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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원래는 한겨레 책소개를 읽다가
천규석님의 책소개글을 발견하고 키핑(?0차원에서 퍼온 것인데
어찌하다가 퍼온 글이 블러그에 공개되고
또 어찌하다보니 앙겔님의 공개부탁을 받게 되었네요....ㅎㅎ
제가 쓴 글도 아니고 또 특별한 이야기도 아닌데
제목(?)상 호기심을 일으켰나 ?...싶어서 밍구스럽네요....ㅎㅎ
여튼 앙겔님께 죄송해서 여튼 글 올려놓습니다....ㅎㅎ
[공정무역 비판]이라는 제목
특히, 천규석님의 논지는 이미 보편화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네요..
몇 해전인가 이리저리 일종의 모색(?)을 감행할때 접하게 된 이야기인데
한실림에서는 꽤 오랬동안 논쟁(?)이 있어 왔었던 것 같더군요.
가장 크게는 한살림이 제품생산에 사용하게 되는 설탕(?)에 관한 이야기인데
유기농설탕, 그리고 이를 수입하는 문제(수입사의 윤리성..??..), 그리고 공정무역 등에 대한
이야기로 조금씩 넓어진 이야기인데 그 중에서 나름 꾸준히 한살림의 정신(?)처럼 여겨지는
어떤 신념체계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된 것이 천규석님의 논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여기저기 글들과 한살림관련 분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들은 것이라서 정확하진 않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공정무역]이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결국 식민지지배를 고착화하는 방식을
재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듯 싶네요...ㅎㅎ
다만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는 것은
천규석님의 소농자급시스템이 과연 대안이 되어 줄 것인지는 여전히 이런저런 고민을 주네요...ㅎㅎ
여튼 앙겔님이 알고싶으셨던 것이 맞을지.....^^;;
공정무역’ 불공정한 속내를 꼬집다 | |
“착취구조 숨기고 연장하는 신식민주의적 발상 소농공동체 자급자치보다 윤리적인 소비는 없다” |
|
한승동 기자 | |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 천규석 지음/실천문학사·1만5000원
공정무역은 정말 공정한가? 그리고 윤리적인가? 4년 전 “질 들뢰즈나 펠릭스 가타리류의 유목주의(노마디즘)를 국가로부터의 해방철학이라도 되는 양 떠받들면서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세계시장제국주의와 신침략주의를 합리화하는 변설임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72). 실명비판을 마다않는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생태적 자급자치 소농(두레)공동체 복원이라는 자신의 오랜 작업을 가로막는 ‘적’들이라면 그 누구와의 논쟁도 피하지 않았던 그가 이번엔 민중무역·윤리적 소비·착한 초콜릿·착한 여행 등으로도 변주되는 공정무역을 정면으로 문제삼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공정무역 이념은 옛 식민지 착취구조를 현재와 미래까지도 계속 연장 확대하려는 제국주의 국제분업체제의 신식민지주의 논리일 뿐이며,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의존관계를 은폐시켜 그 영속에 일조하는 반민중주의라는 게 천규석의 생각이다. 직거래 형식을 통해 유통 모순을 어느 정도 해소함으로써 제3세계 가난한 생산자들에게 20~30%의 이익이 더 돌아갈 수 있게 해주고, 잘사는 먼 나라 소비자들에겐 안전식품에 대한 욕구와 심리적 부채감을 해결해주며, 생태환경 보존과 세상의 수평적 연대에도 기여한다는 공정무역. 지은이에 따르면 다분히 일본 그린코프 등의 생협활동에서 자극받은 이 땅의 공정무역 운동은 마스코바도 설탕과 올리브유 등의 수입품을 취급하는 두레생협연합, 여성민우회생협, 동티모르 교육사업 지원 명목으로 동티모르 커피를 평화커피라는 브랜드로 판매하는 와이엠시에이(YMCA), 생산자에게 두 배의 가격을 주고 네팔산 커피를 수입하는 아름다운가게, 밸런타인데이에 맞춰 ‘착한 초콜릿’을 홍보하고 공정무역여행을 기획한 한국공정무역연합 등 날로 세를 얻고 있다. 이에 대해 천규석은 야멸칠 정도로 냉소적이다. “히말라야 오지의 산악국가에까지 자급 대신 세계시장에 예속시키는 데 일조하는 장삿속을 인도적 지원으로 위장하는 양두구육은 노골적으로 돈벌이에 나선 세계무역보다 오히려 더 역겹다.”
그가 지적하듯이 공정무역의 대상은 커피, 차, 카카오, 바나나, 설탕 등 주로 기호식품이다. 이들 기호식품은 상품화 역사 자체가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수탈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전세계 기호식품 주요 생산지들에는 서구 열강들이 무자비한 수탈을 위해 생필품 중심의 자급적 전통농업을 철저히 파괴한 뒤 건설한 기호식품 단작 플랜테이션(모노컬처), 도태당한 현지 노동력을 대체한 추악한 아프리카 노예무역 등 원주민 절멸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천규석도 공정무역이 상대적으로 공정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일품목 경작 때문에 외부 의존형으로 바뀐 원주민들의 삶을 온전하게 복원시켜주기보다는 오히려 그 왜곡을 더욱 심화시킨다. 그 결과 이득을 얻는 쪽은 지금의 뒤틀린 국제분업체제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기업 등 자본, 그들과 결탁한 지배그룹이 사실상 사유하는 국가다. 게다가 원거리 공정무역은 운반과 이동 등에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낭비함으로써 지구 생태계 파괴를 가속시키고, 자원 거래를 장악하고 있는 강자들의 이익을 더욱 배가시킨다. 이런 불평등·생태파괴 구조를 온존시킨 채 “사실은 자신들의 기호적 필요와 이익사업을 위해 (공정무역을) 하면서도 마치 시혜를 베풀듯”하는 공정무역의 위선을 천규석은 질타한다. 결과적으로 “공정무역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세계시장체제에 예속된 농업의 국제분업을 기정사실화하고 거기로부터 차선이라도 구하는 현실주의자들의 자기위안 행위일 뿐이다.” 대안은 그가 지난 수십년간 계속 주장해온 지역적 자급자치 소농공동체의 복원이다. 소비도 “자급자치적 소비보다 더 높은 윤리적 소비는 없고”, 또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급이다. 제국주의 ‘외세’의 식민지·신식민지 수탈 출발점은 바로 이 자급체제를 강제로 무너뜨려 외부의존체제로 만드는 것이다. 자급이 무너지면 자치도 무너진다. 자급자치 소농공동체를 무너뜨린 이 외세의 대변자, 착취의 실행주체는 자본가와 관료 등 지배세력이 사실상 사유화한 국가다. 제국주의 일본도 외세였지만, 국내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도 자급적 소농공동체에겐 외세였다. <윤리적 소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국가지배로부터의 탈피, 국가에 대한 저항, 나아가 국가 해체 없이는 인간의 진정한 해방도 임계점을 넘어버린 지구생태계 파괴 저지도 불가능하다고 거듭 외친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서도 그랬지만, ‘국가 타도’를 역설하는 지은이의 목청은 이번 책에서 더욱 단호하고 집요하다. 공정무역이 나쁜 것도 결국은 그것이 강자들의 수탈기구인 국가를 온존시키거나 더 강화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노동조합 또는 노동운동의 대안 가능성에 회의적인 이유도 자급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국가에 저항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급이 안 되면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급적 소농공동체와의 연대 없는 노동운동은 자본과 국가에 예속되거나 그들과 한통속이 돼 치명적인 살인무기 생산이나 생태파괴에도 앞장설 수 있다. 설사 노동계급이 예컨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국가를 장악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르크스가 예언했듯이 국가 소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는 건 실패로 끝난 현실사회주의 실험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유럽형 사민주의나 복지국가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거부감도 거기서 비롯된다. 소농두레공동체 복원은 그가 보기에 국가에 대한 가장 완강한 저항이며,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국가해체 작업이다. 그것은 혁명적이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권력 탈취를 통해 단기간에 달성될 순 없다. 소농공동체 복원과 국가 소멸은 오히려 권력을 버리는 기권,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을 거부하는 절약과 가난을 선택하는 결단을 통해 주체와 객체가 함께 바뀌어가는 점진적 과정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그것만이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하는 길이라고 천규석은 생각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먹거리 연대로 시장 예속 벗어나야” 한살림운동 펴는 천규석씨
