 소박하지만 안정된 삶을 보장할 지역 순환 경제의 구축이다. 그리고 그 가장 확실한 시작은 각 지역의 주민 생활에 깊이 뿌리박은 풀뿌리 부문을 육성하는 일이다.
 
생태 전환의 또 다른 중심 과제인 에너지 체제 전환과 농업 회생에서도 마찬가지다. 풀뿌리 부문은 다른 부문에 비해 분권형 에너지 생산-소비 체제의 출발점 역할을 하기 쉽다. 또한 도시와 인근 농촌 사이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농업을 새롭게 회생시킬 주역 역시 다른 누가 아닌 도시와 농촌 양쪽의 풀뿌리 부문이다.
 
셋째, 풀뿌리 부문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중요성을 지닌다. 그것은 사회성 자체의 재구성이다. 우리에게 ‘사회’란 오히려 아직 오지 않은 무엇에 가깝다. 우리는 생산-재생산 활동 내에서 ‘사회’의 경험과 의미 자체를 새로 구성해야 한다. 이윤 추구 행위와 관료 체계를 넘어선 협동과 연대의 행위 양식을 찾고 만들어내야 한다.
 
풀뿌리 부문은 그 유일한 무대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 가장 좋은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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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 사회주의에 주목하자 (레디앙, 2008년 11월 14일 (금) 08:12:16 장석준 / 진보신당 서울당원)
[동시대인의 의견③-2] '풀뿌리-공공 vs 시장' 평화공존은 없다 
  
그렇다고 공공 부문이 이제는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공공 부문을 새로 구축하고 확장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공공 부문’이란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 당국이 소유 주체인 영역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필자는 조세-재분배에 의한 자원 배분 체계, 즉 공적 복지 제도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은 공공 부문 확대가 한국 진보 정치의 핵심 의제가 될 것이다. 진보 좌파는 선거에서든, 일상 정치 활동을 통해서든, “신자유주의 재테크 문화인가, 아니면 공적 복지의 확대인가”라는 선택을 선명히 제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의 당면 과제는 ‘복지국가 건설’이 맞다. 이 대목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복지국가로 나아간다는 것이 꼭 북유럽 ‘모델’을 수입하는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기본소득제 구상을 예로 들 수 있다. 기본소득제란 요즘 서구 좌파 내에서 논의되는 새로운 공적 복지 형태다. 간단히 말해, 모든 시민들에게 일정 액수의 현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즉, 복지 수당을 임금 소득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임금과 함께 모든 시민의 소득의 주요 구성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서구 복지국가의 맥락에서 보면 그 동안 주택 수당, 아동 수당 등의 형태로 지급되던 각종 현금 지원 제도를 하나로 통합하고 보편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서구와는 또 다른 맥락에서 이 구상은 우리의 복지 확충 과정에서도 상당한 현실 적합성을 지닐 수 있다. 아니, 이미 이전의 복지 체계가 깊이 뿌리를 내린 서구 국가들보다는 오히려 이제야 막 새로 복지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 구상이 보다 더 설득력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 비정규직, 중소사업장 등 저소득 노동자의 증가 때문에 그렇다. 이들의 가장 긴급한 문제는 낮은 임금 수준이다. 이 문제가 생기는 구조적 이유는 노동은 사회적으로 이뤄지는 데 반해 임금은 기업 단위로 결정된다는 데 있다. 모두가 사회 전체의 생산에 기여하는데도 어느 기업에 속했는지에 따라 분배에 차이가 생긴다는 것.
   

이것을 해결할 방안 중 하나는 다수의 노동자를 대변하는 초기업단위 노동조합이 강력한 연대임금 교섭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임금 편차를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한국의 노동운동이 이를 실현시킬 전망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또 다른 타개책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게 기본소득제다. 임금 교섭으로 안 된다면 기본소득제 같은 조세-재분배 체계를 통해 이 문제에 도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단순한 북유럽 따라 배우기는 아니라는 점만은 확인하자. ‘21세기 초 혼돈의 시대’에 ‘한국 사회’에 맞는 공공 복지 체계를 설계하고 실현하는 일은 훨씬 더 독창적이고 그래서 더 어려운 시험이 될 것이다. 더구나 중앙정부를 통해 공공 복지의 전면 확대를 추진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먼 미래에나 기약할 수 있는 일임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이 ‘지방자치 사회주의’의 가능성이다. 지방정부를 무대로 제한적인 수준에서나마 새로운 공공 부문을 건설, 운영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적 지지를 넓혀 나갈 가능성. 
 
