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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병리학]

Paul Farmer < Pathologies of power - health, human right, and the new war on the poor> California University Press 2005 (김주연, 리병도 옮김. [권력의 병리학] 후마니타스 2009)

 

 

 

올해 번역서가 출간되기는 했지만, 미국에 머물던 당시 사놓았던 책이 있어서 그걸 읽었다.

한글판도 있는데 굳이 영문판 읽는다고, 잘난체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 비싼 돈 주고 산 책을 냅두고 또 새책을 사란 말이냐... ㅡ.ㅡ

 

약간의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외면하거나 혹은 냉소해버릴 수 없는 엄청난 경험과 슬픈 진실,  그리고 저자의 감성적/이성적 분노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천상 임상의사인 그의 직접 서비스 제공 (이걸 pragmatic solidarity 라고 칭했다)  고집 원칙이 가끔 아쉬움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건 사실 당연한거다. 앞에서 당장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원칙이나 법개정이니, 근본적 대책이 어떻고 하는 건 한가하게 비춰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노력들이 함께 이루어져야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의 강점은, 대부분의 인도주의적 구호/원조활동이 그리는  '따뜻한 마음'과 '불쌍한 사람들' 이면의 구조적 폭력 (structural violence)과 권력의 병리학 (pathologies of power)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른손으로는 자선 활동을, 왼손으로는 가공할 폭력을 행사하는 신자유주의/보수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은 매섭다. 한국에서 최근 몇 년 간 한비야 씨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참여를 통해 국제 구호활동이 관심을 끌고 있지만,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여전히 금기....  비록 시간과 공간, 드러나는 현상은 다르지만, Haiti와 Chiapas 의 가난한 이들, 러시아 구금 시설의 청년 수감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은 모두 같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조금 아쉬운 점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자체의 착취적 성격에 대해서는 그닥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가 문제삼고 있는 국제 금융기구의 활동이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어떠한 동력에서 비롯되었는지에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음. 하지만 이 책의 초점이 그건 아니잖아?)

 

파머는 국제사회 혹은 학계, 인권운동의 통상적 접근법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의 원조가 어떻게 독재정권 (Haiti와 Chiapas 에서)의 권력을 영속화시키고 민중들을 고통에 빠뜨렸는지, 인권의 협소한 법률적 해석과 정치적/시민적 권리에 치중한 인권운동이 어떻게 실질적인 사회권 침해로 이어졌는지, 비용효과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의 지원이 거부된 결핵 프로그램 때문에 어떻게 러시아 구금시설의 청년들이 약제 내성 결핵으로 죽어갔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연구자들 혹은 국제사회, 관료들의 이중적 잣대와 위선을 맹 비난하신다 (사실, 미국에 있을 때 이 분 본 적 있는데, 엄청 까칠해보임 ㅜ.ㅜ 훌륭하신데, 같이 일하기는 무서울 것 같음.......내공이나 경험이나....그 무시무시한 포스....) 

특히 '중립성'이라는 이름으로 피억압 민중과 가해자들의 주장, 그 어디 사이엔가 진실이 있는 것처럼 호도해버리는 가장된 당파성, Haiti 의 가난한 민중들이나 Russia 구금 시설의 수감인들이 결핵 내성을 갖게 된 것은 미신에 쉽게 빠져 근대적 의학치료를 거부하거나 생활태도가 불량하여 약을 잘 안 먹기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해버리는 선진국 연구자들의 편견, 비용효과 분석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선진국 국민과 후진국 국민의 목숨값이 다르게 계산되기 때문에 최선의 치료가 후진국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이미 내성이 생겨버린 1차 약제를 계속 퍼붓는 비효율적인(!) 원조활동을 하는 국제기구와 '전문가들'.... 또한 최근 붐을 이루고 있는 '의학윤리' 분야가 의학 신기술의 적용과 개별 진료행위에는 그토록 뜨거운 논쟁을 벌이면서도 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값싼 약제조차 복용하지 못해 죽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모르쇠하는 것, 축제나 기이한 문화체험에만 초점을 둔 인류학 연구들에 대해서도 막 야단을 치신다... (ㅡ.ㅡ)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인종적 혹은 문화적 특수성에 천착하는 '문화적 상대주의'나 '정체성의 정치학 (identity politics)'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 쪽 문화의 고유한 전통이니 우리는 그걸 인정해야 한다는게 도대체 말이 되냐는 거다. 또한 대개 인종, 젠더, 종교/문화 등에 근거한 정체성의 기저에 도도하게 흐르는 사회경제적 힘을 고려하지 않는 '인정 투쟁'은 충분치 않다는 거다.

 

(참, 본문에 보면, 임상 의사들이 개별 환자 보는데만 매몰되어서 보건의료 체계나 사회적 건강, 공중보건의 문제는 역학자들에게 미룬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그것도 오해다. 대부분의 역학자들도 이런 문제를 잘 다루지 않는다.....  )

 

그래서, 결국 저자의 결론은 무엇인가...

실천적인 방향으로 연구의 의제를 변화시켜야 하고,  또한 연구'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다 ("But remember that none of the victims of these events or processes are asking us to conduct research").

또한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해방신학에서 이야기하는 'preferential otpion for the poor'의 원칙을 수용하고, 건강권을 인권 문제의 중심에 혹은 유용한 잣대로 활용하자는 것이다.실제로, 건강을 매개로 접근하는 것은, 보편적인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크고 또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당장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면서 이를 토대로 지평을 넓혀 나가기에 유리하다.

그리고, 사회권 보장에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연대활동에서 국가나 관료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빠뜨리지 않는다. 좋은 뜻이 항상 좋게만 쓰이지 않는 경우가 많고, 더구나 인권 유린이 일어나는 경우 대부분 국가가 가해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나...........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알리는 것은 배운 자들이 가진 특권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단지 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싶다. 

관찰과 분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참여 없이는 진정한 관찰과 분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과대학이나 보건학 분야의 학생과 연구자들.... 그리고 국제연대 혹은 심지어 '봉사활동'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한번 꼭 읽어보아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정도의 경험과, 그 엄청난 경험을 이렇듯 정제된 언어로 정리해낼 수 있는 이는 지금 이 지구촌에 몇 명 없을 듯....

 

* 인용된 Edurardo Galeano 와 Paulo Freiri의 글은 기억해둘만하다.

"   The technocrats claim the privilege of irresponsibility: "We're neutral", they say.  "

"  True generosity consists precisely in fighting to destroy the causes which nourish false ch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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