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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때문에 눈이 부셔

여기 사람들이 오바질에는 일가견이 있기에, 방송에서 웬만큼 호들갑 떨고 이야기해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프로그램 중간 홈쇼핑 광고를 보면 amazing, incredible, oh my god 이 한 10초 간격으로 나온다.

 

하여... 평생 본 적 없는 눈폭풍 snow storm (blizzard)이 온다고 각 쇼핑센터와 비디오가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뉴스를 보면서, 저인간들 또 시작이네.. 시큰둥 했었다.

그.러.나....  장난이 아니었다. 토욜 오후부터 엄청난 바람과 함께 날리기 시작한 눈발은 일요일 점심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일욜 오후에는 꼼짝 못하고 집에만 있었다. 방송에서 "really dangerous"라고 겁을 주면서 제발 집에 있으라고 하길래 충실히 따른 셈 ㅎㅎ

 

한국에 있을 때는 눈이 정말 싫었다. 우선 서울 집은 가파른 산동네라 출퇴근 길이 정말 악몽이었다. 어려서는 연탄재들도 많이 뿌렸는데, 요즘은 연탄 떼는 집도 없는 데다가 어중간한 상태에서 사람들이 차를 움직이는 바람에 녹고, 다져지고, 얼고.... 조금만 날이 추우면 온 동네가 얼음 미끄럼틀로 변해버렸다. 넘어진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 눈이 오면 한숨부터 나오는게 일이었다. 대전은? 정말 기억도 하기 싫다. 대전은 생태적 관점에 충실하여, 눈들이 제풀에 지쳐 녹을 때까지 시에서 그냥 방치한다. 작년 초 폭설이 내렸을 때, 가장 놀라운 것은 버스가 다니질 않았다는 거다. 그만큼 눈이 쌓였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 큰 도로조차 제설 작업을 안 해주니까 눈길 경험 없는 버스들은 그냥 운행을 중단해버리고, SUV 차량을 가진 사람들만 신나서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나머지 사람들은? 걸어 다녔다. 두 시간 걸려 눈+얼음+물의 난코스를 퇴근하고 걸린 심한 감기 끝에 오늘날 한 쪽 귀가 이지경이 된 것이다.

 

이런 안 좋은 추억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 출근길 문밖을 나서는데 수북이 쌓인 눈더미들이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오염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하다보니, 눈 색깔도 순백색 그대로고,  날이 쌀쌀해서 질척거리며 녹지도 않고, 또 한국 눈과 다르게 질감이 포실포실하다보니......미로를 찾듯 눈길을 헤치며 인도와 도로 사이를 걸어다니는 것이 재미있기까지 했다. 눈 치우는 동네 사람 붙들고 같이 눈싸움이라도 하고 싶었다. 눈이 오려면 모름지기 이 정도는 와야지 어디서 명함이라도 내미는 거 아닌가.. 음하하하.... 눈길 헤치고 출근해야 하는 절박함이 없고, 산동네 미끄러운 얼음길 걱정 없고.... 환경의 변화는 사람의 취향까지도 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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