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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미래』, 그리고 『미래의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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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그와 함께 일했던 정치인들과 일군의 학자들은 노 전 대통령의 유지를 계승 발전시키는 정책연구서를 발간하기로 하고, 현재 그 준비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연말과 내년 초까지 모두 세 권의 책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연구책자 시리즈의 제목은 『진보의 미래』다. ‘진보’나 ‘보수’라는 것이 다분히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어떤 정치세력이 ‘진보’나 ‘보수’를 자처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노무현 정권과 그 전신이라 할 김대중 정권을 ‘진보’라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구분법에 따르자면 한국의 민주당들은 전통적이고 완고한 보수정당일 뿐더러,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구사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사회정책 역시 ‘진보’보다는 ‘보수’이며, 유럽적 기준으로 보면 '극보수'에 가깝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진지하게, 스스로를 ‘진보’라 규정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김 정권과 노 정권은 국민을 향해서 자신들이 보수 전통 위에 서있음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간혹 ‘진보’인 척하는 경우도 있기는 했는데, 이는 주로 극우집단과의 공방에서 오가는 정치적 수사에 한해서였다. 따라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동지'들이 ‘진보의 미래’라는 기치를 높이 들고 나온 것에 대해서는 한 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상대적인 개념이라 해도, 정책으로 나타난 그들의 10년을 '진보'로 부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 많다.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적은 명찰을 패용한다고 진보가 되는 것은 아닐 터, 구체적 비전과 정책을 놓고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진보신당 정책연구소 ‘미래상상’과 <레디앙>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동지'들이 발간할 예정인 『진보의 미래』에 대당되는 『미래의 진보』를 기획하고, 12월 초순 경에 발간하기로 한 배경이다. 『미래의 진보』는 ‘진보’와 ‘보수’에 대한 올바른 정의, 노무현 정부가 펼친 각종 정책에 대한 비판적 평가, 그리고 ‘짝퉁’이 아닌 진짜 진보의 비전과 정책, 그리고 미래에 대한 토론을 담으려 노력했다. 아래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의 글은 20여 꼭지로 구성될『미래의 진보』의 일부이며, <레디앙> 지면에 3회로 나누어 소개한다. <레디앙 편집자 주>
 
그들은 왜 '좌파정권'으로 불렸을까 (레디앙, 2009년 11월 05일 (목) 13:29:14 이대근 / 경향신문 논설위원)
[DJ-노무현 정권은 진보?①] "민주파의 봄날은 벌써 갔다" 
 
'민주파'여, 이명박 악마화하지 말라 (레디앙, 2009년 11월 06일 (금) 09:23:56 이대근 / 경향신문 논설위원)
[DJ-노무현 정권은 진보?②] "당신들과 본질적으로 같다" 
 
진보, 분당후 쇄신 없는 것 놀라워 (레디앙, 2009년 11월 07일 (토) 14:00:34 이대근 / 경향신문 논설위원)
[DJ-노무현 정권은 진보?③] 민주대연합, 환상 또는 거짓 
  
위의 글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두 번째 유고집 『진보의 미래』에 대당되는 『미래의 진보』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DJ-노무현 정권이 왜 진보라고 할 수 없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보의 미래』는 발간되었다. 여기저기에 노빠들의 서평이 이어진다. 이 책을 보게 된다면 정말 '진보의 미래'를 발견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내가 서점에서 잠시 훑어본 바로는 여기에서 '진보의 미래'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 정도는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들도 고민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석준 동지가 레디앙에 <진보의 미래>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서평을 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 때문에라고 하면서... 글쎄다. 과연 그 정도일까. 너무 과분한 찬사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의 미래가 떠올려지지 않았다. '더이상 분신으로 항거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했던 그와 우리의 미래가 겹쳐보인다면 너무 가혹하다. 
 
아래 서평기사들 중에 인용되는 것들을 보니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 보다. 하긴 그처럼 하고 싶은 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중요한 것은 노무현과 그 일파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말들을 실천에 옮길 기회를 가졌으면서도 그러하지 못했고,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시대적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점이다. 
 