상업적 수익 극대화에 매진해온 다른 유사조직들이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거둔 물량주의 성과들에 비하면 20년이 넘은 역사의 한살림 외형은 초라해 보일지도 모른다. 임원이나 활동가들이 그 때문에 불평도 하고, 빈약한 대우 때문에 사람 붙들어두기도 쉽지 않지만 그는 “한살림도 그렇게 한다면 다를 게 없다”며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천규석은 한살림운동이란 “결국 가난하게, 하지만 재미나게 살자는 것”이라며 “가난하지 않으면 이웃이 안 보인다, 가난해야 비로소 주변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가난한 삶이야말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도 했다. 시인 김지하보다 1년 늦게 들어간 서울대 미학과를 그보다 2년 먼저 졸업한 그는 학창시절에 이미 자급적 소농공동체 건설을 꿈꾸었다. 고향인 경남 창녕으로 내려간 게 1965년. 이후 반세기 가까이 “소농두레공동체 혁명”에 매진해오면서 지금과 같은 생활이 “재미나고 좋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느꼈다”며 “나보다 못사는 친구들이 없지만, 남부러울 게 없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국가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지난 정권교체 뒤 한층 더 확고해졌다. “70 평생 (국가의 언설에) 다 속고 살아왔는데, 이젠 결론을 내려야 할 때”라고 했다. 국가지상주의 시대에 일방적으로 국가를 해체한다면 외부세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겠느냐는 우려에 대해 그는 “다들 그런 고민들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시도를 하지 않으면 국가 극복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했다. 세계연방정부가 대안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쪽이 더 어렵다”며 국가가 존속하더라도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면 된다고 했다. 국민국가 거부로 인한 혼란과 무질서를 어찌할 거냐고 지레 겁먹는 것은 기우라면서, 국민국가를 대체하거나 극복할, 어떤 의미에서는 국민국가보다 훨씬 강력한 공동체의 출현이 없이 절대로 국민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말하자면 소농두레공동체만이 국가를 대체할 수 있으며, 소농두레공동체가 그만큼 강력해지지 않는 한 국가는 계속 존속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로 들렸다. 그는 당장 모두가 소농공동체에 동참하기 위해 귀농할 순 없는 일이라며, 비록 도시에서 살더라도 그런 정신으로 연대하면서 먹을거리 하나만이라도 우선 시장과 자본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살림에 호의적인 사람들조차 대다수는 건강식품을 먹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지만 그런 식의 참여도 꾸준히 오래 하다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했다. 1980년 무렵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한살림운동은 1985년 원주에서 첫출발을 했고 1986년 천규석이 두번째로 마산에서 시작했으며, 서울에 가게를 연 것은 1987년이었다. 지금은 전국 회원이 18만에 이른다. 고령이 된 그는 겨울엔 주로 대구 쪽에서 생활한다. 창녕엔 농업전문대를 나와 함께 농사짓는 아들 식구들이 살고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
음....지난 가을에
몇몇 언론사들의 취재때문에 사진 촬영을 했더랬다.
딱히 새로운 것은 없고
그저 우리들이 일하는 내내 함께 다니며 이리저리 찍었었는데
며칠전 사무실에 놀러 갔다가 우리들이 하는 일이 기사화되었다는 이야길 들었다.
음...그래서 내둥 신경 안쓰다가
이리저리 찾아 보았다는....ㅎㅎ
여튼
취재는 경향신문이 했었는데
경향신문때문에 촬영한것이
이번에 미디어충청의 [사진만평]에 실린 모양이다.
내가 일하는 직장인
[삶과 환경]은 일종의 사회적 기업으로
몇년전부터 지속적으로 언론사가 취재를 오는 편이다.
이런 언론사들의 취재가 특별하지 않을 정도로 종종 있어 왔는데
이번처럼 공개적으로 사진이 실리기는 처음인듯 싶다.
조금은 뻘쭘하기도 하고 약간은 생소하기도 하고....ㅎㅎ
여튼
그렇다는 거다
경향신문 [사회적 기업이 희망이다] 시리즈 중의 한 꼭지로 실린 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011728325&code=210000&s_code=af079
그리고 미디어 충청의 [사진만평]에 나온 기사....ㅎㅎ
http://www.cmedia.or.kr/news/view.php?board=photo&id=3174&category1=1
집집마다 김장이라는 연례행사를 치르던 지난 11월말,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하는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언젠가 밤길에서 본 듯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들의 노동은 말 그대로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노동이 항상 밤부터 새벽까지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와 세상의 주위를 끌기에 마땅치 않은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1.
익숙하고 담담한...
많은 이들이 하루 일을 마쳤을 시간, 그들의 노동은 시작 됩니다. 부쩍 쌀쌀해진 밤 날씨와 김장 쓰레기가 많아진 것 말고는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쉬운 노동과 어려운 노동, 몸이 좀 더 편한 노동과 힘든 노동, 더러움을 감내해야 하는 노동과 깨끗한 환경에서의 노동, 안전한 노동과 위험한 노동이 사람마다 있을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불합리한 차별을 만들어내기고 하지만, 세상에 소홀히 치부해도 될 노동은 없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겐 그저 삶을 위한 지극히 익숙하고 담담한 노동입니다.
2.
골목길...
담당하는 동네 골목골목을 하나하나 다 뒤져가며 뛰고 또 뛰어 다니는 사이 어느새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한 명은 이 골목, 한 명은 저 골목, 또 다른 한 명은 차를 몰고 다른 골목으로, 마치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박자 맞춰 돌아가듯이 팽팽한 짜임새로 일이 진행됩니다. 골목 하나하나를 다 외우지 못해도, 체력이 약해 다른 노동자와 박자를 못 맞춰도, 매순간 서로의 역할을 눈빛으로 잘 알아채지 못해도 하기 어려운 노동입니다.
3.
노동 & 쉼
쉬는 시간이 많아지거나 뛰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많으면 그만큼 일을 마치는 시간도 늦어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쉬는 장소와 시간은 따로 없습니다. 차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과 길거리에서 일하면서 태우는 담배 한 대가 바로 쉼이고 노동입니다.
4.
돌아오는 길
쓰레기처리장에서 마지막 쓰레기를 부리고 차량을 씻어내는 것으로 그날 일은 마무리 됩니다. 새벽 3~4시까지 꼬박 8시간을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하는 노동, 그것이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의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대로 풀어질 피곤은 아니겠지만, 이를 위로삼아 뒤늦은 하루 노동을 마감합니다.
5.
백밀러 속의 노동...
