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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 [휴전]

hongsili님의 [이것이 인간인가...] 에 관련된 글.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끝나나 싶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조차 순탄치는 않았다.

세계 정치라는, 도대체 우리네 일상과는 닿아있지 않을 법한 그 거대한 질서가

그들의 귀향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행군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사의 회오리에 휘말린 자들,

그들 개개인이 경험한 '비일상'을 어떻게 스스로에게 또 타인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휴전
휴전
프리모 레비
돌베개, 2010

 

 

전편 [이것이 인간인가] 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으면서, 또 읽고 나서 생겨나는 감정은 그야말로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는 경험 속에서 깨달은  '인간'으로서의 본원적 욕구와 고유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 하릴없고 상대적으로 건강하게 보낸, 그래서 가슴속에 스며드는 향수로 가득한 두 달이었다.

향수는 깨어지기 쉽고 섬세하며,

본질적으로 다른 고통이다.

구타와 추위, 배고픔, 공포, 박탈, 질병 같은,

우리가 그 때까지 겪었던 고통들보다는 더 친밀하고 인간적인 고통이다.

맑고 깨끗한 고통이다.

그러나 절박한 고통이다..."

 

물론, 전작과 다르게 문득문득 기지와 유쾌함이 발휘되기도 한다.

이전 작품이 '증언'이라는 시급한 복무에 따라 폭풍처럼 쓰여졌다면,

이 책은 무려 20년이 흐른 후에 어쩌면 (이런 말을 써도 될는지 모르지만) 관조의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찾은 후에서 더욱 차분하게 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전자가 바닥을 알 수 없는 나락에 대한 기록이라면,

과정이 어쨌든 이책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수 있기에 그런 것이기도 할게다.

 

제각기 개성이 뚜렷한, 위기 상황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변이를 보이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무척 '재미있다'

심지어 수용소를 벗어나 벌거벗은 수렵채집인의 생활을 하는 한 포로의 기술발전사(?)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무거운 마음 중에도 웃지 않을 수가 없다.

"... 그렇더라도 그 또한 사람의 아들이었으므로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지식과 덕을 추구했고

매일같이 자신의 기술과 도구를 단련했다.

그는 칼을 제작했고 그런 다음 창과 도끼도 만들었다.

시간이 있었다면 농업과 목축 기술도 재발견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건 원래 더글라스 아담스 전공인데...

러시아 수용소에서 겪은 영화상영의 일화는 또 어찌나 황당하던지...

잠시 열차가 정차한 순간 물을 길러 갔다가 차를 놓칠뻔한 이야기도 요즘 유머 게시판 수준이다.

 

그렇다고, 옮긴이가 후기에 쓴 것처럼 이 책이 그렇게 '유머 가득한 시선'이라고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독자들로 하여금 좀더 '가벼운' 마음으로 성찰에 동참하게 했다는 해설도 도저히 동의하기 어렵다.

 

프리모 레비는 차분하지만 끈질기게. 인간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 질문의 무거움은, 앞서의 유쾌함과 생동감으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모든 역경을 거치고 마침내 오른 거대한 귀환 열차는 비엔나를 거친다.

 

"우리는 패배한 독일인들과 파괴된 비엔나를 보면서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가슴 아팠다.

연민이 아니라 좀더 폭넓은 의미의 아픔이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비참함과 혼동되는, 가혹하고 곧 닥쳐올 듯한 느낌,

회복될 수 없고 결정적이고 도처에 있는 병의 느낌,

유럽의, 세계의 뱃속에 궤양처럼,

미래 재앙의 씨앗처럼 자리잡은 병마의 느낌과 혼동되는 아픔이었다."

 

열차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지나 다시 뮌헨에 정차한다.

 

"... 처음으로 우리의 발밑에 독일의, 상 슐레지안이나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바로 독일의 한 자락을 느낀다는 사실은

피곤함에 더하여, 견딜 수없는 초조함과 좌절과 긴장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심정을 한층 가중시켰다.

우리는 독일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것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인 각각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결산을 해야 할,

체스 선수들이 경기가 끝날 때 그러는 것처럼 질문하고 설명하고 논평해야 할 절박함을 느꼈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자기집 문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상적으로 자행된 조용한 대학살에 대해 '그들'은 알고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길을 가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 자식들을 바라보고

교회의 문턱을 넘어 들어갈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 아니라면 그들은 경건하게 우리에게서,

나에게서 모든 것을 당장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한다.

나는 내 팔에 문신으로 새겨진 숫자가 쓰라린 상처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을 들었다.

 

또한번 우리의 열차가 좌초하여 누워있는 역 주변,

잔해로 가득한 뮌헨의 거리들을 배회하면서

나는 마치 각자가 내게 무언가를 갚아야 하지만 갚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지불 불능의 채무자 무리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들 사이에, 아그라만테의 진영에, '지배민족'의 한가운데에 나는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었고, 많은 이들이 불구자였고,

많은 이들이 우리처럼 누더기를 입고 있었다.

그들 각자가 우리에게 당연히 질문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얼굴에서 읽을 것이라고,

겸손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고

아무도 대면해서 이야기하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귀머거리, 벙어리에 장님이었다.

의도적인 무지의 요새 속에 있는 양 자신들의 폐허 속에 피신해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강하고, 아직도 증오와 멸시를 할 수 있는,

오만과 죄의 그 오래된 매듭에 묶인 포로들이었다..."

 

나는 웬지 이 심정을 스스로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만 같다.

실제로는 이런 경험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건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적 감수성을 건드리는 프리모 레비의 탁월한 통찰력과

그에 걸맞는 담백한 글쓰기 덕분일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영성 체험' (?) 때문에 사람이 책을 읽는 게 아닌가 싶다.

작년이 존 버거의 차분함에 경도되었던 해라면,

올해는 단연 프리모 레비의 '깊이'에 몰두하는 해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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