물론 함께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벗어나 우리의 길을 발견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잘해도 노무현과 그 일파가 걸어갔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서구에서도 집권한 사민주의 세력들이 한역할이라고 해봐야 우파가 저질러놓은 쓰레기를 치우는 역할, 그래서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하는데 일조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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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불행... 분배, 해보지도 못하고 몰매만 (오마이뉴스, 09.11.25 10:32  황방열)
 가장 아팠던 부분은 노동유연화의 수용"
노무현 두번째 유고집 '진보의 미래' 출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과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은 25일 노 전 대통령의 유고집 '진보의 미래-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동녘출판사)를 발간했다. 그의 유고집으로는 '성공과 좌절'에 이어 두 번째다.
 
그는 신자유주의를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으로 보는 것에 반대했다. "이 논리로 가면 유럽의 진보주의 정부들, 이른바 제3의 길이라고 불리는 정권 아래서도 정부혁신, 구조조정, 아웃소싱, 민영화, 규제완화, 노동의 유연화, 개방 등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이들 정권은 신자유주의 보수정권이다, 이렇게 말해야 된다." (80쪽)
 
신자유주의 주장의 일부를 수용한다고 해서 이를 신자유주의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실제적으로 강조하는 핵심 가치는 감세와 복지의 축소이다. 여기에 대하여는 분명하게 '아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냐, 국가냐라든가 민영화, 규제완화, 노동의 유연화 등과 같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정책수준의 선택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는 일들에 관해서는 '그것은 구체적인 타당성의 문제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보자', 이런 융통성 있는 태도로 가는 게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85쪽)
 
대신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을 '복지와 분배'라고 규정했다. 이는 시장과 경쟁을 보수와 진보의 기준으로 보는 시각에 대한 반론이다. "지금 지구상에 현존하는 진보주의에 시장과 경쟁을 반대하는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한 진보를 기준으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노동유연화의 수용'을 꼽았다. "우리가 진짜 무너진 건, 그 핵심은 노동이다.…노동의 유연성을,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인데…, 아웃소싱을 우리가 불법이라고 규정해서 잘라내지를 못하니까 정부의 칼이 현장에서 파업하는 사람들한테 겨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32, 233쪽) 그는 이 노동유연화 문제를, 빈부격차를 발생시킨 큰 원인으로 규정했다. 또 전 세계적 관점에서도 "'노동의 유연화, 그것도 우린 할 수 있어'하고 놔버린 게 진보주의의 가장 아팠던 대목"이라고 했다.
 
그에게 가장 곤혹스러웠을 '김대중·노무현은 신자유주의자인가'라는 질문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진보정권이었나? '제3의 길', 유럽의 진보주의 기준으로 평가해 보자. 그래도 한계는 분명하다…무엇이 발목을 잡았을까. 한국의 이념구도,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조류, 제3의 길 노선의 세례, 위기와 극복을 위한 비상대책, 정치세력의 한계-소수파 정권, 여론을 주도하는 조직적 세력의 열세, 진보주의 분파와 분열과 갈등" (99쪽)
 
그러면서 "그걸 한 번 시도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보수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은 것이냐, 아니면 실질적으로 세계의 변화를 받아들인 것이냐는…(것을 정리해보려 한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의 이 같은 고민들은 '국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집약된다. 그는 국민들의 행복실현을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구현돼야만 하며, 민주주의는 조직된 시민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시민'은 민주주의의 핵심개념이고, 그는 시민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을 진보주의, 민주주의라고 규정한다. 이 때문에 그는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간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도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 우리 쪽의 동질감을 만들어 주고, 우리는 착한 사람이고 뭔가 미래를 위해서 기여할 것처럼 하는 그런 분위기가 지금도 여전한 것이 현실이다. 오늘도 대중적 분위기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거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거냐에 대해서 과거 반독재 구호처럼 한 개인을 타도하는 것, 한 세력을 타도하는 것, 그것이 아니고,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고 다음 세기를 지배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의 가치 체계가 중요한 것이다."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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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무너진 건, 노동유연성 받아들인 것" (프레시안, 윤태곤 기자, 2009-11-25 오후 4:23:20)
노무현 제2 유고집 '진보의 미래-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
 