사적 시장이 지배하는 영역은 점차 축소돼야 한다. 그리고 새로 등장한 부문들에서 훈련한 행위 양식들을 사적 시장으로까지 확산시켜야 한다. 맑스주의 전통에 따라 이야기하면, 시장 자체가 생산자와 소비자 등 민중들 자신의 자주관리 아래 놓여야 한다. 폴라니 식으로 말하면, 시장이 다시 사회에 끼워 넣어져야 한다. 물론 금융 위기 같은 상황이 닥치면, 오히려 사적 시장의 제압이 가장 긴급한 과제가 될 것이다. 
 
기존 경제 구조의 핵심에 개입해 들어가는 경로로 지금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다음 세 가지 경로다.
첫째, 앞으로 예상되는 연쇄적인 금융 위기 때마다 이를 거대 금융 세력과 대결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체제 위기의 부담을 거대 자본 자신에 물려야 하고, 강력한 공적 금융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물론 그 수단 중 하나는 금융 기관의 국공유화다.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 구축한 공적 금융 체계를 통해 어떻게 자본 소유 구조를 바꿔낼지, 그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축적 구조에서 양극화의 피해 대상이 돼온 영역들에 어떻게 자본을 새로 분배할 것인가? 국공유화는 이러한 종합적인 대안 경제 정책의 일부로서만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 
 
둘째, 에너지 전환 과정과 지역 순환 경제를 만드는 과정(수도권-지방 관계의 재편 등을 수반할)에 주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장 바깥의 사회적 결정에 따라 경제 활동을 재편해가는 값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후 대안 사회의 기본 원리가 될, 경제 활동에 대한 사회적 자주관리의 도제 과정, 숙련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자주관리 경제는 성장을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재편하며 제어하는 과정에서 등장할 것이다. 생태 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쌓인 경험들이 미래 경제의 원리로 스며들 것이다. 
 
셋째, 개별 기업 내에서도 끊임없이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자주관리를 제창해야 한다. 이것은 지금의 계급 역관계로는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먼 미래의 일로만 미뤄둘 일도 아니다. 지금부터 노동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이상과 원칙임을 확인하고 그 공감대를 늘려가야 한다. 진보정당도 그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해야 한다.
 
다만, ‘사회적 자주관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노동자 자주관리에 대한 과거의 협소한 시각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미 모든 경제 활동은 다 지극히 사회적으로 이뤄진다. 그럴수록 자주관리의 주체와 그 범위도 더욱 사회적이어야만 한다. 자주관리의 범위가 기업 단위 안에만 갇혀서도 안 되고, 그 주체가 해당 기업 노동자들만일 수도 없다. 유관 업체의 모든 노동자들, 지역의 모든 노동자들이 그 주체여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소비자, 지역 주민 등도 그 주체여야 한다. 따라서 자주관리 운동은 개별 노동 현장의 운동에 머무를 수 없다. 보다 많은 노동자들 사이에 단결을 확대하고 광범한 민중 세력들 사이의 동맹을 촉진하는 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에 보다 주목해야 한다.
 
진보 좌파의 목표는 대위기의 진원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이다. 혼합 경제는 이 극복 과정, 즉 탈자본주의 대안 사회로 나아가는 여정 그 자체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과도적인 경제 구조가 소극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향할 탈자본주의 대안 사회는 과거의 국가사회주의 같이 어떤 전일적 지배 요소로 이뤄진 일괴암(monolithic) 사회일 수 없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단지 국가를 민주화한다는 점에서만 ‘민주적’인 것이 아니다. 국가 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이 주역이 된다는 점에서 또한 ‘민주적’인 것이다. 혼합 경제는 이러한 민주적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데 가장 적합한 경로다. 혼합 경제는 다주체의 복합 사회주의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물론 진화 과정에는 단절적 변혁의 계기들도 포함된다).
 
탈자본주의 대안 사회의 성숙을 확인할 잣대로 중요한 것은 필자가 아래에 제시한 것과 같은 몇 가지 원칙들이다. 이들 원칙이 과도기 경제 내에서 서로 다른 각 부문들 사이의 경계를 넘어 얼마나 관철되고 있는지가 성숙의 가늠자가 될 것이다. 
 