그들의 움직임이 한창일 시간, 음식물쓰레기 수거 차량의 백밀러에 담긴 그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 백밀러 속에 그들과 그들의 노동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만들고 움직이는 수많은 노동자와 그들의 노동은 항상 백밀러 속에 갇혀있습니다. 자동차라는 세상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그들과 그들의 노동은 항상 주위 깊게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습니다. 수많은 경제지표에는 알지 못할 숫자만 있을 뿐, 그들의 노동은 없습니다. 공장을 멈춰 세상이라는 자동차를 세워도, 그저 밟고 지나가버리면 백밀러 속으로 멀리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 그들의 노동이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하는 노동자, 그들의 노동도 그렇습니다. 생산하고 소비하고 버려진 찌꺼기를 맨 뒤에서 수거하는 그들의 노동이 백밀러 속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현실이 자꾸만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꿈꾸게 합니다.
[적린]님의 블러그를 보다가
간만에 푸하하 하면서 웹써핑을 즐기다.......ㅎ
우와 !!...역쉬 고수들은 다르군...하는 감탄연발과 감동..?....크크크
[적린]님 블러그에 소개된 글....ㅎㅎ..
ZZiRACi의 "나에게 독서란 [혁명]이다"에 관련된 글.
"독서란 [ ]다"를 채우는, 트랙백 릴레이.
맨 처음 제안하신 inuit님의 규칙....
1. 독서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6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릴레이의 오상 참조
그런데 6월 20일까지니 이미 마감한 릴레이다.
(위의 "릴레이의 오상"을 보니, "6월 20일까지만"이라는 규칙을 벗어나는,
"불의"(不義)의 포스팅이 되겠다.
ㅎㅎ 마감했으니 여기서 "땡"하려 한다. 후발주자 지정은 안 하고...)
여기까지 온 경로를 적어보면...
- inuit : 독서는 [자가교육]이다.
- 유정식 : 독서는 [성장]이다.
- 쉐아르 : 독서는 [확장]이다.
- 최동석 : 독서는 [삶]이다.
- 구월산 : 독서는 [여행]이다.
- easysun : 독서란 [영양제 챙겨먹기]다.
- 민노씨 : 독서란 [연애감정]이다.
- leopord : 독서란 [만남과 헤어짐]이다.
- Hendrix : 독서란 [연애]다.
- capcold : 독서란 [허세]다.
- TheQ : 독서란 [자뻑]이다.
- ZZiRACi: 독서란 [혁명]이다.
독서 릴레이: 나에게 독서란 [혁명]이다
Posted on 2009-06-20, 5:49 pm, by ZZiRACi, under 만물상.
낮잠을 잤다. 일어났더니 TheQ군께서 릴레이를 쏴주셨다.
이런… 귀찮기도 하지만 그래도 던져준 떡밥을 무시해서는 안되겠기에 이렇게 글을 쓴다.
근데 며칠동안 RSS를 통해 다양한 독서론을 보았지만 자세히 읽지는 않았다.
이렇게 나에게까지 올줄은 몰랐다고 해야할까? 여튼 세계는 넓고, 노는 바닥은 좁다.(응!?)
나에게 독서란 [혁명]이다.
뭔가 꽁끼한 말을 뽑아내고 싶기도 한데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허세]나 [자뻑]을 뒤 이어 [거세]나 [자폭] 등을 생각해봤지만,
그건 내 이야기가 아닌거 같아 접기로 했다.
그래도 릴레이인데 좀 뽀대나는 말을 내세워야겠다 싶어 생각한 말이 [혁명]이다.
혁명革命. 사전을 찾아보니 설명이 꽤 복잡하다.
국어사전에서는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Daum 국어사전)”이라고 한단다.
백과사전에서는 한술 더 떠서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으로 해석하려 든다.
좀 뽀대나고 싶어서 선택한 [혁명]이지만 그런 뜻은 아니고.
혁명革命이란 말 그대로 명命을 바꾸는 것(革)을 말한다.
명命이란 주어진 객관적인 조건을 말한다.
선택이전에 이미 주어진.
독서란 바로 그 현실을 깨뜨려 새로운 삶의 통로를 만들어내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독서는 삶의 변화를 수반한다.
끊임없이 다른 ‘나’를 만나도록 하는 힘이라고 할까나?
<논어서설論語序說>에 소개된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정자程子가 말했다.
[논어]를 읽는 데에 다 읽은 뒤에 아무 일이 없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한 두 구절을 얻어 기뻐하는 자도 있고,
다 읽은 뒤에 그것을 알고 좋아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뛰는 자도 있다.
정자程子가 말했다.
지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었을 때에, 읽기도 전에 이러한 사람이었고
읽은 뒤에도 또 다만 이러한 사람이라면 그것은 읽지 않은 것이다.
===
푸하하하....다들 재미나게 사시는 듯 부러웠다...ㅎㅎ
그래서 찾아 보았다.....ㅎㅎ
[inuit]님이 쓰신 블로그 릴레이의 五常
Culture | 2008/12/28 13:15 | Inuit
그간 블로그 릴레이로 이웃 블로거들이 시끌벅적했습니다.
그그 탓인지 며칠 전 꿈에 블로그 신령을 만났습니다.
저는 저는 물었습니다.
블로그 릴레이는 어떻게 해야해야 잘하는 걸까요?
인 (仁)
릴레이 받는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고, 반드시 그에게 도움되는 릴레이를 넘겨야 하느니라.
이를 릴레이 부여의 仁이라 한다. 비단 릴레이 뿐 아니라 블로거의 기본이니라.
만일, 도움 될지 안될지 모르고 무작정 넘기려면 차라리 자폭을 하라.
앞 사람 민망하지 않게 릴레이가 중단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에 준하는 포스팅으로 보상해야 함을 잊지 말거라.
가급적 릴레이가 이어지도록 새사람을 소개해줘라.
이를 일컬어 자폭의 仁이라 한다.
그냥 어정쩡한 (^^; ) 표정짓고 우적우적 씹어 먹음은 不仁이다.
절대로 앞사람 손을 부끄럽게 하지 말라.
또한, 릴레이 받는 사람의 사정을 살핌이다.
전에 준거 까먹고 연타로 또 주지는 않는지, 최근 2주내에 다른 이의 릴레이 받은 적이 있는지,
요즘 편찮은 기색이 있는지, 아니면 회사나 학업에 어려움은 없는지,
또는 태생적으로 릴레이에 앨러지 반응이 있는지,
저번 릴레이에 받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 줘서 내심 섭섭해 했던 적이 있는지
이 모든 심기를 세세히 헤아려야 하느니라.
이는 릴레이 주자 선정의 仁이다. 사랑과 배려의 마음이다.
의(義)
릴레이 규칙 함부로 바꾸지 마라.
창시자의 취지를 충분히 존중하라.
블로거 답게 최대한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답하되, 원뜻은 충실히 이어가야 하느니라.
이야말로 릴레이의 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간부터 구경하는 사람 이해를 돕기 위해,
릴레이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계보를 낱낱이 적어라.
릴레이 친구들 돌아다니다 보면 누가 누구로부터 받았는지 서로 헛갈린다.
아마 너조차 헛갈릴거다.
릴레이 따라오는 마음의 흐름을 잊으면 릴레이가 아니라 낱글 모음에 다름 아닐지어다.
이렇게 남을 위해 꼼꼼히 기록하는 마음을 릴레이 기록의 義라 일컫는다.
또한, 구경하다 재미난 릴레이가 소강이다 싶으면, 주저말고 자발적으로 릴레이를 떠안아라.
이는 블로거 군자의 도이며 릴레이 구경꾼의 義이니라.
내 대에서 릴레이 불씨 꺼뜨릴까 저어하던 블로거는,
자발적으로 소방수 역할을 맡은 선수를 평생 잊지 못할지니.
예(禮)
이왕 릴레이 받을진대, 궁시렁대지 말고 감사히 받아라.
릴레이 주는 사람은 고민하고 번민해서 네 이름을 부른 것이다.
너는 꽃이 되어야 한다.