이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은 "우리가 진짜 무너진 건, 그 핵심은 노동이다…노동의 유연성을,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인데…, 아웃소싱을 우리가 불법이라고 규정해서 잘라내지를 못하니까 정부의 칼이 현장에서 파업하는 사람들한테 겨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면서 노동 유연성 수용을 최대의 패착으로 꼽았다.
 
그는 또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신자유주의라고 획일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다…시장이냐, 국가냐라든가 민영화, 규제완화, 노동의 유연화 등과 같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정책수준의 선택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는 일들에 관해서는 '그것은 구체적인 타당성의 문제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보자', 이런 융통성 있는 태도로 가는 게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책에 나타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동유연성 확산·양극화·법인세 감세와 복지 예산을 좀 더 확충하지 못했던 점, 즉 신자유주의적 정책 시행을 뼈저리게 후회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부분적 수용'이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혼란은 이 책에선 "그런 고민들이 있습니다. 근데 지금 뭐 다른 방법도 없죠? 우리가 해야죠, 그죠? 우리가 풀자고"정도로 마무리 된다.
 
이 책에서도 부동산 정책, 노동 유연성 수용, 한미FTA 추진, 이라크 파병 등 노 전 대통령 임기 중 논란이 컸던 문제들에 대한 막전막후의 구체적인 회고는 잘 엿보이지 않는다. 이같은 문제들은 대체로 '진보와 보수', '신자유주의와 현실' 같은 식으로 추상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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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도 못하고 몰매… 난 불행한 대통령” (경향, 최우규기자, 2009-11-25 18:12:47)
ㆍ노무현 전 대통령 유고집 ‘진보의 미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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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너진 건 노동유연성 수용 때문” (한겨레, 임석규 기자, 2009-11-25 오후 08:07:42)
노무현 전 대통령 미공개 기록 ‘진보의 미래’ 출간
“이라크 파병, 사리에 맞지 않는 일 한 것” 고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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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사람이다, 진보의 핵심 사상은 연대" (오마이뉴스, 09.11.26 15:11  이해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고집 <진보의 미래>를 읽고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한 것처럼 '진보에도 경쟁력과 효율성 향상을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개방·규제완화·민영화 등 민주정부 10년 동안 선택한 신자유주의 정책 일부는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개방형 통상국가인 '한국경제의 체질상 유리하냐 불리하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생의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등 양극화와 빈부격차의 문제는 심각하다.
 
그는 정치전략과 세력 이전에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고 다음 세기를 지배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의 가치체계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은 사람이다.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는 가치를 함께 인식하는 진보적 사상과 시민을 육성하자. 시민 속으로 들어가자. 시민과 함께 행동하자. 시민이 지도자를 만들고 스스로 지도자가 되는 시민주권을 실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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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돈 편이 아니라 사람 편으로 간다 (브레이크뉴스, 정리/문시림 기자, 2009/11/30 [07:01])
노무현 전대통령, 미공개 육필원고 '진보의 미래' 출간
 
노 전 대통령은 이 책에서 “어떤 책을 만들 것인가? 진보주의에 관한 책을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세계의 역사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역사는 진보주의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사회적 논쟁의 중심 자리를 차지해야 지역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보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입니다.”(20쪽)라고 피력했다.
 
민주주의와 진보의 발전을 위해, 우리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책의 모습을 그려 나갔다. 그 책은 “우선 읽기 쉽고, 재미있고, 읽은 내용을 남에게 옮기기” 쉬운 것이었다. 그 책이 필요한 까닭은 “국민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시민의 가치관이 바뀌면 시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발전하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지난날의 역사를 보면 책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좋은 책이 필요하며, 그 좋은 책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와 진보의 이념을 넓힐 생각이었던 것이다.
 