그 첫째는 생산 및 소비 활동의 생태적 지속 가능성의 확보다. 예를 들어, 에너지 전환과 농업 회생, 지역 순환 경제 구축 등을 중심으로 한 전 사회적 생태 전환의 진전 여부. 둘째는 시민들의 경제적 자치 능력의 확대, 즉 경제 민주주의의 근본 조건 확보다. 이것은 다시 보편적 복지의 충족과 노동시간의 전반적 단축, 그리고 다양한 자주관리 활동에 대한 참여로 나타날 것이다.
 
셋째는 지역 순환 경제와 일국 경제, 지역(동아시아, 유럽, 라틴아메리카 등) 경제 그리고 세계 경제 사이의 최적 결합을 찾는 것이다. 어떤 폐쇄 경제나 환상적 세계화가 아니라 각 경제 단위 사이의 생산 및 교역 활동의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균형을 형성하는 일.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혼돈의 시기에 우리가 반드시 도전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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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전이 필요하다” (레디앙, 2008년 11월 24일 (월) 15:23:37 장석준 / 진보신당 서울 당원)
[동시대인의 의견④-1] 경직된 진지전, 참호 고립, 기업별노조 
 
파시즘의 부활 우려가 모두 다 쓸 데 없다거나 아주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대혼돈의 시대에 한국 자본주의가 보여줄 수밖에 없을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분명 예언자의 경고를 담고 있다. 그 경고의 대상은 한국 자본주의의 참을 수 없는 경직성이다.
 
몇몇 시간의 마디에도 불구하고 군부 독재 정권 시기에 형성된 관성들은 의연히 지속되고 있다. 그 기본 골격이 크게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새롭게 이식된 요소들과 결합해 그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토건 국가의 양상이 그 한 예다.
 
수출 대자본의 성장에 사회의 다른 모든 요소들을 희생시키는 약탈형 축적 구조, 농업과 농촌의 지속적인 파괴,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지역간 불균등 결합 발전 구조, 향락산업 등 룸펜적 요소로 내수를 지탱하는 전반적 부패화 경향 등등. 이런 것들이 이제껏 한국의 지배 계급이 경험하고 학습한 유일한 생존과 번영의 방식이다. 어쨌든 이들은 이런 구조와 관성으로 1960년대 이래 한 세대 이상을 버텨왔다.
 
한데 이 모든 궤적의 이면에는 세계사의 압도적인 배경이, 그 강력한 버팀목이 존재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등장에서부터 후견자 역할을 해온 미국 헤게모니였다. 그런데 이제, 지난 60여 년간(두 세대 이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미국 헤게모니의 단순한 변동이 아닌 그 노골적인 해체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지배 계급으로서도 그들 나름의 ‘변화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대자본의 기득권이나 부동산 투기 문화 같은 경제적, 분파적(그람시의 용어로는 동업조합주의적) 이해를 침해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 자본주의의 유지를 위해 지배 체제 전체를 새로 짤 리더십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배 계급의 각 분파들은 저마다의 경제적 이해에 단단히 갇혀서 그 어느 세력도 새롭고 전반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 결국 교착 상태가 장기화한다. 이 궁지의 인격적 표현이 결국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민주당의 대안 부재 상황 아닌가. 만약 전 지구적인 격변이 지속되는 가운데(특히 동아시아에서 보다 역동적으로 나타날 텐데), 국내에서는 이러한 지도력 공백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 때에는 진짜 파시즘이 현실 대안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더욱 비관적인 것은 경직된 게 지배 계급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민중들 역시 한국 자본주의의 경직된 구조에 깊숙이 얽혀 있다. 사실 노동자들 자신이 자본의 축적 구조나 문화에 일정하게 종속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라면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한 ‘종속’이 아니라 그것의 ‘경직성’에 있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는 확실히 유별난 데가 있다. 민중들의 선택의 폭이 유례없이 제한돼 있다. 
 
한국의 노동자, 민중에게는 기존 자본주의 구조가 제시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으며, 따라서 그만큼 기존의 경직된 구조 안에 너무나 꽉 끼어 있다.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구명선에 타기 위한 경쟁이 무서운 힘으로 사람들을 지배한다.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민중운동 스스로 그 경직성을 강화하기도 했다. 87년 이후 성장한 민주노조운동이 기업별 노동조합 구조에 갇힌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만약 민중 세력 스스로 이제까지 당연시돼온 선택의 폭에서 다만 한 발자국이라도 비껴나가는 용기와 결단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제 우리를 기다릴 것은 “서로 투쟁하던 두 계급의 공멸”(『공산당 선언』)이라는 또 다른 비극의 한 광경일 것이다. 
 