그 지워지지 않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라. 이를 릴레이 수용자의 禮라 한다.
일단 받은 릴레이는 시일이 걸려도 반드시 완수를 해야 하느니라.
그리하여 릴레이 준 사람 마음 멍들지 않게 하라.
시간이 좀 걸리면 댓글로라도 봤다고 말해라.
릴레이 준 사람은 봤는지 안 봤는지 알길 없어 번민할터이다.
이를 릴레이 확인의 禮라 한다.
하지만, 정말로 피치 못할 사유가 있다면,
반드시 댓글이 아닌 포스트로 설명을 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려라.
블로거는 포스트로 말한다.
익명잡배는 댓글로만 말한다.
따라서, 해명 포스트 자체도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갖춰라.
이것은 블로거의 禮이며, 릴레이 거절의 禮다.
그리고 나중이라도 반드시 마음의 빚을 갚아라.
이는 블로거를 떠나 사람으로서의 禮일지어다.
지(智)
릴레이 아무나 돌리지 마라.
받을 사람은 적어도 댓글 10회 이상 주고 받고, 한달 이상은 알고 있는 사이여야 하느니라.
시간과 댓글 횟수가 대수 아니다.
다만, 말 몇마디 섞었다고 친한 척 하지 않음이다.
진정으로 그 마음을 알고 이해할 때 주어라.
RSS 리스트에서 제목 없이 포스트 본문만 보고 그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는가.
메타블로그 어지러운 리스트에서, 제목만 보고도 그 사람을 찝어낼 수 있는가.
남의 블로그 놀러갔다 스크롤 내려 읽게된 댓글 글투만 보고 그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경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블로고스피어에서 그를 초큼 안다고 한다.
이런 사람에게야 넘기는 것을 릴레이의 智라고 하느니라.
신(信)
릴레이 주는 사람은 나를 믿고 의지해서 준다는 그 마음을 믿어라.
서로 믿지 못하는 사이의 릴레이는 시간만 소모하는 무의미일 뿐이다.
또한 릴레이를 받았으면 그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다가
다른 릴레이로 되돌려주는 정성을 보여라.
장난으로 앙갚지 말고, 반드시 보답하는 마음을 담아라.
이때 비로소 우리는 블로거 릴레이의 信이 이뤄졌다 한다.
이 다섯 가지 인의예지신을 이루는 자를,
우리는 블로거 릴레이의 오상(五常)을 이뤘다 부른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블로그를 조금 안다고 칭할 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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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하하....날도 더운데 마음 상쾌해지는 글이라서
이렇게 퍼와서 남긴다....잊지 않기 위해서......ㅎㅎ
그리고 언젠가 나도 한번 이런 릴레이 에 도전해 볼까나 싶기도 하구.....ㅎㅎ
여튼 부러운 세상이다......ㅎㅎ
사랑하다는 형용사일까 동사일까..?....ㅎㅎ
동사라면 명령형도 있을까?
동사와 형용사는 흔히 헷갈리기 쉬운데,
이를 구별하는 방법 중엔 '현재형'을 나타내는 '-ㄴ-' 혹은 '-는-'을 붙여서
종결형의 '-ㄴ다' 혹은 '-는다' 꼴로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동사(움직씨)의 경우 현재형이 성립하지만,
형용사(그림씨)의 경우엔 현재형이 성립되지 않죠.
예컨데, 형용사의 '예쁘다'와 '더럽다' 경우를 들면
영길이는 정말 예쁘다의 현재형 영길이는 정말 예쁜다 <--- 뭔가 많이 어색합니다.
정치판은 매우 더럽다의 현재형 정치판은 매우 더럽는다 <--- 역시 어색하죠.
위의 법칙에 따라 사랑하다는 형용사가 아니고 동사가 분명한데,
사랑하다의 경우,
사랑한다는 게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것이며
타의가 아닌 자의로부터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명령했던 전례가 없었고,
그런 이유로 듣거나 말하기에 어색한 게 아닐까 싶군요.
하지만, 청유형의 경우엔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와 같은 경우엔 그렇게까지 어색하진 않아 보이는데요. ...히히.. ^-^;
정리하자면, 사랑하다의 경우 동사이기 때문에 명령형, 청유형이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다의 의미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청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사랑을 강요하는 명령형은 지금까지 우리들은 사용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뭔가 이상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
(굳이 사랑하다의 명령형을 찾아 보자면 예수께서 말 했다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어떨까요.
사랑해라(구어체)와 사랑하라(문어체)는 어체의 차이일 뿐!
이렇게 보면 예수께선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한 셈이군요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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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문학 수업이 [사랑]이라서
뒤늦게 옛날에 읽었던 책들을 급하게 읽고 있다.....ㅎㅎ
읽으면서 뭐 !! 특별한 것은 없군...하며 그래도 계속 자료찾아 읽는 중...ㅎㅎ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사랑하다는
사랑은 하는 것이다 라는 거고
사랑한다,. 사랑해 처럼 자신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거다
인문학 첫번째 주제였던 [우정]은
우정하다....우정해(?) 우정하자 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걸 .....
[우정]은 언제나 "친구 사귀기"라고 표현된다는 거다.
즉, 우정은 사귀고 관계맺는데서 그 출발이 이루어 지지만
사랑하다는 온전이 [하다] 즉, 나의 실현의 문제
곧 내가 행하는 문제라는 거다
곧 우정은 관계에 그 뿌리가있지만
사랑은 언제나 그 뿌리가 나에게 있는 것 같다.....
오직 나를 바라보고 나를 실현시키는 것이 사랑일까...?...싶었다.
화법 [話法, narration]
화법은 크게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내용으로 하고,
`무엇을` `어떻게`는 `왜?`에 의해 상위 규정된다.
화법이란 언제나 유목적적 행위이고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는 그 목적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왜 말을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삶의 공유에 두고
그러면 삶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라는 측면에서
화법 교육의 성격을 살피고자 한다.
화법은 메시지의 내용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일방적 행위나 메시지를 전달하고
상대방의 메시지를 듣고 이해하는 선조적인 순환의 상호 작용 차원을 넘어,
메시지의 의미가 협력적으로 창조되며 나선형식으로 진행되는 상호 교섭(transaction) 작용이다.
대인 의사소통은 그래서 본질적으로 협력적 활동이다.
이것은 언어의 의미가 낱말에 본래부터 주어져 있다기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 나름대로의
삶의 경험과 그 말이 사용된 상황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머니`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삶의 경험 내용과 그것이 사용된 상황 맥락에 따라 각각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의미는 결국 삶의 반영이고 의미의 공유란 삶의 공유를 뜻하게 될 수밖에 없다.
대인 의사소통은 유목적적이다.
대인 의사소통의 목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관계 측면이다.
대인 의사소통에서 공유되는 의미가 메시지의 내용 차원을 넘어
화행적 의미와 의사소통에 참여한 사람들의 인생관, 세계관, 가치, 믿음의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면,
즉 의사소통이 결국 삶을 함께 나누는 과정이라면
대인 의사소통은 근본적으로 인간 관계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대인 의사소통의 목적에는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간에
근본적으로 인간 관계의 발전이라는 측면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화법은 반드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다.
문화적 배경이 개인적일 수도 있다.
개인별 대화 스타일, 성별, 사회경제적 계층 따위는 개별적인 특성에 관한 것이고
이런 특성은 대인 의사소통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화법 교육을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화법 전통을 체계적으로 밝혀야 한다.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따른 화법의 차이를 이해하도록 하여야 하고
전통적인 말 문화를 현대적 필요성과 조화시킬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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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법에 이런 심오한 뜻이.......ㅎㅎ
결국 말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방식의 문제....결국 관계의 문제라는 거다.