“진보냐 보수냐 하면 사람들이 다 찡그리는데 피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죠?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고 이걸 회피할 방법이 없어요. 이것 빼고는 말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이념 논쟁이에요. 회피할 문제는 아니고 결국은 이 고비를 넘어서야 우리 운명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진보냐 보수냐’라는 큰 두 물줄기, 결국은 샛강이 100개라도 이 두 개의 줄기 속으로 합류하고 그 다음에 국민의 행복이라고 하는 하나의 강에 통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보와 보수에 대한 이해와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죠.”(148쪽)
 
진보의 가치는 자유, 평등, 평화, 박애, 행복을 강조하고, 보수의 가치는 시장과 경쟁을 강조한다. 진보의 핵심은 ‘복지’와 ‘분배’다. 그러나 이 핵심 가치를 말하려고 하면, 늘 보수주의의 ‘경제 성장’이라는 단어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곧 보수의 가치로 인해 진보의 가치가 등한시된다는 것이다. 특히 ‘선진국 진입, 세계 몇 위 국가’ 등과 같은 장밋빛 청사진만 제시하는 성장 일변도의 정책이 진보의 핵심 가치를 가린다는 것이다.
 
문제는 결국 ‘돈이냐, 사람이냐’라는 단어로 요약되는데, 우리가 지금 너무 ‘돈’에만 매몰되어 있어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과 복지를 어떻게 할 거냐’는 지금 보수주의 시대 가장 큰 논쟁입니다. 지금 복지라는 것이 밀리고 있잖아요. 이론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지금 밀리고 있는데, 사실은 그거 경제 논쟁인 것 같지만 분배 논쟁입니다. 성장 논쟁인 것 같지만 분배 논쟁이고, 정치 논쟁이에요. 계급투쟁이고, 정치투쟁이에요. 경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건 다 정치적인 문제예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 정부라고 한다. 정통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한다.”(79쪽)
“어떻든 진보주의도 ‘그거 우리도 할 수 있어’ 하면서 규제 혁파 많이 했어요. 그런데 ‘노동의 유연화, 그것도 우린 할 수 있어’ 하고 놔버린 게 진보주의의 제일 아픈 데죠. 가장 아팠던 것이 이 대목입니다.”(212쪽)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정책 중 가장 진보주의와 충돌하는 게 ‘노동의 유연화’라고 말하고 있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계속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 정책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우리가 진짜 무너진 건, 그 핵심은 노동이에요. 핵심적으로 아주 중요한 벽이 무너진 것은 노동의 유연성을, 우리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에요.”
 
“그야말로 역사의 진보를 밀고 가는 역사의 주체가 필요합니다. 민주주의의 이상과 목표를 분명하게 품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운영해 갈 수 있는 시민 세력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답은 민주주의밖에 없어요. 지배 수단이라는 것을 놓고 정치와 권력을 좌지우지하지 않도록 시민들이 똑똑히 제 몫을 다하자, 그것 말고 달리 있겠어요?”(309쪽)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냐에 따라 정부의 정책과 세상도 변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노무현은 “민주주의의 미래, 진보의 미래는 국민의 생각만큼만 간다”고 힘주어 말한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가고 다음 세기를 지배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의 가치 체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민이 주권자로서 돈의 지배를 물리치고 스스로의 권리를 찾아 올바르게 행사하면 이 혼란스러운 세상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 막강한 돈의 지배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짜내고 이를 지혜롭게 조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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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에 빠진 내 청춘의 이유를 다시 만나다 (오마이뉴스, 09.12.01 15:40  안희정)
[서평]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고집 <진보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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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노무현이 남긴 미래의 민주주의 (2009-12-04 10:57 데일리노컷뉴스 김정욱 기자)
[BOOK] 서거 직전까지의 미공개 육필원고·육성기록 엮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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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짱이 남은 자들에게 묻는 ‘진보의 미래’ (한겨레21 2009.12.04 제788호, 정혁준 기자)
[초점] 노 전 대통령 두 번째 유고집 출간… ‘진보·보수가 뭐냐’ 얘기 한번 해보자
 