약한 쪽이 강한 쪽에 맞서 정규전을 고집한다면, 몇몇 진지를 고수하는 데 집착해서 경직된 전략을 펼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20세기 전쟁사에는 그 풍부한 실례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제껏 한국의 노동자, 민중운동은 일본군에 정규군으로 맞서다가 패배와 후퇴를 거듭한 장개석 정부와 비슷한 처지였는지 모른다. 
 
그람시의 비유는, 그가 말한 ‘진지전’을 ‘기동전’의 대립 개념, 즉 ‘참호전’이 아니라 ‘총력전’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현상을 뜻하려던 것으로 이해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총력전, 곧 인민 전쟁. 그리고 이것을 보다 명확히 이해한 것은 (옥중의 그람시가 아니라)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었다. 그들의 군사 전략은 유격전, 즉 게릴라전이었다. 
 
유격전이 정규전과 구별되는 그 첫째 특성은 기동성이다. 게릴라 부대는 기존 진지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의 전선은 경직되어 있지 않다. 진지 자체가 이동한다. 그래서 이들은 퇴각 중인 정규군과는 달리 (비록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새로운 정규군의 건설로 발전해야 한다. 게릴라전의 목적은 압도적 다수의 근로 대중, 즉 농민에 바탕을 둔 새 정규군의 형성 과정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는 데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인민전쟁 개념으로 재해석된 우리 나름의 진지전이다. 그것은 곧 일단 기존의 요새에 고립되어 있던 상황에서 탈피하고, 유격전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여, 결국은 민중들 사이에서 새 정규군을 다시 건설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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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주체를 성장시키자” (레디앙,  2008년 11월 25일 (화) 09:29:09 장석준 / 진보신당 서울 당원)
[동시대인의 의견④-2] 지금부터 진보정당운동이 해야 할 일 
 
우리의 유랑 군대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과거의 요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1단계의 정규전은 이미 패배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유격전을 시작해야 한다. 
 
게릴라 부대는 적에 맞서 낡은 정규전 방식으로 싸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존 정규군과 같은 지평에서 경쟁하려 하지도 않는다. 게릴라 부대는 기왕의 전장에서 단지 한 걸음만 거리를 둔다. 두 걸음도 아니고 오직 한 걸음이다. 이 단 한 걸음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적을 교란하면서 기존 정규군을 선동하여 그 재구성(노동운동의 경우라면, 계급연대-사회운동적 노동조합운동)을 촉진한다.
 
그러자면 민중들 사이에서 유격 부대의 기동성을 강화할 새로운 요소들을 끊임없이 충원해야 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경직된 구조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운 부분들, 흐름들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그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자유’는 역설적으로 사회로부터 좀 더 방치되고 배제된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즉,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 여성, 소외된 지역 주민, 88만원 세대, 웹2.0세대 등등. 새로운 진보정당은 바로 이들의 정당이 되어야 한다. 진보신당 제2창당 토론에서 나온 의견들처럼,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의 정당’, ‘여성의 정당’, ‘지역의 정당’이어야 한다. 
 
변화는 여전히 다수자 전략에서 나온다. 유격대는 다시 다수 대중을 획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지만, 게릴라전의 목표는 정규군을 새로 형성하는 데 있다. 이 대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보다 많은 수의 대중이 한국 자본주의의 경직된 구조로부터 조금이라도 이완되도록 만드는 일이다. 틈을 벌리고 그것이 한국 사회 전체를 가로지르게 해야 한다. 
 
풀뿌리 부문의 건설이나 지방 수준의 실천 등의 의미를 이런 맥락에서 되씹어볼 수 있다. 이것은 곧 민중들 스스로 기존 구조의 바깥에서 새로운 선택지들(혹은 그것의 맹아라도)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실천 과정에서 그 때 그 때 정세에 맞는 연합 전술 같은 게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 세력 간 연합은 진보, 민중 세력의 재구성이라는 더 근본적인 목표에 철저히 종속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낡은 정규군(민주당이든 과거 방식의 진보정당이든)에 재흡수될 위험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이제부터 진보정당운동의 과제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은 지속될 대혼돈의 시대를 극복할 주체들을 성장시키는 일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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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6 21:01 2009/01/06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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