그렇다면
내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말하기는
결국 나의 삶의 관계들을 이야기하는 것일텐데....
이렇게 생각해 보니 큰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빨리 말하기를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된 관계들을 형성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되기 때문이다.......ㅎㅎ
결국
[말하기]를 제대로 하는 것...이것이 곧 샒을 제대로 사는 것이겠지......ㅎㅎ
열심이 공부 또 공부해야할 것 같은.............
여하튼 열공의 분위기다...요즘은.....ㅎㅎ
청유 어법 혹은 청유-문 請誘-文 이란...
화자가 청자에게 같이 행동할 것을 요청하는 문장.
청유형 어미로 문장을 끝맺는데 ‘귀중한 문화재 빠짐없이 등록하자’ 따위이다.
명사]<언어> 문장에서 종결 어미에 나타나는 서법의 하나.
화자가 청자에게 같이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
‘-자’, ‘-자꾸나’, ‘-세’, ‘-읍시다’ 따위의 어미로 표현된다. ≒공동법(共同法)·권유법·이끎법.
'청유법(請誘法)'이라고도 하는데 문장에서 종결 어미에 나타나는 서법의 하나로,
말하는 이가 듣는 이에게 같이 행동할 것을 요청하는 어법입니다.
'-자', '-아/어', '-자꾸나', '-세', '-읍시다' 따위의 어미로 표현되며,
'권유법'이라고도 하고 청유법을 명령법에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예) 나와 함께 학교에 가자, / 나와 같이 학교에 가. / 우리 많이 먹자꾸나.
이끎음 --音 명사 발음〔-끄믐〕
[명사]<음악> 으뜸음에서 반음(半音) 아래의 음.
선율을 안정된 음으로 옮기는 성질을 가진 음으로 보통 장음계, 단음계의 제7음을 가리킨다.
≒도음(導音)·제칠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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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의 어려움을 절실이 느끼고 있다.
아니 말하는 것이 가끔은 두려울때가 있다
아니 말하는 것 속에서 생기는 많은 파장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조금은 더 진지해져야 하고
나름 예의라는 것들을 갖추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이것 만으로는 잘 안된다...ㅎㅎ
그러면 무엇이...?
그래 ...연습이다...
연습만이 나를 일정한 예의를 가지도록 만들어 줄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연습하기로 했다.
무엇부터 연습할까...하다가 그냥 맘에 속 들어온 것이
청유형 어법이다.
웬지 뉘앙스도 좋고 요즘 하려는 일과도 맞는 거 같고....ㅎㅎ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덥석 청유형 어법을 연습하기로 했다..
ㅎㅎ....뭐 여하튼 혼자서 하는 공부니까 내 맘대로다....크크크
다 함께 놀아보세
공부 하자
오늘은 즐겁게 일해보자
"나"를 사랑해 보자
식사를 같이 하세
이번주 한번 만나 보세....??
영 어색하군....크크.....그래도 힘내서 사용해 볼까나...?.....ㅎㅎㅎ
원래는 함께 하기로 했었는데
제안했던 종효형의 지나친 배려로 그동안 연락을 못받았다.
지역에서 지역화폐 혹은 대안화폐에 대한 고민과 실행을 준비하는 모임이 생기고
그 모임에 함게 할 것을 제안 받아 놓았었는데
종효형이 내가 너무 밤낮 일만하는 것이 안쓰러웠다는 이유로
나름 배려를 해 주신 모양이다.
그래서 초기 틀거리를 잡는 모임에는 나를 초대하지 않으신 모양새....^^;;
뭐 언제나 지나친 배려는 약간의 어긋남들을 만들어버린달까...ㅎㅎ
차라리 배려하지 말고 권해보시지 그랬냐고 나름 종효형을 타박해 보았다...ㅎㅎ
여하튼 그러면서 자료를 받았다
나름 기대하고 받은 자료인데 받고 보니 이미 읽은 자료들이다....^^;;
에구구...너무 기대가 컸나 ...??.....ㅎㅎㅎ
여하튼 이야기는 상당히 진행된 듯 싶다
지역의 한살림 등의 생협활동가들과 사회적 기업, 시민단체, 복지단체 등의 활동가들 중
생각을 같이하는 분들과 모임을 진행하고 있는 듯....ㅎㅎ
뭐 여하튼 나는 배운다는 생각과 실행하면서 몸으로 느껴 볼 요량으로
우선은 덥석 참여를 결정했다.
우선 받은 자료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이윤과권력을동시에넘는실험-- 강수돌
-- 지역통화문답 -- 마이클 린턴
-- 지역통화운동활성화방안에관한연구,한밭레츠의사례를중심으로 (류동민, 최한주)
-- 지역품앗이운동소개 -- 이창우
-- 지역화폐,대안적경제공동체운동과협동조합운동 -- 임종한
-- 한국의 지역통화운동 -- 김형용
내가 읽은 목록은 다음과 같다.
-- 공동체의_돈_만들기 -- 바바라 브란트(Barbara Brandt)
-- 지역화폐운동_국내외_현황
-- 상호부조론
-- 프루동 - 소유란 무엇인가
-- 증여론
-- 레츠..인간의 얼굴을 한 돈의 세계....조너선 크롤
-- 에코머니...환경을 살리는 위대한 돈...가토 토시하루
음.....무엇인가 읽기는 읽었는데
아직도 오리무중....눈앞에 선명하게 보여지는 무엇인가가 없다...
역시 책읽고 문서읽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되는 모양이다....ㅎㅎ
결국 실행의 문제겠지....ㅎㅎ
어쨋든 조만간 즐거운 만남과 실행이 이루어질 듯....ㅎㅎ
올 한해 여러가지로 바쁘게 돌아다닐 모양새다....ㅎㅎ
음악의 역할은 정신안에 조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음악에 의해 생기고 유지되는 규칙적인 박자 감각은, 급작스런 충동과 격한 감정으로부터 정신을 조금씩 벗어나게 한다. 만약 그 같은 정신적 혼란이 심해진다면 개인은 더 이상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게 되고 감정기복을 제어할 줄 모른채 고통받게 된다.
조하로운 정신은 리듬감이 있는 정신이다. 이것이 없을때 정신은 뒤죽박죽 반복되는 변덕과 극단적인 감정에 휘둘리고 흥분하며, 안정과 기쁨 대신 원한과 좌절만을 키운다 . 이 슬픈 격정으로부터 풀려나 정연한 감정과 고결한 욕망을 담은 아름다운 음악에 눈뜬 정신은 자신의 충동을 지배하고 그 각각의 음가에 맞춰 리듬을 조절할 줄 안다. 또 정확한 음을 내고 자신의 근복적인 필요에 부합하는 유쾌한 열정을 가꿀 줄 안다.
걷기는 일종의 음악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체육이다. 한번의 도약을 통해 걷기는 몸과 정신을 함께 가꾼다. 이때 몸에 드는 노력은 점진적이고 계속적이어서, 몸을 무너뜨리는 발작은 일어나지 않는다. 걷기가 설정한 박자는 일정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근육을 강화한다.
이 리듬은 정신과 그 담화, 즉 사유를 틀어막지 않는다.
누구나 알듯이, 걷기는 사유를 용이하게 할뿐 만 아니라 활발하게 한다. 걸음은 여행의 공간뿐만 아니라 명상의 공간까지도 열어젖힌다. 아름다움, 침묵, 그리고 느림에 다다른 정신은 숨을 고르고, 자신을 표현하는데 필요한 기본 요소들과 다시 조우한다. 느리고 긴, 좋은 산행은 곧잘 도시의 삶 속에서 소음, 추함, 광란으로 파괴된 조화를 정신과 몸이 되찾게끔 해준다.