지난 9월 펴낸 <성공과 좌절>(학고재 펴냄·1만5천원)이 스스로 재임 기간을 되돌아보는 ‘회고록’이라면, <진보의 미래>는 퇴임 이후 그가 살아가고자 했던 ‘희망’이다. 315쪽에 이르는 잘 장정된 두 번째 책에서 그는 여전히 진지했고, 고민했고,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우고 싶어했다. ‘국가란 무엇이냐’와 같은 도저한 질문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메모를 하고, 글을 썼다.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 말을 건네고, 토론을 하고자 했다.
 
“재산권을 중심으로 보고 평등을 강조하면 자유가 제약을 받는 것인데, 생존권이란 것을, 별 볼일 없는 부자 아닌 사람의 생존권을 중심으로 보면 얘기가 달라져요. 평등을 강조할수록 생존권 차원에 있는 사람들은 자유가 신장되는 것이죠. …자유와 평등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나는 그렇습니다. 불평등이 없으면 지배가 발생하지 않으니까 자유니 속박이니 하는 개념이 싸움이 될 일도 없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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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숙연하게 만든 그의 책 (레디앙, 2009년 12월 04일 (금) 10:28:04 장석준)
[서평] 노무현 유고집 『진보의 미래』…"그토록 잘 알았으면서"
 
사실 제1부의 내용을 인터넷으로 처음 보았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보수의 시대’니 ‘진보의 시대’니 하는 말들이 생뚱맞게 들렸고, 정치인이 왜 사회과학자 풍의 글을 쓰려 했는지, 의아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그의 구술(제2부)을 보니 비로소 그가 고민했던 것, 말하고 싶었던 것이 실감 있게 와 닿았다. 성긴 활자로 200쪽 가량 되는 이 지면들에는 평소 그의 어투가 그대로 묻어 있어서 마치 그와 직접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독서하는 내내 평자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정도 깊이 있는 고민을 하는 정치가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과연 얼마나 될까”하는 경탄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토록 명석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 왜 그것밖에 못했을까”라는, 그 경탄에 비례하는, 의문이었다.
 
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론으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다. 아니,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과감한 자기 비판 역시 곳곳에서 돌출한다. 생전 노 전 대통령의 그 지나치게 돌발적이던 모습은 이제 이 책 안에서는 자기 비판과 변명이라는 양 극단 사이의 좌충우돌로 반복된다. 가령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를 ‘노동의 유연화’에서 찾는 대목이 그러하다. “제일 아픈 게 어디냐 하면 노동의 유연성입니다.”(211-212쪽) “우리가 진짜 무너진 건, 그 핵심은 노동이에요. 핵심적으로 아주 중요한 벽이 무너진 것은 노동의 유연성을, 우리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에요.” (232쪽) “빈부 격차의 원인을 우리나라에서 얘기하면 노동의 유연화라는 게 굉장히 크게 작용하고 있거든요.” (249쪽)
 
“넘어설 수 없는 운명의 지평”, 그것을 노무현은 제시하고 싶어 한다. “김대중 ․ 노무현이 진보주의를 배신했다면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었던 것 아니냐”(124쪽)라고 토로할 때의 그 “사연” 말이다. 이 “사연”을 해명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만 운명의 결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펼쳐보였던 그 미덕과 분투가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럼으로써 자신은 넘어서지 못했던 그 모진 운명에 맞서 새로운 주인공들의 투쟁을 고무하고 독려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이 도달한 그 해명은 한 마디로, 참여정권이 “보수 시대의 진보주의 정부”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계사적 시대 인식이 중요해진다. 그는 이른바 ‘보수주의’, ‘진보주의’라는 두 주인공과 함께, ‘보수의 시대’, ‘진보의 시대’라는 시대 구분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보수의 시대’에 ‘진보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진보 원리주의’와 ‘제3의 길’, 두 노선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이 중 ‘제3의 길’을 택했고,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보수의 시대’에 그래도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진보주의’를 펼치려던 선택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러한 자기 이해로부터 참여정부의 공과에 대한 복잡한 소회들을 일관되게 정리해보려 한다.
 
