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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님의 [빈마을 공동체에 대한 단상] 에 관련된 글.
'게스츠하우스 빈집'이 검색 순위 1위에 오르기 위해서는ㅋㅋ 넘어야 할 이름들이 있다.
기형도와 김기덕.
기형도의 시 <빈집>은 다들 한번쯤 봤을 것이지만, 나중에 다시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여기서는 아직 안들어 본 사람을 위해서 백창우가 곡을 붙인 노래만 소개하고 넘어가자.
김기덕의 영화 <빈집>
'빈집'이라는 이름을 듣고 여러 사람들이 김기덕의 이름을 떠올릴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아무 상관 없다'고 강조하며 얘기하곤 했다.
김기덕의 영화는 처음 한 두 작품을 보고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빈집>을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찾아보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빈집>을 보게 된 건 순전히 아랫글 덕분이다.
로쟈, 김기덕의 <빈집> 읽기
지난주에 액션팀 회의에서 '빈집 정의하기'를 하면서 얘기나왔던
Ghost house 얘기 와도 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서 퍼 온다.
(Ghost house와 관련해서는 [빈마을 공동체에 대한 단상] 과 그 덧글들을 참고할 것.)
보고 난 소감은... 아주 좋다.
김기덕 영화를 저어하는 사람들이라도 봐도 무방하다.
씨네마빈 상영회 때 꼭 한 번 같이 봤으면 좋겠다.
빈집살이에 대해 생각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 준다.
주인보다 더 주인같은 손님.
집을 자신이 살기 전보다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손님.
먼저 살다 죽은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예를 다하는 손님.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인과 도둑과 손님의 결정적인 차이는?
가사노동은 유령의 노동-누군가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저절로 되어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노동-이 아닌가?
가지지 못한 자들의 환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유령되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등등
로쟈의 글이 훌륭해서, 영화를 본 사람들은 꼭 한 번씩 전문을 다 읽었으면 좋겠다.
아래 인용문은 내가 특히 맘에 든 부분들.
김기덕의 고백에 따르면, 그가 ‘도둑’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 빈집에서 시켜볼 수 있는 게 빨래밖에는 없었다고.
한국사회에서 집이란 건 가족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배타적인 공간이다(우리집/너네집). 그런 자기만의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한국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을 희생하며 간혹 목숨까지도 건다(한국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집이고 집값이다). 그리고 그렇게 마련한 집을 ‘행복한 집’(스위트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는 일이란 주로 외부자/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비하는 것과 인테리어(interior)하는 것이다(집을 아예 ‘탑’으로 만들기도 하고 ‘궁전’으로 만들기도 한다. 타워 팰리스). 거기서 외부성의 배제는 행복의 조건으로 전제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폐쇄된 공간의 주인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아마도 그들의 행복은 집 없는 ‘남의 불행’과의 대비 속에서만 얻어질 듯하다). 태석과 선화, 2인조 빈집살이 팀이 전전하는 집 대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빈집들은 행복이 비어있다는 의미에서도 ‘빈집’들이다.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레비나스-데리다의 윤리적 요청이기도 한데, <빈집>은 그러한 ‘환대의 윤리학’, 혹은 윤리적 요청이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지 차분하고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집이 순수한 소비의 장이 된 이상, 집에 돈을 가져오지 않는 이상 '도둑'이 아닌 행위를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모든 행위가 소비다. 그건 '주인'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합법적으로 돈을 지불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지불하지 않는 소비는 도둑이거나 착취일 뿐이다. 다소 억지스럽지만 온갖 고장난 가전제품을 고치는 것, 그리고 빨래를 그것도 손으로 하는 것이 비주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재생산(소비가 아닌) 행위다. 사실 더 중요하게는 청소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태석이 들어가는 빈집들은 모두 대체로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한 듯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특별히 청소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과연 현실의 얼마나 많은 집들이 그러할까? 사실 집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 아무도 오지 않고 또 올 수 없는 집에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집을 지저분하게 망가뜨려도 집이 비어진 채로 방치되어도 무방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한 빈민 아파트에 들렀다가 태석과 선화는 (나중에 밝혀진바) 폐암으로 숨진 독거 노인을 발견하고는 염을 해서 매장해준다. 하지만, 뒤늦게 들이닥친 아들 가족에 의해 빈집살이가 발각된 두 사람은 경찰에 넘겨진다. 태석에게 ‘납치된’ 걸로 간주된 선화는 남편에게 보내지고 태석은 무단침입 등의 죄목으로 수감된다. 거기부터가 영화의 후반부인데, 이 후반부에서 주제화되는 것은 ‘유령의 존재론’이며, 이에 의해서 전반부의 환대의 윤리학은 보충되고, 이 영화의 힘은 배가된다.
이미 남의 빈집살이를 통해서 유령 같은 생활을 해왔지만, 태석은 감금된 독방에서 더욱 완벽한 유령-되기를 연마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수행이 비변증법적인 ‘공부’인 반면에, <빈집>의 수행은 변증법적인 ‘학습’인 것('공부'와 '학습'의 차이는 다른 통신문에서 다루었다). 태석의 수행이 변증법적인 것은 간수한테 걸릴 때마다 매번 맞아가면서 학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석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며(시험해보면서/맞아가면서) 유령-되기를 터득해간다.
사회로부터 격리돼 감금된 태석은 사회로부터 보여서는 안 되는, 즉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감옥 안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간수에게 반드시) 보여야 하는 존재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이중적인 ‘사회적 규정’ 자체가 이미 태석의 유령성을 강요하는 바이기도 하다. 즉, 그는 사회에서 안 보이면서 보이는 존재여야 하며,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유령이기 이전에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미 유령인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둘은 등가이다. 즉, 사회적인 유령은 존재론적인 유령이기도 하다.
선화가 남편과의 관계를 버틸 수 있는 건 태석이라는 ‘유령’을 매개로 해서이다. 그것이 함축하는바, 유령을 집안에 들여놓을 때, 유령적 존재로서의 외부자/침입자를 환대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그나마 견딜 만한 것이 되고 행복한 것이 된다.
<빈집>이 윤리-철학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그러한 바탕에서이다(<빈집>은 “당신의 집도 혹 빈집은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불손한’ 영화이다).
유령으로서의 태석은 꿈(환상)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다. 그러니까 ‘꿈’과 ‘현실’이라는 이항적 규정을 넘어서는 제3항이다. 이 제3항을 사회학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견인해냈다는 데 이 영화의 의의가 있다(환대의 윤리와 유령의 존재론을 주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빈집>은 데리다 철학의 탁월한 영화적 번안이기도 하다.
태석의 유령되기는 모호한 점이 있기는 하다.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주인공 태석은 왜 빈집살이를 하는가? 선화는 왜 유랑하기와 유령되기를 계속하지 않고, 단지 유령과 함께 사는 것(그것은 끔찍한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에 머무는가? 감옥 안에서 태석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유령성을 강요받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감옥 밖에서의 태석은 어떠한가? 그들의 유랑과 빈집살이는 계속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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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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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재밌겠다. 영화도 재밌겠고, 비슷한 전개로 해방촌 '빈집'을 써봐도 재밌겠구나.. 크크디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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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빈마을 회의 전야제쯤으로 영화 보는 거 어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