---------------------------------------------------------------- [걷기의 철학] 중에서
오호랏.....
역시 [리듬]은 아무래도 음악적인 요소가 강한 듯 싶다.
박자라든지 하모니라든지 하는 음악적 요소들에 대하여 더 공부를 해 봐야겠다.
지금에 와서 악기를 배울 수 있는 물리적인 상황이 아니라며
차라리 음악듣기를 체계적으로 해 보는 것 또 한 좋으리라.......ㅎㅎ
무슨 음악을 어떻게 듣느냐..
그것이 내 삶의 리듬감을 줄 수 있도록 듣는 훈련도 병행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리듬을 공부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는 단어가
[추임새]다......내가 가장 재미있어하는 것...그것은 추임..새다...ㅎㅎ
검색해보니 저절로 흥이난다......음...역쉬....그렇군....앗싸...??....ㅎㅎ
국어사전
추임-새
품사 : 명사
[음악]
판소리에서, 장단을 짚는 고수(鼓手)가 창(唱)의 사이사이에 흥을 돋우기 위하여 삽입하는 소리.
‘좋지’, ‘얼씨구’, ‘흥’ 따위이다.
백과사전
소리판에서 창자(唱者)의 소리에 고수 또는 청중이 감탄사를 내면서 흥을 돋우는 것.
'추다'·'추어준다'는 동사와 '새'라는 불완전명사의 합성어이다. 판소리뿐만 아니라 민요·잡가·무가 등
다른 분야의 소리판에서도 볼 수 있다.
판소리 고수는 '으이'·'얼씨구'·'좋지'·'좋다'·'허이'·'그렇지'·'아먼'·'얼쑤' 등을 흔히 쓴다.
그밖에 간혹 '어디'·'잘한다'·'명창이다'라는 말도 쓰인다.
추임새는 창자의 흥을 돋우어 소리를 잘하도록 돕고, 청중의 분위기나 감흥을 자극하여
소리판을 어울리게 하며, 창자가 아니리로 말할 때는 고수가 추임새로 상대역을 맡아 표현한다.
창자의 소리는 음악적인 내용이나 극적인 상황에 따라 강약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추임새도 자연히 강약과 고저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때로 소리의 심각성을 살리기 위해 북장단을 생략하고 추임새로 대신하기도 하며,
소리가 없을 때에도 추임새로서 공간을 메꾼다.
청중의 추임새도 북반주가 없다는 것만 다를 뿐 고수의 추임새와 같다.
추임새는 대체로 맺는 마디에서 하는데, 소리의 박자나 리듬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소리판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추임새의 종류
'추임새'라는 것은 소리 도중에 발하는
'얼씨구', '좋다', '으이', '그렇지', '아먼(암)' 등의 감탄사를 가리키는데
판소리뿐만 아니라, 민요, 잡가, 무가 등 다른 분야의 성악곡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추임새라는 말은 '추어주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추어주다'는 '정도 이상으로 칭찬해주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추임새로 사용되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으이', '얼씨구', '좋지', '좋다', '허이', '그렇지', '아먼', '얼쑤' 등은
흔히 쓰이는 말이고, 간혹가다 '어디', '잘한다', '명창이다' 등의 말도 씁니다
대체로 추임새는 맺는 마디에서 하는데, 소리의 박자나 리듬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소리판을 이끌러 가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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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쉬....명쾌한...??...답변이군...크크크
여하튼
나의 삶에는 다양함 [추임새]들이 필요하고
또한 [추임새]들을 주어야 할 것이다....
관계속에서 혹은 나 스스로
일에 흥을 돋우기 위해서
아니면 간혹 나 스스로를 조금은 진정시키기 위해서 추임새를
너울너울 발산해 보아야겠다......ㅎㅎ
리듬공부...나름 재미있다......책이 없어도 공부가 되는 희안한 경험이다....푸하하하
리듬에 대해서 공부해보기로 해 놓고나서 보니
아는게 없더라....
그래서 우선 검색부터 해봤다.
우선 국어사전
[리듬]..품사는 명사
1 [음악] -- 음의 장단이나 강약 따위가 반복될 때의 그 규칙적인 음의 흐름.
비슷한 말 : 동률2(動律)·절주1(節奏).
2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반복되는 움직임을 이르는 말. ‘박자감’, ‘흐름’, ‘흐름새’로 순화.
리듬이 깨지다. 생활의 리듬을 찾는 시간이 좀 걸린다.
3 [미술]선, 형, 색의 비슷한 반복을 통하여 이루는 통일된 율동감.
즉 농담, 명암 따위가 규칙적으로 반복되거나 배열된 상태를 가리킨다. ‘율동’으로 순화.
==> 보니까 결국
리듬은 반복과 규칙 혹은 규칙적인 반복이라는 거다.
다음은 위키 백과사전 이다.
리듬
리듬(rhythm, 문화어: 흐름새)은 똑같은 것이 규칙적으로 되풀이될 때 인간이 느끼는
시간적인 덩어리의 연속이다. 심장 고동소리, 자동차의 깜빡이, 걷는 발소리, 세탁기, 매미 등
리듬은 주로 청각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리듬은 음악이나 음성 언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언어의 리듬
강세 박자 리듬
강세 박자 리듬(stress-timed rhythm)은 강세를 가진 음절이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나타나서 생기는 리듬.
영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에서 보인다. 음절수가 많아져도 강세가 나타나는 간격은 변화지 않는다.
음절 박자 리듬
음절 박자 리듬(syllable-timed rhythm) 은 음절의 길이가 같은 간격으로 나타나서 생기는 리듬.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에서 보인다.
한국어의 리듬
한국어의 리듬은 음절보다 긴 말토막(어절)이란 것이 리듬 단위를 형성한다.
말토막은 하나의 강세 음절과 그 외의 비강세 음절으로 구성된다.
강세 음절은 앞뒤의 비강세 음절보다 돋들리게 길게 나타난다.
말토막 마지막 음절도 다른 음절보다 길게 된다.
S (강세 음절 하나) /ˈ달/
www...S (비강세 음절 - 강세 음절) - /왜그ˈ래/
Swww... (강세 음절 - 비강세 음절) - /ˈ한글/
www...Swww... (비강세 음절 - 강세 음절 - 비강세 음절) - /기ˈ분이/
음절수가 많아지면 말토막도 길게 되지만 음절수에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말토막이 조금 길어질 뿐이다.
말토막과 말토막 경계는 휴지와 억양으로 구별된다.
/ˈ난+ˈ정말+ˈ뭐가뭔지+ˈ모르겠어요/ ("/"는 완정 휴지, "+"는 말토막 경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시간예술인 음악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지만,
소리 자체의 성격으로부터 따로 분리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1초 동안 일어나는 소리의 규칙적 리듬은 그 소리가 드럼 소리, 피아노 소리,
관현악 소리냐에 따라 각기 다른 효과를 낼 것이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리듬은 시간만이 아니라 강세·음정·화성·음색 등 여러 가지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복잡성은 연주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리듬의 특성이다.
대부분 음악에서 리듬은 규칙박(規則拍)에 의해 간단히 정해진다.
실제로 일상 언어에서 리듬은 흔히 박의 규칙성을 말하고, 경음악의 리듬 일절이나
리듬감있는 음악가에 대해 말할 때도 리듬은 보통 규칙적인 강세 패턴을 말한다.
마주르카, 록 음악, 아프리카 드럼 독주 등과 같이 춤에서 유래한 음악에서도 강렬한 박(beat)이
중요한 리듬의 국면을 이룬다.