더 이상 비극만은 아니게 된 새로운 무대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노 전 대통령은 그 주체를 ‘시민’에서 찾는다. “내가 말하는 시민이라는 것은 자기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 자기와 정치, 자기와 권력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적어도 자기의 몫을 주장할 줄 알고 자기 몫을 넘어서 내 이웃과 정치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 시민의 범위를 넓혀 나가자는 것이 진보주의, 시민의 범위를 넓혀 나가는 과정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295쪽)
 
평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저자 노무현의 도저한 시대 인식이었다. 일정한 자기 변론의 취지에서 출발했다고는 해도, 어쨌든 세계사의 풍향을 읽으려는 노력을 통해 그는 뭔가를 감지했다. 그 ‘뭔가’가 빛을 발하는 페이지들이 있다. 가령 앞으로 우리가 당면한 과제가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문제, 자연과 문명의 충돌 속에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 미래를 확보하느냐는 문제라고 요령 있게 정리하는 대목(134쪽)이 그러하며, 이러한 난문들을 해결하려면 근대적 이성주의만이 아니라 “보편적 위협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는 대목(296쪽)이 그러하다.
 
그는 신자유주의와의 대립의 핵심이 “빈부 격차하고 노동보호에 관한 문제, 분배와 재분배에 관한 것”(192쪽)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을 이토록 명확히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가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그는 다름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실패했다. 그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는가? 이 난처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오직 ‘보수의 시대’여서 그랬다는 것뿐이라면 그것은 공허하다. 그리고 현실에 들어맞지도 않는다. 그와 같은 시기에 집권한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권들이 있다.
 
떠난 이가 남긴 말들에 어떨 때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것밖에 못한” 그 이유에 대해서만은 냉정하게 다른 답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그 답의 일단은 『진보의 미래』가 말하면서 또한 말하지 않는 그 ‘빈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과 “지배권을 넘겨 받은 자본”이 도대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자본의 지배권’은 그러려니 하고 그 빈 구석에서 ‘시민의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자본의 지배권’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힘’으로 ‘분배와 복지’를 쟁취하자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자본의 지배권’ 그것에 맞서기 위해 ‘시민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진보 원리주의’라는 간편한 규정에 떠밀려 조명 받지 못한 ‘진보’의 얼굴은 ‘자본의 지배권’과 정면으로 맞서는 어떤 입장이고 세력이며 지향이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자본의 지배권’을 용인하지 않고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자본의 지배권’이 관철되는 그 영역, 즉 경제 영역으로까지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일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분배와 복지는 그 결과물일 뿐이다. 전쟁의 진짜 이름은 ‘자본과의 대결’이다. 그러나 ‘대결’은 어디에 있었던가?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그런 대결은 없었다. 그리고 이 유고집 『진보의 미래』 안에도 그런 대결은 결코 이야기되지 않는 무언가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것밖에 못한 이유”가 꼭 이것만은 아니다. 또 다른 이유들은 아마도 완전히 이 책 바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바로 하필 집권 이후에야 이런 책을 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권좌에서 물러나고 나서야 자신의 철학을 짚어보고 있다는 사실, 실패 이후에야 정책과 전략을 따지고 있다는 사실, 권력을 놓고 나서야 권력의 주인이 누가 됐어야 했는지 이야기한다는 사실, 즉 모든 일이 저질러지고 나서야 이 모든 걸 돌아본다는 사실. 그토록 그와 그 주위의 사람들은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점이 우리로 하여금 이 책을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기지 못하게 한다. 참여정부의 집권 세력이 맞닥뜨린 이 상황은 고스란히 진보정당의 몫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자본에 맞설 조직된 힘이 성숙해있지 않다면, 이것은 필연이다. 그래서 평자는 이 책 <진보의 미래>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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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1 16:21 2009/12/1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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