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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이드데일 로맨스]...공동체였을까..?

  • 등록일
    2009/06/16 15:50
  • 수정일
    2009/06/16 15:50

최근 누군가의 충고대로 더울땐 머리쓰지 말고

말랑말랑한 거 보라는 충고에 마땅한 말랑말랑한 것 없어서

애써 구한 것이 이책이다....ㅎㅎ

 

말랑말랑한 로맨스나 읽어볼까 싶다가

로맨스는 로맨스인데 사회주의 공동체에서의 로맨스라는

다소 엉뚱한 구절에 눈이 박혀 읽게 되었다.....ㅎㅎ

 

 

저자는 나사니엘 호손

19세기 미국의 소설가 나사니엘 호손은 1804년 7월 4일에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태어났다. 호손의 집안은 독실한 청교도 신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는 호손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825년 보든대학교를 졸업한 후 1828년 최초의 소설 『팬쇼Fanshawe』를 출판하였으나 뒤에 미숙한 작품임을 깨닫고 회수한다.
1837년 단편집 『진부한 이야기들Twice-Told Tales』을 발표했으며, 1839년 경제적 불안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보스턴 세관에 근무하였다. 그 후 1850년 그의 대표작이 된 『주홍 글자The Scarlet Letter』를 발표하였고 이 작품은 19세기의 대표적 미국 소설이 된다. 1851년에는 『일곱 박공의 집The House of Seven Gables』을, 이듬해에는 자신이 참가했던 실험적 공동체를 무대로 한 『블라이드데일 로맨스The Blithedale Romance』를 발표하였다. 1853년 영국의 리버풀 영사(領事)로 부임하였으며, 그 후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이 여행 뒤에 『대리석 목신The Marble Faun』 (1860)을 발표하였다.

 

뭐 이정도의 작가다...??...ㅎㅎ...누구나 알듯이 교과서에 나오는

[큰바위 얼굴]의 작가다...ㅎㅎ

 

여튼

말랑말랑하게 읽었다...ㅎㅎ

 

인간 정신의 속박에 반대하고, 노동과 사랑의 숭고한 가치를 믿으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들의 진보적인 공동체로서 사회주의공동체를 실험하였다는 브룩농장을 배경으로 한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제목처럼 실은 그냥 로맨스 소설인 것같다.

중간중간 공동체에대한 작가의 체험적인 인식들이 배어나고

또한 그런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들이 들어나지만

결국은 한 남자와 두 여자를 둘러싼 극히 사적인 연애담이고

또한 지배욕에 사로잡힌 이기주의적 이상주의자와 스스로 그에게 속박당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뭐 이정도다....ㅎㅎ

 

더 심하면 악랄한 지배욕을 가진 사기꾼과 그에게 희생당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너무 천박한 평인가...?....푸하하하

 

(실은 보다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지만

말랑말랑하게 읽다보니 그저....ㅎㅎ....그랬다는 거다...ㅎㅎ)

 

다만 읽으면서

공동체운동을 하는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몇가지의 생각들을 던져주기는 한다.

특히 내부에서의 권력화 문제나

공동체적 이상과 현실의 문제처럼

어쩌면 일상의 삶이 가지는 끈질긴 속물적 근성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개개의 구성원의 문제들은

어쩌면 공동체에서의 좀더 많은 고민들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즉,  일상의 삶을 재구성하지 않는 공동체의 파국을 그렸다고나 할까...?

운동은 어쩌면 지나친 유토피아적 상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자잘한 일상의 변화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로맨스에 간간이 곁들여서 보여주는 책이다...ㅎㅎ

 

책 중에서

==>  탐욕스럽고 서로 싸우고 이기적인 세상으로부터 이제 막 결별하자마자 제기된 첫번째 문제가

바로 어떻게 하면 외부의 속물들보다 우위를 점하느냐 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라니.

그것도 그들의 전문영역인 노동에서 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회 전체의 생각이 그렇듯이 우리도 새로운 형제애가 아니라

새로운 적대적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 거대하고 더 나은 나머지 사회가 우리 편으로 돌아서기 까지는 이것도 어느 정도 예외일 수 없었다.

우리는 지금 빈약한 소수 집단을 형성함으로써 우리 사이의 유대에 철저히 비례하는 만큼

나머지 인류로부터 불가피하게 소외되었다.

 

==> 우리의 새로운 생활에 도사린 위험은 우리가 진정한 농사꾼이 될 수 없다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농사꾼 이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었다.  

         ....(중략)....우리가 연신 갈아 엎은 흙덩이가 상념으로 영화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갖고 온 상념들이 점점 흙덩이로 변해가는 형국이었다.
         육체노동은 아무런 상징성이 없었다.
         홍혼 무렵이 될 때면 우리의 정신은 한 없이 무뎌지고 멍할 뿐이었다.
         심한 육체노동은 지적 활동과 공존할 수 없었다.
         농부와 학자 즉, 농부와 불굴의 감각과 성실까지는 아니어도 가장 훌륭한 도덕적 교양을 지닌 사람은
         서로 뚜렷이 구별되는 개체일뿐 하나의 존재로 녹아 들거나 융합될 수 없다.
==> 거기에는 악마가 교묘하게 작용하기때문에,
        그들은 남아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해 억누를 수 없는 신격의 강철같은 모습안에서
        자비와 사랑만을 볼뿐 그 신격이 바로 주위를 둘러싼 어둠에 투영된 대사제인 자기자신의 잔상일뿐
        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 또한 그 본래의 목적이 고상하고 순수하면 할 수록, 그리고 그 목적을 수행하는 태도가 비이기적일 수록, 그 수행 과정에서 신과 같은 자비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천박한 이기주의로 변질되고 만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 수 있는 가능성은 그 만큼 희박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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