박이 모여 박자(metre)가 된다. 서양 음악에서 가장 일반적인 박자는 2박자와 3박자로,
2박자는 한 마디 안에 2개의 박이 있고 3박자는 3개의 박이 들어 있다.
이외에도 2박과 3박이 결합하여 다양한 변화 박자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4박자는 2개의 박을 2개 모아 만들며(전통적인 행진곡 박자),
6박자는 3개의 박을 2개 모아 만든다.
대체로 곡은 기본적으로 같은 박자로 된 여러 마디 단위로 이루어지며,
물론 때에 따라서는 박이 마디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결합·세분될 수 있고,
또 그밖의 모든 변형들이 가능하다.
서양 음악에서 리듬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중세 단성성가가 일정한 박자로 연주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 반면,
또다른 학자들은, 별다른 규칙성 없이 연주되었다고 주장한다.
12세기경 여러 가지 박자를 표시할 수 있는 기보법이 나왔고
14세기에 들어와서 리듬 기보법이 최고로 복잡해졌다
(당시 리듬의 복잡성은 1950년대 이전까지는 예를 찾기 어려운 것임).
그러나 르네상스에 와서 화성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됨에 따라 리듬의 이러한 발전은
일단 주춤하게 되고, 이후 리듬은 단순성과 규칙성이라는 본래의 특성을 다시 찾게 되었다.
17세기에 리듬은 대체로 2가지 유형으로 나뉘게 되었다.
하나는 춤곡의 반복 패턴에 기초한 규칙 리듬이고,
또 하나는 독창 노래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듯이 말에 가까운 보다 자유로운 리듬이다.
이러한 구분은 오페라에서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를 구분하던 관습을 반영한 것이다.
이중 규칙 리듬으로 된 음악의 특징으로 나타난 설계의 명확성은 짝수마디에 의한 명료한 윤곽 속에서
(흔히 4마디 혹은 8마디 악구로 나뉨) 여러 가지 다양한 수준의 미묘한 운용을 꾀했던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 음악의 리듬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규칙 박자의 체계는 19세기에 와서 교차 리듬, 리듬 분할, 불규칙성 등을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깨지게 되었고 급기야 20세기의 많은 작곡가들은 장·단조 조성과 더불어 박자(규칙 리듬) 개념도
버리게 되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Rite of Spring〉과 같은 곡에서는 원시적 충동감을 나타내는
리듬의 약동이 음악의 표면에 부상되었으며, 그밖에 많은 현대 음악에서 리듬 패턴의 규칙성이 사라졌다.
==> 음....읽어보니 재미있군...크크
느끼는 것은 결국
리듬은 일종의 청각이라는 거고 음악이나 음성언어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하고있다는 거군..
그리고 이런 리듬은 다양하게 혹은 아주 소박하게 다듬을 수 있다는 거고
그렇게 다듬어진 리듬도 어쩌면 누군가의 창조물 혹은 나 스스로 만들어갈 수 도 있다는 거군..ㅎㅎ
그렇다면 이러한 리듬이 단순히 음악적 요소가 아니라
삶의 요소라고 할때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내가 만들어내는 삶의 리듬이라는 게 결국 누군가과의 접속에서 그 의미가 있을 것도 같고
아님 나 스스로에게만 영향을 주는 어떤 것일것도 같고
아마도 남과의 관계를 삶의 기반으로 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남과의 소통도 리듬일 것같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몸을 만들어가는 것이 삶의 리듬인것도 같고...
그러면 이러한 리듬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어떤 것을 공부해야하는 걸까...?
음악공부...?....악기 다루는 법...?.....음...
악기를 배우려면 아마도 많은 시간과 노력들이 있어야 할텐데....어쩌지...?...^^;;
음...우선 듣기부터...훈련해보고. .....다음에 결정해 보자...공부의 방향을....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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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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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공정무역이 참 좋으면서도 뭔가 야릇한 느낌이 있었는데... 잘 정리한 책이 있었군요.부가 정보
앙겔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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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이 있네요, 기호 식품으로서의 수탈의 역사성...근데 현실 사회주의 국가 시망했으니 계급 혁명이 시망이라는 부분은 기분이 나쁘다..-_-
어제 공정무역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저는 팔레스타인의 난민 캠프에서 생산되는 주로 악세사리들을 좀더 열심히 사다가 팔면서 운동을 하면 어떨까, 고민하는데 공정무역에 대한 비판이 하두 많아서.... 암튼 품목 부분에서 기존 공정무역과 차별화가 가능...< 공정무역 자체가 아니라 내가 운동의 수단으로 쓰려는 공정무역에 대해 정리해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슴당 나중에 트랙백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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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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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수단으로 쓰려는 부분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에서생산되는 악세사리는 사주는 것도 연대라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유통을 생각하면서 비싸게
팔지 않으면 됩니다. 시장가격으로 파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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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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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무역이 제가 하는 운동의 목적이 아니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지원하고 한국에 팔레스타인의 정치 상황을 알릴 때 단지 유인물만 나눠주는 게 아니라 팔에서 생산된 물건과 함께 설명하면서 - 올해에 함 해볼 수 있겠다 싶은 거죠. 해보고 잘 안 되면 바로 접고 다른 방법을 쓸 거구요. 수단이 나쁜 말은 아니지 말입니다.가격 책정은 현지 지원 + 비행기가격 + 단체 재정 사업, 기타 사정도 고려되지만 시장가격?? 뭐 그런 건 좀 애매하고, 당장 동의는 안 된다능.. 소량 구매하는데 가격 경쟁이 될리가 없잖아요. 뭐 먹을 거 팔 거는 아니고 오히려 비싸게 팔아야 먹히는 대상들도 염두에 두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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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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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필자처럼 많은 이들이 대안으로 주장하고 있는 지역적 자급자치 공동체는 외부에 대해서는 자립적일지 모르지만 그 공동체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상호의존적입니다. 우리는 도시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느 미장원을 이용하든 그것은 나의 자유이며 A가 싫으면 B를 택하면 됩니다. 하지만 지역공동체에서는 사회적 필요에 따라 미장원이 한개 이상일 필요가 없게 됩니다. 내가 그 미장원 미용사와 사이가 나빠지면 어떻게 될까요. 귀농한 사람들이 농촌에 대해 로망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도시인의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귀농을 해서 여전히 도시적인 생활양식을 유지할 수도 있고 또 변화된 생활양식에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한 세대가 지나면 과연 그 후손들이 그 공동체 생활을 견딜 수 있을지. 생산양식은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선택이라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공정무역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생산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심성도 달라지고, 따라서 자립공동체를 대안으로 한 운동을 하자는 것은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부가 정보
우중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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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제가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뭐라하기는 좀 그렇지만 제 블러그에 덧글 달아주시니 제 생각 조금 적어봅니다.우선 "암담"님이 하신 말씀을 굳이 옳고 그른 잣대로 이야기하고픈 생각은 없지만
뭔가 오해(?)가 약간 있으신듯해서....ㅎㅎ
우선 천규석님이 말씀하신 소농두레공동체의 논리가 마치 공동체 성원들의 기호 혹은 취향과 지향성을 무시한 체 운영되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성향으로 읽히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을듯 싶습니다.
소농두레공동체의 경우 제가 보기에 일차적인 먹거리 해결의 측면에서 이야기되는 것이고(먹거리 생산방식)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와 같은 거대 국가시스템의 극복을 위한 연대의 형식이 보다 더 적절히 읽히는 것 같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보다 다양한 작은 단위의 공동체들의 연대 혹은 네트워크 방식이 전제된 것이 아닐까 싶거든요.
또한 실제 작은 공동체라는 것이 상정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공동체라는 말들이 함께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즉, 삶의 다양성만큼 각자의 공동체가 다양한 측면들을 열어놓고 상정된다는 것입니다...ㅎㅎ
제가 잘은 모르지만 천규석님의 논조를 마치 전체주의적 경향으로 바라보는 것은 오해인듯 싶다는 것이지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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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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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공동체가 공동체 성원들의 기호 혹은 취향을 무시한다는게 아니라 판매를 위한 생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다양한 생산자가 존재하는 것이 자급공동체에서는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기호를 무시하는 것은 둘째치고(마을사람들 헤어스타일이 다 똑같아지는건 사실 그리 문제도 아닙니다) 종속적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급자치공동체뿐만이 아니라 소도시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유학생 사회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고 나머지 사람들과는 표면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소도시의 유학생 사회에서는 자신이 알고지내는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한다는 부담감때문에 나쁜 소문이 돌돌거나 하면 아예 학교를 옮기는 일도 벌어집니다. 게다가 저 필자는 이 공동체 운동을 국가를 해체할 수 있는 거대한 운동으로까지 보고있는데 어떠한 사회가 진정으로 자립하려면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자립해야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리고 중세의 꼬뮌들은 사실상 군사기구까지 갖추고 있었는데 왜 깨졌나요? 길드는요?부가 정보
암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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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 저녁준비하느라고 말을 다 끝맺지못하고 갔는데 어쨌든 중세에는 상당히 괜찮았던 도시꼬뮌이나 길드도 여지없이 깨진 이유가 상품경제의 혁명성 때문이잖아요. 그냥 나는 도시생활이 싫다, 농촌에서 마음맞는 사람들끼리 농사지으며 살고싶다 이런 견해에 어느 누구도 반대할 사람은 없지만 왜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는지, 요 가까운 서울 근처 소도시만 가도 왜 사람들 심성이 우리와 다른지(버스 끝에서 끝까지 애들이 뛰어다녀도 기사분이 가만있습디다) 그런 건 생각안하고 오로지 도시의 비인간성과 살인적 물가만 생각하고 귀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서울에 다시 돌아왔으며 이 운동의 문제점은 무엇인지(문제적이지 않은 운동은 없습니다) 말씀안하시고 오로지 국가를 해체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라고 하시니 참 갑갑합니다. 운동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엘리트들이 하는게 아니지않나요. 문제는 반드시 나타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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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포스트에서 제가 천규석님의 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측면은제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먹거리 해결방식이외의 작은 단위로서의 공동체들이 어떻게 도시내에서 가능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연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제 스스로 좀더 해야한다는 것입니다...ㅎㅎ
여튼 소농두레공동체처럼 도시내에서 어떻게 자급가능한 공동체들이 어떻게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들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지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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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관심 감사합니다....ㅎㅎ부가 정보
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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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 나왔습니다^^ 책 받으실 주소를 알려주세요. 제 블로그에 덧글로 남기시거나 raputers@jinbo.net로 메일 보내주세요. 예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부가 정보
카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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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공정무역에 관련 일을 준비하면서 천규석님 책을 읽어 보지 않았지만 많은 고민을 한 부분 입니다. 국내 공정무역 운동과 세계 공정무역의 역사, 단체들을 보면서 과연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은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그가 지적하듯이 국내에서의 공정무역의 상품들을 보면 커피, 차, 카카오, 바나나, 설탕 등 대부분의 기호식품으로 이루어져서 대중의 기호에 철저히 맞춰지면서 자본주의 경제관에 편승하는 모습과 전통적 농업의 생태적 파괴에 대한 문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내에서의 공정무역의 발전은 거대 NGO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기호식품에 집중되어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따르면서 거래방식에 있어서는 대중적인 착한 가격이 아닌, 공정무역 인증마크제로 독점적이고 선택적인 상품으로 인해 착한소비자들에게 선의적 구매를 강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공정무역은 개인이고 단체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인들이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일 국의 상품으로,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생산한 생산재만으로 삶을 영위하거나 그것에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천규석님의 지적대로 소농공동체에 모두가 동참하거나 귀농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본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러한 공동체에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도 이 부분은 많은 부분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입니다.
저 역시 초창기 한 살림 회원으로 참여를 하면서 한 살림 상품들을 공동구매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드는 생각은 직거래 방식인데 개인적으로 상품이 비싸다는 생각이고,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자본의 비교등극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시장이나 마트의 싼 가격에 손이 빨리 갑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비교와 경쟁을 할 때 생산력문제도 있지만 자본주의를 생산양식을 뛰어넘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도 있었기에 언제나 민중들의 삶을 유린하였습니다. 모든 직거래 방식은 싸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내에 유통의 단계를 너무나 축소시키기 때문입니다. 생협의 직거래 상품도 싸야하고, 공정무역 제품들도 자본주의 시장내 유통되는 상품들과 비슷한 가격으로 경쟁하여야 합니다.
또한 공정무역은 앞서 지적했듯이 제3세계 제품들을 상품으로 포장된 것이 아닌 것들을 그들의 공동체에서 만든것들을 사주면 됩니다. 그러한 제품들은 여행을 가거나 인터넷에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직접 생산한 제품을 산다는 것이 생산자 개인이나 소비자에게는 하나의 연대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지키는 힘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지키지 위한 다양한 생각과 논의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천규석님의 지적은 현재 공정무역을 하는 단체들에게 많은 부분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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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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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공정무역과 관련된 무슨 얘기를 쓰셨던 건가 했더니...요거였군요^^ 어젯밤에 지음이랑 또 친구랑 요책 야그를 나누었었다는..ㅋㅋ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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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홋...ㅎㅎ...좋았겠네요....ㅎㅎ저두 요즘 혼자 책읽기에 조금씩 지쳐서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프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라는...ㅎㅎ
뭐 그래도 요즘 워낙 할일들이 밀려 있는 중이라서 짬이 나질 않지만요...ㅎㅎ
여튼 반갑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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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담님께.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현재 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동체의 상이 천규석님이 말하시는 공동체의 상이 아니라는 것
즉, 천규석님의 글을 읽어보시라는 겁니다....ㅎㅎ
단순히 [소농두레공동체]혹은 [자급자립]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매이지 마시고
한살림 혹은 천규석님의 글을 있는 그대로 읽어보시면
현재 님께서 오해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수 있으실겁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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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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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렇지만 우중님도 다이하드하신 분이시군요. 제가 보기엔 님도 오해하고 계세요. 저는 천규석님의 공동체의 상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필연성 내지는 경향성에 대해서 우려 내지는 회의를 표시한거에요. 저도 기회가 있다면 한살림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겠지만 우중님 역시 기회가 된다면 외국의 다른 공동체들에 대한 객관적 사례들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부가 정보
암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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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면 저는 천규석님의 말에서도 모순을 느낍니다. "자급적 소농공동체와의 연대 없는 노동운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결국 판매를 위한 생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자급이 안되면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노동조합은 자급공동체의 외부가 아니면 무엇인가요. 자급이 무너지면 자치도 무너진다고 했는데, 공정무역이 공정하지 않다고 한 것처럼 이렇게 되면 자급공동체도 자급이 아닌 것이 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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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를 보시는 분들께...변명하자면...^^;;제가 쓴 글도 아니고 단지 책소개 글 퍼온것 뿐인데...^^;;
이 반응들이 조금 당황스럽군요...ㅎㅎ
공정무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은데
저때문에 천규석님의 글이 오독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정도...?...가
저의 솔직한 심정이라는...ㅎㅎ
여튼
책소개니
책을 읽고 책이야기를 했으면 하네요....ㅎㅎ
여튼 다들 관심주셔서 감사...?,.....^^;;....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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